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가 원균과 유극량을 전라 좌수사 임무를 맡기겠다고 발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에 임명하겠다고 했을 때에도 조정 고위 관료들의 반대는 대단했다. (1591년) 2월 24일(주) 선조가,
“진도 군수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에 제수하라.”
하고 명을 내리자, 3월 11일 사간원이 강력히 항의했다.
“정읍 현감 이순신은 진도 군수로 발령을 받은 후 아직 군수에도 부임하지 않았는데以縣監郡守時未赴任 좌수사에 임명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모자라는 상황이라 해도 이렇게 지나친 승차는 있을 수 없습니다而超授閫帥雖因乏人”
선조가 말했다.
“이순신을 지나치게 승차시켰다는 것은 나도 안다李舜臣事然矣予亦知之.”
신하들이 놀란 얼굴로 임금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일반적인 인사 규칙에 묶일 형편이 아니다. 인재가 모자라니 파격적인 승진도 해야 한다乏人不得不爾. 그 사람이면 충분히 좌수사의 임무를 감당할 것이다此人足以可堪矣. 벼슬의 높고 낮음을 따질 일이 아니다不必問官爵高下.”
그런데 이때 선조는 이순신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서익 및 성박 사건 관련자 정도로 인식했을 뿐이다. 심지어 선조는 한산 대첩 등 임진왜란 초기의 전세를 뒤집는 큰 전공을 연일 세운 1592년을 지나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직 중이던 1597년 3월 14일에도 류성룡에게,
“나는 이순신의 사람됨을 잘 모른다舜臣未知其如何人. 그가 경성 사람인가? 글을 잘하는 사람인가?”
등 기초적인 것들을 물었다. 유성룡이,
“신의 집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건천동)에 있었기 때문에舜臣同里人也臣 어린 시절부터 그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自少知之以爲能察職”
라고 대답했다.
그에 견줘 선조는 류성룡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다 알았고, 전적으로 인정했다. 이미 10여 년 전인 1585년 6월 25일 선조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류성룡은 군자다柳成龍亦一君子也. 나는 그를 오늘날의 큰 현인이라 믿는다予以爲雖謂之當今大賢可矣’라고 공언했다.
이어 선조는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으로 감동할 때가 많다觀其人與之語不覺心服之時多矣.’라고 류성룡을 격찬했다. 그만큼 선조는 류성룡을 존경하고 믿었다. 그 결과 선조는 류성룡이 천거한 이순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막연한 신뢰를 가졌다.
류성룡이 일개 현감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추천하고, 선조가 고위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그 자리에 앉힌 것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천운이었다.
그것도 전쟁 발발(1592년 5월 23일) 1년 2개월 전에(1591년 2월 13일) 수사가 됨으로써 이순신은 수군에 대해, 수군의 주력 전함인 판옥선에 대해, 천자총통 등 화포에 대해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새로 거북선을 만들 시간도 있었고, 바다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전술을 연구하고 장졸들을 훈련할 여유도 얻었다. 또 전라도 일대 바다의 특성과 해안 지형도 숙지할 수 있었다.
이익(1681∼1763)은 〈서 징비록 후〉에 ‘사람들은 임진전란 때 류성룡 선생이 온 힘을 다해 애쓴 공로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류 선생의 경우 그것은 사소한 공로이고, 그보다 훨씬 큰 공은 충무공 이순신을 등용시켜 나라의 위기를 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오직 충무공 한 사람 덕분이다. 처음 충무공은 일개 부장에 지나지 않았다. 류 선생이 아니었으면 그저 군졸 속에서 목숨을 버렸을 것이다’라고 썼다.
우여곡절을 거쳐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로 임명된 지 한 해 지난 1592년 2월 13일(음력 정월 초하루), 오늘.
새벽, 밖이 소란하다.
문득 잠에서 깬 이순신이 ‘누가 왔느냐?’라고 묻는다. 누가 왔는지 진작 헤아리고 있으면서도 이순신은 짐짓 그렇게 확인한다.
“접니다, 형님! 봉이와 회도 함께 왔습니다.”
동생 우신의 목소리다. 봉은 작고한 둘째형님 요신의 아들이고, 회는 이순신의 장남이다. 이들은 충청도 아산에서 이곳 여수까지 약 740리(295km) 먼 길을 이레 밤낮 걸어서 왔다.
이순신이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큰소리로 아우의 이름을 부르며 방문 밖으로 뛰어나간다. 갑자기 해가 솟아오른 듯, 지치고 굶주린 얼굴들이건만 모두들 환하게 밝다.
(계속)
(주) 《선조수정실록》 1591년 2월 24일(음력 2월 1일) : 以李舜臣爲全羅左道水使時舜臣聲名始著論薦相繼自井邑移拜珍島郡守未赴任除加里浦僉使未幾擢拜水使(이순신을 전라좌도 수사로 삼았다. 이때 순신의 명성이 드러나기 시작하여 칭찬과 천거가 잇따라서 정읍에서 진도 군수로 이배移拜되어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 첨사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수사로 발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