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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견디는 사랑
고린도전서 13:1-8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오늘은 사랑의 열다섯 가지 속성 중에 마지막 속성을 다룹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 “영원한 사랑”을 마지막으로 “영원한 사랑의 속성”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마칩니다.
아무튼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여기서 “견딘다”는 우리 나라의 단어는 고린도전서 13장 4절의 “사랑은 오래 참고”와 7절의 “모든 것을 참으며”와 혼돈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로 보면 그 의미는 확실하게 구별됩니다.
4절의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할 때 그 원어는 “마크로수메오”입니다. 이는 사람을 향하여 오래 참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비방이나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리고 그에게 보복할 수 능력이 있어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어리석고 완악한 그의 백성들에게 오래 참으심을 말합니다.
한편, 7절의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할 때는 (스테고)입니다. 이 단어의 명사형은 (스테게)라고 하여 ‘지붕’이라는 뜻입니다. 지붕은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덮어 줍니다. 즉, 스테고는 남의 약점을 덮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남의 실수를 덮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스테고'는 `감추어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남의 실수나 죄나 과거의 잘못을 들추어 내지 않고 덮어두고 감추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형제의 잘못과 약점을 덮어주고 감추어주는 착한 행동이 열두 번째의 사랑의 특성입니다. 이러한 포괄적 의미에서 (스테고)는 관용하며, 용납하며, 포용하며,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관용은 다른 사람의 약점들과 실수들을 덮어주는 것이고, 포용 서로의 모든 차이점을 극복하는 능력이며, 용납은 사람들은 약점과 실수를 폭로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주는 것이며 이해는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속성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인데 원어로 (판타 휴포메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판타는 “모든 것”이라는 뜻이고 견딘다는 것은 (휴포메네이)입니다.
(휴포메네이)를 원어로 찾아보니 “끝까지 견디다. 그런데 기억을 하며 견디다. 뭔가를 잊지 않는 가운데 끝까지 버티다, 견디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지닌 가장 확실한 개념은 경주입니다. 마라톤의 개념입니다. 즉, “끝까지 달리다”라는 뜻입니다. 마라톤처럼 목표를 기억하며 끝까지 달리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한국 프로그램 중에 아이들의 보행기 시합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한살된 아이들이 만일 3분 내에 목표점에 들어오면 상을 받을 수 있는 게임입니다. 그런데 목표점까지 가는 도중에 돌 된 아이들을 유혹하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가령, 맛있는 사탕, 장난감, 칼라 종이, 인형, 소리 나는 도구들 등이 있었습니다. 반면, 아이들 부모님들은 그 아이가 사용하던 장난감 등을 사용하거나 이름을 불러 소리를 지르면서 계속 목적지까지 완주하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아이들이 출발점에서 출발한 후에 목표를 향하여 가다가 여러 가지 유혹들 때문에 목표를 망각하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딴 짓을 하며 코스 중간에 계속 서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시간이 땡 하면서 탈락하게 되고 실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완주한 아이들은 큰 박수와 함께 상을 받게 되고 그 아이의 가족들은 어깨가 으쓱해지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러한 개념입니다. 즉, 사랑은 뚜렷한 목적을 갖고 그 목적 때문에 견디며 모든 유혹을 이기고 삼천포로 빠지지 않고 끝까지 목표를 향하여 완주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9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는, 특히 착한 일을 하려고 할 때는 낙심할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많은 실망스러운 일들과 역경이 닥쳐와도 끝까지 모든 것을 견디면, 때가 되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주인공들은 끝까지 완주하는 자들입니다. 끝까지 견뎌야 주의 뜻을 이룰 수 있으며, 그 영광을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우리의 믿음의 경주는 어떤 때는 낙심되고 피곤합니다. 믿음의 길을 휴가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믿음의 경주에는 분명히 낙심될 일, 실망될 일, 피곤한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끝도 없이 받게 되는데, 이때 만일 포기하면 열매를 거둘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끝까지 휴포메노”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렇게 할 때 사랑의 열매가 있습니다. 사랑의 영광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믿음의 여정에 관하여 더욱 확실하게 마라톤으로 비유합니다.
[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히 12:1-3)
지금 히브리서의 이 말씀도 정확하게 마라톤 경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름같이 허다한 관중들이 있습니다.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히브리서 12장의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에 대하여 읽을 때마다 제 인생 중에 꾸었던 생생한 꿈이 생각납니다.
아마 1995년 또는 1996년인 것 같은데, 제가 신학의 길에 처음 들어왔을 때 공부가 너무 힘들어서 정말 이 길을 가야 하나 하는 고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는데, 꿈 속에서 허다하게 많은 응원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저는 달리기 선수로 있고 주변에서 응원하는 분들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얼마나 응원을 열심히 해 주시던지…. 그래서 그 꿈 속에서도 ‘나는 포기해서는 안 된다’하며 마라톤을 뛰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저는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를 위로하기 위하여 보여주셨던 응원의 꿈이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 때문에 지치지 않고 달려갔던 기억이 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름같이 허다한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우리를 지켜 봅니다. 여러분들을 아는 믿음의 성도들이 우리를 지켜봅니다. 그러면서 응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3절에서도, 분명히 이 믿음의 경주는 종종 피곤하며 낙망을 고민하게 되는 경주인 것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3절에서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달려야 하는데 그러기 위하여 너희는 소극적인 면에서는 “무거운 것”(즉, 과거의 죄짐이나 죄책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얽매이기 쉬운 것”(각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특별한 죄악들, 즉, 그의 신앙을 얽매는 각자의 죄성입니다. 도둑질, 거짓말, 음란, 미움, 혈기, 간교함 등입니다)을 버려야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면에서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3절을 보면,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의 본이요, 우리의 믿음의 경주의 목표인 것입니다. 그 많은 고난과 환란과 핍박을 받고도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그 경주를 완주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경주를 포기하고 싶은 피곤함과 낙심이 찾아올 때에 참고 달리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경주에는 언제나 방해물이 있습니다. 많은 방해물이 있습니다. 그 방해물로는 무엇보다 먼저 이단의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물들은 세상 철학들이 있습니다. 끝도 없는 세상의 유혹들이 있습니다.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자극하는 것이 어디에나 있습니다. 또한 궁핍함이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려는데 먹고 사는 문제가 계속 장애물이 됩니다. 또한 억울한 일들 때문에 괴롭습니다. 불의를 당하면서 불공평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면 이러한 불의한 일이 왜 내게 발생할 수 있는가 라며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중도에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건강을 잃고 병들 때, 직업을 잃을 때 하나님께 섭섭함을 느끼면서 이제는 홀로 힘으로 달리기 위해 신앙을 접는 것입니다. 즉,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사랑의 경주, 믿음의 경주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바라보는 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 분을 목표로 하여 계속 달립니다. 계속 견딥니다. 모든 것을 견딥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을 견디는” 아가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길이 얼마나 힘든 길입니까? 믿음의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가장 큰 죄성은 믿음을 원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지 못하면 어느새 한 살 된 아이들처럼 세상에 정신이 팔려 끝까지 모든 것을 견디는 경주를 달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믿음의 과정 속에는 어려운 일들과 낙심되는 일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 위대한 엘리야 선지자도 중간에 지쳐서 포기할 정도였습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 총 850명과 대결을 합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참신이 누구인가? 바알인가 여호와 하나님이신가? 결국 엘리야가 승리합니다. 그리고 바알 선지자들을 전부 죽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동안 3년 반 동안 멈추었던 비를 기도를 통하여 내리게 합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선지자입니까? 정말 무서운 능력을 지닌 하나님의 참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열왕기상 19장을 보면, 이세벨 여왕이 열이 나서 당장 엘리야를 잡아 죽이겠다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당당하던 엘리야가 “날 살려라”라고 도망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왕상 19:1-4)
이와 같이 아무리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도 믿음의 경주 가운데 넘어질 때가 있고 지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위로를 합니다.
엘리야가 죽고 싶은 마음으로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자고 있습니다.
[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왕상 19:5-7)
곧, 우리가 인생 길에서 지치고 낙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찾아오셔서 위로하시고 다시 세우시고 나아갈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를 보면 바울은 소아시아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디도를 먼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후에 드로아로 갔다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한 뒤에 또다시 바다를 건너 마게도냐로 건너갑니다. 이때 마게도냐로 건너간 바울의 심정은 가장 힘든 상태였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5절은 그때의 상태를 바울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고후 7:5)
따라서 바울은 크게 낙심하였습니다. 특히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사도성마저 의심하면서 거짓 복음에 넘어가려는 그러한 위기에 있었습니다. 외적으로는 유대인들과 로마 당국이 바울 사도를 추적하며 핍박하고 복음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놀라운 사건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를 보내심으로 우리를 위로하셨도다”(고후 7:6).
이처럼 엘리야도 마찬가지이고 바울도 마찬가지이고 누구든지 주께서 정하신 믿음의 길을 가다가 낙심할 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위로의 손길을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디도’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일 수도 있고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엘리야의 경우는 디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가 직접 와서 먹을 것을 주시며 힘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힘을 얻은 바울은 디도를 만나서 여러 가지 기쁜 소식을 되면서 즐거움과 확신과 감사가 번져나가는 것을 증거합니다. 그가 가져온 기쁜 소식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사모하며 이전의 잘못 및 그릇된 길에 선 것에 대해 애통해 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또한 열심으로 바울을 따르려는 마음을 다시 갖고 디도에게 융숭한 대접을 하였던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달리며 어려움을 당하고 힘들어 할 때 하나님께서는 천사와 같은 어떤 ‘디도’를 보내시는데 그는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시는 생수와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보고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여기서 여러 가지 시험 가운데 견디는 것은 슬픔과 고통 가운데 견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러한 어려운 상황 및 불편한 만남을 허락하심은 주의 크신 뜻이 있는 줄 믿고 적극적으로 모든 것을 견디어 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성품이 온전하여지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날마다 닮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딤을 “승리의 견딤”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하는 사랑의 열다섯 번째 속성으로 사랑은 “끝까지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견디는 것”입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견딤은 주의 약속을 확신한 상태에서 꼭 붙들고 있기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며 늘 성경을 가까이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나온 내용에 그대로 더욱 순종합니다. 그 성도는 주의 약속을 기억하고 기대하고 기다리며 기도합니다. 이는 적극적인 견딤입니다.
지금 어려운 과정을 지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믿고 적극적으로 견디기 바랍니다. 이러한 자세로 우리의 어려운 상황을 대처해 나갈 때 벌써 승리의 깃발이 휘날리기 시작합니다. 그 승리의 깃발은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심령 가운데 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환난 중에 찬송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거룩한 기쁨이 넘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셨으므로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도 그 승리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마지막으로 이제 구체적인 경주에서의 승리의 비결을 세가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성도의 견인은 칼뱅주의의 제 5번째 요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와 같은 개념입니다.
1618년과 1619년 화란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은 취소될 수 있다는 알미니안 주의자들에 대하여 모든 교회가 모여 총회를 갖게 됩니다. 이 총회를 도르트 총회라고 하는데 이 때 이 총회의 결론은 알미이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교회사에 획을 긋는 칼뱅주의를 정립하게 됩니다. 즉, 칼뱅주의는 캘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알미니우스 이단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공교회가 진리를 수호하고 다시 확정했던 도르트 회담의 결론이 바로 칼뱅주의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이 회의의 결론은 캘뱅주의의 대명사인 “TULIP”으로 요약됩니다.
Total Depravity (전적 타락) : 모든 사람은 그 누구나 죄인으로 태어나며 죄 가운데 있다는 뜻입니다.
Unconditional Election (Love) (무조건적 선택 - 사랑) :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을 아무런 조건없이 택하신다는 내용입니다.
Limited Atonement (제한적 구속)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택함을 받은 주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Irresistible Grace (불가항력적 은혜) :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거절할 수 없는 은혜로서 주의 예정과 선택과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으로서 그 은혜는 인간이 거절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엄청나게 강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Perseverance of Saints (성도의 견인) :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끝까지 견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은혜로 택함을 받아 거듭난 자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을 수 없으며 그들은 마침내 주의 은혜 때문에 모든 것을 견디고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지막의 성도의 견인 부분은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도는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여 사랑을 완성시킨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놓아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놓지 않으심으로 “성도는 끝까지 견딘다. 끝까지 달린다. 끝까지 완주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성도들의 완전한 경주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우리를 사랑하기에 결코 포기될 수 없는 믿음의 경주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견인이며 마지막 사랑의 속성인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인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그러므로 칼뱅의 가르침에 의하면, 믿음을 중간에 포기하는 자는 사실 처음부터 하나님에 의해 택함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더욱 힘있게 믿음의 경주를 달리게 하는 줄 믿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적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둘째는, 면류관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부활은 대속의 십자가와 함께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부활의 소망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소망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부활 소망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베푸실 상급 또는 면류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는 부활 소망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을 향한 소망이 있다는 말이요, 영원한 영광이 결정되는 면류관과 상급이 있음을 믿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달리는 것을 말합니다.
마라톤 경주는 완주하면 완주 기념 메달을 줍니다. 그러나 승리하는 자에게는 면류관을 줍니다.
[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0-14)
여러분은 부활의 소망을 갖고 있습니까? 또한 면류관 및 상을 베푸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마지막으로 믿음의 경주를 힘있게 달리려면,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의 씨 부리는 비유에 관한 설명이 나옵니다.
[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 13:18-23)
그 속에 뿌리가 없어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하는 자, 환난이나 핍박, 손해, 억울함 때문에 넘어지는 자는 끝까지 달리지 못합니다. 따라서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이끌리며 그의 관심이 오직 세상이면 그에게는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절대로 힘찬 경주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깨닫는 자는 주의 복음에 그의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린 자입니다. 따라서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땅, 곧, 오직 주님을 바라며, 하늘의 면류관과 상급을 바라며,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깊게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깊게 내릴 때, 우리는 내 힘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우리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완주할 뿐만 아니라 면류관의 영광을 얻는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사랑의 15가지 속성을 마무리합니다. 사랑의 끝은 “끝까지 달리는 것입니다.” 죽는 그날까지, 예수님 만나는 그 날까지 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믿음의 경주, 사랑의 경주를 멈추거나 늦추지 말고 계속 전진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달리려면 우리에게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은 오직 십자가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그 힘은 주께서 보내시는 성령과 함께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 힘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은혜요, 또한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완주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생수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호흡이 마치는 그 날까지 힘찬 믿음의 경주를 달리심으로 아가페의 사랑을 온전하게 이루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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