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학문적 통합적 방법론으로 인왕산 탐색하기
역사/생물/지질학 지식을 교차하여 인왕산을 답사함
글 : 이수인(한국산서회) 사진 : 김은주(한국산서회)
“인왕산”의 특별함과 우리 인문산행
338.2m 높이의 인왕산(仁王山과 仁旺山 두 표기가 뒤섞여 쓰였는데, 한때 仁旺山이 왜식 표기라는 혐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옛 자료에서 혼용해서 쓰인 예가 확인된다. 어쨌든 국토지리정보원은 앞으로 仁王山을 표준으로 삼아 그것만 쓰기로 정했다.)은 예로부터 특별한 산으로 인식되어 왔다. “인왕산 호랑이”라는 관용어가 있고 “몹시 무서운 대상”이라는 의미로 쓰이듯이, 무언가 강하고 센 인상을 지니고 있는 산이다.
이 인왕산의 특별함을 잘 살린 예술품으로 우리는 흔히 겸재 정선(謙齋 鄭敾,1676-1759)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국보 제216호)>를 꼽는다. 비가 내린 바위산에 응축된 팽팽한 긴장감이 화폭 위로 뿜어 나오는 것 같다. 한국산서회의 5월 인문기행은 바로 이 인왕산에서 실시되었다.
한국산서회의 인왕산 인문기행은 이번으로 3회 째에 이른다. 해마다 빠트리지 않고 실시해 왔다는 뜻이다. 1회 때는 인왕산 자락 서촌마을에서 옛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더듬었었다. 작년 2회 때는 산자락 곳곳에서 이루어졌던 민간신앙의 자취를 찾아보았었다. 이번 3차 인왕산산행은 자연생태적 탐사를 목표로 삼았다. 바위나 나무, 꽃 등의 생태적 특징과 지질적 특징을 이해하는데 중심을 두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 활동으로, 올 초 우리 인문산행팀에서 찾아내서 서울시에 제보함으로써, 시 당국의 보전조치를 이끌어낸 “옥류동(玉流洞)” 각자도 살펴보기로 하였다.
한양도성과 인왕산
“서울을 대표하는 역사 문화적 표상으로 무엇을 꼽겠느냐?”고 사람들에게 질문한다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양도성”이라 답할 것이다. 고려를 멸하고 개국한 조선은,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는 일에서부터 개국의 정통성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여기에서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등장한다. 유교와 불교의 경쟁이요, 사상적 대결이었다. 둘은 고려 당시에 남경이었던 지금의 서울, 즉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추천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예컨대, 도성의 향(방향)과 범주(경계)에서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정도전의 방안이 오늘의 한양도성과 거의 같았던 반면에,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해서 백악과 목멱(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하자는 것이었다. 결과는 다시 “정도전 승!” 이었다.
곧바로 도성 축성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2차 각축이 일어난다. 인왕산 구간에서 선바위를, 성곽 안으로 두느냐 밖으로 내보내느냐가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이 결과도 무학대사의 패배였다. 선바위는 지금처럼 도성 밖으로 밀려났다. 사람들은 이것이 불교의 퇴조와 유학의 성행을 상징한다고 이해한다.
무악재와 독립문
지금 무악재 남쪽인 독립문 4거리 쪽에서 북쪽 무악재를 올려다보면, 길의 규모가 제법 널찍하게 보인다. 경사도도 대체로 완만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 모습은 조선 초기의 모습이 아니라, 해방 후에 크게 바뀐 모습이다. 즉, 1966년에 35m로 길 폭이 크게 확장되었고, 1985년 서울지하철 3호선 개통에 즈음해서도 재차 정비된 결과다.
조선 초기의 이곳은 말 그대로 도둑이나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던 험벽한 산길이었다. 성종 19년(1488년)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왔었던 동월(董越)은 『조선부(朝鮮賦)』를 지으며, “여기는 천 길의 험한 산세를 이루었으니···(중략)···겨우 말 한필만 지날 수 있구나”라고 표현하였다.
“무악재”와 병행되는 이 고개의 이름들을 모아보면, 매우 다양한 것들이 나온다. “무악재”, “모래재”, “길마재”, “추모현”, “무학현”, “모화현”, “봉화재”, “봉우재” 등이 모아진다. “홍제동고개”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이름도 보인다.
안산, 무악산, 또는 승전봉
무악재를 끼고 인왕산과 마주하는 서쪽 산 이름은 “안산(鞍山)”이다. 고개 이름 “길마재”와 통하는 이름이다. 이 산 역시 다양한 이명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승전봉(勝戰峰)”이란 이름의 유래는 짐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인데, 그것은 인조 때 일어났던 “이괄(李适, 1587-1624)의 난” 진압과 연관되어 생겨난 이름이다.
이번 인왕산 인문산행의 시작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1번 출구로 나와 세란병원 부근 공터에 집결하여 산행을 시작하였다. 행정명으로 “무악동”인 이 지역은, 과거부터 도성 밖 가난한 백성들이나 소시민들이 살던 마을이었다. 그러나 근래 재개발 사업으로, 깨끗한 새 아파트단지가 산 중턱 이상 도성 발치까지 바짝 당겨져 들어섰다. 그러나 아파트 단지 위로는 여전히 절과 굿당이 산재해 있다. 이곳저곳에서 굿이나 재(齋)를 올리는 부산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번 인문산행을 이끄는 류백현 강사는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현역 숲 전문해설사(산림청 숲길등산지도사)로, 자연환경 분야에 특별한 실력을 갖춘 인물이다. 인왕사나 국사당, 그리고 굿당 등을 지나쳐 위로 올라가는 동안, 자주 발길을 멈추게 하면서 주변에 널린 식물들에 대한 설명을 폭포수처럼 쏟아낸다. 눈앞에 보이는 식물들마다 특징은 물론, 그 이름의 유래나 의미, 전설 등을 세밀한 부분까지 막힘없이 풀어준다.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는 생물의 이름을 정하는 정부 부서가 산림청과 환경부로 2원화 되어 있는 바람에 빚어지는 혼란이 많다고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합리성과 능률성, 또는 일관성을 위한 일원화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압권은, 화투나 지폐 등에 들어있는 식물을 짚어가면서 연관된 정보를 설명해준 것인데, 필자는 류강사의 종횡무진하는 해박한 생태학 강의에 취해서, 부지불식간 “앞으로 <화투 인문학>을 저술하면 틀림없이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요.” 라고 하였다.
선바위를 지나고 큰 암체를 돌아서 숲속으로 들어가니, 특이한 형태의 바위들이 많아진다. 선바위 말고도, 모자바위, 돼지바위, 말안장바위, 두꺼비바위, 코끼리바위, 달팽이바위(또는 손가락바위), 자라바위, 범바위, 매부리바위, 쉼바위, 삿갓바위, 기차바위, 펭귄바위, 해골바위, 짐승바위, 치마바위, 부처님바위, 혹은 이슬바위, 책바위, 매바위 등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이 바위들은 각각 형태적 유사성 때문에 그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일 터인데, 본질은 지구 표면이나 지하에서 마그마가 굳어져 만들어진 화강암이 오랜 시간 풍화작용을 받아 그렇게 변화된 것이다.
류백현 강사의 식물학 강의는 어느새 지질학 강의로 바뀌고,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산경표> 체계로 바뀌어, 백두대간과 장백정간 그리고 13개 정맥으로 계속 새끼를 쳐나가고 있었다.
한국 암벽등반사 내지 학생등산사와 인왕산과의 긴밀한 관계
인왕산은 한국 등산사에서 주목해야할 매우 중요한 곳이다. 해방 전 학생들의 산악활동이, 주로 이 산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증거나 개연성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나라 초기 고등부 등산활동을 주도했던 양정고나 경복고가 모두 이 인왕산 아래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인왕산 자체에서도 그러한 활동 흔적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가령, 지금 치마바위 주변에는, 1960년대 초부터 인왕 탑 알파인 클럽에서 관리하는 암벽코스가 여럿 살아남아 있으며, 또 석굴암 주변 바위 이곳저곳에는 산악회 로고가 새겨져 있기도 하다. 하강용 피톤이 박혀있는 것도 발견되었다.
이밖에도 이것들보다 더 신빙성이 있는 증거도 남아 있으니, 가령 생존해있는 고령의 인왕산악회 회원들로부터 아주 구체적인 증언을 들을 수도 있다.
치마바위 암벽면은 해방 전 일제가 총동원체제를 선전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선동문구를 새겨놓았던 곳이다. 그래서 해방 후 그것을 지우느라 우리가 다시 바위 면에 엄청난 파괴행위를 저지르기도 했었다.
한국산서회가 발굴한 <금강굴> 위치와 <옥류동> 암각자
인왕산이 “인왕산”이란 이름을 갖게 된 기원은 “인왕사”라는 절 이름에서 비롯한다는 통설이 있다. 《광해군 일기》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거기에는, 이전에 “서봉” 또는 “서산”으로 불리던 산에 “인왕사”란 절이 들어서면서 “인왕산”란 이름으로 바뀌어 정착했다고 했다.
또한 이 산에는 “인왕사” 말고도 “복세암”이나 “금강굴” 같은 불교시설이 존재했었다는 기록도 담겨있다. 역시 신빙성이 높은 실록 정보로, 연산조 때 절에서 궁궐을 내려다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철거되거나 이전되었다고 했다.
아주 미세한 불확실성까지 제거하지는 못했으나, 행복하게도 <인문산행팀>은 그간 “미확인 상태”로 남아있던 <금강굴>의 위치를 확인했고, 또 저 아래 옥인동 주택가에서 <옥류동>암각자의 위치도 확인했다. <금강굴>은, 현재 석굴암에서 아래쪽으로, 접근이 매우 어려운 계곡 아래에 굴 형태로 발견되었다. 반면에 우암 송시열의 필적으로 알려진 <옥류동> 암각자는, <해맞이 공원> 아래쪽 한 낡은 가옥의 비스듬한 절벽면에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발견사실은 지난 2월 서울특별시에 바로 전달되었고, 서울시는 검토 끝에 그것을 보존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산서회>가 하는 여러 노력 중에서, 보람찬 결실을 이룬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며 크게 기뻐한다. 5월 인문산행은 이런 것들을 확인하는 것으로 종료되었다.
((공지)) 제4차 화양구곡 및 선유구곡 인문산행 예고
주제 : 역사가 깃든 아름다운 구곡을 찾아가는 캠프
일시 : 1919년 6월 1일(토) ~ 2일(일)/1박 2일
회비 : 3만원
출발 : 6.1. 09:00 양재역 서초구청/개인출발 가능
집결지 : 충북 괴산군 청전면 화양로 834-9 괴산 원탑오토캠핑장(043-832-4114)
준비물 : 야영장비 일체, 2끼 분 식량 및 부식(장비대여 가능-장비 없는 참가 희망자는 사전 문의할 것), 6. 2. 아침식사는 운영팀에서 제공함
참가문의 및 신청 : 다음 카페 한국산서회(http://cafe.daum.net/peakbook) <인문산행 공지> 란에 댓글로 신청하며, 문의는 010-2725-0026(조장빈)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
후기 감사드립니다.
사진은 김윤주가 아니라 김은주입니다....ㅎ
내가 답사하던 날 현장에서 이름을 물어 적었는데, 제대로 듣고 적지를 못했었나 봅니다. 핸드폰 저장도 그리 되어 있네요.
문제는, 까페 글은 고치면 되지만, 잡지는 고칠 수가 없으니 낭패로군요. 이걸 어쩐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인물 사진 몇 장 없지만 올렸어요. 저화질이니 고화질 필요하면 이메일 주소 알려주세요. 금강굴 사진 두 분은 저 맛있는 거 사주실 거죠?
5월 월례회에 심산 선배님이 앞으로는 인문산행의 기고글을 인문산행의 다른 진행위원들이 돌아가면서 쓰면 좋겠다고 말을 했는데...
이번 기고글을 보면 성공적인 출발을 하는 것 같네요...
앞으로는 다른 분들의 글들을. 그리고 기사 중에 있는 류백현 선배님의 글도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