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6일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준 여행이었다.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 나라 日本은 살기 좋은 곳이었다. 東京,京都,大版 등을 둘러 보면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내 소중한 感情에 根據해 記錄해 두기로 한다. 物價에 많은 關心을 기울여 現場感覺을 익히려 했으며, 다음 旅行의 參考資料로 삼으려 한다.
1994.6.13(月)
우리 一行 14명은 가이드 송선미씨를 따라 光州空港에서 8시에 出發하는 KAL기에 몸을 싣고 서울로 향한다. 偶然인지 付託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窓가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緯度로 쳐서 大田 쯤을 지나고 있을까? 구름위로 기체가 날고 있다. 내가 타고 있는 KAL기의 그림자가 구름 위를 나란히 날고 있다. 그 그림자를 둘러 싼 영롱한 환무지개가 곱고 황홀하다. 그도 잠시다. 아득히 내려다 보이는 서해바다 속으로 이내 자취를 감추고 만다. 꿈을 꾸었나?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국제선 제 2청사로 옮겨 오전 11시에 출발하는 나리타행 KAL기에 몸을 싣는다. 송선미씨가 내 옆에 앉는다. 국내선 창밖으로 본 무지개처럼 또 幸運이다. 운동화 뒷축을 구겨신고 캐주얼을 차림으로 光州空港에 나타났던 송선미씨는 이웃 친구집에 잠시 들르러 가는 아가씨 같았다. 自由人? 旅行이 주는 설레는 감정을 숨기려고 애쓰면서 동경까지 가야만 했다. 지난 밤 제주에서 늦게 올라왔다는 미스 송은 줄곧 잠에 떨어져 있다. 機內食을 맛도 느끼지 못하고 열심히 먹어 치운다. 11:20에 離陸한 KAL機는 高度 3,500M에서 5,178M, 6,900M로 變하더니 11,300M까지 올라간다. 最高高度에서 時速 1,022Km로 날고 있다. 13:10경 나리타(成田)空港에 到着할 豫定이며 그 곳의 現在 氣溫은 24도이고 비가 내리고 있단다. 비가 온다고? 旅行이 일그러지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미스 송은 入國申告書를 쓰고 있다. 한장 써보고 싶었으나 ….
成田(나리따) 空港의 入國節次를 마치고 14:30 現地 案內人 李宗九씨를 따라 대기하고 있던 傳貰버스에 몸을 싣는다. 60세 쯤 되어 보이는 안내인은 東京으로 가는 버스 속에서 6일간의 日本生活에 必要한 여러가지 情報를 이것저것 알려 준다. 패키지 旅行이 아닌 自由旅行의 境遇 東京驛 앞에서 하토버스를 타고 東京觀光을 할 경우 반나절 코스와 온종일 코스가 있는데 料金은 각각 4,500엔, 8,800엔 정도란다. 종일 코스의 경우는 점심도 提供되고 ….
年 降水量이 韓國의 4배에 달하고 후덥지근하며 濕氣가 많은 氣候의 섬나라여서 잦은 沐浴이 習慣化 되어 있고 地震이 많은 나라란다. 또 그 濕氣때문에 맥기文化가 매우 發達한 점이 特徵이며 다다미 방이 많은 것도 年中 氣溫이 比較的 높고 濕氣가 많은 地域的 特性에서 비롯된 것이란다. ‘한 나라의 山을 보고 그 나라의 國力을 헤아리고, 化粧室을 보고 그 國民의 水準을 알 수 있다’면서 日本의 水準을 間接的으로 紹介한다. 人口 1,200만의 東京 1년 豫算이 韓國의 그것과 맞먹으며 넓이는 서울의 4배에 달한다고? 高速道路 검표원들은 모두 나이 많은 老人들이다. 쓰레기를 버리는 양이 1일 800g으로 韓國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으며, 旅行하는 6일 동안 交通事故 現場을 보기가 힘들 것이라고 紹介한다. 괜히 기가 죽는다.
東京都와 치바현의 境界를 이루는 것이 아나까와(?) 江이란다. 東京灣의 港灣道路를 끼고 市內로 들어간다. 스티로폴 조각 하나 눈에 띄지않는 海邊이 印象的이다. 高架道路를 지나 市內로 접어들자 왼쪽으로 東京타워와 긴좌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東京은 주차비가 비싸 대부분이 大衆交通을 利用하여 출퇴근 한다고 한다. 의외로 市內 거리에 自轉車가 많다. 그런데 우리와는 달리 自轉車들이 人道로 다니고 있다. 대체로 東京의 샐러리맨들은 9시 出勤하여 오후 4시쯤 退勤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 곳은 서울과 時差는 없으나 해가 1시간 정도 빨리 뜨고 먼저 진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東京으로 들어가는 거리의 은행나무 가로수가 우리와는 그 수형이 또 다르다. 옆으로 뻗은 가지를 허락하지 않고 가지를 잘라 전봇대처럼 높게 키우고 있다.
15:40 日本 천황이 居住한다는 황거 앞에 到着한다. 넓다. 잔디정원과 잘 가꾸어진 오래된 소나무들이 印象的이다. 廣場에는 검은색의 모래가 깔려 있다. 近處의 관청가와 어울려 廣大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문 앞의 아치형 다리를 背景으로 團體寫眞을 찍고 여러가지를 느껴야 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日本과 韓國의 歷史가 자꾸 對比되어 즐거운 旅行氣分보다는 착잡한 심사가 틀어 오른다. 地下鐵을 利用하여 이곳을 찾으려면 히비야역에서 내리란다. 일본의 팁문화는 우리와 비슷하여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단다. 동경타워로 가는 길은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인상적이다. 높이 330M의 이 탑은 250M까지 승강기로 오를 수 있으나 우린 150M만 오른다. 오나가나 한국인이 참 많다. 전망대를 돌면서 광활한 동경 땅을 조망한다. 남쪽으로 멀리 동경만이 보이고 검은 비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으나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는다. 동경타워 남쪽 바로 밑의 우레탄으로 만들어진 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뛰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바로 아래 자리한 사원의 묘가 독특하게 자리잡고 있다. 시내에 사원이 많아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여 저런 가족묘를 만든단다. 그림엽서 몇장 사려고 했더니 한장에 80엔에서 120엔이다. 韓貨로 계산해 보니 비싸다. 우리나라까지는 엽서가 4,5일 걸려야 도착한단다. 1층 프런트에서 우표를 구한다. 1장에 70엔이다.
日本人들은 그의 子女들에게 敬語를 쓴다고 한다. 완전한 인격체로 대접한다는 뜻에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동경엔 다방이 드물고 교회를 찾기가 힘들다고 한다. 불교의 일본화로 기독교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을까? 靑山(あおやま)거리를 지난다. 外國人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란다. 가이드가 오랫만에 우릴 추켜 준다. 日本 女子는 우리 韓國의 女子에 비해 못생겼다는 것이다. 地方으로 가면 그 도가 더욱 심하단다. 그 말을 듣고 지나는 女子를 살펴보니 정말 왜소하고 못생겨 보인다.
*** 일본천황이 거주한다는 황거의 정문앞에서 연수단 일행과 기념촬영 ***
日本의 車輛은 운전석이 오른 쪽에 있다. 우리와는 반대로 모든 차량은 좌측통행이다. 좌회전은 편하고 우회전이 힘들다. 영국식을 받아 들여 그렇단다. 동경의 대졸사원 초임은 대략 20만엔 정도이며 아르바이트의 경우 시간당 700엔 정도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신쥬꾸의 도청건물은 일개 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거리를 가로질러 서로 연결된 거대한 맘모스 건물이다. 시설도 최첨단이란다. 그런데 지진이 심한 도시라서 높은 건물은 엄격한 규제를 거쳐야만 지을 수 있단다. 일본에서 여행자 수표는 가능한 사용하지 말라고 귀뜀해 준다.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신용이 좋지 않아 불쾌한 일을 당하기 쉽단다. 듣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수치스런 이야기다. 시내를 다니다 보면 燒肉(불고기)이라는 간판이 자주 눈에 띄는데 대개 교포가 운영하는 식당이라고 보면 틀림없단다. 신쥬꾸의 동해정에서 저녁을 들었다. 메뉴표를 살펴보니 참 비싸다. 비루(大) 800엔, (小) 600엔, 불고기 부페 2,500엔, 소주 1030엔 등이다.
*** 황거 외원의 잘 가꾸어진 소나무 정원 ***
17:00 숙소 SUNSHINE CITY(?) PRINCE HOTEL로 향한다. 이 호텔을 이용하려면 이케부쿠로역에서 내리면 된단다. 방을 정하고 근처의 전자상가를 구경한다. NIKON FM2가 105,000엔인데 84,000엔에 할인 판매하고 있었다. 카메라 밧데리는 1개에 160엔이다. 햄버거 250엔 간판이 눈에 띈다.
숙소에 돌아와 아내와 최사장님께 전화를 건다. 가스사업 담보문제로 복잡하다. 모든 것을 아내에게 위임하고 만다. 내 무능력이 약간 부끄럽다. 초등교직과의 김풍 사무관과 한 방을 쓰게 되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 아내와 송회장님께 엽서를 쓴다. 아내에게는 주소 쓸 여백도 없이 빽빽히 사연을 채우고 만다. 다시 쓴다. 선샤인프린스 호텔은 규모가 매우 커서 한국인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었다. 이 호텔 앞에서 공항의 LIMOUSINE BUS가 멈춘단다. 객실간 전화는 8번을 누르고 방번호를 누르면 된다. 모닝콜은 71-0820하면 아침 8시 20분이고 아침에 벨이 울릴 경우 수화기를 들었다 놓거나 “THANK YOU"하면 된다. MORNING CALL을 변경할 경우는 71+NEW TIME DESIRED 란다. 잠이 온다. 귀국하면 아내에게 정말 잘 해야지.
*** 동경타워에서 내려다 본 동경만 쪽의 시내전경 ***
1994.6.14(화)
눈을 뜨니 4시 40분, 벌써 창이 밝다. 옆의 일행은 아직 밤중이다. 서울에서 가져온 동아일보의 “횡설수설”란을 읽는다. 韓國이 낳은 世界的인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양의 “차이코프스키 현악 4중주”를 直接 듣고 KOREAN이 最高라는 自負心을 표현해 놓은 글이다. 자랑스럽다. 愛國心인가? 아침 7:00, 호텔 내 2층 부페식당에서 간단히 아침을 마쳤다. 연회장 같은 곳을 이용한 간단한 아침 메뉴만을 準備한 곳이다. 臨時 食堂같은 곳이다. 소시지, 감자볶음, 물고기볶음, 밥, 국이 내 메뉴이다. 어제 저녁에 쓴 葉書를 프런트에다 발송해 달라고 부탁한 후 08:30 東京의 하루를 시작한다. 비가 온다니 一行 중 몇명은 프런트의 가게에서 雨傘을 산다. 보통 3000엔이다. 도오쿄오의 代表的 사원 아사쿠사를 찾는다. 빗발이 듣는다. 아사쿠사(ASAKUSA)역 下車. 이 아사쿠사 사원은 東京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寺院으로 1년간 필요한 시주돈이 정월 초하룻 날 모두 걷힐 정도로 유명한 곳이란다. 동전에서부터 몇 백만엔에 이르는 다양한 시주돈이 모여 運營되는 사원인데, 그 안에는 신사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독특한 일본식 佛敎文化의 根源을 알아보고 싶은 충동이 불쑥 솟는다. 가이드 李先生에게 후지산 가는 길을 물어본다. 그가 가르쳐 준 후지산 登行日程이다.
(제1일) 서울발 나리타행 첫 飛行機를 타고 온천휴양지 ATAMI에서 1박한 후
(제2일) 후지행 버스를 이용해 5항목에 간후 도보로 7항목에 있는 山莊에서 1박
(제3일) 새벽 4시에 일어나 頂上까지 등행하여 일출을 본후 하산하여 버스로
東京行
(제4일) 東京觀光(황거, 동경역, 아사쿠사사원, 긴좌, 신쥬꾸거리, 명치신궁,
동경디즈니랜드 등)
(제5일) 나리타, 서울, 光州, 첫날 나리타에서 바로 하코네행 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단다.
아사쿠사 사원을 둘러보고 싸구려를 파는 집으로 한국사람에게 널리 알려진 多慶屋(다케히야?)으로 발길을 옮긴다. 9층으로 된 두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상가다. 전철역은 SHOCHIKU KANGO역. 아내에게 줄 양산과 登山하면서 사용할 소형 雨傘을 산다. 근처의 한인식당에서 점심을 들고 전자상가 아키하바라로 끌려간다. 화려하고 값비싼 물건들이 많다. 語學工夫에 쓸 카세트를 구경했으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마음에 드는 것은 값이 비싸고. YAMAGIWA, DUTY FREE 등의 문구가 굵직하다. 日比谷線(Hibiya Line)의 仲御徒町驛(Nakaokachimachi Sta.)에서 내리면 혼자 올 수 있겠다고 눈여겨 둔다. Mitsukoshi백화점 본점이 보인다. 평민들이 많이 애용하는 곳이란다. 시간이 있으면 들어가 구경해 보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만다. 반면에 긴좌마쓰야는 高級 百貨店이란다. 긴좌에서 가까운 동경역 建物과 서울역 청사는 설계를 맡은 사람이 동일인이라고 한다.
*** 동경타워에서 내려다 본 어느 학교 운동장 ***
*** 뒷쪽에서 올려다 본 동경타워 모습 ***
마지막 날 보게될 大版의 市廳 건물도 그렇단다. 일본인의 건축 정신이 우리보다 투철하다는 생각이 든다. 긴좌거리는 주말이면 차량 없는 거리가 된단다.
*** 선샤인 시티 프린스 호텔에서 바라본 동경 시내 ***
*** SUNSHINE CITY PRINCE HOTEL 광장의 태양열 가로등 안내도 ***
이 곳 긴좌에서 황거는 불과 1Km이내란다. 世界 최고의 시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SEIKO본점 建物이 보인다. 14:00 긴좌거리를 버스 안에서 구경하며 明治신궁으로향한다. 122대(?) 천황으로 실권을 장악하고 오늘의 日本을 기초해 놓은 人物로 우리 韓國에게는 한일합방의 원흉으로 잘 알려진 자를 기린 곳이다. 신목이라 불리우는 숲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입구 기둥에 신목가지가 꺾여 묶여 있다. 日本 庶民들의 市場이나 어물전에서 時間을 보내고 싶다. 배낭 여행을 꿈꾸어 본다.
아사쿠사나 메이지신궁은 별로 흥미롭지가 못하다. 아키하바라나 다경옥 그리고 신주꾸의 중고 카메라점에서의 쇼핑은 내 심신 모두를 지치게 하는 짜증난 코스이다. 그러나 보이는 모든 것이 처음이라는 것 때문에 소중히 기억해 두기로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본다. 東京商銀은 民團에 속한 한국인이 운영하며, 朝鮮銀行은 조총련계에서 운영하는 銀行이란다. 일본의 기사들은 팁을 받으면 회사에 납부하여 다른 기사와 고루 나누어 가지며, 월급은 30만엔 정도란다. 저녁을 마치고 또 Sunshine City Prince Hotel로 든다. 유료 비디오도 보고 또 다른 일행은 고스톱도 즐긴다. 일행 몇이서 어느 방에 모여 보기도 했으나 말을 독점해 버리는 사람이 있어 대화의 장은 열리지도 못하고 만다.
1994.6.15(수)
새벽에 호텔 주변을 거닐어 본다. WORLD MART라는 거대한 百貨店이 호텔 옆에 있었으나 우리가 투숙할 시간이면 이미 문을 닫곤 해서 구경할 수가 없었다. 태양열에 의한 가로등이 호텔 뒷면 광장에 설치되어 있다. 國際電話 카드가 따로 있는데 요즈음 위조카드가 성행하고 있는 모양이어서 전화박스에 국제전화를 중지한다는 내용을 고지하고 있다.
*** 아사쿠사 사원 풍경 ***
*** 긴좌거리 모습 ***
오늘은 타마시립중학교를 방문하는 날이다. 타마시는 동경의 위성도시 중 가장 잘 계획된 곳이라 한다. 높은 구릉을 깎아 만든 전원도시로 東京에서 1시간 정도를 달려 간다. 校監과 타마시 敎育委員 그리고 敎師와 學父兄들이 우리 일행 15명을 정중히 맞아준다. 정성스럽게 종이 위에 그린 태극기와 ‘잘 오셨습니다’라고 쓴 프랑카드가 걸려 있다. 會議室에서는 많은 자료가 準備되어 있고 傳統的인 日本 모찌에 차를 곁들여 우릴 歡待한다. 그들의 정성스런 손님맞이 態度가 감명스럽다. 올 3월에 竣工했다는 옥상위의 水泳場은 정말 좋다. 여중생들이 水泳服 차림으로 수업하는 모습은 참 부럽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 경우 투명한 이동식 천장이 닫히도록 되어 있다.
*** 국제전화 변조카드 사용이 성행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안내문 ***
푸른 하늘을 보면서 옥상 수영장에서 수업을 받는 우리 광주의 중학생들을 그려 본다. 작년 12월에도 우리 시교육청 日本연수단이 이 학교를 방문했다고 한다. 헤어지면서 김포공항에서 마련해간 인삼주를 선물한다. 우리 일행이 더운 계절탓에 正裝을 하지 못한 점이 다소 마음에 걸린다. 13:00 Abina 휴게소에서 점심을 떼운다. 1080엔. 시간을 아끼려고 바로 하꼬네로 향한다. 길거리엔 이불 말리는 풍경이 자주 눈에 띈다. 오른 쪽으로 북알프스까지로 이어지는 높은 산맥을 끼고 東名(동경-나고야)고속도로를 달린다. 꼬불꼬불 길을 넘으니 호반 관광지에 닿는다. 대낮에 환히 불을 밝힌 식당이 많다. 백열등을 밝히고 환영한다는 뜻일까? 전기가 풍부해서는 아닐 것 같고 …. 케이블카를 타고 중간지점에서 내린다. 神山밑의 화산 증기(?)가 구름처럼 퍼져 나오는 곳이다. 화산의 분출을 억제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땅속의 가스를 누출시켜 이런 광경을 연출하고 유황이 섞인 온천수는 여러 지역에 보내 이용한단다. 神山의 등행시간은 1시간 30분. 화산 폭발이 두려워 어떻게 오르나? 유황이 지표로 올라와 부글부글 끓는 샘도 보인다. 검은 달걀을 팔고 있다. 아마 끓는 유황물에 삶았을까? 약이 된다기에 500엔에 6개하는 黑卵을 사려 했더니 벌써 매진이다. 피어 오르는 수증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일행은 다시 버스로 내려와 유람선에 오른다. 시원하고 깨끗한 호수다. 일본 천황의 별장이 그림같다. 반대편에 도착하여 고개를 꼬불꼬불 넘으니 후지산을 볼 수 있다는 고갯마루가 나온다. 안타깝게도 구름만이 보일 뿐이다. 고개를 완전히 넘으니 바로 온천 휴양지 아따미이다. 해안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위의 NISHI ATAMI HOTEL(西熱海 호텔)에 여장을 푼다. 1층에 있는 대중탕에 든다. 둥그런 거의 5,60미터에 달하는 긴 파노라마식 욕조에 몸을 담그니 석양녘의 앞 바다와 시가지가 한폭의 그림이다. 태평양인가?
*** 타마시립중학교의 옥상 수영장에서 수업중인 학생들 ***
왼쪽으로는 철길이 보이고 그 철길은 이내 해안의 왼쪽 언덕 터널 속으로 숨어버린다. 양 쪽 언덕사이로 조그만 휴양도시가 아늑해 보인다. 벳푸, 이푸스키와 함께 일본의 3대 온천 휴양지에 속하는 곳이다. 방은 다다미가 8장인데 5장, 3장으로 칸이 막아져 온가족이 함께 지내기에 좋겠다. 숙소에서 내려다 본 정면은 조그만 산으로 그 비탈에는 예의 일본식 공동묘지가 마을의 일부로 평화스럽다. 8층에서 일식으로 저녁을 마치고 혼자 시내로 나가 본다. 300미터 정도 차도를 따라 내려가자 조그만 간이역이 나온다. 아내에게 전화를 했으나 최사장님 댁에 가고 없다. 계속 내려가 본다. 조그만 선술집 같은 곳의 입구에 중년의 남여가 들어 오라고 손짓이다.
*** 타마시립중학교의 교직원,학부형과 기념촬영 ***
STRIP SHOW를 하는 곳이란다. 3000엔. 들어가 보고싶다. 혼자라서 못들어 간다. 호텔에 돌아가 후회할 줄 알면서도 과감히 단념한다.
*** 신산 중턱에서 솟아 오르는 유황이 섞인 화산 수증기 ***
특이한 경험을 놓쳤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계속 걷는다. 번화가가 나온다. 충청도의 음성 택시 노조에서 왔다는 한국인들이 떼지어 돌아 다니고 있다.
*** 하꼬네 호반의 천황 별장(사진 오른 쪽) ***
*** 아따미 역 전경 ***
일본 여성에게 西熱海 호텔의 전화 번호를 부탁하자 책자를 뒤져 친절하게 찾아준다. 우리 방의 일행에게 내 소재를 알려주고 계속 걸어 내려 가니 밤 바다다. 아무도 없다. 늙은 여인 둘이서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하고 있을 뿐이다. 검은 파도를 바라보다가 발길을 숙소로 돌린다.
*** 타마시립중학교 현관에 걸린 환영의 글 ***
*** 신산 중턱의 노천에서 끓고 있는 유황 ***
1994.6.16(목)
새벽 4시 반, 온천탕에 몸을 담그고 나서 프런트의 신문을 뒤진다. 아사히신문을 훓어 보다가 북한핵과 관련하여 치마처고리를 입고 다니는 조총련계 여학생의 치마를 찢고 희롱하는 사례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눈길을 끈다. 찢어진 치마의 흑백 사진이 내 감정을 자극한다. 극우파 일본인들의 소행이 아닌가 하는 짐작이 들었으나 그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우리 민단계통의 교포가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 조총련계 여학생의 찢어진 치마를 보여주는 일본의 TV화면 ***
조식을 마치고 호텔의 미니버스로 熱海驛으로 향한다. 빠르기로 유명한 신간호를 타고 京都로 간다. 관광을 위해서 중간 속도의 열차를 탄다. 교오토는 전통을 볼 수 있는 도시이다. 많은 오래된 사원과 고적이 특징이란다. 교토까지 가는 동안 오른 쪽 차창으로 스쳐가는 후지산의 원경이 날 자극한다. 배낭 매고 꼭 한번 찾아보고 싶다. 초여름 날 백설 덮힌 후지산의 우뚝 솟은 모습은 어떤 영감같은 것을 주었으나 구체적으로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표현할 길이 없다. 훗날 후지산을 오르다 문득 ‘아! 맞다. 바로 그것이다!’로 나에게 다가올 수도 있으리라. 교토에 거의 도착할 즈음 신간호의 승무원이 우리 일행 중 혼자 앉아 가는 단원에게 뭐라고 일본말을 해댄다. 옆에 앉은 송선미씨에게 ‘왜 다른 사람의 좌석에 앉았는지를 묻는겁니까?’라고 했더니,‘왜 아직 내리지 않았는가’를 묻는다는 통역이다. 서비스 정신에 대한 의식의 차를 단적으로 드러낸 장면이다.
*** 달리는 신간호에서 바라본 후지산 전경 ***
12:06 京都에 도착해 東風버스에 오른다. 교오토역 앞에서 하얀 저고리에 청색 치마를 입은 조총련계 여중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왔는지 손에 손을 잡고 길을 가고 있다. 아사히 신문의 기사가 생각나면서 울컥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 비슷한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렵다. 쫓아가서 ‘나도 너희들과 같은 민족이다. 치마를 찢기우고 희롱을 당해도 기죽지 말고 당당하거라’고 격려해 주고 싶었으나 마음 뿐이다. 인구 250만의 교오토는 800년간 천황이 살아온 도시로 막부 등 실권세력이 지배해 오다가 德天家康이 천황에게 실권을 돌려준 일본 역사에서는 뜻깊은 곳이란다. 지진 때문에 10층 이상의 건물은 짓지 못하도록 시 조례로 지정하고 있다. 물론 옛 것의 보존에도 목적이 있다고 한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많다. 동경에서 이틀을 지내고 온터라 꼭 시골에 온 기분이다. 점심을 마치고 14:00부터 금 1톤으로 칠했다는 금각사를 둘러 본다. 호수에 비친 금빛 절집이 사진처럼 또렷하다. 한 바퀴 둘러 보고 버스에 오르려고 무심결에 오른 쪽으로 갔으나 오를 문이 없다. 습관의 중요함을 깨닫는다.
二條城을 둘러본다. 튼튼하다. 사무라이들의 숨결을 지금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450년전 도꾸가와 에이야스(德川家康)가 豊臣秀吉의 초청에 암살을 우려해 따로城을 지어놓고 오라고 해서 만난 곳이란다. 아무리 날랜 닌자가 침입을 해도 마루가 삐꺽거리는 소리가 들리도록 설계하여 지어 놓았단다. 긴 낭하를 걷는데 계속 소리가 난다. 신기하다. 16:00 平安神宮을 둘러 본다. 온통 붉은 색으로 칠해 놓은 절이다. 이 곳 교오토에는 이런 사원이 수없이 많단다. 날이 무척 덥다. 교오또에서의 일정을 끝내고 오오사까로 향한다. 450만 인구의 거대한 도시다.
*** 금각사 전경 ***
제주도 사람이 많은 이 도시에는 민단 세력이 가장 발달한 곳이란다. 고가도로가 커다란 건물을 뚫고 들어간 모습이 이채롭다. 일본의 교포 70만중 3분의 1이 오오사까에 살고 있다고 한다. 운하가 시내를 관통하고 있다. 오오사까 성을 쌓으면서 필요했던 석재 등을 나르기 위해 건설된 운하라고 한다. 오오사카 시청 건물에는 오후 6시가 넘었는데도 환하게 불이 켜져 있다. 이 곳 大板의 중심지는 우메다이고 미나미는 유명한 환락가로 바가지 요금이 상당히 심한 곳이란다. ‘보행자 천국의 거리’를 지나 또 불고기로 저녁을 떼우고 中津驛(Nakatsu역) 근처의 三井(みつい)アバん) ホテル에 여장을 풀었다. 御堂筋線(Midosuji Line)의 Nakatsu역에서 호텔 1층으로 바로 올라가는 통로가 있다.
저녁식사 후 박형순 과장과 함께 근처를 걷는다. 커다란 현대식 호텔의 야외 휴게소에서 초여름 밤의 오오사까 바람을 즐기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주로 박과장의 지나온 얘기를 담담하게 들었다. 부군 문귀남씨와 열애 끝에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사연과 사무관 승진 시험에 패스하기까지의 어려웠던 시절을 모두 들려준다. 자기의 주어진 생활을 소중하게 감싸면서 살아온 그분을 존경하게 된 밤이다.
*** 二條城 전경 ***
그 중에서도 자녀교육에 온 정성을 쏟아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와 조대의대에 두 아들을 합격시키고 딸은 전남대 미생물학과에 보내고 있다니 정말 훌륭하다. 전남여중과 여고를 나온 재원으로 우리 시교육청의 첫 여성 사무관이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한데 가정까지 완벽하게 꾸려가는 그의 능력이 대단하다. 문귀남 선생은 대동고등학교 교사로 언젠가 교원연수원에서 직무교육을 받을 때 카운셀링 관련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손 끝에도 기억력이 있다’는 말을 믿고 녹음 강의 테이프를 모조리 옮겨 적었다는 얘기와 일천 페이지가 넘는 행정학원론인가를 우직하게 3번이나 읽었다는 얘기도 ….‘정은 날마다 써버리면 없어지니 새롭게 만들어 고리로 이어가면서 살아가야’한단다. 오오사까의 밤은 시원하고 즐겁다.
1994.6.17(금)
전망좋은 17층에서 오오사까를 내려다 보며 아침을 든다. 역시 부페식이다. 빵과 우유, 밥, 소시지가 나의 메뉴다. 송선미씨는 자리가 없어서인지 안쪽 벽의 정물화를 마주보고 혼자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다. 그 뒷모습이 단아하고 아름다워 전체가 한 폭의 정물화로 뇌리에 남는다. 근처의 동양호텔(TOYO HOTEL)은 교포가 운영하는 업소라 한다. 시간이 충분하면 왕인박사 묘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았으나 …. 일본인이 왕인박사를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가도 궁금하지만 유홍준 교수가 ‘왕인박사는 일본인이 존경하고 섬겨야 할 인물이지 한국에서 영웅으로 떠 받들 일은 못된다’고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 써놓은 것을 읽은 기억이 있어서다.
*** 大版 시내 ‘보행자 천국의 거리’ ***
법륭사를 보고 동대사를 본다. 동대사의 사슴공원은 볼만 하다. 먹이를 달라고 밀고 들어오는 사슴이 신기하다. 동대사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송선미양이 입구의 커다란 나무기둥에 서서 우리 일행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멀리서 바라다 본 그녀의 모습은 고독, 외로움, 방랑 등의 어휘들을 연상시켜 준다. 오오사까역은 좁아서 신간호가 서지 못한다고 한다. 간통죄가 없어서 성생활이 비교적 자유분방하다는 나라 일본, 토지를 상속할 경우 60퍼센트 이상의 상속세를 물어야 하는 일본의 현실로는 三代만 가면 소유권이 없어지는 실정이니 사회에 환원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10:00 나라에 도착한다. 백제인이 처음 이 지방을 개발하고, 신라인은 오오사까와 교토지방에 뿌리를 두고 퍼져 나갔다고 한다. 나라의 지형이나 마을 모습, 비닐하우스 등은 꼭 호남지방 모습과 비슷하다. 농가의 채마밭이나 울타리 등도 어쩐지 눈에 익어 보인다. 중고차가 주유소 같은 곳에 여러 대 진열되어 화환에 싸여 있다. 한꺼번에 동남아 등에 수출되곤 한단다.
유일하게 중국 고승이 지었다는 절 “당초제사”를 둘러 본다. 이제 절은 별 감동을 주지 못한다. 날마다 돌아본 곳이 사원이요 절이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14:00 豊中 市役所 本廳 玄關前에서 MS.橋양의 영접을 받는다. 市役所 6층의 교육위원회실에서 인사를 나누고 간단한 만남 의식을 가진 다음 토요나카시의 시화인 장미가 그려진 넥타이 핀과 교육에 관한 자료를 받고 우린 또 인삼주를 선물하였다. 豊中 市立 第11中學校를 찾는다. 교장은 영낙없는 일본인상이다. 타마시립중학교와는 달리 시골이라서 인지 우리네 시골 학교를 찾은 느낌이다. 그러나 인쇄실 기계들은 시골학교 치고는 훌륭했으며, 정박아를 위한 특수학급 운영에도 많은 정성을 쏟고 있었다. 奈라의 天理大學은 일본에서 최초로 韓國語科를 개설한 곳이어서 일본의 한국어 가이드는 대부분 이 천리대학 출신이란다.
1994.6.18(토)
벌써 日本 旅程 마지막 날이다. 오오사까성을 둘러보고 서울로 가는 날이다. 새벽에 일어나 지하철 역과 거리를 둘러본다. 동경보다는 훨씬 더 불결하다. 오오사까성은 튼튼하게도 지어져 있었다. 풍신수길과 토요토미히데요시도 구별하지 못하는 나는 일본의 역사에 관하여는 무지 그대로다. 그런데 오오사까성 안에는 일본이 우리 나라를 침략한 당시의 설명도가 있었는데 지도와 함께 붉은 화살표를 자랑스럽게 그어놓고 반도를 거쳐 명나라까지 죽죽 그어져 있다. 지도를 보면서 가이드가 들려주는 설명은 더욱 가관이다. ‘일본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에 길을 빌려 달라고 했으나 빌려 주지 않아 풍신수길이 가등청정을 시켜 쳐들어 갔다’는 것이다. 가이드에게 그 설명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를 두 번 물었다. 그냥 다 그렇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뭔가 단단히 잘못 되었다 싶었으나 어디 잘못된 것이 그뿐이랴 싶어 마음을 다시 방랑자의 그것으로 되돌리려 애쓰고 만다. 오오사까성의 8층에서 내려다 보는 시가지는 참 넓다. 공항에서 점심을 마치고 면세점에서 선물들을 산다.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15:30분 한국으로 이륙한다. 창가에 자리를 잡았으나 비구름으로 전망이 없다. 맥주를 마신다. 日本땅을 떠나온 지금 한잔 마시지 않고서는 베길 수 없는 감정을 어쩔 수 없어서였다. 수도물을 마음 놓고 마실 수 있는 도시 동경, 아무 곳에나 물건을 놓아 두어도 잃어버릴까 두리번 거리지 않아도 되는 곳, 밤거리를 거닐면서 무서워 하며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곳을 나는 며칠 간 다녀 온 것이다. 그런 곳이 정말 있었다. 나보다 타인의 감정을 더 생각하여 소근소근 작은 목소리로 주고받는 대화가 생활화되어 있는 곳을 보고 온 것이다. 살벌한 칼잡이들이 키워온 나라도 그렇게 해나가고 있는데 문민을 자부해 온 조선조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맥주 한 캔을 다 들이킨 이유이다. 누가 범인인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일성인가? 미국과 소련인가? 분단인가? 모르겠다. 그냥 ‘우리 모두’ 때문이라고 해두자. 속이나 편하게 ….
많은 것을 느낀 6일 간이었다. 인생을 흘러가는 여행자의 아름답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아 가고 싶다. 물 흐르듯이 바람부는 대로 自由스럽게 말이다. 또 있다. 어학이다. 영어 하나 쯤은 유창하게 구사하고 싶다. 생활하다 지치면 훌쩍 비행기를 탈 수 있었으면 해서다. 혼자서 혹은 둘이서만 말이다. 벌써 비행기는 김포에 닿는다. 내리자 마자 억센 우리의 말투와 더운 기운이 후끈 얼굴을 덮는다. 일본이 아무리 잘 정돈되고 질서있는 나라라 해도 내가 호흡하고 살아가야 할 곳은 대한민국임을 퍼뜩 깨닫는다. 일본 컴플렉스를 벗어나려면 얼마 간의 시간을 소비해야 할까? 국내선으로 옮아 타고 송정리 공항에 도착하니 비가 온다. 집대문에 이르니 동경에서 아내에게 보낸 엽서가 비에 젖어 뒹굴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