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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堤川] - 청풍명월의 고장
제천시는 중원문화의 중심지로서 많은 문화유적과 월악산국립공원을 비롯한 명승지가 있어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문화재는 2003년 현재 보물 6점, 천연기념물 1점, 중요민속자료 2점 등 국가지정문화재 9점과 유형문화재 21점, 무형문화재 1점, 기념물 10점, 민속자료 1점 등 도지정문화재 33점이 있다.
제천 문화관광 http://tour.okjc.net/main/index.do
덕주사[德周寺]
제천의병전시관
http://jcub.okjc.net/main/index.do
한벽루(보물 제528호)
문화재청 사이버문화재탐방 http://www.heritage.go.kr/visit/cyber_2008/index.html
제천 10경.
제1경. 의림지.
제2경. 박달재.
제3경. 월악산.
제4경. 청풍문화재단지.
제5경. 금수산.
제6경. 용하구곡.
제7경. 송계계곡.
제8경. 옥순봉.
제9경. 탁사정.
제천10경. 배론성지
김취려 장군 역사관
김취려 장군은 1217년(고려 고종 4) 7월 거란군이 10만 대군으로 침공해 왔을 때 김취려 장군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전공을 세운 전승지로 유명하다. 천등산 또한 인근의 지등산·인등산과 함께 천·지·인을 모두 갖춘 신령스런 곳으로,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성소로 알려져 있다.
김취려 장군 전적비와 역사관이 조성된 안국사(安國寺). 박달재의 안국사 주지 청암스님이 사비를 털어 조성한 김취려장군 전적비, 기마상등이 있다. 박달재 서원휴게소 옆이 있다
능강 솟대문화공간 수산면 능강리 산6
삼한(三韓)시대에 신을 모시던 장소인 소도(蘇塗)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소도에 세우는 솟대[立木]가 그것이며, 소도라는 발음 자체도 솟대의 음이 변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농가에서 섣달 무렵에 새해의 풍년을 바라는 뜻에서 볍씨를 주머니에 넣어 장대에 높이 달아맨다. 이 볏가릿대[禾竿]를 넓은 마당에 세워 두고 정월 보름날 마을 사람들이 농악을 벌이는데, 이렇게 하면 그 해에 풍년이 든다는 것이다. 또 민간신앙의 상징물인 장승 옆에 장대를 세우고 장대 끝에 새를 나무로 깎아서 달기도 하였다.
솟대의 끝에는 오리나 기러기 등이 올려지는데, 옛날 솟대의 새들은 천상계의 신들과 마을의 주민을 연결해주는 일종의 전령조였다는 설이 있다
이 밖에 경축의 의미로는 옛날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위해 마을 입구에 주홍색을 칠한 장대를 세우고, 끝에 청색을 칠한 용을 만들어 붙이는데 이것도 솟대라고 한다.
덕주사(德周寺) http://www.deokjusa.org/
원래의 덕주사는 보물 제406호인 덕주사마애불(德周寺磨崖佛) 앞에 있었는데, 1951년 군의 작전상 이유로 소각하였다. 창건 당시의 절을 상덕주사, 지금의 절을 하덕주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상덕주사는 지금의 덕주사에서 1.7㎞ 지점에 있었는데, 1951년 무렵 까지만 해도 고색창연한 기도사찰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당우(堂宇)는 법당과 요사채 뿐이지만 어느 때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우탑(牛塔) 1기(基)와 조선시대의 부도(浮屠) 4기가 있는데, 이 우탑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얽혀 있다. 덕주사에 승려가 많아져 절이 좁아서 새로이 부속건물을 지으려고 하는데, 난데없이 건장한 황소 한 마리가 나타나 목재를 어디론가 실어 날랐다. 뒤따라가 보니 지금 마애불이 있는 바위 아래였으므로 거기에 절을 짓고, 목재를 다 실어나른 황소가 죽은 자리에는 우탑을 세웠다고 한다. 미륵리사지 석불입상(마의태자가 조성)과 마애불(덕주공주가 조성)은 마주 보고 있다
덕주사의 남근석이 처음에는 월악산의 음기를 중화시키고자 세웠으나, 세월이 지나며 아들을 바라는 사람이나 또 소망所望과 행운幸運을 기구하는 민속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덕주사 마애불(德周寺磨崖佛 보물 406호)
덕주산성(德周山城)
남문은 경상북도 문경에서 하늘재[寒暄嶺]를 넘어 미륵리에서 발원하여 월악산 남쪽 기슭의 월천을 막는 차단성 역할을 하는 문이다. 동창에서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홍예문으로 되어 있고 좌우를 막는 석축은 내외겹축으로 길이가 100간이다. 축성법은 선단석을 3개씩 쌓아올린 뒤 종석(宗石) 1개와 12개의 기석(基石)을 쓰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동문은 덕주골 입구에 있는데 좌우를 가로막은 축성법을 사용하였고 문의 홍예 양식은 남문과 비슷하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이 고려의 왕건에게 나라를 내어주자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금강산으로 가던중 문경을 경유하여 하늘재를 넘고 이곳에서 머물 때 미륵사지 와 덕주사를 지어 망국의 한을 달래며 성을 쌓고 병사를 훈련시켰다 하여 덕주산성 이라 부른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이후 조선시대 말기에는 명성황후(민비)가 대원군의 세력과 권력싸움이 심할 때 이곳에서 피신하였다 전하며 3개의 성문(북문, 동문 ,남문)의 문루는 모두 조선시대에 조성되어 이후에 불에타 소실된 것을 근래에 제천시에서 다시 복원한것이다. 송계계곡에는 한때 명성황후의 별궁이 있기도 했다
고려 때는 군대를 주둔하게 하고 월악사자빈신사지석탑(月岳獅子頻迅寺址石塔)을 건립하여 몽고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을 세웠던 곳으로 대몽항쟁의 방어선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조에는 임진왜란 과 병자호란 을 겪으면서 산성이 파괴되었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는 조선 중종때 내성을 축조하였다 하며 고려시대 에서 조선 초기 까지는 3중의 성벽이 존재하였으며 이후에 4겹의 성벽이 쌓아진 것으로 추측된다.
사자빈신사지석탑(獅子頻迅寺址石塔) 기단부에 네 마리의 사자를 원각(圓刻)하여 배치한 특수형식의 석탑으로 보물 제94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층기단부 면석에는 해서(楷書)로 10행 79자의 조탑연기(造塔緣記)가 오목새김되어 있는데, ‘九層石塔一坐(구층석탑일좌)’ 및 ‘태평(太平)2년 4월일’ 등의 명문(銘文)을 통해 볼 때 이 탑은 본래 9층이었으며 1022년(현종 13)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1256년(고종 43년)에 몽고군이 침략하여 충주를 공략한 다음 여세를 몰아 덕주골의 남쪽방향 으로 진격해 오자 관리들과 노약자 들은 덕주산성 으로 피신하였는데 뒤따르는 몽고군이 들이닥쳐 올 무렵 갑자기 하늘에서 우뢰가 치고 비와 우박이 쏟아지면서 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그러자 몽고군은 기이하게 여겨 이곳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났다 한다. 또한 한때는 고려군사 2만 명이 덕주공주를 감시하며 덕주산성을 지켰다는 전설도 전하여 지고 있다.
박달재(제2경)
금봉을 볼 면목이 없는 박달은 평동에 가지 못했다. 박달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금봉은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의 이름을 부르며 오르내리다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죽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른 뒤 사흘째 되던 날 낙방거사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왔다. 금봉의 죽음을 알게 된 박달은 목메어 울며 고갯깃를 바라보니 금봉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고갯마루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박달은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금봉의 뒤를 쫓아 달려가 아슬아슬하게 금봉을 잡았으나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후로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박달재 목각공원
작품을 시작 하게 된 주요 동기는 박달재의 전설이 주는 박달선비와 금봉낭자의 사랑, 헤어짐, 죽음으로 끝맺음 할 수밖에 없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밑바탕에 음. 양의 조화로 인하여 안타까운 이별과 슬픔이 금봉낭자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박달도령의 죄책감이 다시 죽음으로 연결되는 슬픔이 두 번 다시없도록 하기 위하여 음과 양을 조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박달재가 있는 시랑산을 모실시(侍), 사내랑(郞) 으로 해석하여 양기가 부족함을 남근으로 표현함으로서 지간(평생을 바쳐 헌신하는), 지기(음양의 기운), 지세(박달재)에 표현 하였다
보는 이에 따라서 협오감을 느끼기도 하고 해학적인 모습에 피로를 잊고 웃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작가인 성각 스님은 성(姓)적인 표현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음, 양의 조화로움으로 슬픈 사랑의 종말이 없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작품을 만들지만 때로는 항의적인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이 있어 고통스러운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울고 넘는 박달재’의 주인공이 누굴까? 결론부터 말하면 노래와 전설은 서로 다른 얘기다. 노래의 배경은 박달재에서 이별을 하던 촌농부의 모습을 작사가 반야월 선생이 보고 만든 노래인 것이다. 반세기 전의 박달재의 모습이 노래로 전해오니 고개 정상에 마련된 조각상과 해설을 통해 그때를 회상해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촌농부의 이야기 ‘울고 넘는 박달재’가 국민가요가 되어 불리니 제천시를 알리는데 톡톡히 한몫했다.
제천은 청정 산간지대에서 자생하는 도토리를 이용해 도토리묵을 만든다. 도토리 묵을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
배론성지(제10경)
* 배론 이란? - 배론 이란 지명은 골짜기가 배 밑 바닥 같다 고하여 한자 새김으로 주론(舟論) 또는 음대로 배론(排論)이라고도 합니다.
* 백서 - 가로 62cm, 세로 38cm되는 흰 명주 비단에 한줄에 110자씩 122행 13,384자로 작성되었으며 원본은 로마교황청 문서보관소에 보관중입니다.
송계계곡(제7경)
와룡대 용이 승천하였다고 하며 수심 5m의 깊은 웅덩이 가까이에 사자빈신사지석탑이 소재하고 있습니다.
팔랑소 200여평의 화강암 반석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곳으로 옛날 하늘나라 공주가 하강하여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곳입니다.
신륵사[神勒寺]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전과 산신각·국사당·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제천신륵사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2년 12월 17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내부에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세음보살,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이 있고 안팎 벽에는 탱화와 벽화가 많이 그려져 있다. 탱화 중에서는 1806년(조선 순조 6) 경에 그린 아미타후불탱화가 가장 오래되었다.
옥순대교
옥순대교는 지난해 건설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다리로 1998년 착공해 5년만인 2003년 1월 20일 개통됐다. 폭 10.5m에 총길이 450m에 이른다.
시는 옥순대교를 더욱 널리 알리고 명소화 하기 위해 각종 화보집책자에 관련 사진을 제출하고 전시회 출품과 함께 각종 홍보매체를 통해 적극 홍보해 나갈 방침이다.
이 다리는 6개의 우물통 교각위에 붉은색 삼각형 트러스 2개가 세워져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으며 제천-수산을 잇는 지방도 597번 도로와 충주-단양을 잇는 국도 36호선이 만나는 도로로 청풍권 관광지와 월악산, 충주 수안보, 단양팔경을 연결하는 관광 벨트화 역할을 하고 있다
옥순봉(제8경)
옥순봉은 조선 초 청풍군(현 제천시 청풍면)에 속해 있었다. 단양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 선생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단양 태생의 기녀 두향이 아름다운 옥순봉의 절경을 보고 단양군에 속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청풍군수가 이를 허락지 않았다. 그러자 이황 선생이 단애를 이룬 석벽이 마치 대나무 순이 솟아 오른 것과 같다하여 옥순봉(玉筍峰)이라 이름 짓고, 석벽에 <단구동문>이라 새겨 단양의 관문이 되었다고 전한다
용하구곡(제6경)
의림지(제1경)
고려 성종 11년(992)에 군현의 명칭을 개정할 때 제천을 '의원현' 또는 '의천'이라 하였는데, 그 후에 제천의 옛 이름인 '의'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축조된 명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구전에는 신라 진흥황 (540~575)때 악성 우륵이 용두산에 서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을 막아 둑을 만든 것이 이 못의 시초라고 전해진다. 그로부터 700년 뒤 이곳에 온 박의림이라는 현감이 보다 견고하게 새로 쌓은 것이라고도 한다.
현재는 수리시설보다 유원지로 유명해졌다. 순조 7년(1807년)에 세워진 ‘영호정’과 1948년 건립된 ‘경호루’ 그리고 수백 년을 자란 소나무와 수양버들, 30m의 자연폭포 등이 어우러져 단아한 의림지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특히 겨울철 및 해빙기에 잡히는 공어(빙어)는 담백한 맛의 회어로 각광받고 있다. 순채는 영조 임금의 수라상에 올릴 만큼 유명했으나 1914년 의림지 보수 이후 멸종돼 현재 농업기술센터에서 복원연구, 시험재배 중이다. 의림지는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하나이며 가야금의 대가인 우륵선생이 노후에 여생을 보낸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가 가야금을 타던 바위 ‘우륵대(일명 제비바위·연암·용바위)’와 마시던 물인 ‘우륵정’이 남아 있다.
신털이섬 의림지 만들 때 인부들이 작업 후, 신발 속에 있는 흙을 털어놓은 것이 모이고 모여서 섬이 만들어 졌다고 한다
그 후 700년이 지나 현감 "박의림"이 4개 군민을 동원하여 연못 주의를 3층으로 석축을 해서 물이 새는 것을 막는 한편 배수구 밑바닥 수문은 수백관이 넘을 정도의 큰 돌을 네모로 다듬어 여러 층으로 쌓아 올려 수문기둥을 삼았고 돌바닥에는 "박의림"현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합니다.
자양영당(紫陽影堂)
조선후기 학자이자 의병장인 유인석은 1895년 단발령이 시행되자 “문경을 포기하고 야만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자양영당에서 8도 유림을 모아 창의의 비밀결사활동을 벌였다.
자양영당은 1889년 자양서사로 시작했으며 1906년 전면 3칸, 측면 2칸의 툇마루가 있는 팔작집으로 건립됐다. 1976년 12월21일 충북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제천시 문화관광과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곳은 건물 자체만으로도 조선후기 건축사연구에 도움이 되고 있으며 경내 화동강목 판목은 조선말 목판 인쇄술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시는 자양영당주변에 제천의병 기념탑과 제천의병전시관(http://jcub.okjc.net/main/index.do)을 건립하고 의병봉기활동에 대한 전시물과 다양한 독립운동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제천유물전시관[堤川遺物展示館]
청풍문화재단지(4경,청풍호반) 청풍면 물태리
문화재청 사이버문화재탐방 http://www.heritage.go.kr/visit/cyber_2008/index.html
충주 다목적 댐 공사가 1978년에 시작하여 1985년 10월 17일에 준공될 때 까지 수몰지역 내에 산재되어 있는 문화유산을 1983년부터 만6천 평의 부지 위에 원형대로 이전 복원하여 1985년에 개장하였다.
단지에는 보물 2점(한벽루, 석조여래입상), 지방유형문화재 9점(팔영루, 금남루, 금병헌, 응청각, 청풍향교, 고가4동), 지석묘, 문인석, 비석등 42점과 생활유물 2천여점이 보관되어 명실상부한 옛 남한강 상류의 화려했던 문화의 산실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벽루(보물 제528호) 고려 때 관아의 연회 장소,
밀양 영남루(보물 제147호), 남원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함께 본채 옆으로 작은 부속채가 딸려 있는 조선시대 누각 건물의 대표적인 예이며, 세 건물 가운데 가장 간결하고 단아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부연(附椽) 유명한 어느 도편수가 서까래의 치목을 잘못해서 짧게 제작했다고 한다. 완공 시일까지 시간적 여유도 없거니와 목재도 없어 한숨을 쉬던 시아버지를 본 며느리가 사정을을 물어보고 한참을 생각한 끝에 덧 서까래를 거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자 그 덧 서까래를 며느리 부, 서까래 연 자를 써서 부연이라 했다고 한다. 서까래를 도와 덧 서까래를 건다 하여 추가 설명을 할때에도 부연설명 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금수산에서 도를 닦고있던 왕사(임금을 가르치는 책사역활의 스승)였던 천공스님이 금수산 일대를 굽어보니 청풍이란 곳은 살기좋은 조건을 잘 갖추었으나 언젠가 큰 수해를 당하게 되는 지형을 안고 있어 청풍의 악운을 방지하기 위해 산신의 역할을 하는 호랑이로 하여금 재앙을 막아내기 위하여 청풍의 관문인 팔영루 입구에 그리게 되었다 한다.
호랑이 그림은 머리를 관아 쪽으로 향하게 하고 꼬리는 관문밖으로 나가게 하여 그렸는데 흔히 생각하는 호랑이의 용맹성을 모두 버리고 민간신앙에서 자주 출현하는 우희적인 표현으로 그려져 청풍의 순수한 사람과의 인연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호랑이의 위치로 보아 머리가 관아쪽에 있어 마을의 모든 먹이를 집어 삼키고 배설은 마을 바깥쪽으로 하게되는 형상이어서 기름진 땅은 모두 마을밖에 있게되고 청풍에는 큰 부자가 없다 라는 속설 때문에 청풍을 떠나야 잘살게 된다고 전해진다.
그러한 전설이 내려오는 동안 청풍은 몇번의 대홍수를 겪게 되는데 크고 작은 홍수를 잘 피해 갔지만 1970년의 대홍수 때에는 한벽루의 기둥이 경기도 양수리 까지 떠내려 가는 수해를 보았다 한다. 그뒤로 1984년 에는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청풍면 읍내리를 비롯한 강주변 모두가 수몰지역으로 선정되어 마을사람들은 보상금을 받아 일부만 남게되고 모두 인근의 제천,단양,충주등으로 흩어져 모두 잘살고 있다하여 천공스님의 호랑이 그림으로 인하여 청풍의 지형적인 예언이 실현되었다 믿는다.
금남루(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 청풍부 아문인 금남루
금병헌(지방유형문화재 제34호) 동헌(東軒)으로 부사(府使)가 집무하던 곳
응청각(지방유형문화재 제90호) 객사,
청풍향교(지방유형문화재 제64호),
도화리 고가외 3동(지방유형문화재 제83, 84, 85, 89호)
청풍호반은 충주 다목적댐 건설로 생성된 호수로 뱃길 130리 중 볼거리가 가장 많고 풍경이 뛰어난 곳으로 내륙의 바다라고 합니다. 특히 2000. 4. 15에 개장된 수경분수(162m)에서 쏘아올리는 시원한 물줄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현재 1개 타워에 3종의 시설을 설치하는 번지점프장 및 수상레져시설 등 종합휴양시설을 이용한 체류형 관광지로 각광받게 되어 그야말로 청풍호반은 보고, 즐기며, 체험하는 종합적인 국제적 관광명소로 급부상할 것입니다. 2011 청풍호 벚꽃축제 2011.04.15(금) ~ 2011.04.17(일)
탁사정([濯斯亭 제9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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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국제음악영화제
음악영화제 제천국제음악영화제(JIMFF) 아시아 최초, 국내 유일의 음악 영화제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2005년부터 매년 8월에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주체로 충청북도 제천시 일원에서 열린다.
제천 맛집
이 집의 대표 음식은 제천약초쟁반요리(5만5,000원). 지난해 열린 제12회 충북향토음식경연대회에서 대보명가는 제천에서 나는 산야초와 송이, 표고 등 8가지 버섯, 구기자, 연자, 은행, 잣 등의 각종 씨앗과 한우수육을 활용한 이 요리로 금상을 수상했다. 성별로 나눠 당귀물로 지은 밥(여성용)과 재래삼으로 지은 밥(남성용)을 내놓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집의 별미는 또 있다. 1인당 1만원에 건강만찬을 즐길 수 있는 약초밥상이다.
제천약초시장 대구, 전주와 함께 조선 3대 약령시로 유명했던 충북 제천은 전국 약초의 30%를 생산하며 황기의 경우엔 유통량의 80% 가 이곳에서 거래될 정도다. 시내에는 대규모 약초 시장이 형성돼 있다
제천 국제한방바이오엑스포 평균해발 274m의 지대에 석회암으로 구성된 제천지역은 1930년대 이전부터 대구, 전주와 함께 국내의 3대 약령시장을 형성해 왔다. 자생약초 집산지인 제천시는 명의촌 조성, 약채락 음식개발 등을 통해 한방의료관광의 중심지로 부각되고 있다. 한의학의 우수성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한방의 재발견’을 주제로 한 2010년에는 한의약 분야로는 세계 최초인 ‘제천국제한방바이오엑스포’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제천은 지금도 국내 약초 생산의 30%를 차지한다. 제천은 ‘한방의 도시’라고 이름 붙여질 만큼 전통 한방과 관련한 산업들이 발달해 왔다.
제천 황기 우수농산물관리제도(GAP)로 생산되는 제천황기의 특징은 석회암의 점토질 땅에서 재배하여 재질이 단단하고 저장성이 좋으며 해발 300m 이상의 고랭지 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타 지역의 제품에 비하여 약효가 월등히 우수하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특히 제천황기는 전국 생산량의 30%, 유통량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제천의 최다 생산 약초다. 당귀도 전국 거래량의 90%를 차지한다.
한국전통문화체험학교 http://www.woorii.co.kr/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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