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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열 투쟁.
현장이 지금까지 보존된 항일의거.
‘부민관 의거’에 붙는 수식들입니다.
강윤국·조문기·류만수. (사진왼쪽부터)
불과 20세 정도의 청년들이었습니다.
부민관 의거는 광복을 불과 이십여 일 앞둔 1945년 7월 24일, 이 청년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친일파와 일본 고위관료들을 향해 폭탄을 터뜨린 사건입니다.
부민관은 1935년 경성부(京城府)가 세운 부립(府立) 극장이었습니다. (1950년대 사진)
다목적 회관으로 냉난방 시설과 조명·음향 시설을 갖춘, 당시로서는 첨단의 건물이었습니다.
일제강점 말기, 일제를 찬양하고 전쟁참여를 독려하는 선동예술과 정치집회가
이곳에서 열렸습니다.모윤숙․이광수 등의 친일파들이 전쟁참전 독려 연설을 했습니다.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입니다.
‘대한애국청년당’이었습니다.
강윤국·조문기·류만수 등은 비밀결사를 조직합니다.
이들의 눈에 ‘아시아민족분격대회’가 부민관에서 열린다는 광고가 들어옵니다.
‘아시아민족분격대회’는 일급 친일파 박춘금이 주도하는 전쟁 지지대회였습니다.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 조선군사령관 이타카키 세이치로를 비롯한 고위 관료와
장성, 친일 세력들이 다수 참석하는 대회였습니다.
대한애국청년당은 이 대회장에서 폭탄을 터뜨릴 것을 결의합니다.
박춘금(사진).
박춘금은 정치깡패의 원조격으로 분류되는 사람입니다.
1924년 전남 하의도에서 농민들이 소작쟁의 벌이자 깡패들을 동원하여 이를 진압합니다.
소작쟁의나 노동쟁의 현장에서 폭력을 휘두릅니다.
이런 깡패 짓으로 입지를 다져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이 됩니다.
1945년 6월, 대의당을 조직하고 당수에 취임합니다.
청년들은 행동에 돌입합니다.
류만수는 수색변전소 이전 작업 공사장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입수합니다.
거사일인 7월 24일, 류만수와 조문기, 강윤국은 부민관에 폭탄을 설치합니다.
연달아 폭발한 폭탄.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 당원 1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당합니다.
일제는 서울 일원에 비상을 선포하고 범인색출에 광분합니다.
박춘금도 개인적으로 거액의 현상금을 내겁니다.
그러나 강윤국·조문기·류만수 등을 잡지 못합니다.
사건의 전말은 광복 이후 밝혀집니다.
일제 강점기 마지막 의열 투쟁, 부민관 의거였습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일급 친일파 박춘금은 일본으로 도주합니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결성됩니다.
반민특위는 박춘금을 '반민족행위 1급 피의자'로 지목, 맥아더 사령관에게
박금춘의 체포와 국내송환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부에 의해 와해되면서 박춘금은 일본에 계속 거주합니다.
도쿄 민단 중앙본부 고문, 일한문화협회 상임고문.
박춘금의 대외활동은 활발했습니다.
1973년 도쿄에서 사망합니다.
강윤국·조문기·류만수.
광복 45년이 흐른 1990년에야, 이들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주어집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이승만 암살음모사건에 연루되는 등,
역대 대한민국 정권과 불화한 탓이었습니다.
일제 경찰이 광복 조국에서도 여전히 경찰 노릇을 하고 있는 현실을 이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놀랍게도, 일제 경찰과 독립투사의 관계는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단독정부 수립 반대운동을 하다 체포된 조문기는 경찰서 취조실에서 악명 높은
친일경찰 김종원에게 고문당합니다.
대못이 박힌 각목으로 두들겨 맞으며, 못이 몸 안에 박히는 고통을 경험합니다.
“분통이 터지고,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1945년 일제는 물러갔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제치하에서 살고 있다...”
조문기는 그의 회고록 <슬픈 조국의 노래>에서 토로합니다.
1964년 동아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강윤국은 행상으로, 조문기는 농사일로
생계를 이어갑니다. 손재주가 뛰어났던 류만수는 당시 무허가 판자촌이던
이문동에서 철공일을 합니다.
1975년 2월 어느날, 조문기는 찬거리, 요깃거리를 들고 류만수를 찾아갑니다.
"추운 겨울, 연탄도 때지 않은 방이었고 아주 냉골이었어.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얼어죽은 거라고 하던데 내가 보기에 굶어죽은 것 같아. 돌봐줄 사람없이 먹을
것도 떨어졌는데 나도 그걸 못챙긴거야...“
조문기는 류만수의 최후를 이렇게 전합니다.
다시 박춘금.
박춘금이 죽은 뒤 경남 밀양시 교동 900번지 천주교밀양성당 아래 산 중턱에
묘소가 만들어집니다. 그의 아버지 묘소 바로 밑이었습니다.
박춘금의 묘가 이곳에 있는 것이 일반에게 알려진 것은 1992년이었습니다.
박춘금이 상임고문으로 활동했던 '일한문화협회'에서 무덤 옆에 ‘송덕비’를
세우면서 문제가 불거집니다.
경남 밀양의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친일부역자이자 정치깡패인 박춘금의 송덕비와
묘를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결국 2002년 박춘금의 송덕비와 묘는
파묘되어 철거됩니다.박춘금의 이름은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들어갑니다.
조문기는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사장을 맡습니다.
대중모금으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힘을 보탰고, 2008년 세상을 뜹니다.
그의 장례는 시민사회단체가 마련하는 겨레장 형식으로 치러집니다.
2009년, 강윤국 역시 세상을 뜹니다.
부민관 의거 청년들, 그들은 모두 이렇게 돌아갔습니다.
경기도 화성 매송초등학교에는 조문기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의 모교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운 것입니다.
‘위안부 소녀상’ 작가 김운성씨가 제작했습니다.
이 동상뒤로 아래와 같은 조문기의 말이 적혀 있습니다.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지 못한 것이 그 첫 번째요,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강윤국·조문기·류만수.
세 분의 명복을 빕니다.
7월 24일은 이 세 분이 ‘부민관 폭파의거’를 결행한 날입니다.
.출처 한국 교육정책 교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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