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트레킹](3)스위스 그뤼에르
청정 초콜릿·치즈 한입…알프스를 날다
일본 야쿠시마에서는 나무 밑동과 바위까지 온통 초록인 산을 올랐다. 하와이 칼랄라우에서는 16시간 내내 태평양의 푸른 바다를 보며 걸었던 트레킹. 이번에는 알프스의 산길·맛길이다. 주말매거진+2의 '세계의 트레킹' 3편은 스위스 그뤼에르(Gruyere). 당신이 '스위스'라고 할 때 떠올리는 판타지의 120%가 여기에 있다. 소녀 하이디가 앞구르기와 뒤구르기를 반복했을 것 같은 연둣빛 초원, 슈렉의 친구와 쏙 빼닮은 당나귀 떼의 100m 질주, 해 질 녘이면 황금색으로 물드는 호수와 하늘. 그리고 하나 더.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는 스위스의 치즈와 초콜릿을 품은 길이다. 알프스에 홀려 시작했다가, 나도 모르게 달콤한 향에 무릎 꿇은 하이킹. 스위스 수도 베른에서 기차로 1시간 20분, 그뤼에르의 치즈·초콜릿 트레킹이다.
- ▲ 초록빛 알프스가 당신을 부른다. 초콜릿과 치즈의 달콤한 유혹. 여기는 하이킹 천국. 스위스 그뤼에르 / 이규열 프리랜서 kyuyeollee@hotmail.com
트레킹 초입, 샤르메(Charmey) 우체국 앞에서 만난 이탈리아 사내 스테파노(Stefano)가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 동네 풍광과 맛에 대한 스위스 타지역 주민들의 말도 안 되는 질투를 아느냐고. 그가 들려준 잔인한 농담은 이렇다. "산골 마을 그뤼에르 사내들의 결혼식 때 주최측이 반드시 준비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젖소 똥이다. 그렇지 않으면 파리가 똥이 아니라 신랑의 머리 위로 달려들 테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국의 트레커에게 스테파노가 부연했다. 그런 인신공격성 농담까지 만들어낼 정도로 이 지역이 아름답고 사람들은 순박하다고. 샤르메부터 그뤼에르까지 3시간을 걷고 나서 공감했다. 왜 스위스 정부는 이 루트를 '알프스 파노라마 루트'로 명명(命名)했고, 타 지역 주민들은 그렇게 질투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 루트는 무엇보다 알프스를 만끽할 수 있는 트레킹이다. 오스트리아부터 프랑스까지 알프스는 유럽 거의 전역에 뻗어 있지만, 이곳 스위스 중서부에서 바라보는 알프스 전망은 최고다. 말 그대로 파노라마. 정상은커녕 산마루에서도 첩첩 쌓인 알프스가 한눈에 가득 들어오고, 걷는 길 내내 늘씬하게 뻗은 밤나무와 플라타너스 숲, 우유를 탄 듯한 석회암 계곡수, 또 억년 세월의 물줄기가 뚫어놓은 석회암 동굴이 갈마들며 나타난다. 느닷없고 계통 없이 등장하는 석회암 동굴은 때론 3~4m, 길게는 10m가 넘는 어둠 속으로 인간을 빨아들인다. 완벽한 초록과 완벽한 어둠이 번갈아 찾아들며 지구 반대편에서 찾아온 여행자의 넋을 빼앗는다. 산 없는 나라, 네덜란드에서 온 러스크(Lustke)는 연방 감탄사다. "여기야말로 하이킹 천국. 똥 농담이 나올 만하다"고 익살을 부리면서.
스위스에서 트레커는 길을 잃을 염려가 절대 없다. 갈림길마다 예외 없이 나타나는 완벽한 표지판과 그 단순함 때문이다. 올해와 내년을 '스위스 걷기의 해'로 명명한 스위스 정부는 전체 6만㎞에 달하는 하이킹 루트를 32개 코스로 정비하고, 그 32개 루트의 길 안내 표지판을 오직 숫자만으로 단순화했다.
우리가 걸은 '알프스 파노라마 루트'는 3번. 원래는 로잔(Lausanne)에서 슈바르첸부르크(Schwarzenburg)에 이르는 150㎞에 6일짜리 코스지만, 당연히 자신의 체력과 판단에 따라 거리를 조절할 수 있다.
이날 코스는 3번 루트의 하이라이트인 샤르메~그뤼에르의 11㎞ 구간. 초등학생과 노인도 큰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는 평탄한 코스다. 웅장한 야운바흐(Jaunbach) 협곡을 오른쪽에 끼고 걷다가 갈림길이 나타났다. 역시 선명하게 등장하는 화살표 모양의 노란색 3번 표지판. 여기서 길을 잃으면 바보 소리 듣는다.
그 단순함과 명쾌함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스위스 관광청의 최고참격 롤랜드(Roland)가 "이게 다 노력의 결과"라고 말했다. 원래는 지자체와 걷기 관련 단체마다 제 나름대로 이름을 붙였지만 십수 년에 걸친 대화와 다수결 투표 등으로 단일화했다고 했다. 최근 몇 년의 걷기 열풍 이후 수백 가지 이름이 제멋대로 붙은, 같은 길에도 다른 이름들이 붙은 수많은 한국 길들이 떠올라 씁쓸해졌다.
우윳빛 시냇물에 놓인 징검다리를 뛰어넘는다. 그때였다, 순간 씁쓸함을 단숨에 날려보낼 만큼 달콤한 향내가 나타난 것은. 정밀하기로 이름난 스위스의 시계처럼, 예정했던 하이킹 3시간이 막 지난 순간이었다.
◆초콜릿과 치즈의 달콤한 유혹
메종 카이에(Maison Callier)는 스위스의 유서 깊은 초콜릿 공장이다. 한 사람이 연평균 12.3㎏을 먹어치워 세계 최고 소비량을 자랑하는 스위스에서 가장 사랑받는 초콜릿 브랜드다. 카이에는 지난 4월 700만 스위스프랑(약 82억원)을 들여 그뤼에르에 방문자센터를 열었다. '초콜릿 브레이크'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눈에 띈다. '브레이크(break)'는 '휴식'이라는 뜻이다.
꼭두각시 인형극과 공포영화 기법을 도입해 만든 20분짜리 초콜릿 역사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역시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은 무료 초콜릿 시식이었다. 열 가지가 넘는 카이에 초콜릿들을 마음껏 먹어볼 수 있다. 방문자센터를 나와 10분 남짓 그뤼에르 기차역 방면으로 달리면 역시 또 세계 최고의 맛이라 자처하는 그뤼에르 치즈공장이 있다. 엉덩이보다 배가 더 나온 샤르메 지역 치즈 생산자 조합장 앙드레(Andre)가 말했다. "이곳의 알프스는 고산지대라 풀이 천천히 자란다"고. 그래서 비옥한 고산의 미네랄을 천천히 오랫동안 빨아들인 풀, 그 영양 많고 신선한 풀을 뜯어 먹은 젖소, 그 젖소에서 짜낸 우유로 치즈와 초콜릿을 만드니 어찌 맛없을 수가 있겠느냐고.
전날 저녁 케이블카로 올라갔던 부네츠 산(Vounetse ·1626m) 정상 부근의 풍경이 떠올랐다. 패러글라이더가 활공하는 황금빛 석양을 배경으로 한국 황소의 두 배 크기의 젖소들이 알프스의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이른 봄 산 아래에서 시작했던 녀석들의 풍요로운 식사는 여름을 관통한 지금, 산꼭대기에서 한창 진행 중이다. 우윳빛 그뤼에르 치즈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찔했다.
>> 여행수첩
그뤼에르까지: 산골마을 그뤼에르(Gruyere)에 가려면 스위스 중서부의 대도시 프리부르(Fribourg)에서 기차를 갈아탄다. 프리부르에서 한 시간 거리. 대한항공이 취항하는 취리히에서 프리부르까지는 한 시간, 수도 베른에서는 20분, 제네바에서는 열차로 1시간 20분 거리다.
환율: 9월 1일 현재 1스위스프랑은 약 1170원.
그뤼에르 트레킹: 출발지점인 샤르메 우체국은 그뤼에르 현지에서 시내버스를 타야 한다. 역에서 10분 거리. 버스 시간표는 그뤼에르 관광안내소(41-26-927-5580)에 문의.
스위스패스: 스위스 면적은 한국 절반 정도다. 기차 여행이 발달돼 있다. 이동이 많은 여행자라면 비싸지만 스위스패스를 이용하면 편하다. 성인(26세 이상)일등석 8일권은 발권수수료 포함 369유로(약 56만원). 8일 동안 기차·버스·선박이 모두 무료다. 한국에서는 서울항공여행사(02-755-1144·www.seoultravel.co.kr) 등에서 판매한다. 스위스 기차 시간표는 www.rail.ch 참조.
산중 스파: 샤르메에는 알프스 산중 스파 바인즈(Bains·41-26-927-5580·www.bainsdelag ruyere.ch)가 있다. 야외 수영장에서 내려다보는 알프스 전망이 일품이다. 입장료는 24스위스프랑. 스파 바로 옆에 있는 카이에호텔(41-26-927-6262)에서 묵었다. 알프스의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아늑하고 품위 있는 산장 호텔이다. 1박 225스위스프랑부터.
퐁듀: 스위스에서 스위스 퐁듀를 맛보지 않을 수 없다. 분츠산 정상 레스토랑(Restaurant de Voun etz·41-26-927-1284)에서 빵이나 미니 감자에 찍어 먹는 스위스 퐁듀 가격이 1인당 28스위스프랑. 점심만 가능하다.
스위스 하이킹 32 루트: '스위스 모빌리티'(Swissmobility)라는 단어가 있다. "인간의 힘을 이용한 여행법"을 모토로 하는 스위스 여행의 캐치프레이즈다. 하이킹·사이클·산악자전거·스케이팅·카누 등 모두 다섯 가지 무동력 여행을 포함한다. 웹사이트(www.schweizmobil.ch)에서 이들 종목에 대한 루트를 친절하게 설명했다. 하이킹 32개 루트 소개도 있다. 스위스관광청 한국사무소 홈페이지(ww w.myswitzerland.co.kr·02-3789-3200)에 신청하면 서울 이외 거주자에게는 '스위스 걷기여행' 책자를 보내준다. 무료. 서울은 강남·북에 한 곳씩 있는 스위스 트래블 센터(02-514-0585, 02-777-3900)에 직접 가면 받을 수 있다.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