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천서원
(충렬공 전이갑, 충강공 전의갑 장군을 배향하는 서원)
공산 동수 전투(전이갑,전의갑,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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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동수 전투
(후삼국 시대의 일부)
◎ 날짜 : 927년
◎ 장소 : 신라 공산(현재 팔공산) 파군재
◎ 결과 : 고려 건국 이후 최대 패배
◎ 교전국 : 고려, 후백제
◎ 고려 지휘관 :
왕건, 복지겸, 신숭겸, 김낙, 전의갑, 전이갑, 전락
◎ 후백제 지휘관:
견훤, 능환, 최승우
◎ 고려병력:
왕건 5000명후방 배치군 1만 명총병력 1만 5000명
◎ 백제병력:
불명
◎ 피해 상황:
신숭겸, 김락, 전이갑, 전의갑, 전락 등 8명의 장수 전사, 4930명 전사
공산 동수 전투는 후삼국 시대인 927년 신라 공산(현재 팔공산)에서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치른 전투로 견훤이 왕건군을 기습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고 이곳에서 신숭겸, 김락, 전이갑, 전의갑, 전락 등 8명의 장수가 전사해 지명이 공산에서 팔공산으로 바뀌었다는 설화도 있고 반야월 등 대구의 대표 지명들이 이 전투에서 생겼다.
◎ 배경
후삼국 시대 당시 고려와 후백제는 처음에는 별다른 충돌 없이 평화롭게 지냈으나 926년 9월 견훤이 고려 근품성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927년 견훤은 군사를 이끌고 대대적으로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 신라 근암성(현재 문경시)과 고울부(현재 영천시)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수도 금성(현재 경주)로 진군했다. 신라 경애왕은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해 왕건은 1만 명의 군사를 원군으로 보냈다. 그러나 고려군이 도착하기 전 후백제군이 먼저 경주를 점령하여 경애왕을 자결하게 하고 경순왕을 새 왕으로 세웠다. 이에 왕건은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후백제군을 격파하기 위해 출전했다.
◎ 전투 과정
왕건은 대구 공산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 틈을 노려 견훤군이 왕건군을 기습 공격했고 5000명의 고려군을 우왕좌왕하며 혼란에 빠졌다. 왕건의 부하 신숭겸이 왕건의 복장으로 왕건을 대신해 싸우다가 전사했고 부하 김낙도 왕건을 자신의 말에 태우고 가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어 전의갑과 전이갑 형제도 싸우다가 전사했다. 왕건은 겨우 탈출했으나 8명의 장수를 잃고, 5000명의 군사 중 4930명이 전사하고 불과 70명만 살아 돌아왔다.
◎ 결과
고려는 이 전투에서 건국 이래 최대의 패전을 당하게 되고 왕건은 후에 930년 고창 전투에서 승리하여 전세를 뒤엎는다.
이후 태조는 신숭겸의 시신을 찾아내어 통곡하며, 광해주 비방동(현, 춘천시 비방동)에 예장한 다음 직접 제례를 지내고 그 자리에 순절단(殉節壇)을 모시고 대구지방에 지묘사(智妙寺)라는 절을 지어 공의 명복을 빌게 하였고, 세 개의 봉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1120년(예종15)에 신숭겸과 감락장군을 추모하는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어 찬양케 하였다. 현재 곡성의 덕양서원과 용산재, 대구의 표충사,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 평산의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 동양서원 등에 배향되고 있다.
공산전투 [公山戰鬪]
◎ 요약
927년 경북 팔공산(八公山)에서 벌어진 고려와 후백제의 싸움.
◎ 언제 : 927년
◎ 어디서 : 경북 팔공산
◎ 누가 : 고려의 왕건군
◎ 무엇 : 후백제의 견훤군
◎ 어떻게 : 공격
◎ 왜 : 통일신라를 구하기 위하여
본문
927년(태조 10) 후백제의 견훤(甄萱)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다. 그 해 9월 지금의 문경시와 영천에 있던 근암성(近癌城)과 고울부(高鬱府)를 잇따라 공략한 견훤은 계속하여 경주로 군사를 밀고나갔다. 당시 후백제의 견훤은 고려의 태조 왕건(王建)과 더불어 여러 호족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 두 세력은 외교상 화친을 맺고 있었으나 그들 사이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견훤의 공격을 받은 신라의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건이 곧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돕기 위하여 출전하였으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경주는 이미 견훤의 군대에게 점령되었다. 경주에 입성한 견훤의 군사들은 온갖 약탈을 자행하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던 경애왕을 붙잡아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였다.
뒤늦게 신라에 도착한 왕건은 견훤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이들이 돌아가는 길목인 공산 동수(桐藪)에 군사를 대기시켰다. 약탈한 수많은 보물을 수레에 싣고 포로로 붙잡은 재상 영경(英景)을 비롯한 많은 관리와 기술자 등을 끌고 귀환길에 오른 견훤군은 여기서 왕건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전투는 공격을 한 고려군의 대패로 끝났다. 고려의 장군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이 죽고, 많은 군사가 전사했으며 왕건 자신도 간신히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승리가 얼마나 컸던가는 《삼국사기》 〈견훤열전〉에서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전투를 시작으로 종래 표면상 유지되던 두 세력 간의 평화가 깨어지고 무력충돌이 격화되었다. 결국 이 전투는 후삼국사 전체를 통하여 보면 통일전쟁이 가속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출처] 공산전투 [公山戰鬪 ] | 네이버 백과사전
후삼국시대 대구 공산전투 전사자
1. 김락( 金樂 ):( ?~927 )
-> 당악 김씨 시조. 익대교절광위갈충위사전공신에 추봉되고 시호는 장절( 壯節 )
2. 전락( 全樂 ):( ?~927 )
-> 천안 전씨 시조. 전이갑의 사촌 동생. 천안군 봉호를 받고 시호는 충달( 忠達 )
3. 전의갑( 全義甲 ):( ?~927 )
-> 전이갑의 동생. 죽산군 봉호를 받고 시호는 충강( 忠康 )
4. 전이갑( 全以甲 ):( ?~927 )
-> 자는 자경( 子經 ), 장호는 도원( 桃源 )으로 정선사람. 정선군 봉호를 받고 시호는 충렬( 忠烈 )
5. 신숭겸( 申崇謙 ):( ?~927 )
-> 평산 신씨 시조. 시호는 장절( 壯節 )
6. 호의( 扈義, 혹은 호원보( 扈元甫)):( ?~927 )
-> 보안( 혹은 라주 ) 호씨 시조. 배현경( 裵玄慶 ),신숭겸, 복지겸( 卜智謙 ), 홍유( 洪儒 ), 유검필( 庾黔弼 )과 함께 6태사로 불림
한천서원
<달성군 가창면 행정리에 >
이 서원은 고려개국공신 태사 충렬공 전이갑과 충강공 전의갑 형제를 배향하는 곳이다.
양공은 서기 918년에 장절공 신숭겸장군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하였다.
서기 927년(고려태조10년) 후백제 견훤의 침공을 받은 신라를 돕기 위해 왕건과 함께 출전하여 견훤군과 팔공산 동수에서 만나 대 혼전 중에 태조 왕건이 위급하게 되자 신숭겸, 김락 장군 등과 의논하여 미복으로 탈출케 하고 장렬히 전사하여 영명을 천 백세에 남기었다.
뒷날 태조가 몹시 슬퍼하여 전이갑은 통합삼한개국공신 태사 충렬공으로 추증하고 전의갑은 시중개국공신 충강공으로 봉하였다.
공의 충절이 병조, 예조등 열성조 수교가 조선왕조에도 전교 되어 서기 1864년(고종 8년)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설단하고 제각을 지어 공의 높은 충의를 기려오다가 서기 1989년 서원으로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