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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후에, 지에게 최승자
20년 후에, 지(芝)에게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 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 다니고,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眼]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江)을 이뤄 흘러 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몫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 봐라,
저 많은 세월의 개떼들이 나를 향해 몰려 오잖니,
횐 이빨과 흰 꼬리를 치켜 들고
푸른 파도를 타고 달려 오잖니.
물려 죽지 않기 위해, 하지만 끝내 물려 죽으면서,
나는 깊이깊이 추락해야 해.
발바닥부터 서서히 꺼져 들어가며, 참으로
연극적으로 죽어가는 게 실은 나의 사랑인 까닭에.
그리하여 21세기의 어느 하오,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무덤에 술 내리고
나는 알지
어느 알지 못할 꿈의 어귀에서
잠시 울고 서 있을 네 모습을,
이윽고 네가 찾아 헤맬 모든 길들을,
─가다가 아름답고 슬픈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동냥바가지에 너의 소중한 은화 한 닢도
기쁘게 던져 주며
마침내 네가 이르게 될 모든 끝의
시작을!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S를 위하여 최승자
S를 위하여
내 애인은 태평양(太平洋)처럼 누워 있다.
내 애인의 눈동자 속으로
한 낯선 사내가 걸어 들어 간다.
그녀의 홍채가 휘황한 꽃잎처럼
벌어졌다 접히고
일순 나의 일평생이 조용히 닫혀진다.
닫혀진 문 안에서 그들이 나를
씹고 또 씹는 소리가 들린다.
내 몸에서 육즙이 뚝뚝 떨어지고
그들은 멀리에서 입술을 쓱 닦고
남은 내 뼈다귀들을 창 밖 쓰레기통에 내던진다.
나는 쓰레기통 속에 고요히 처박혀,
그래도 밤은 아름다와,
이 지상의 누더기인 내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 아름다와라고 말한다.
나는 잠시 성냥불을 켜들고 저 문간에 불을
지를까 말까도 생각지 않는다.
성냥불이 제 홀로 툭 꺼지고
밤하늘 별들이 제 값의 빛을 되찾고
내 애인은 태평양(太平洋)처럼 누워 있다.
이윽고 내 애인의 꼬리가
고요히 남실거리기 시작한다.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Y를 위하여 최승자
Y를 위하여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을 때
시멘트 지붕을 뚫고 하늘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들의 폐벽에 가득찬 공기도 보였어.
하나 둘 셋 넷 다섯도 못 넘기고
지붕도 하늘도 새도 보이잖고
그러나 난 죽으면서 보았어.
나와 내 아이가 이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시궁창 속으로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 가던 것을.
그때부터야.
나는 이 지상에 한 무덤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고
나의 아이는 하늘을 날아 다닌다.
올챙이 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나쁜 놈, 난 널 죽여 버리고 말 거야
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 거야
내 아이는 드센 바람에 불려 지상에 떨어지면
내 무덤 속에서 몇 달간 따스하게 지내다
또다시 떠나가지 저 차가운 하늘 바다로,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오 개새끼
못 잊어!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가을의 끝 최승자
가을의 끝
자 이제는 놓아 버리자
우리의 메마른 신경을.
바람 저물고
풀꽃 눈을 감듯.
지난 여름 수액처럼 솟던 꿈
아직 남아도는 푸른 피와 함께
땅 속으로 땅 속으로
오래 전에 죽은 용암의 중심으로
부끄러움 더러움 모두 데리고
터지지 않는 그 울음 속
한 점 무늬로 사라져야겠네.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개 같은 가을이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廢水)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기억의 집 최승자
기억의 집
그 많은 좌측과 우측을 돌아
나는 약속의 땅에
다다르지 못했다.
도처에서 물과 바람이 새는
허공의 방(房)에 누워, ꡒ내게 다오,
그 증오의 손길을, 복수의 꽃잎을ꡓ
노래하던 그 여자도 오래전에
재가 되어 부스러져 내렸다.
그리하여, 이것은 무엇인가.
내 운명인가, 나의 꿈인가,
운명이란 스스로 꾸는 꿈의 다른 이름인가.
기억의 집에는 늘 불안한 바람이 삐걱이고
기억의 집에는 늘 불요불급한
슬픔의 세간살이들이 넘치고,
살아 있음의 내 나날 위에 무엇을 쓸 것인가.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더 빼야 할 것인가.
자세히 보면 고요히 흔들리는 벽,
더 자세히 보면 고요히 갈라지는 벽,
그 속에서 소리 없이 살고 있는 이들의 그림자,
혹은 긴 한숨 소리.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더 빼야 할 것인가.
일찍이 나 그들 중의 하나였으며
지금도 하나이지만,
잠시 눈감으면 다시 닫히는 벽,
다시 갇히는 사람들.
갇히는 것은 나이지만,
벽의 안쪽도 벽, 벽의 바깥도 벽이지만.
내가 바라보는 이 세계
벽이 꾸는 꿈.
저무는 어디선가
굶주린 그리운 눈동자들이 피어나고
한평생의 꿈이 먼 별처럼
결빙해가는 창가에서
나는 다시 한번
아버지의 나라
그 물빛 흔들리는 강가에 다다르고 싶다.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89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 벨이 울리고 최승자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 벨이 울리고
많은 사람들이 흘러갔다.
욕망과 욕망의 찌꺼기인 슬픔을 등에 얹고
그들은 나의 창가를 스쳐 흘러갔다.
나는 흘러가지 않았다.
나는 흘러가지 않았다.
열망과 허망을 버무려
나는 하루를 생산했고
일년을 생산했고
죽음의 월부금을 꼬박꼬박 지불했다.
그래, 끊임없이 나를 호출하는 전화 벨이 울리고
나는 피해 가고 싶지 않았다.
그 구덩이에 내가 함몰된다 하더라도
나는 만져 보고 싶었다,
운명이여.
그러나 또한 끊임없이 나는 문을 닫아 걸었고
귀와 눈을 닫아 걸었다.
나는 철저한 조건반사의 기계가 되어
아침엔 밥을 부르고
저녁엔 잠을 쑤셔 넣었다.
궁창의 빈터에서 거대한 허무의 기계를 가동시키는
하늘의 키잡이 늙은 니힐리스트여,
당신인가 나인가
누가 먼저 지칠 것인가
(물론 나는 그 결과를 알고 있다.
내가 당신을 창조했다는 것까지)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 벨이 울리고
그 전화선의 마지막 끝에 동굴 같은
썩은 늪 같은 당신의 구강(口腔)이 걸려 있었다.
어느 날 그곳으로부터 죽음은
결정적으로 나를 호명할 것이고
나는 거기에 결정적으로 응답하리라.
타들어가는 내 운명의 도화선이
당신의 썩은 구강(口腔)안에서 폭발하리라.
삼십년 전부터 다만 헛되이,
헛되고 헛됨을 완성하기 위하여.
늙은 니힐리스트, 당신은 피 묻은 너털웃음을 한번 날리고
그 노후의 몸으로 또다시 고요히
허무의 기계를 돌리기 시작하리라.
몇 천년 전부터 다만 헛되이,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 말하기 위하여.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내가 너를 너라고 부를 수 없는 곳에서 최승자
내가 너를 너라고 부를 수 없는 곳에서
□ 1
어느 한 순간 세계의 모든 음모가
한꺼번에 불타 오르고
우연히 발을 잘못 디딜 때
터지는 지뢰처럼
꿈도 도처에서 폭발한다.
삼억 이천만 원짜리 선글래스를 낀 것은 그젯밤의 꿈,
어두운 밝음 속에서
우리가 서로를 껴안은 것은
어젯밤의 꿈,
네가 떠나고
바람 불고
내가 죽는 것은
오늘 한낮의 꿈.
□ 2
또 다시 한 세월이 끝났을 때
나의 무릎은 절단되어 있었고
너의 문은 닫혀 있었다.
네가 없는 그 거리,
나침판이, 운명 지침서가 헛돌고
한 평생이, 온 인류가 헛돌고
헛도는 그 깊이로
흩어져 내리는 내 꽁지의
마지막 깃털이 보였다.
□ 3
내가 너를 너라고 부를 수 없는 곳에서
흐르는 물은 흐름을 정지하고
이제 눈 감는 자는 영원히
다시 눈 떠 헤매지 않으리니
말없이 한 여자가 떠나가고
바다의 회색 철문이 닫혀진다.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최승자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러면 내 심장 속 새집의 열쇠를 빌려 드릴께요.
내 몸을 맑은 시냇물 줄기로 휘감아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당신 몸 속을 작은 조약돌로 굴러 다닐께요.
내 텃밭에 심을 푸른 씨앗이 되어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당신 창가로 기어올라 빨간 깨꽃으로
까꿍! 피어날께요.
엄하지만 다정한 내 아빠가 되어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너그럽고 순한 당신의 엄마가 되 드릴께요.
오늘 밤 내게 단 한 번의 깊은 입맞춤을 주시겠어요?
그러면 내일 아침에 예쁜 아이를 낳아 드릴께요.
그리고 어느 저녁 늦은 햇빛에 실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갈 때에,
저무는 산 그림자보다 기인 눈빛으로
잠시만 나를 바래다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뭇별들 사이에 그윽한 눈동자로 누워
밤마다 당신을 지켜봐 드릴께요.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너는 즐거웠었니 최승자
너는 즐거웠었니
네가 나를 차 버렸을 때
너는 즐거웠었니,
내 사랑 내 아가야.
어느 날 네가 병든 낙엽처럼
내 문간에 불려 떨어진다면
어느 날 네가 허깨비처럼
내 창가에 돌아와 선다면
네가 쓰러지기 전에
먼저 나를 차 주지 않겠니,
다시는 내가 이 세상에 기어 나오지 못하도록
모가지를 꿈틀거리며 기어 나오지 못하도록
네가 쓰러지기 전에
먼저 나를 차 주지 않겠니,
다정한 내 사랑 내 아가야.
가여운 내 사랑 내 아가야!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네게로 최승자
네게로
흐르는 물처럼
네게로 가리.
물에 풀리는 알콜처럼
알콜에 엉기는 니코틴처럼
니코틴에 달라붙는 카페인처럼
네게로 가리.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매독 균처럼
삶을 거머잡는 죽음처럼.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당대의 당대의 최승자
당대(當代)의 당대(當代)의
내가 믿지 않았던, 내가 인정하지 않았던
그 세월 위에 그래도 녹이 슬고
또 싹이 트느니
이제 내가 불러도 대답하지 않을 당대(當代)여
당신의 외로움이 날 불러냈나,
내 그리움이 당신을 불러냈나,
외로움과 그리움이 만나
찬란하구나,
이 밤의 숱한 슬픔의 천적들이 만나
다정히 꼬리를 깨물리고 깨물리우는
이 밤 슬픔의 불꽃놀이여,
당대(當代)의 당대(當代)의 슬픔의 집합들이여.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89
돌아와 나는 시를 쓰고 최승자
돌아와 나는 시(詩)를 쓰고
고통의 잔치는 이제 끝났다.
기억의 되새김만이 남았을 뿐.
그러나 쟝르를 바꾸고
운명의 제목을 바꾸고
그러고도 살아 남은 고통의 기억들.
그 위로 안개처럼 내리는 잠의 실중량(實重量).
슬프다 가이없다,
돌아와 나는 시(詩)를 쓰고
한 세기가 흘러가고
돌아와 나는 또 시(詩)를 쓰고.
여기는 어디인가,
내 일생의 유적지인가,
전생인가, 내세인가.
흔들며 흔들리며
눈 뜬 잠의 나날을
나는 잠행하고
내가 몸 눕히는 곳 어디서나
슬픔은 반짝인다.
하늘의 별처럼
지상(地上)의 똥처럼.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89
무제 1 최승자
무제(無題) 1
□ 1
나는 그들을 살아 넘겼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 내가 아니다.
이제 죽어도, 죽어서도
더 나아갈 곳은 없고
나는 이제 노래하라!
입도 혓바닥도 없이,
처음으로 마음이 찢어지고
마지막으로 항문이 찢어질 때까지
나는 이제 영원히 춤추라!
무릎도 발바닥도 없이,
노예선의 북소리 울리고
까마귀들의 습격이 시작될 때까지.
□ 2
구르기로 작정하면 한없이 굴러지지만,
그러나 육체는 흘러가도
마음은 흘러가지 못하며,
어머님.
저 바다 끝 너머
내 망막의 수평선에 누워 계신
종이 같은, 뿌리 없는 어머님,
가여운 내……
내 너를 무릎 위에 얹고
가리라 가리라
앉은뱅이 시늉으로
내 너를 무덤까지 데려가리라
무덤 속에 최초로 씨 뿌리리라
(어디에도 계시옵지 않은
그대, 독기로 타오르시며
그대, 한 세상을 꺾어 버리시며
그대, 그대 그늘로 일세를 뒤덮으시며,
그러나 원하신다면,
당신이 원하는 그 깊이로
고이 추락하리라.)
머나먼 소혹성 위에서
그녀가 까마득하게 외쳐댄다.
우리가 그녀의 외침을 듣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듣고 싶어하지 않는 귀를 가진 까닭이다.
그러나 내 무의식의 코는 분명하게 찾아낸다.
이 파멸의 냄새,
보이잖게 살이 타는 푸른 냄새를.
책이 썩고
애인이 썩고
한 나라가 썩고
아랫목에서 어머니가 썩고 계시다.
□ 3
보이네
한밤중에
그대의 흰 죽음.
모든 사물(事物)이 까무러치고
모든 사물(事物)의 표상(表象)이 까무러치고
보이네
한밤중에
떠가는 그대의 흰 죽음.
□ 5
─그러나 언어는 여전히 하나의 울타리일 뿐이며,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만을 체험할 뿐이다.'
기다려라, 이제 보다 아픈 가을이 오고
비로소 나는 그치지 않는 잠을 자기 시작하리라.
두문불출 내 마음의 세월 위에
그대들의 물음이 떨어져 내리고
떨어져 내려도
답하지 않으리라,
어느 날 문득 내 창가에 불이 꺼질 때까지.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문명 최승자
문명
어느 날 한 사람이 블랙 홀로 빨려 들어 간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블랙 홀로 빨려 들어 간다.
어느 날 네 사람이 블랙 홀로 빨려 들어 간다.
어느 날 사만 명이 블랙 홀로 빨려 들어 간다.
어느 날…… 어느 날……
어느 날 지구는 잠잠 무사하고
텅빈 아시아 대륙
황량한 사막 위로 모래바람이 불어 가고
마지막으로, 실패한 한 남자 곁에
한사코, 실패한 한 여자가 눕는다.
어디선가 붉은 양수가 질펀하게
새어 흐르기 시작하고
(누구, 너희는 누구?)
허공 한구석에서
외계인의 눈알 하나가
조소처럼 빛나고 있다.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물망초 최승자
물망초
우리가 엽전 열닷 냥 찌개 백반의
자유를 위해 분주할 때에도
모든 길들은 소리 없이 굽이치며 앓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물망초들은 피어난다.
외부를 향한 내부의 내부의
피흘림을 고요히 지우며
물망초는 또 한 가지를 뻗는다.
그와 같이 내 낮은 흐느낌 또한
하나의 말이 될 수 있을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다오.
내가 이 잔을 다 비울 때까지
내가 꿈속에서 다시 한번만 돌아누울 때까지
내가 내 시야를 스스로 거둘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다오,
죽음이여
잠시만,
영원히.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89
미망 혹은 비망 1 최승자
미망(未忘) 혹은 비망(備忘) 1
아무도 모르리라.
그 세월이 어떻게 흘러 갔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으리라.
그 세월의 내막을.
세월은 내게 뭉텅뭉텅
똥덩이나 던져 주면서
똥이나 먹고 살라면서
세월은 마구잡이로 그냥,
내 앞에서 내 뒤에서
내 정신과 육체의 한가운데서,
저 불변의 세월은
흘러가지도 못하는 저 세월은
내게 똥이나 먹이면서
나를 무자비하게 그냥 살려 두면서.
내 무덤, 푸르고, 문학과지성사, 1993
미망 혹은 비망 2 최승자
미망(未忘) 혹은 비망(備忘) 2
먹지 않으려고
뱉지 않으려고
언제나 앙다물린 오관들.
그러나 언제나 삼켜지고
뱉아져 나오는
이 조건 반사적 자동 반복적
삶의 쓰레기들.
목숨은 처음부터 오물이었다.
내 무덤, 푸르고 , 문학과지성사, 1993
미망 혹은 비망 3 최승자
미망(未忘) 혹은 비망(備忘) 3
생명의 욕된 가지 끝에서
울고 있는 죽음의 새,
죽음의 헛된 가지 끝에서
울고 있는 삶의 새.
한 마리 새의 향방에 관하여
아무도 의심하지 않으리라.
하늘은 늘 푸르를 것이다.
보이지 않게 비약의 길들과
추락의 길들을 예비한 채.
마침내의 착륙이 아니라.
마침내의 추락을 예감하며
날아오르는 새의 비상─
파문과 파문 사이에서 춤추는
작은 새의 상한 깃털.
내 무덤, 푸르고 , 문학과지성사, 1993
미망 혹은 비망 16 최승자
미망(未忘) 혹은 비망(備忘) 16
가을의 페이지가 넘길수록 깊어진다.
그리고 잠이, 마약 같은 마비의 잠이
온몸의 말초 혈관부터 퍼져 올라온다.
곧 뇌중추가 항복하리라.
온 성(城)이 가뭇없이
잠의 빙하 속에 가라앉으리라.
그러나 아직은 흔들리는 이 끝에서,
흔들리는 이 물살이 심히 어지럽구나.
물살을 잠재우든가,
떠도는 이 일엽편주를 잠재우라.
내 무덤, 푸르고 , 문학과지성사, 1993
방 최승자
방(放)&
가을날 사과 떨어지듯
아는 얼굴 하나 땅 속에 묻히고
세월이 잘 가느냐 못 잘 가느냐
두 바지가랑이가 싸우며 낡아 가고
어이어이 거기 계신 이 누구신가,
평생토록 내 문 밖에서
날 기다리시는 이 누구신가?
이제 그대가 내 적이 아님을 알았으니,
언제든 그대 원할 때 들어 오라.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봄의 약사 최승자
봄의 약사(略史)
서울신문사와 시청이 두 개의 사이드를
이루는 일방통로를 걸어, 걸어!
××협회(協會), 그 미궁의 문을 향해
몸을 꺾고 정신을 꺾을 때,
유물론은 내 머릿속에서
가장 확실하게 빛난다.
유물론은 나의 슬픔,
유물론은 나의 오기.
기워도 기워도 나의 삶은
자꾸만 펑크가 터지고
(분명 어딘가 구조적 모순이 있다)
내가 버린 세월, 내가 포기한 세월 위에
올해도 수백 펜지꽃들 피어난다.
지랄처럼, 간질 발작처럼
펜지꽃들 미칠미칠 피어나
텅 빈 봄의 전면을 뒤덮고,
오 가벼운 약속의 시간들이여
흐르는 잠과 하품과 구역질의 시간들이여.
만월처럼 현세(現世)의 독(毒)이 차 오르누나.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89
비오는 날의 재회 최승자
비오는 날의 재회
하늘과 방 사이로
빗줄기는 슬픔의 악보를 옮긴다
외로이 울고 있는 커피잔
무위(無爲)를 마시고 있는 꽃 두 송이
누가 내 머릿속에서 오래 멈춰 있던
현을 고르고 있다.
가만히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까.
흙 위에 괴는 빗물처럼
다시 네 속으로 스며들 수 있을까.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너는 생생히 웃는데
지나간 시간을 나는 증명할 수 없다.
네 입맞춤 속에 녹아 있던 모든 것을
다시 만져 볼 수 없다.
젖은 창 밖으로 비행기 한 대가 기울고 있다
이제 결코 닿을 수 없는 시간 속으로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사랑 혹은 살의랄까 자폭 최승자
사랑 혹은 살의랄까 자폭
한밤중 흐릿한 불빛 속에
책상 위에 놓인 송곳이
내 두개골의 살의(殺意)처럼 빛난다.
고독한 이빨을 갈고 있는 살의,
아니 그것은 사랑.
칼날이 허공에서 빛난다.
내 모가지를 향해 내려오는
그러나 순간순간 영원히 멈춰 있는.
쳐라 쳐라 내 목을 쳐라.
내 모가지가 땅바닥에 덩그렁
떨어지는 소리를, 땅바닥에 떨어진
내 모가지의 귀로 듣고 싶고
그러고서야 땅바닥에 떨어진
나의 눈은 눈감을 것이다.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삼십대의 자서전 최승자
삼십대의 자서전
우리의 핏멍이 보이지 않는
행복한 번역체로 ,
그리운 그리운 제국주의의 번역체로,
다시 쓸까, 내 고백을 내 자서전을,
나의 성공한 실패들의 집적을,
내 무의미의 집대성의 신전(神殿)을.
아하, 그리하여 읊어 볼까,
잘도 배운 식민지적 어법으로,
미지의 신비의 불가해한 불가항력의
뿌리칠 수 없는 대체할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89
삼십 삼년 동안 두번째로 최승자
삼십 삼년 동안 두번째로
삼십 삼년 동안 두번째로 나는
나로부터 도망갈 결심을 한다.
우선 머리통을 떼내어
선반 위에 올려 놓는다.
두 팔과 두 발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몸통을 떼내 의자에 앉힌다.
오직 삐걱거리는 무릎만으로 살며시 빠져 나와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오래 달리고 달려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때,
가만히 쉬고 싶을 때,
저 앞에서 누군가가 걸어간다.
그에게 달려가 동정을 구한다.
그 품에서 잠시만 쉬게 해달라고,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 품에서
가볍게, 풍선에서 공기 빠지듯
가볍게 죽게 해달라고.
그는 못 들은 체하며 걷는다.
나는 또다시 그에게 동정을 구걸하고
이윽고 마지못해, 귀찮다는 둣
그가 나를 뒤돌아볼 때
그것은……
짓뭉개져 버린 나의 얼굴.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삼십세 최승자
삼십세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횐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횐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솔리테어 최승자
솔리테어
아득한 벌판
죽음의 붉은 신호등 앞에
당신은 서 있었다.
건너가지 마, 누군가
등 뒤에서 속삭였다.
결코 뒤돌아봄 없이
당신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시간과 죽음 사이로
가랑이를 벌리고 앉아
운명의 난장판 혹은 고독의 패(牌)들을
쉬임 없이 흩었다 다시 모으고
또다시 흩으면서
당신은 슬금슬금 웃는다.
당신의 전신이 조금씩 허물어지면서
진흙을 게워 내기 시작한다.
아득한 벌판 앞에서
당신의 그림자가 먼저 지워진다.
두 다리와 몸통이 지워지고
머리가 지워지고
오직 귀신 같은 눈빛만 남아
마지막으로 당신의 시야가
막막하게 풀어져 눕는다.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수신인은 이미 최승자
수신인은 이미
수신인은 이미 죽었는데,
누가 암호를 보내는가.
이 물 속 같은 고요를 뚫고서……
어느 집에선가
어느 허공에선가
아니 어느 먼 먼 나라에선가
한세상 아득히 떨어져
고즈넉이 1세기를 울리고 있는
응답받지 못 할 전화 벨소리.
창가에서
창가의 무위(無爲)의 침상에서
나는 한평생을 손짓으로
흘려, 흘려 보낸다.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89
술독에 빠진 그리움 최승자
술독에 빠진 그리움
무수한 꿈이 그녀를 짓밟았다
독한 희망에 그녀는 썩어 갔다
그리고 오늘밤 또 다시 바람은
하늘 밖에서 그녀를 부르고
오오 벼락치는 그리움에
절망이 번개 광선처럼
그녀의 뇌 속에 침투한다
그녀의 머리통이 깨어지고
꿈이 좌르르 쏟아진다
뇌수와 함께.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슬로우 비디오 최승자
슬로우 비디오
한 사람이
죽어 가고 있다,
어두운 화면
흐린 일생 위에서.
이 패주의 길
오냐 다시 오마
이빨을 갈며
그러나 한 사람이
죽어 가고 있다.
그는 분명 쓰러질 것이다.
고통처럼 행복처럼
기필코 그는 쓰러질 것이다.
사람이 쓰러지면
어떻게 쓰러지는가를
당신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슬로우 슬로우 비디오로,
겨드랑이털의 미세한 떨림까지.
그는 당신들의 필생의 악몽이 되고자 한다.
피하고 싶은 자는
그것을 복수심이라 일컬으며
채널을 돌려 버리면 된다.
그리고 밥상머리에서 입 안에 든
밥알을 오래오래 씹고 있거라.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어느 여인의 종말 최승자
어느 여인의 종말
어느 빛 밝은 아침
잠실 독신자 아파트 방에
한 여자의 시체가 누워 있다.
식은 몸뚱어리로부터
한때 뜨거웠던 숨결
한때 빛났던 꿈결이
꾸륵꾸륵 새어 나오고
세상을 향한 영원한 부끄러움,
그녀의 맨발 한 짝이
이불 밖으로 미안한 듯 빠져 나와 있다.
산발한 머리카락으로부터
희푸른 희푸른 연기가
자욱이 피어 오르고
일찌기 절망의 골수분자였던
그녀의 뇌 세포가 방바닥에
흥건하게 쏟아져 나와
구더기처럼 꿈틀거린다.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여의도 광시곡 최승자
여의도 광시곡
□ 1
가물거리는 정신의 한 끝을 헤집고 나와
다시 다른 한 끝에서 침몰하기 위하여
원효대교, 그 허상의 다리를 넘어
섬으로 진입하는 사람들.
유해 색소의 햇빛에 조금씩 들끓으며
발효하기 시작하는 거대한 반죽 덩어리.
─ 여의도는 거룩한
천상(天上)의 빵.
□ 2
구르는 헛바퀴의 완강한 힘, 치욕이여
중국집 짬뽕 속의 삶은 바퀴벌레여,
그래도 코를 벌름거리며
돼지들은 죽어서도 즐겁고
오, 제 먹는 게 제 살인 줄 모르는
무의식의 죄의식의 내출혈의 비몽사몽의
손들엇 탕탕!
창밖엔 찌를 듯 환한 햇빛
샛강 빈 벌판에서, 누가 노래 불러?
귀아리게
쟁쟁하게
불끈 솟아오르는 산들,
어린 날의 메아리가 되살아나
흐야 호 바다로 내달아
바다!
일어나!
솟구쳐!
위로
위로
정점의 피
태양
□ 3
그러나 예, 기다려야지요.
즐거운 사탕발림의 기다림.
그러나 예, 기다려야지요.
우리의 기다림에도
프리미엄이 붙을 테니까요.
오 이 느긋한 기다림의 사원에서
영원히 기다리게 하소서.
마지막 임종처럼 다가올
약속의 땅을 꿈꾸며
우리 네 활개 펴고
잠들어 있게 하소서,
지금 여기서 영원히.
□ 4
시간은 저 혼자 능률 능률 흘러가고
보라, 우리의 오물더미 위에서,
구린내도 그윽한 문화의 오븐 위에서
무럭무럭 김을 풍기며
거대하게 부풀어오르는 여의도를.
─ 여의도는 거대한
천상(天上)의 빵.
그윽한 향취 속에서
저는 잠든 것도 깬 것도 아니었어요.
다만 이 세상을 손수건처럼 얌전히 접어 두고서
한 세월 아득히 눕고 싶었을 뿐이에요.
─ 그때 거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었는데
나는 왜? 알지 못했죠.
─ 그때 그 거리에서 검은 상복 입은 사람들이
바다로 내닫고 있었는데
나는 왜? 알지 못했죠.
하지만 어느 순간 내 꿈을 타고 한 마리 뱀이
내 입 속으로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그 순간 큰 골이 팽팽한 풍선처럼
내 머리 밖으로 부풀어오르고
그때 나는 보았죠.
피골이 상접한 내 정신이
땡땡 부어 오른 내 육신의 관을 이끌고
대방 터널을 힘겹게 빠져 나가는 것을.
□ 5
날개 돋힌 듯 홰를 치며
열심히 빵을 굽는 사람들
살인적으로 미소짓는 가화(假花)들
심장과 성기와 항문을 발랑
얼굴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
혹은 삶 속에 죽음의 기념비를 세우며
심장과 성기와 항문을 꼭꼭 잠그고
막대그래프처럼 걷는 사람들
차트 같은 표정의 얼굴들
옛날의 금잔디
창가에서 노래하던
처녀들의 순한 목소리 문득 그치고
수직으로 곧게 추락하는 새들.
보이지 않게 습한 기류의 이동이 시작되고
비닐조각 볼펜 서류철,
인기 가수의 사진들, 사산된 아이들이
검은 하구로 떠내려와
검은 운명을 짜맞추기 시작한다.
─ 각성하라
너희의 꿈을 뒤덮을
홍수가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너희에겐 되돌아갈 땅,
세습의 땅도 없다.
□ 6
지렁이들도 꾸물꾸물 꿈을 꾸기 시작하고
네온사인의 젖은 미소 피어 오르고
지하(地下)의 사자(死者)들도 감겼던 눈을
일제히 치켜 뜨고 지상(地上)을 응시하는,
거두절미하고, 밤이 온다.
반신불수의 밤, 그러나 영혼불멸의 밤.
반짝이는 눈을 가진 쥐새끼들은
포식의 탁자 위에서 공영 방송과
분 냄새 나는 잡지들과 주식회사
경영 방침을 논의하며
한 사회의 아마도 광대한 몇 바퀴의 헛바퀴와
한 개인의 아마도 무수한 개미 쳇바퀴가
여전히 맞물려 돌아가면서
잘 구도된, 또 하나의 완벽한
폐허를 향해 전진해 가고,
여의도는 뒤로 벌렁 누운
거대한 다족류의 벌레.
그 무수한 발끝마다 네온사인을 달고
허공을 향해 수만 개의 발가락을 꼬물거리면서
입으로는 하루 종일 먹었던 온갖 더러움을
게거품처럼 조용히 게워내고
여의도 허공 가장 깊숙한 곳에선
신(神)의 형상을 한 거대한 검은 아가리가
이 세계의 남은 뼈를 아득아득 씹고 있다.
─ 여의도는 거룩한
천상(天上)의 빵.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우우, 널 버리고 싶어 최승자
우우, 널 버리고 싶어
식은 사랑 한 짐 부려놓고
그는 세상 꿈을 폭파하기 위해
나를 잠가 놓고 떠났다.
나는 도로 닫혀졌다.
비인 집에서 나는
정신이 아프고
인생이 아프다.
배고픈 저녁마다
아픈 정신은
문간에 나가 앉아,
세상 꿈이 남아 있는 한
결코 돌아오지 않을 그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린다.
우우, 널 버리고 싶어
이 기다림을 벗고 싶어
돈 많은 애인을 얻고 싶어
따뜻한 무덤을 마련하고 싶어
천천히 취해 가는 술을 마시다
천천히 깨어 가는 커피를 마시면서,
아주 잘 닦여진 거울로 보면 내 얼굴이
죽음 이상으로
투명해 보인다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불러도 삼월에는 주인이 없다
동대문 발치에서 풀잎이 비밀에 젖는다.
늘 그대로의 길목에서 집으로
우리는 익숙하게 빠져들어
세상 밖의 잠 속으로 내려가고
꿈의 깊은 늪 안에서 너희는 부르지만
애인아 사천년 하늘 빛이 무거워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물에
우리는 발이 묶인 구름이다.
밤마다 복면한 바람이
우리를 불러내는
이 무렵의 뜨거운 암호를
죽음이 죽음을 따르는
이 시대의 무서운 사랑을
우리는 풀지 못한다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이제 가야만 한다 최승자
이제 가야만 한다
때로 낭만주의적 지진아의 고백은
눈물겹기도 하지만,
이제 가야만 한다.
몹쓸 고통은 버려야만 한다.
한때 한없는 고통의 가속도,
가속도의 취기에 실려
나 폭풍처럼
세상 끝을 헤매었지만
그러나 고통이라는 말을
이제 결코 발음하고 싶지 않다.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 위에서
나는 너무 오래 뒤뚱거리고만 있었다.
목구멍과 숨을 위해서는
동사(動詞)만으로 충분하고,
내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허덕일지라도
오냐 온몸 온정신으로
이 세상을 관통해보자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을 때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89
이천년대가 시작되기 전에 최승자
이천년대가 시작되기 전에
이천년대가 시작되기 전에
나는 결혼에 성공할지도 모르고
나는 삶에 성공할지도 모르고
그보다는 죽음에 성공할지도 모르고
나는 나를 모르고
무지한 돌멩이처럼 채이면 채이는 대로
다시 굴러갈 뿐, 굴러가다 멈출 뿐.
이 후반전 인생은
맥도 긴장도 없이,
그러나 얼마나 두려운가,
속살 밑의 속살이 속살 위의 속살이 모르게
저 혼자 울부짖는.
진저리를 치며
그러나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미끄러져 간다. 이 후반기 인생길을.
이 미끄러짐 끝에 확인이 있을까.
삶의 확인 아니면 죽음의 확인이
소인처럼 분명하게 찍혀질까.
어느 먼 하늘 혹은 지상(地上)의 카운터에서
마지막 셈을 시작하려 하는
저 거대한 손은 누구의 것일까.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89
일찌기 나는 최승자
일찌기 나는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자칭 시 최승자
자칭 시(詩)
그러면 다시 말해 볼까.
삶에 관하여, 삶의 풍경에 관하여,
주리를 틀 시대에 관하여.
아니 아니, 잘못하면 자칭 시(詩)가 쏟아질 것 같아
나는 모든 틈을 잠그고
나 자신을 잠근다.
(시(詩)여 모가지여,
가늘고도 모진 시(詩)의 모가지여)
그러나 비틀어 잠가도, 새어 나온다.
썩은 물처럼,
송장이 썩어 나오는 물처럼.
내 삶의 썩은 즙,
한잔 드시겠습니까?
(극소량의 시(詩)를 토해내고 싶어하는
귀신이 내 속에서 살고 있다.)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89
주변인의 초상 최승자
주변인의 초상
이 세계의 문법을 그는 매번 배우지만
매번 잊어 버린다.
세계가 마취된 것인가,
자신의 두개골이 마취된 것인가,
그는 매번 판정을 내리지 못한다.
그는 물질이 정신성으로, 정신이 물질성으로
이동해가는 통로를 너무나 잘 알고
때로는 너무나 까마득히 모른다.
주변인은 신문이 배달되는 시각과
텔레비전이 시작되는 시각을
습관적으로 초조히 기다린다.
주변인은 이따금씩 제 집안의
하나뿐인 시계가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
국번 없이 116에 전화를 걸어 본다.
그리고 로보트 음성의 한 문장이 끝날 때까지 듣는다.
주변인은 주로 전철이나
시외버스를 타고 다닌다.
때로는 목숨 내놓고
총알 택시를 타기도 한다.
행복의 이데올로기를 믿는
행복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서울의 탱탱한 표면장력을 그리워하며,
그 속으로 이입되기를
무수히 갈망하고 무수히 증오하면서,
표면에서 표면으로
주변에서 주변으로
가장자리에서 가장자리로
주변인은 정처 없이 지도를 어지럽히며
하염없이 시간을 혼선시키며 굴러다닌다.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89
주인 없는 잠이 오고 최승자
주인 없는 잠이 오고
주인 없는 잠이 오고
잠 없는 밤이 다시 헤매고,
얘들아 이게 시(詩)냐 막걸리냐,
겨울에 마신 술이
봄에 취하고
흘러간다 흘러가서.
나를 붙잡지 마라,
나는 네 에미가 아니다,
네 새끼도 아니다.
오냐 나 혼자 간다 가마,
늙은 몸이 시(詩)투성이 피투성이로.
환히 불 밝혀진 고층 건물
층층이 밝은 물이 찰랑거리고
아직은 아직은이라고 말하며
희망은 뱃가죽이 땅가죽이 되도록 기어나가고
어느 날 나는 나의 무덤에 닿을 것이다.
관(棺) 속에서 행복한 구더기들을 키우며
비로소 말갛게 깨어나
홀로 노래부르기 시작할 것이다.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죽음은 이미 달콤하지 않다 최승자
죽음은 이미 달콤하지 않다
닫혔다 열리고
열렸다 다시 닫히려 하지 않는
(닫히면서, 결코 닫히면서)
흐르는 관(棺)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찐 박쥐는
탈지(脫脂)된 흰쥐들을 감시하고
죽음은 이미 달콤하지 않다.
그것은 무미한 버튼과도 같은 것,
세계의 셔터를 내 눈앞에서 내리는.
수세기 동안 내 방(房)은 닫혀 있었고
외로운 옥좌 위엔 살해자의 흰 장갑,
이 세계를 나는 죽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손을 씻고서
나는 돌아섰다.
지루한 업무를 비로소 끝낸 인턴처럼.
그리고 안드레이 오 안드레이
너는 거기 앉아 있었다.
바다 건너 네 사후(死後)의 방(房) 안에,
죽은 미래를 깔고서, 고요히.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즐거운 일기 최승자
즐거운 일기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선 날개들이 풍선돋친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이 별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잔씩 돌리며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에선 노란 튤립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 속에선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몰래 일 센티 미터의 날개가 돋고……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많이 사랑해 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습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첫사랑의 여자 최승자
첫사랑의 여자
그 여자의 몸 속에는 스물 다섯에
내가 버린 동정(童貞)이 흐르고 있다.
오래 전에 떠나온 고향처럼
황량하게, 다시 늘 그리웁게.
그 여자의 두 손가락으로 쉽게 나는 열린다
무한을 향해 스스로 열리는 꽃봉오리처럼.
그 여자가 나를 만지면
스물 다섯살 적의 꿈이 깨어나
물결처럼 나를 감싼다.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청계천 엘레지 최승자
청계천 엘레지
회색 하늘의 단단한 베니아판 속에는
지나간 날의 자유의 숨결이 무늬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청계천엔
내 허망의 밑바닥이 지하 도로처럼 펼쳐져 있다.
내가 밥먹고 사는 사무실과
헌책방들과 뒷골목의 밥집과 술집,
낡은 기억들이 고장난 엔진처럼 털털거리는 이 거리
내 온 하루를 꿰고 있는 의식의 카타콤.
꿈의 쓰레기더미에 파묻혀,
돼지처럼 살찐 권태 속에 뒹굴며
언제나 내가 돌고 있는 이 원심점,
때때로 튕겨져 나갔다가 다시
튕겨져 들어와 돌고 있는 원심점,
그것은 슬픔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 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 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 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폰 가갸씨의 초상 최승자
폰 가갸씨의 초상(肖像)
9시, 사무실 출입문이 폰 가갸 씨를 기운차게 연다.
의자가 걸어와 폰 가갸씨 위에 앉는다.
볼펜이 그의 손가락을 꼬나 쥐고
활자들이 그를 꼬나보기 시작한다.
12시, 점심이 그를 잘도 먹어 치우고
때가 되면 오줌이 유유하게 그를 갈긴다.
때때로 심심해서 전화가 자꾸 그를 걸어 본다.
여보십니까? 여보십시다!(존재의 딸꾹질)
시간이 가기도 하고 안 가기도 하면서
이윽고 월급 봉투가 그를 호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6시 반, 54번 버스가 다시 폰 가갸씨를 올라탄다.
원효대교가 다시 홀라당 그를 넘어간다.
현관문이 그를 열고 집어 넣는다.
따뜻한 방바닥이 그를 때려눕힌다.
잠이 아작아작 그를 갉아먹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윽고!
꿈 속에서 대한민국이 열렬하게 그를 찬양하고
여의도 광장 한가운데에 그의 기념비를 세운다.
코러스도 웅장하게 울려 퍼지며
우러러 찬미할지어다!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해남 대흥사에서 최승자
해남 대흥사에서
은지의 엄마 아빠에게, 이 시를 은지의 태몽꿈으로 읽기 바라며
깊은 밤 강물은 바다로 흘러 들고
우리의 손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찾는다.
우리 몸 속에서 오래 잠자던 물살이
문득 깨어나 흐르고
비가 오리라
바다 건너서
그대의 땅을 적시며.
산사의 계곡
하늘의 빈 술잔엔
서푸른 취기의 바람이 일렁이고
지금 어느 산맥 뒤에서
두 연인의 손이 만난다.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허공의 여자 최승자
허공의 여자
나의 꿈 속은 바람부는 무법천지
그 누가 부르겠는가
막막 무심중에 떠 있는 나를.
다가오지 마라!
내 슬픔의 장칼[長劍]에
아무도 다가오지 마라.
내가 버히고 싶은 것은
오직 나 자신일 뿐……
하늘의 망루 위에
내 기다림을 세워 놓고
시간이여 나를 눕혀라
바람부는 허공의 침상 위에
머리는 이승의 꿈 속에 처박은 채
두 발은 저승으로 뻗은 채.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호모 사피엔스의 밤 최승자
호모 사피엔스의 밤
팽팽한 초록빛 눈알을 번들거리며
내 앞에서 공포는 무럭무럭 자라 오른다.
바오밥나무처럼 쳐내도 쳐내도
무한정 뻗어 나가면서
불면의 밤, 불면의 방(房)을
쑥대밭처럼 뒤헝클어 놓는다.
내 입 속으로 내장 속으로
가지 치고 뿌리 치며 뻗어 들어 온다.
새벽 여섯 시, 물먹은 싱싱한 빛을 발하며
공포는 이미 하얗게 세어 버린 내 방 안을
그 무성한 이파리와 줄기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뒤덮어 버리고
내 배꼽을 뚫고 아랫목
구들장 속까지 뿌리 내렸다.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