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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지) 29호에 '우리나라 국호고'-한반도 통일이후 국호제정을 위한 기초연구'라는 제목으로 투고된 것입니다. 각주가 붙여졌는데 여기서는 생략할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국호고- 통일 후의 국호를 제정을 위한 기초연구
정구복(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1. 머리말
20년전 통일조국의 이름 짓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지고 역사비평사에서 특별기획을 하여 국호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인식을 확장시킨바 있다. 시인 고은, 박현채교수, 한영우교수가 주제발표를 하였다.
고은은 실질적인 민족의 통일국가였던 고려라는 국호가 타당성도 있지만 이는 고구려의 계승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파악하여 적극적인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한(韓)은 고대 남한 사회의 한에 근거를 두고 있고, 고려는 북방의 고구려를 뜻하고, 한국은 남방의 삼한사회를 강변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여 통일국호의 원안으로 ‘조선’, ‘고려’ ‘한국’을 기정사실로 두고 ‘아리랑’이라는 국호도 논의 상에 놓자고 주장했다.
박현채 교수는 고려라는 국호를 제기하였다, 고려라는 국호는 통일왕조의 국호였다는 점을 들었고 강대한 원제국에 맞서 왕조를 지킨 위대한 국가라는 것이다. 또한 고려는 외국에 알려진 Korea 라는
국호와도 걸 맞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고려라는 국호가 처음 생긴 것은 고구려의 후기 국호에 연유함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한영우 교수는 통일 후의 국호를 빨리 정하는 것이 좋다는 전제하에 역사적으로 쓰인 고려, 조선, 대한을 검토하면서 남북이 혐오감이 없이 쓸 수 있는 국호로 ‘코리아’(Korea)라로 쓰자는 제안을 했으며 남북탁구단일팀이 코리아팀으로 쓴 예를 들었다. 이는 역사적 성찰이 아니라
주로 현실적인 남북한 간의 국제회의 등의 명칭을 정함에 어려운 점, 상대방을 지칭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상황을 들어 설명했다.
그리고 다른 연구에서 국호를 논한 한국사학사 연구의 거두인 조동걸 교수도 앞으로의 통일 후의 국호를 코리아로 하자는 제의를 한 바 있다.한자로 쓰지말고 그냥 영문표기와 같이 코리아로 하자는 주장이었다. 현재 한글전용을 하는 시대에 걸맞는 견해이지만 앞으로의 통일조국의 명칭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전통시대의 국호에 대하여는 이해가 부족한 부분도 있었다.
또한 월드컵이나 올림픽 출전권을 놓고 벌여지는 응원에서는 “오! 필승 코리아!”, “오!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리듬릭하게 불러져 어린아이까지 환성을 지르는 지경에 이르렀고, 한류문화가 세계를 뒤흔들고 있어 이제 한국이라는 국호가 세계에 알려진 점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국제적인 공식국가 명칭도 Korea에서 Corea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었으나 그 근본이유가 일제가 바꾼데 기인한다는 허위사실을 학문적으로 실증을 통하여 그런 것이 아님을 밝힌 논문도 나왔다. 즉 서양에서 한국을 Korea로 표기하기 시작한 것은 1891년
경부터라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밝혀냈다. 또한 대한민국의 국호 제정에 대한 논문으로는 이완범교수의 국호 ‘대한민국의 명명’이란 논문
에서 폭넓게 다루어졌다.
옛날부터 국호 나라이름이란 어떻게 지어졌는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그 국호가 칭해졌던 당시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국호가 상징하는 역사성은 무엇인지?, 또 자신이 칭한 이름과 남이 불러주는 칭호가 왜 다른지 또 우리나라의 나라이름은 이웃 나라와 비교하여 어떤 특징을 가진 것인지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통일 후의 국호를 제정하는 것에 대한 제안을 해보고자 한다.
본 논문은 역사적으로 사용되어 온 우리나라의 국호를 올바르게 파악하여 국민들의 역사이해를 돕고 역사의식을 국민에게 확장시켜 통일 후의 국호를 제정하기 위한 기초연구이다.
2. 국명과 국호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조동걸 교수는 국가의 상징인 국호, 국기, 국가, 국화를 다룬 글에서 일람표로 국명과 국호를 구분하여 쓴 바 있다. 그런데 국명과
국호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엄밀한 정의는 내리지 않고 있으나 그 설명을 보면 전통시대에는 국명과 국호가 일치되었는데 근대 국가에 들어와 정체(政體)가 국호에 나타나기도 했다 하여 국호란 정식명칭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전적인 의미를 보면 ‘명(名)’자와 ‘호(號)’ 자의 차이는 거의 없다. 단지 개념상 차이를 말한다면 ‘호(號)’자는 ‘명(名)자보다 조금 격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이름을 예로 든다면 명은 가장 기초적인 것이지만 호, 또는 시호는 흔한 이름보다는 품위와 격이 조금 높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경우 이름에는 여러 가지 별칭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라이름과 국호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 권 4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4년 조에 “시조가 창업을 한 이래 국명(國名)이 정해지지 않아서 사라, 또는 사로, 또는 신라라 칭하는데 신등이 생각하기에 ‘신(新)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라(羅)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니 이를 국호로 삼음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한 기록에 국명과 국호가 함께 나오고 있다. 이 말은 모두 번역하면 나라이름이지만 국명은 국호보다 개념이 일반적이고 넓지만 정식으로 정한 이름이 국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라이름을 정할 때에는 국호라는 용어를 중국과 한국, 일본의 옛 역사기록에서는 오랜 동안 공통적으로 사용하여 왔다.
중국을 한(漢), 당(唐)나라가 망한 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의 약을 한약, 중국의 음악을 당악이라고 칭한 것처럼 중국을 한, 당이라고 칭하였고 임진왜란 시 명나라 군사를 당군(唐軍)이라고도 칭한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중국인들은 임진왜란 때까지 우리나라를 ‘고려(高麗)리고 칭하기도 한 바 이는 고구려를 뜻하는 것으로 이는 국명이라 할 수 있다. 국명은 이처럼 남이 불러주는 명칭도 포함될 수 있다. 또한 별칭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으나 우리나라를 청구, 근역, 해동, 동국, 대동이라는 국명도 있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전근대의 국가나 왕조의 이름은 국호가 있었을 뿐이다. 분명한 사실은 나라가 건국되면 전통시대나 현재까지도 나라이름을 국호라고 칭하였다는 사실이다. 전통시대 역사서에서 국호를 무엇으로 했다고 나오지 국명을 무엇으로 정했다고 하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나라라는 말에도 국가(國家), 국(國), 방(邦)이 있다. 국가나 국은 영토와 인민, 주권을 가진 단위체이다. 우리나라라고 할 경우 분열적인 경우 두 개 이상의 국가가 포괄될 수 있다. 김부식은 신라, 고구려 백제를 오방(吾邦)이라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나라는 남한만을
지칭하는 경우와 남북한을 통털어 우리나라라고 칭할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나라라 함은 지금의 나라를 뜻할 뿐 아니라 과거의 역사에 있었던 국가까지를 포함함으로 시공을 초월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라이름은 자기 나라 안에서 인정하는 것과 외부에서 인정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 자기 나라 안에서 정권의 주체가 바뀌면 나라이름 즉 국호가 바뀔 수도 있지만 외국에서는 이를 그대로 부르지 않고 자신들이 불렀던 이름 그대로 부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외국에서 칭하는 명칭은 그 나라에 알려진 칭호로 계속 불러지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는 영국, 미국, 독일 등으로 그 나라의 국호를 음대로 칭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서양에서 한국을 Korea, 또는 Corea로 칭하는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명을 조선, 고려, 대한(한)이라고 함은 역사상 이들 국호가 여러 번 반복하여 사용되었다는 의미와 동시에 역사계승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역사계승의식이라 함은 추상적 정치적 속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라는 역사관 등이 강하게 반영될 경우 사실과 달리 과도하게 허장성세로 부풀리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국호가 다른 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을 우리만이 중요하다고 강조할 경우 그 객관성이 없는 것이다. 예컨대 단군조선과 같은 경우이다. 국내에서는 단군조선에 대한 강조가 크게 진행되고 있지만 이는 외국인은 그리 관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외국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또한 역사계승의식은 당대의 것과 후대의 역사가에 의하여 파악되거나 강조된 것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당대인의
역사계승의식에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반영된 정치적 의식이 반영되기도 하고, 후대 역사가의 역사계승의식에도 당시 학풍의 영향을 받은 한계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3.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국호와 그 의미
우리나라의 각 나라에 대한 국호에 대한 기록으로 원전적 가치는 뒤지지만 종합적 정리를 한 자료에는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에는 우리나라의 국호가 시대순, 지역순으로 정리되고 그에 위치 강역 등에 관한 자료가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단군조선국, 기자조선국, 위만조선국, 예국(濊國), 맥국, 동옥저국, 고구려국. 한사군,
고구려국, 비류국, 개마국, 구다국, 북옥저국, 남옥저국, 황룡국. 梁貊國, 부여국, 동옥저국, 曷思國, 藻羅國(미상). 朱那國, 발해국, 定安國, 挹婁國, 선비국, 海頭國, 연나국(미상), 낙랑국, 염사국(미상), 보덕국
辰國, 마한국, 기준마한국. 후마한국, 진한국, 변한국.
백제국, 비류국, 탐라국, 휴분국, 州胡國,
신라국, 우시산국, 거칠산국, 장산국, 音汴伐國, 실직국, 압독국, 비지국, 다벌국, 초입국, 소문국, 감문국, 골벌국, 사량벌국, 이서고국, 우산국, 금관국, 대가야국, 소가야국, 고령가야국, 아라가야국, 성산가야국, 골포국, 칠포국. 고포국 가라국, 임라국, 창녕국, 召羅國, 駒令國, 溟州國, 保羅國, 史勿國, 대방국
태봉국, 후백제국. 고려국, 本朝 국호 조선
이상에 열거한 국호는 역사상 나타났던 국가의 명칭을 모두 나열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문헌에 나오는 ‘구려(句麗)’라는 나라가 빠져 있다. 이는 한사군 앞의 고구려와 연관된다. 구려는 북한에서는 고구려의 전신 국가로 파악하여 B.C. 10세기 경에 구려국이 건국되었다고 하나
중국문헌의 구려는 고구려의 약칭으로 사용된 것임이 후한서 권85 「고구려전」에서 확인된다. 이는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주몽에 의하여 세워지기 전에 있었던 나라로 북한에서 크게 강조하고 주몽의 고구려 건국을 기원전 277년으로 올려잡는 것이라는 점에서 여기서 그 대강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의 역사가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700년의 역사가 아니라 900년의 역사였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의 연표서문에 가언충의 이야기로 전하고 있어 그 존속기간(歷年)에 문제의 의혹이 있어 왔다. 북한에서는 고구려의 건국이전의 ‘구려(句麗)’국의 기록을 기원전 중국 측의 기록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이는 위서인 古文 書傳(尙書)를
근거로 파악하고 있으나 이는 타당한 근거라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근거로 인용한 상서의 기록 그 자체가 의심스럽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주몽으로부터 유리왕 사이에 5왕을 새로이 추가하고 이를 국가적 정설로 확정하고 있다. 이를 남한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북한이 고구려 정통의 역사를 만들려는 체제적 정치 이념과 연계된 것으로 이해된다,
남한 학계에서도 주몽의 고구려 건국 이전에 고구려가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는 기원전 107년에 설치된 현토 군에 고구려현이 나오고 있는 점 때문이다. 이는 한서 「지리지」에 나오는 현토군의 속현 이름에 고구려현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남한의 학자도 기원전 37년 주몽이 고구려 건국 이전에 고구려의 국명이 보임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사료비판을 하지 않고 그대로 믿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너무나 큰 문제이므로 앞으로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야 하겠으나 본인이 고찰한 바에 의하면 이는 기원후 15년 경의 왕망대의 기록을 남긴 자료임이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중국측 기록이나 우리나라 측 기록에는 ‘구려’는 고구려의 약칭으로 기록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한문을 쓰는 투식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할수 있다. 구려는 ‘고구려’에서 ‘고’자를 생략한 것이다. ‘고’자는 성씨거나 아니면 높다는 수식어로 생각한 듯 하다. 왕망이 고구려를 하구려로 칭했다는 기록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그리고 한서와 후한서 등 중국의 기록에는 고구려를 ‘高句驪’로 말마자 변을 쓴 驪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주변민족을 멸시하여 이렇게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에 든 여러 나라의 국호 중 우리 역사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사용된 것을 말한다면 조선, 고려, 삼한의 대한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은 현재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3번, 고려 3번, 대한 또는 한국은
3번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국호 중 이 세 국호에 관심이 집중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4. 우리나라 국호 조선, 고려, 대한의 의미와 그 역사성
4.1. 조선이란 국호와 그 역사성
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이라 했고, 동국여지승람과 동국통감에는 전조선(前朝鮮 단군조선), 후조선(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구분을 했으며 삼국유사에는 단군신화가 전하고 있다. 조선이라는 최초의 국호는 사마천의 사기와 산해경 「내해편」에 나오고 있다. 사기에는 조선전이 있는 바 이는 위만조선만을 다루고 있으며, 사기 「송미자세가」에서는 기자를 주 무왕이 조선후에 봉하였다는 기록과 그리고 기자가 주 무왕에게 정치의 근본철학인 홍범 9주(9개철학)를 가르쳐주었다고
하였다. 기자조선에 대하여는 민족주의 한국사학에서는 이를 부정하고 있지만 조선왕조말까지는 우리나라의 유교문화를 전달한 국가로 적극적으로 인정해왔다. 이를 한씨조선이라고 하고 기자를 추장의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조선이란 국호의 어원적 의미는 남북조의 남조였던 송나라(劉宋)의 배인(裵駰)이 쓴 사기집해 史記 集解에 의하면 “조선에 濕水, 열수 선수(汕水)가 있는데 이 세물이 합쳐 열水가 된다. 아마도 낙랑, 조선은 이에서 이름이 연유한 것 같다.”고 하였고, 그리고 당나라 사마정(司馬貞)이 쓴 사기색은 史記 索隱에서도 자기의 생각에 “조선이란 명칭은 선수(汕水)라는 강물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라고 하여 수도에 있던 강의 이름에 연유한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아침의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했고
19세기 말서양인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Morning Calm). 즉 태양이 일찍 뜨는 나라, 태양을 숭배한 종족이름이란 등 십여 가지 추측성 해석이 가해지고 있다. 이는 어원적 해석이라고 할수 있다. 이는 태양을 숭배한 종족이 만들어 낸 수많은 거대한 지석묘를 이룩한 청동기문화와 연계하여 해석할 수도 있다.
조선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빨리 건국된 국가명칭으로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다. 즉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에 의하여 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은 고조선에 대한 마력적 해석을 낳게 하였다. 즉 조선왕조에서는 고조선 당시에는 유일한 국가로서 전국을 통치했을 것이라는 생각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시간적 직렬 하에서 고조선의 의미를 깊게 가졌다. 더구나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의 독립심을 고취하기 위한 역사적 사상적 구심체 역할을 한 것이 소위 단군민족주의라는 것이다.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이 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을 취함으로써 전 국민에게 교육되는 대상이 되었다. 또한 북한에서는 단군릉을 발굴했고 단군의 뼈를 찾았다고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무장하는 현상까지 벌어졌다.
단군조선의 위치는 오랜 전부터 평양설이,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설, 강화도설이 있으며, 주대 초기의 기자가 조선후에 봉해졌을 때의 위치는 요동일대에 걸쳤던 국가로 이해되었고, 위만에 의해 집권자의 교체가 있었음에도 국호는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회과학적인 국가이론으로는 한국사에서 최초의 정치집단인 국가체가 성립된 것은 위만조선을 상한으로 보는 고고학적 견해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음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런 국가 최초로 형성될 때에 조선 한 나라만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많은 나라가 함께 세워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 예로 진국(辰國)을 들 수 있다. 진국은 마한의 한 국가로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기준이 와서 통치한 나라로 전해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남한에 존재하는 수많은 지석묘 군의 통치자 중 하나일 것이다. 단지 당시 중국과 교섭을 가진 북방의 조선만이 중국문헌에 기록으로 남게 된 것으로 이해함이 올바른 이해라고 생각한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이성계는 요동정벌에 출정을 하였다가 꾸데타를 일으켜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새 왕조를 개창하였다. 따라서 국호의 제정에서 ‘조선’과 이성계의 출신지인 화령이란 국호를 제시하여 명나라에 의해 조선이 취해진 것처럼 국호제정에 자주성을 잃은 국가였다. 조선이란 국호가 명나라에 의해 택해진 것은 기자조선과의 연관성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조선을 건국함에 기여한 정도전이 朝鮮徑國典 「국호고」에서 중국의 승인을 받은 것을 명분을 얻은 것이라는 해석은 당시 조선왕조의 명칭을 미화하여 설명하기 위해 저술된 것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조선왕조는 고려왕조에 비하여 외교적 자주성이 약한 것이 사실이었고,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제시하여 불교와 민간신앙을 억제하는 종교의 자유가 크게 제한된 사상적으로 자유가 극도로 통제되고 변화를 극히 꺼린 극단적인 보수화된 사회였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국문자를 제정하고 영토를 현재의 영토로 두만강까지 확장했다. 또한 사림들의 높은 도덕국가, 예치의 실천문화를 이룩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기록의 나라로 알려질 만큼 풍성한 기록문화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사상적으로 자유가 없었던 조선왕조는 서양의 문화 수용에 소극적이어서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망해버린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4.2 고려라는 국호와 그 역사성
고려라는 국호는 고구려의 장수왕 이후에 개칭된 국호였다. ‘고구려’는 높은 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병도는 ‘高’자는 신성하다는 수리의 한역이라고 했다. 그러나 환인에 있는 오녀산성을 수도로 했다면 높은 읍성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듯 하다.
고구려는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할 때에 국호를 ‘고려 高麗’로 개칭하였다. 이를 현재 국내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약칭으로 보고
있으나 이는 분명한 국호의 개칭이었다. 그 의미는 산이 높고 아름다운 나라는 ‘산고수려(山高水麗)’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단순히 자연만이 아니라 정치와 덕성이 높고 아름답다고 해석할 수 있고 신성스럽고 아름다운 나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도 있다. 이는 신라와 백제처럼 아름답고 상용한자로 국호가 개칭된 것과 일치한다. 즉 신라는 사라, 사로 시라(尸羅)라고 칭해지다가 지증왕 대에 ‘덕업일신 망라사방’으로 해석을 하였다. 사로 사라에서 종래의 음을 표현하되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좋은 뜻을 가지는 한자로 바꾼 것이 신라였다. 백제는 십제, 백제라고 하여 온조왕을
따라 강의 건너온 사람들을 뜻한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정치를 도운 사람이 열 신하라고 하여 십제에서 발전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마한의 백제(伯濟)에서 취했다는 설도 있다. 어떻튼 한자의 아름다운 뜻을 살리게 된 데에는 한자의 이용이 보편화되고 그 사용이 더욱 익숙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고구려의 고려라는 국호로 개칭된 사실은 국가에서 세운 금석문으로 충주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에 ‘高麗國’이라고 표현되어 있고, 또 민간 사찰에서 만든 연가7년명 금동불상의 광배에도 ‘高麗國’으로 쓰였다. 또한 당시의 436년(장수왕24) 이후의 중국사서의 본기 기록에는 고려국에서 사신을 파견했다고 기술하였다. 당시 매년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호개칭의 연대는 몇 년을 더 올라갈 수도 있다. 또한 중국 정사 중 외국열전으로 다룬 동이전에 ‘高麗傳’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고구려라는 국호와 고려라는 국호가 사용된 시기가 엄격히 구분되어 나타난다. 즉 장수왕대 이후의 기록에는 외국이나 국내의 기록에 모두 고려로 나오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82번의 고구려 기사 중에 69번을 고려라 칭했다. 이는 아마 구삼국사에서 ‘고려본기’라고 쓰여진 것에서 취하여진 결과가 아닌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의 국호를 멸망 시까지 고구려라는 국호를 계속 사용된 것으로 사료를 수정하여 기술하였기 때문에 이후의 국내의 역사서에서는 고구려가 고려라는 국호로 개칭한 것을 모르고 6-700여 년을 지내왔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고구려의 ‘高麗’를 고마로 훈독하고 있으며, 속일본기에 나오는 왕건의 ‘高麗’는(‘고라이)’로 훈독하여 구분한다. 발해에서 일본에 보낸 국서에도 고려라는 국호를 칭한 예도 보인다. 고려 인종대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왕실 세계를 고구려의 선계와 연결시키는 두찬을 한 것도 이런 중복되는 국호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생긴 착각이었다. 또한 원 세조가 고려의 원종이 강화를 요청하자 세조는 고려는 당나라 태종의 군사를 물리친 강국이었다고 하면서 대단히 좋아했다는 내용은 고구려의 고려를 당시의 고려왕조와 같은 실체의 국가로 인식한 것임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국호의 개칭에 대한 기사를 싣지 않고 있다. 만약 고구려 측의 기록에 국호의 개칭사실의 내용이 없었다면 그는 왜 당시 중국의 기록에 고려로 칭하였을가 하는 주 정도는 붙이는 것이 삼국사기의 일반적인 편술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은 이런 주를 붙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구려의 고려라는 칭호를 고구려로 고쳐쓰고, 또 한편 고려라는 국호를 의도적으로 삭제하려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901년 왕을 칭한 궁예의 첫 국호도 고려였는데 김부식은 이를 삭제했다.
고구려의 고려라는 국호의 역사성은 하늘님(天帝)의 아들인 해모수와 지신(河伯)의 딸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웅장한 주몽의 탄생신화를 가지고 있어 단군의 신화와 연계되며, 이는 거대한 광개토대왕의 비문에도 언급되었고, 유화의 사당은 고구려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종교적 기능을 가졌다. 또한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하늘을 해와 달로 표현하고 인간과 하늘과의 연결하는 삼족오(三足烏)의 그림 그리고 사신도의 웅장한 신비력, 약동하는 기상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한반도와 요동에 걸치는 대제국을 이룩하였던 나라였다.
고려라는 국호는 918년에 궁예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왕건은 국호를 태봉에서 고려로 환원하여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고 500년의 아주 훌륭한 역사를 발달시켜왔다. 왕건의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선언한 것은 북방의 영토를 확장하려는 의지와 연계된다. 즉 서경을 개척하고 고려 성종대에는 거란의 침입을 받았을 때 압록강 어구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우왕대에는 요동 땅을 차지하려는 요동정벌을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고려는 황제국을 칭하였으며 북방의 강성한 국가와 중원의 송나라와의 외교적 중재를 하는 문(文과) 무(武)가 다 같이 발전한 나라였다.
왕건 고려왕조의 역사성은 상공업이 자유롭게 발전하였고, 유교, 불교, 도교, 전통신앙 등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으며 여성이 활동이 자유로웠고, 국민축제로 국민이 즐기는 행복한 시대였으며 우리나라의 민속이 크게 존중된 나라였다. 또한 신분의 상승이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던 시대였다. 노비도 그리 많지 않았고 국가의 주권도 가장 강했던 왕조였다.
또한 고려 조에 벽란도에 온 사라센 상인을 통하여 국호가 서양에 Corea, Korea로 알려지게 되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4.3 대한이란 국호와 그 역사성
한국이란 국호는 마한, 변한, 진한의 경우 종족 명칭에 유래하였다. 중국문헌을 보면 우리나라의 종족을 한(韓). 예(濊), 맥(貊)으로 칭했다. 이 중 맥은 고구려 종족을 지칭했다. 광개토왕비문에는 ‘구민(舊民)’과 새로이 잡아온 ‘신민(新民)을 한(韓), 예(濊)라 칭했다. 그리고 한족(韓族)이 세운 나라를 마한, 진한, 변한이라 칭한 것은 국호라기 보다는 종족의 국가를 총칭하는 용어로 해석된다.
그런데 한자로는 ‘韓’을 쓰지만, 우리말 ‘한’이라는 글자에는 여러 개의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이란 말에는 크다, 넓다. 왕성하다. 중간. 가장, 올바름, 최고, 하나, 하늘, 추장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이란 우리 말에는 시작이면서 최고의 왕성함까지, 그리고 올바름이란 도덕성까지를 포괄하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은 한국이란 국호 외에 한글(正音)이란 우리글과도 같은 어원을 갖는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한류문화가 크게 전파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종래 삼한(三韓)은 삼국의 전신국가로 이해되어 왔다. 즉 삼한-삼국으로 발전하였다는 설이 있어 왔다. 최치원은 마한-고구려, 변한- 백제, 진한- 신라로 파악했고, 권근은 마한- 백제, 변한-고구려, 진한-신라라는 설을 제기하였다.
고려가 건국하자 삼한은 삼국의 전신의 국가로 또는 그 전체를 칭하는 용어로 전국을 칭할 때에 삼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고려 왕조에서는 삼한을 통일하였다고 하여 고려왕조에서 가장 중시되는 1급의 공신칭호가 삼한공신이라는 점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고려의 삼한통일론은 실제 후삼국을 재통일한 것이지만 당시에는 삼국을 통일했다고 파악했고, 지금도 북한에서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고, 고려의 통일을 민족의 통일국가 형성의 첫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17세기 한백겸에 의하여 삼한 삼국의 관계를 부정하고 삼한은 한강의 남쪽에 북쪽에는 조선, 예맥 등의 국가가 동시에 있었다고 파악하고 마한-백제, 변한-가야, 진한-신라라는 비정과 강역의 확정이 된 후 이는 조선후기에 새로운 역사학으로 등장하여 크게 풍미한 역사리학의 정설로 정착되었다. 신경준의 여지고, 강계고,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등이 이런 역사지리학의 산물이고 안정복은 동사강목에 당시 제기된 역사지리학의 성과가 수렴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의 지리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이해가 증진되었다. 이는 역사지리학의 출현, 사림들의 지방읍지의 출간, 상세한 전국의 지도 작성을 통해 자의식이 확장되었다. 그런데 이익, 안정복에 의하여 제기된 삼한정통론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이 마한 땅으로 와서 왕이 되어 조선의 정통은 기준의 마한에 있다는 혈연적 정통론이 주장되었다. 이는 삼한이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라는 역사성을 가진다. 삼한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계승한다는 의식으로 왕건 고려 초에 심화되었다.
지식인들의 이런 삼한에 대한 깊은 인식을 바탕으로 1897년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칭하여 1910년 일본에 의하여 식민지로 강점되면서 식민지 ‘조선’으로 다시 칭해졌다. 대한제국의 국호에서 대한의 ‘대’자는 단순히 크다는 수식어로서의 의미만이 아니라 삼한의 전제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으나 대한민국을 한국으로 약칭하듯이 핵심의 의미는 ‘한’에 있다. 대한제국은 1919년 31운동 후 상해에서 세워진 임시정부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제정 칭하였고, 1948년 유엔의 감시 하에 자유선거가 실시되어 남쪽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어 65년간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였고, 세계 역사상 자본주의 경제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발전시킨 국가로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고 현재 세계역사를 창조하는 선진국의 대열에 이미 진입한 빛나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5. 국명사용의 다른 예
국호로 계승관계는 없지만 잠간 동안 두 번 쓰인 것에 발해의 ‘진(震)’과 궁예의 ‘마진(麻震)’이 있다. 마진의 마자는 크다는 뜻이다. 진이라는 동방을 뜻하는 말로 중국을 중심으로 동이란 뜻을 취한 것이다. 학자 중에는 삼한의 진(辰)국을 같은 뜻으로 해석하고도 있으나 이는 동의할 수 없다.
국호는 아니지만 국명으로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용어로는 해동(海東), 동국(東國), 대동(大東), 청구(靑丘)라는 용어가 국내에서 사용되었다. 해동은 고려조부터 사용되었으니 의천(1055-1101)의 대각국사문집에 해동삼국사(구삼국사)라 칭하였고 신숙주(1417-1475)는 일본을 해동이라고 칭하였음을 해동제국기에서 찾을 수 있으며 조선 중기의 심광세(1577-1624)의 해동악부, 이후 많은 사람이 해동악부를 지었으며, 청나라 유의해가 1832년에 편집한 해동금석원, 조선후기에 한치윤(1765-1814)의 해동역사에서 확인된다.
동국이라는 칭호는 이규보(1168-1241)의 문집 동국이상국집, 15세기에 편찬된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국정운, 권근(1352-1475)의 동국사략, 박상(1474-1530), 유희령(1480-1550)의 동국사략, 유형원(1622-1673)의 동국여지지, 한백겸(1552-1615)의 동국지리지, 영조대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동문선과 안정복의 동사강목 등에서 확인된다.
대동이라는 명칭은 권문해(1534-1591)의 대동운부군옥,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정교(1856-1925)의 대동역사, 김광(金洸)의 대동사강 등에서 확인된다. 해동이나 동국, 대동이란 국명의 칭호는 중국을 중심으로 칭해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청구라는 명칭은 김천택의 청구영언, 김정호의 청구도라는 명칭에서 확인된다.
6. 우리국호 사용의 특징
우리나라의 고대국가는 초기에는 작은 국가형태에서 발전하면서 국호의 개칭이 있어 왔다. 서양이나 중국과 달리 왕조국가가 생긴 지명에서 국호를 취하지 않고, 한자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국호의 원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정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 또한 왕조의 교체가 중국보다는 덜 자주 바뀌었고, 여러 번 국호가 사용되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조선, 고려, 한이라는 명칭이다. 이들 용어는 3차례 이상 반복 사용되었으나 좌우익의 이념 갈등으로 그 국호의 사용에 민족의 분열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남북한이 상호 다른 국호를 가지고 있음은 1948년 분단국가의 양립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앞서 나타났다. 즉 일제강점기에 국명의 사용은 좌우익의 대립과 맞물려 사용되었으니 좌익에서는 ‘조선’이란 국명을 선호했고, 우익은 '대한'이라는 국명을 선호했다. 그 단적인 예를 이미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답신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우익의 한민당을 비롯한 임시정부수립대책위원회에서는 ‘대한민국’, 좌익의 남로당을 비롯한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는 ‘조선인민공화국’, 중간파인 좌우합작위원회에서는 ‘고려공화국’을 제시했다.
우리나라의 국호의 특징을 같은 문화권이었던 동양3국과 비교하여 말한다면 중국의 국호는 하,은.주처럼 시조의 출생지나 봉해진 지명을 따서 국호로 삼다가 금, 원나라 이후는 글자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의 글자 한글자를 취해서 만들었다. 金, 元, 明, 淸의 국호가 그것이다. 그리고 특히 중국왕조의 국호는 거의 대부분 한 글자로 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중국사에서도 국호를 여러 번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 바, 대표적인 것이 당과 송나라 국호이다. 중국의 경우 별칭으로 한과 당이라는 국호가 외국에서 칭해졌고, 차이나라는 용어는 진이라는 명칭이 산스크리트어로 지나(支那)로 표기되어 차이나가 서방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 고대국가가 8세기에 성립되어 일본이란 국호를 칭한 후 왕조의 교체가 없었기 때문에 국호의 변동이 한 번도 없이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의 별칭은 왜라고 칭해지기도 했다. 우리나라 국호의 특징은 두 글자나 세 글자의 국호가 특징이고, 이는 일본도 같다. 우리나라의 별칭으로는 해동, 동국, 대동, 청구라는 명칭이 국내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국호가 아니라 국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외국에 잘 알려진 국호로는 고려를 들 수 있는데 이는 고구려 중기 이후의 국호로서 가장 강성했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7. 맺음말
이상에서 통일 후의 국호 제정을 위한 이해를 위해서 전통시대의 우리 국호의 유래와 의미, 그 역사성을 살펴보았다. 국호는 국가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역사성을 담고 있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국호에 대한 현대적 의미와 통일 후의 국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함으로서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통일 후의 국호를 개칭할 것인가는 통일과정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어느 일방이 흡수 통합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고, 정치적 교섭에 의하여 평화통일을 이룩할 수도 있다.
통일 후의 국호를 개칭하여야한다는 의견은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이 비록 유엔의 승인 하에 이루어졌지만 분단국가가 되었다는 국민의 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다. 통일 후의 국호개칭은 이런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측에서 통일 후의 국호를 논의하여 미리 공청회를 거쳐 이를 북한에 제의하는 방법도 있다. 이는 북한의 정부와 정권을 인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통일 후의 국호를 미리 선언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북한에서는 ‘고려연방제’로 하자는 제안을 한 바 있다. 연방제를 할 경우 이를 수용해도 좋을 것이나 우익단체에서 들고 나올 염려가 있다. 이는 북한 역사학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고 왕건 고려에 의해 통일국가가 달성되었다는 역사서술과도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별개의 문제에 속한다.
고려는 고구려 장수왕대에 개칭국호로서 강성했던 우리나라의 국명으로 중국에 알려졌던 이름이고 진취적이고 값진 고구려의 역사성과 고려왕조의 훌륭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측에서는 코리아로 하자는 제안을 이미 제안한 바 있음을 서두에 언급하였다. 이도 좋을 것이며 북한도 크게 거부하지 않을 명칭이다. 이는 쉽게 남북이 합의를 거두기는 쉬울지 모르나 국호에 담긴 역사성을 버리는 것이며 이는 역사정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세계의 선진국으로 발전시킨 대한민국의 역사성을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감수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한 가지 대안으로 대한민국과 조선이라는 이름 중 한 글자를 따서 한조, 또는 조한 이름 뒤에 연방국가나 민주공화국이라 붙여도 좋을 것이다. 두 개의 이름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가 쉽게 달성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두 개 중 통일 후 국민투표에 의해 결정하자는 단서를 단 협약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좀 더 부연한다면 조한이라는 국호가 한조보다 부르기도 좋고 또 단군조선의 조와 삼한의 한이라는 선후를 따져 취한다면 이를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한조라는 국호도 그 의미가 한이라는 많은 의미를 함축한 용어임을 감안한다면 좋은 이름이고 처음에는 어색할지 모르나 자꾸 부르면 친숙감이 생길 수 있는 국호라고 생각하며 그 값진 역사성은 위에서 설명한바와 같다.
통일조국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그 국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바이다. 이런 통일 후의 국호를 남북한이 함께 논의하는 것은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어가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통일 후의 국호를 남북이 협의하여 이를 미리 정한다면 평화통일을 이룩함에 기여할 것으로 생각한다.
첫댓글 낙암선생님께서 우리나라의 역대 국호와 그 의미와 역사성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여 논문으로 발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나라의 역대 국호는 여러가지모습이어서 그것이 어떠한 연유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낙암선생님의 논문을 읽으면 많은 문제가 풀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 시간을 내어 읽고 우리나라의 국호에 대하여 올바른 지식을 얻고자 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2020.11.28 성남시탄천로에서 지교헌 (청계산, 동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