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63편 1–8절
[서론]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두 사람
길가에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두 남자가 그 옆에서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립니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입니다. 이 사람들은 고도가 누구인지, 왜 만나야 하는지, 오늘이 정말 약속한 날인지도 정확히 모릅니다. 그래도 기다립니다. 해가 지면 소년 하나가 와서 "오늘은 못 오시지만 내일은 꼭 오실 겁니다" 하고 전합니다. 다음 날도 똑같습니다. 2막이 끝나도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철학적 뿌리가 있습니다. 베케트는 쇼펜하우어를 깊이 읽은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끝없는 욕망의 존재로 보았습니다. 욕망은 채워지지 않아 고통이 되고, 채워지면 곧 권태가 되어, 삶이 그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고 했습니다. 갈망은 있는데 그 갈망이 닿을 곳은 끝내 오지 않는 것, 이것이 베케트가 그린 인간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람도 광야에 서 있습니다. 표제는 "다윗의 시, 그가 유다 광야에 있을 때"입니다. 왕궁에서 쫓겨나 물도 길도 없는 땅을 헤매던 때입니다. 그런데 그는 고도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기다림과 찾음의 차이를 시편 63편이 가르쳐 줍니다. 오늘 이 시편이 우리 교회에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기다리고만 있습니까, 찾고 있습니까?
첫째, 새벽에 찾는 갈증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히브리어 샤하르(שָׁחַר)는 동틀 녘에 찾다입니다. 1절의 "간절히 찾다"는 아샤하레카(אֲשַׁחֲרֶךָּ)이며, 어근 샤하르는 '새벽'이라는 명사와 같습니다. 동이 트기 전부터 일어나 찾는 것, 가장 먼저 찾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히브리어 차메아(צָמְאָה)와 카마(כָּמַהּ)는 영혼과 몸의 갈증을 말합니다. "갈망하며"는 영혼이 목마르다는 뜻이고, "앙모하나이다"의 카마는 구약 전체에서 오직 이곳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몸이 말라붙을 정도로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영혼과 몸 전체가 하나님을 향해 목말랐습니다.
여기서 베케트의 두 사람과 갈라집니다. 그들도 목마릅니다. 그러나 길가 나무 곁에 앉아 있을 뿐, 한 발짝도 나서서 찾지 않습니다. 쇼펜하우어가 옳았다면 욕망은 채워질 수 없는 고통일 뿐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갈증은 대상이 있는 갈증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목마름이 향할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물이 없어서 갈증이 생긴 것이 아니라, 물이 어디 계신지 알기에 갈증이 갈망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벽 아직 날이 밝기 전에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막 1:35). 그리고 초막절 마지막 날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광야의 갈증에 대한 신약의 응답은 한 분의 얼굴입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요 19:28) 하신 분은, 우리를 찾으시느라 먼저 목마르셨던 분입니다.
주일 오전만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은 샤하르의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을 일정이 끝난 뒤에 찾는 공동체가 되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새벽이 꼭 4시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먼저 드리는 것, 그것이 샤하르입니다. 갈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갈증입니다.
둘째, 생명보다 나은 헤세드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3절의 인자(헤세드, חֶסֶד)는 언약에 근거한 신실한 사랑, 끝까지 떠나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토브 메하임(טוֹב מֵחַיִּים) "생명보다 낫다"고 합니다. 히브리어 '하임'(생명)은 복수형입니다.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삶의 모든 좋은 것을 다 합친 것보다 헤세드가 낫다는 고백입니다. 왕궁도, 안전도, 명예도 다 잃은 광야에서 나온 고백이기에 더 무겁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그는 과거에 하나님을 본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기억이 광야에서 그를 붙듭니다. 5절에서는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는 것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광야에서 이미 잔치를 누리는 사람의 언어입니다.
고도는 끝내 오지 않습니다. 소년이 전하는 말은 언제나 "내일"입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욕망의 시계추처럼, 약속은 영원히 미래에만 있습니다. 그러나 헤세드는 내일의 약속이 아닙니다. 다윗은 이미 본 사랑으로 오늘을 삽니다.
신약은 이 헤세드가 사람이 되어 오셨다고 선언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구약의 '헤세드와 에메트'가 신약의 '은혜와 진리'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오신 분을 아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분을 아는 지식이 너무 고상해서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빌 3:8). 로마서 8장은 어떤 것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롬 8:38–39). 이것이 "생명보다 나은" 사랑의 신약적 얼굴입니다.
오늘 우리를 광야로 내모는 것은 잃어버린 것들입니다. 건강, 관계, 일터, 자녀의 문제 같은 것입니다. 그때 교회가 "우리 모두 조금만 더 버티자"고 위로만 한다면 베케트의 세계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교회는 이미 받은 헤세드를 증거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를 넘어 "내가 이 사랑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의 간증이 광야를 건너는 양식이 됩니다.
셋째, 달라붙는 영혼과 붙드시는 오른손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8절의 "가까이 따르니"는 다박(דָּבְקָה)으로, 달라붙는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2:24에서 남편이 아내와 "연합하여"(다바크) 한 몸을 이룬다고 할 때의 그 단어이고, 신명기 10:20에서도 "그에게 친근히(다바크) 하라"고 쓰였습니다. 언약적 결합의 언어입니다.
그 바로 뒤에 놀라운 반전이 옵니다.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니거니와."의 '붙들다'는 타마크(תָּמַךְ) 로, 쓰러지지 않게 받쳐 주다는 뜻입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붙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다바크는 하나님의 타마크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6절은 그 다바크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고, 밤을 새우며 주를 묵상한다고 합니다. 7절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입니다. 광야 한가운데, 밤이 가장 깊을 때 노래가 나옵니다.
연극의 끝에서 한 사람이 "갑시다" 하고 말하면 다른 사람이 "그래요, 갑시다"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지문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말은 있지만 움직임이 없고, 갈망은 있지만 달라붙을 대상이 없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시계추가 마침내 멈춘 듯한 정지입니다.
다윗은 달랐습니다. 그는 달라붙었고, 붙들렸습니다. 그의 갈망은 움직임이 되었고, 움직임은 노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 거함, 곧 '메노'는 다바크의 신약판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타마크하시는 오른손은 십자가에서 못 박힌 그 손입니다. 히브리서 13:5의 약속,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광야 한복판의 성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 달라붙는 몸입니다. 에베소서 5장은 창세기 2:24의 연합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 풀어 줍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바쁘고 피곤할 때일수록 해야 할 일은 새 프로그램을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붙는 것입니다. 말씀 곁에, 예배 곁에, 서로의 곁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약하다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붙드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나무는 같지만 기다림은 다르다
베케트의 무대에는 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2막에는 그 나무에 잎이 몇 장 돋아납니다. 작가는 시간이 흘렀다는 표시로 두었겠지만, 그 몇 장의 잎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습니다. 아무 기대 없는 무대에서도 생명은 돋아납니다. 우리에게도 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나무는 마른 길가의 나무가 아니라, 열매 맺는 생명나무가 된 십자가입니다. 고도는 오지 않았지만 그리스도는 오셨습니다. 그분은 오셨고, 우리를 찾으셨고, 지금도 붙들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광야는 모두에게 옵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두 종류의 사람이 갈립니다. 길가에 앉아 오지 않을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새벽에 일어나 이미 오신 분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새벽에 찾으(샤하르, שָׁחַר)십시오.
들째, 이미 받은 사랑(헤세드, חֶסֶד)을 기억하십시오.
셋째, 다바크( דָּבְקָה)와 타마크(תָּמַךְ)로 달라붙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붙들고 계신 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손 안에서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고 노래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