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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1129일의 일지 (1950. 6.25 ~ 1953. 7.27)
* 이중근편저 <부영그룹 회장>
- 동 책의 내용 중에 참고 될 만한 내용만을 발췌하여 일자별로 메모해 봅니다.
그래서 동 내용을 청우회 카페에 올릴 것입니다.
- <주> 1943년 11월 23일 카이로회담에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의 자유 독립’이 약속됐고, 이후 이를 재확인했다.
1950년 10월 1일(일) 아주 맑음
<전황>
-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 북한군(김일성)에 항복 촉구
- 국군(제3사단 수도사단), 38선 돌파
- 북한군, 38도선 방어 작전 전개
- 김일성, 마오쩌둥에게 파병 요청
<국내>
- 6.25 남침 수습 비상경비예산안(10월분) 통과
- 경남지구계엄사령관, 사회부장관, 경상남도지사, 피란민 귀향조처 공동 발표
- 북한 수복지구의 치안확보 및 전선 후방의 보급 확보 위해 경찰력 15,417명 대폭 증원
<해외>
- 오스틴 미국대표, 이날부터 유엔안보리 의장에 취임
- 맥아더 원수, 김일성에게 항복 요구
1950년 10월 2일(월) 아주 맑음
<전황>
- 국군 제3사단, 38선 돌파하고 양양 점령
- 국군 제6사단은 춘천, 제8사단은 양평을 각각 탈환
- 유엔 해병대 제7연대, 의정부에 맹공 개시
<국내>
- 신익희 국회의장, 국회의 서울 환도에 대해서 담화
- 이기붕 서울시장, 서울 수복을 계기로 공유재산 반환과 부역자 신고에 대한 포고 발표
- 정일권 계업사령관, 국가 재산에 대한 불법 점유, 파괴 엄금 포고문 발표
1950년 10월 3일(화) 흐림
<전황>
- 국군 제3사단 선두부대, 고성에 도달
- 미 제1기병사단, 의정부 돌입
- 국군 제6사단, 춘천 남방에서 북상, 38선 돌파 준비
- 국군 제2군단, 서울 입성
<국내>
- 서울 시내 각 은행 업무 재개-시중은행 및 금융조합 영업 개시
- 원주 지구, 철도 기관 수복
- 이준식 경인지구 계엄사령관, 전시범ㅈ히 처벌에 대한 포고문 발표
1950년 10월 4일(수) 흐림
<전황>
- 국군 제3사단, 38선 이북 고성 점령
<국내>
- 김완용 계엄사령부 민사부장, 구 공산당 관련 가옥의 불법 무단 검거행위에 대해 경고
<해외>
- 유엔 정치위원회, 38도선 북진 전 한국 자유선거에 해한 서방 8개국 공동 결의안 가결
- 연합군 최고사령부 대변인, 미 제3사단이 미국 서해안에서 한국 향발
- 인도, 황마포대 40만개 한국 제공
1950년 10월 5일(목) 아주 맑음
<전황>
- 국군, 구만리 발전소 탈환, 북한군 포로 200명
- 유엔 해군, 한국 해역 부유 기뢰 폭파작업 전력 경주
<국내>
-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정부의 교통사업 특별회계 국고 채무 부담행위(한도 2,300만원) 안을 원안대로 결정 승인
<해외>
- 유엔총회 운영위원회, 타이완의 장래문제를 총회에 상정하자는 미국 측안 가결
- 북한 소련 간 무역인도조건협정 체결
1950년 10월 7일(토) 맑음
<전황>
- 한국군 4개 사단, 38도선 통과 북진 계속
- 미군부대, 오후 5시 14분 처음으로 38선 넘어(월경) 북진
- 미 제1기병사단, 개성 점령
<해외>
- 유엔 총회, 유엔군의 38도선 북진을 허가하는 서방 8개국 제안을 통과(10.7 통한 결의)
- 인도 정부, 한국 7개국 위원회에 불참가 표명
1950년 10월 8일(일) 흐림-비
<전황>
- 국군 제3사단, 원산 남방 12km까지 상음리 진출
- 국군 제6사단, 화전 진출
- 국군 제6, 7사단, 북진 계속, 일부는 평양 원산 철도 차단
<국내>
- 국회 본회의, 신익희 국회의장의 사임 반려키로 결의
- 정부, 6.25당시 정부 천도 사정을 ‘서울 시민에게 드림’이라는 담화 발표
<해외>
- 중공군, 동북변방군을 ‘인민지원군’으로 개편 및 출병 명령 하달
1950년 10월 10일(화) 맑음
<전황>
- 국군 제3사단, 오전 원산 및 명사십리비행장 점령
- 국군 해병 제1육전대, 순천 점령, 국군 해병 제2육전대, 고흥 점령
<국내>
- 국무회의, 유엔총회의 10월 7일 한국에 대한 결의안 일치 승인
- 대한민국 정부, 미국에 행정 복구 전문요원 지원 요청
<해외>
- 중국 소련협상, 중국 출병에 다른 소련 공군 지원 문제 협의
- 트루먼 대통령, 맥아더원수와 회견 앞두고 ‘통일 민주한국’건설하겠다고 성명 발표
- 프랑스 정부, 인도지나에 연방상과 모로코 총통을 파견, 필요조치 행사권한 부여
1950년 10월 11일(수) 흐림-비
<전황>
- 김일성, 북한군에 최후 저항명령 하달
- 국군 제6,7,8사단, 평강 돌입
<국내>
- 문교부, 이북 각지에 학교행정책임자 배치관련 이북 5도 사무국장 회의 소집
- 윤영선 농림부장관, 양곡대책에 관하여 국회 보고
1950년 10월 13일(금) 흐림-비
<전황>
- 유엔군, 해주시와 철원 탈환
- 국군 제3사단, 문천 탈환
- 미 제1기병사단, 김천 탈환
- 미주리호를 선두로 한 37척의 함대, 함북 해안일대 폭격
<국내>
- 국회, 부역자 처리법 등 확정 가결
- 이승만대통령 내각, 전국 총선거실시의 유엔한국위원회의 계획 거부
1950년 10월 14일(토) 맑음
<전황>
- 국군 제1사단, 신계 점령 후 고원 탈환하고 곡산 점령
- 국군 제3사단, 영흥 도달
- B29전폭기 30대, 평양-신의주간 교통시설에 집중 폭격
<국내>
- 정부, 유엔한국위원회의 전국 총선거 실시 계획안 거부
- 조정환 외무부차관, 유엔 한국임시위원회의 북한행정 유엔귀속 결정에 항의
1950년 10월 16일(월) 비-흐림
<전황>
- 중공군 선발대 압록강 도하,
- 유엔군, 정평 점령, 평양 포위선 점차 압박
- 영국 오스트레일리아군, 김천지구에서 북한군 8,000~10,000명 소탕
<국내>
- 정부 환도 후 중앙청 첫 조례
- 교통부 직제, 전시편제를 전쟁 이전으로 환원 공포
- 서울시 각 초등학교 수복 개교
1950년 10월 17일(화) 맑음
<전황>
- 중공군 지원군 본대, 압록강 도한 재차 유보
- 국군 수도사단, 함흥 흥남 탈환
- 북진한계선, 선천-성진선으로 확대
<국내>
- 정부,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 증거 발표
- 이승만대통령, 유엔 결의 원칙에 의한 북한 통치 선언, 수복지구 행정관 파견을 언명
<해외>
- 유엔경제사회이사회, 미국대표가 한국부흥기관 설립 계획안 제출
- 덜레스 미국대표, 7개국안 토의 요청, 강력한 평화계획달성에 거부권 없는 국제기구 조성을 조속히 달성하기 위한 목적
1950년 10월 19일(목) 흐림-비
<전황>
- 중공군 본대 압록강 도하 개시
- 유엔군과 국군(국군 제1사단, 미 제1기병사단), 평양 점령, 비행장 재 개시
- 국군 수도사단, 홍원 탈환
<국내>
- 윤영선 농림부장관, 농지개혁은 게속 실시하라는 담화 발표
- 금융통화위원회, 임시부흥본부의 설치 승인
- 한강가교 준공식 거행 재개통
<해외>
- 유엔 신임사무총장 선거에 인도 제안을 소련 지지
- 유엔정치위원회에서 평화 협조안 가결
1950년 10월 20일(금) 비
<전황>
- 유엔군 3개 사단, 대동강 도하
- 38도 10분선 이북,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이 담당
<국내>
- 이승만 대통령, 평양 탈환 치하
- 윤영선 농림부장관, 농지개혁을 법률에 따라 단행하도록 언명
1950년 10월 21일(토) 비-흐림
<전황>
- 국군 수도사단, 40도선 돌파
- 미 제1기병사단, 순천지역에서 미 제187공수연대와 합동작전 개시
- 미 제1군단, 평양에 군정 실시
- 미 제1군단 소속의 군 정부, 평양에 창립
<국내>
- 평양에서 구출된 미군 3명 김포 도착
- 평양방송, 수도를 신의주로 이전했다고 방송
- 서울시 병사수사령부, 제2국민병 병적계 실시 공고
1950년 10월 23일(월) 맑음
<전황>
- 미 제1군단, 청천강 도착
- 미 제1기병사단사령부, 엘모베스 대령을 평양시 군정관에 임명
<국내>
- 이승만 대통령, 외신 회견에서 대한민국이 북한 통치 실시중이라고 언명
- 한강교(A선) 가선 복구 개통
- 조선일보 속간, 조간 2면 타블로이드판 발행, 임시정가 1부 30월
1950년 10월 25일(수) 맑음
<전황>
- 국군 제8사단, 구장동 진입, 국군, 박천, 서천 점령
- 영연방 제27여단, 청천강 도하 완료
<국내>
- 이승만 대통령, 평양방문 환영시민대회 개최, 대통령 불참
- 전쟁으로 서울 인구 24만 3,532명(17%), 6만 2,987가구 감소
- 평양에 교통부 파견대 설치
1950년 10월 26일(목) 흐림-맑음
<전황>
- 중공군본대 추가(제50군, 제66군) 압록강 도하 개시
- 국군 및 유엔군, 박천 태천 운산 온정리 희천 이원까지 진격
<국내>
- 침범지역내 금융기관 예금에 대한 특별조치령 공포
- 경부선, 민간인 수송열차도 재개통
- 우루과이, 모포 7만매 원조 제공
1950년 10월 27일(금) 아주 맑음
<전황>
- 국군 수도사단, 황수원리 점령
- 미 제24단 일부, 태천으로 진격, 미 제1기병여단, 마천령 점령
- 유엔군, 평양 북방 80km 박천에서 대령강 도하
- 국군이 안주에서 잡은 중공군 포로, 중공군 2만명 입북설
<국내>
- 정부 행정관서, 서울로 복귀, 평양 탈환 경축대회
<해외>
- 유엔군 사령부, 각국 군대는 북한군을 소탕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지역에 진격할 것이라고 언명
- 마오쩌둥, 인민해방군 제9병단 한국전 투입 비준
- 미 정부 대변인, 대일강화에 관한 미국 사안을 소련 검토 후에 재 회합
1950년 10월 29일(일) 맑음
<전황>
- 미 제7사단, 원산 북방 280km의 이원 상륙
- 미 해병대, 원산 남방 48km의 고저 점령
<국내>
- 이승만 대통령, 평양 방문
- 영월 당일리 두 발전소 건재와 화천발전소 확보, 전력난 해소
1950년 11월 1일(수) 맑음 - 130일차
<전황>
- 미 제10군단 부대 및 미 베7사단 소속 부대, 잔적 공비 소탕하고 계속 북진 국경선 61km 지점 도달
- 미 선두 부대, 서부전선에서 소련기 비호하의 북한군 격퇴, 한 만국경선 30km 이내 도달
<국내>
- 국회 제41차 본회의, 계엄령 해제 요구안, 위원회 심사에서 보류 결정
- 담배 값 인상, 백학 500원, 공작 300원
<해외>
- 유엔총회, 리 유엔사무총장의 임기를 3년 연장하려는 15개국 제안 가결
- 프랑스군, 중월국경 서북방에 고립된 라우케시에 대한 호치민군의 중압을 배제하고 계속 진지 확보
1950년 11월 5일(일) 흐림
<전황>
- 국군, 명천 길주 탈환, 북위 41도선 돌파
- 미 제3사단, 원산에 행정적 상륙
<국내>
- 미 제8군사령부, 중공군 2개 사단 참전 공식 확인
- 전국 공업시설 피해액, 미 경제협조처와 상공부 조사로 760억원
- 평남지구 유엔군 민사부장 만스키 대령, 평남지구 행정 형태는 군정이 아님을 언명
1950년 11월 6일(월) 아주 맑음
<전황>
- 국군, 명주 도달
- 소련제 신형 전투기, 최초로 한 만국경 넘어 참전
- 제6사단 제7연대, 초산에서 개천으로 철수 완료
<국내>
- 이승만 대통령, 중공군 참전은 ‘소련의 사주’라고 기자회견에서 언급
- 김창룡 군 검 경 합동수사본부 책임자, 현안에 대해 기자와 간담
<해외>
- 오스틴 유엔 미 대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을 유엔에 공식 통고
- 영국, 중국 승인 취소설 부인
1950년 11월 7일(화) 맑음
<전황>
- 유엔군, 청천강 북안 교두보 확대
- 캐나다 파견부대, 부산 도착
<국내>
- 청천강, 피난민 2만명으로 인산인해
-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 받은 부역자 23명 사형집행
- 벨기에, 설탕 400톤 원조 제공
1950년 11월 8일(수) 아주 맑음
<전황>
- 국군, 명천 북방에서 20KM 진격
- 미 제24사단, 제27보병연대, 박천 진격
- 미 제2사단, 덕천 점령
<국내>
- 이승만 대통령, 전 국민에 ‘전 민족의 정신통일 요구‘ 경고
- 장두관 경남자구 계엄민사부장, 무기 불법소지자 엄단 경고
<해외>
- 유엔경제사회이사회, 미개지 토지개혁안 가결
- 유엔안보리, ’한국전 개입‘에 관한 중국대표 설명 듣자는 영국 제안 가결
- 번스 전 국무장관, 남캘리포니아주지사 당선
- 미 의원선거, 중간 결과 민주당 세력 대폭 감퇴
1950년 11월 9일(목) 아주 맑음
<전황>
- 국군, 명천 북방 용천동 진출
- 맥아더 유엔사령부 대변인, 중공군 504ㅐ 사단 만주에 집결 대기 중 언급
- 유엔 참전국, 공동성명을 통해 중공군의 철수 요구 및 유엔군의 만주 불침 공약
<국내>
- 서상환 검찰총장, 가능한 한 부역자를 관대히 저리할 방침 천명
- 정부 대변인, 중국 참전에 대해 총궐기 총진군 강조
1950년 11월 12일(일) 아주 맑음
<전황>
- 국군, 철원 김화에서 패잔 북한군 부대 섬멸
- 공군 참모부장 박범준 준장, 함흥 부근 상공에서 작전 지휘중 전사
<국내>
- 서울-대동강 열차 이날부터 개통
- 장창국 헌병사령관, 합동헌병대 본부장 겸임
- 서울-평남 대동 간 열차 개통
<해외>
- 월레스(H. Wallace) 전 미 부통령, “소련과 중국이 평화 희망을 길제로 행할 때까지
미국은 무력증강을 해야 한다”라고 담화
1950년 11월 13일(월) 맑음
<전황>
- 국군, 명천 북쪽 용천동 일대에서 북한군과 대치
- 미 제1기병사단, 영변 일대의 3개 고지 탈환
<국내>
- 국회, ’부역행위 특별처단법‘ 확정 가결
- 이승만 대통령, ’전란 복구‘에 전 기술자 공동협동 요망
<해외>
- 티베트, 중국의 침공을 조정하도록 유엔에 직접 제소
- 타이완 국민정부, 마오쩌등 김일성 스티코프 소련 대사, 선양 회담 사실 보도
- 미국, 미개발지경제정책안 작성, 소련의 침략기도 제지가 목적이라고 천명
1950년 11월 15일(수) 맑음, 흐림
<전황>
- 미 제1기병사단, 정찰대가 영변 돌입
- 유엔군, 청천강 동쪽에서 북한군의 강한 저항에 직면
- 북한군, 북한 요지에 포진한 유엔군 전선 중앙부를 6km 침투
<국내>
- 정두관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농지 개혁 계속 추진 담화
- 놀런드 미 상원의원, 한국전선 시찰
1950년 11월 16일(목) 흐림
<전황>
- 유엔군, 혹한 무릅쓰고 총공격, 중공군 한·만국경지대로 후퇴
<국내>
- 국회, 정부미곡 매상안 통과, 수향 180만석으로 석당 가격 8,000원
- 정일권 참모총장, 민성함과 관련하여 경고
- 동대문에서 종로 사거리 화신가지 전차 운행 부분 재개
<해외>
- 트루먼 대통령, 미국은 전쟁의사가 없고 극동의 평화는 중국 태도 여하로 결정된다고 언명
1950년 11월 18일(토) 비·맑음
<전황>
- 북한 게릴라, 춘천지방에 진입하여 준동
- 미국 공군 약 100회 출격, 해군기는 241회 출격, 미 제7사단 옹호하며 혜산진 교량 폭격
<국내>
- 이승만 대통령, 향토방위대(3만 5,000명) 결성식 공식 석상에서 유시
- 신성모 국방부장관, 완충지대 만주에 설치 요구
1950년 11월 19일(일) 아주 맑음
<전황>
- 동해안 방면의 국군 수도사단, 소련국경 향해 진격
- 미 제7사단, 갑산을 지나 국경선까지 20km 지점에 육박
<국내>
- 정부, 산림보호 포고
- 신성모 국방부장관, 유엔신한국위원회 환영차 도쿄에 갔다가 귀환
<해외>
- 엘살바도르 대표, 중공군의 테베트 침공을 탄핵하라고 유엔에 요청
- 영국 적십자사, 한국의 민간구제사업 원조 위해 한국에 적십자군 파견 결정
1950년 11월 20일(월) 맑음-흐림
<전황>
-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7사단, 한 만 국경으로부터 3km 이내 지점에 돌입
- 국군, 명천 북방 25km 지점에 도달, 동해안 최대 항구인 청진항까지 불과 33km
<국내>
- 제 2국민역, 등록 일제 실시
- 서울시 경찰, 부역자 검거수 현재 1만 4,000여 명
- 노방주 외 248명, 국군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에 의한 희생 사건 발생
1950년 11월 22일(수) 아주 맑음
<전황>
- 미 제7사단, 풍설을 무릅쓰고 혜산진으로부터 서남방 16km 지점인 삼수 향해 진격
- 국군, 서북전선에서 영월 탈환, 국군 제2군단 소속의 다른 사단은 덕천 북방 8km 내지 10km 지점에 진지 구축
<국내>
- 이승만 대통령, 함흥 지구 시찰(2회째) 하고 귀경
- 이승만 대통령, 후임 총리로 장면 대사를 국회에 인준 요청
- 전쟁 피해 상황, 인명 피해 47만명, 재산 피해 2조 7만 1,184억원
1950년 11월 23일(목) 맑음
<전황>
- 경찰, 거창군 북산 위천지구 게릴라 소탕작전에서 사살 119명 생포 7명
- 태국 육군, 유엔군으로 참전
<국내>
- 이승만 대통령, 미국 추수감사절에 즈음하여 메시지 전달
- 국회, 장면 국무총리 인준
<해외>
- 유엔, 타이완 국민정부 측의 소련 비난안, 소총회에 회부 결정
- 미 경제협조처 처장, 경제협조처 원조로 공산중의 침공에 놓인 아시아를 보호할 것이라고 언명
- 베빈 영국 외무장관, “유엔군은 중국 정권을 보장할 것이니 한국 침법군 조속히 철수하라” 라고
중국 외교부장 저우언라이에게 메시지
1950년 11월 24일(금) 아주 맑음
<전황>
- 국군 수도사단, 청진 남쪽 11km 이내 육박
- 국군은 서부전선의 좌익 담당, 공산군의 집결지 태천으로 진격
<국내>
- 이승만 대통령, 유엔의 내정간섭 불허 언명
- 정부, 국민 방위군 설치법안 국회에 제출
- 이광선 부산지구 헌병대장, 군수물자 매매 단속 발표
<해외>
- 중국인민지원군 정치부, 제2차 전역 정치운동령 배포
- 워싱턴 외교 고위관리자, 한국전선에서 유엔군의 총공격은 단호한 유엔 결의 표명, “실력의 시위로 평화적 해결
기대한다”라고 언명
- 소련, 미국의 대일강화조약 제안에 대하여 이의 제기, 류큐 열도 등을 미국이 주관하는데 반박
1950년 11월 25일(토) 아주 맑음
<전황>
- 동부전선의 수도사단은 청진, 제 3사단은 백암 점령
- 동부전선의 미 제3사단, 중공군 제 126사단과 접전
- 중공군, 서부 및 중부전선에서 미 제8군 대공세에 60만병력의 인해전술로 총반격전 개시
<국내>
- 포로심사위원회 규정 (대통령령 제486호) 공포
- 정부 추가경정예산안(제5회) 통과, 정부 예산안 총액 2,438억원
- 유엔 한국통일재건위원단 단장에 파키스탄의 지아우딘 임명
1950년 11월 26일(일) 맑음
<전황>
- 국군, 청진에 돌입 시 탈환 후 12km 북진, 또 다른 국군은 합수에 도착
- 공산군, 덕천 점령
<국내>
- 국회, 추가 예산안 통과, 추곡 매입가 고시, 문화시보 창간
<해외>
-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 일행 12명 서울 도착하여 단장 입국 성명 발표
- 베이징 시 인민원조지원팀, 수술부대 파견, 한국전선으로 출발
1950년 11월 27일(월) 맑음
<전황>
- 미 제25, 2사단, 서부전선의 미 제8군에 대한 중공군의 반격 저지
- 공산군 영원 점령, 국군 제2군단의 영원방어선 붕괴
<국내>
- 이승만 대통령, 신임 보건부장관 오한영, 공보처장 이철원 임명
- 전쟁구제봉사단, 중고 의류 100만 달러 상당액의 원조 제공
1950년 11월 28일(화) 맑음-흐림
<전황>
- 국군, 청진 탈환 뒤 계속 북진, 연천지구에서 600여 명의 북한군 사살
- 동부전선 청진지구에서 국군, 적의 반격 없이 전진, 중서부전선에서는 중공군 북한군의 압박으로 첨차 후퇴
<국내>
- 합동수사본부(김창룡대위 지휘), 북악산 유격대 색출, 공비 240명 체포, 무기 80여정 압수
1950년 11월 29일(수) 눈 맑음
<전황>
- 중공군, 장진호 서북 안변 일대에서 미 해병대를 야습했으나 실패
- 한국 지원 유엔 파견국, 지상군 13개국, 해군 10개국 항공부대 4개국 수송부대 7개국
<국내>
- 조병옥 내무부장관, 유엔신한국위원회와의 협의는 “주권 회복이 주제”였다고 발표
<해외>
- 유엔사령부 한국경제 원조국장, 역병 기아 및 불안 제거 위해 원조물자 계속 수송중이라고 언명
- 임병직 외무장관, 유엔안보리에 참석, 중국의 침입은 침략행동, 철수 요구
- 오스틴 미 유엔대표, 6개국 결의안 토의 요청
- 영국, 미국 프랑스의 협조하여 한국문제 해결에 노력하기로 입장 표명
1950년 11월 30일(목) 맑음
<전황>
- 국군 제3사단 제22연대 제3중대 혜산진 진출
- 유엔군, 신안주비행장에서 철수
- 철원 가평 일대에서 공산군 잔적, 국군과 경찰대에 지리멸렬
<국내>
- 조세임시증정법 법률 제154호 공포
- 월평균 서울 소매물가지수 860.3 (1947년=100), 부산 720.1
<해외>
- 소련, 한국으로부터의 중공군 철퇴안(6개국 결의안)에 거부권 행사
- 미국, 소련과 그 위성국에 전략물자 수출 금지 고려
- 미국 여론, 한국사태의 결정적 단계에서 원자탄 사용, 조기사용에는 반대 의견 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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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1일(금) 아주 맑음 --- <160일차>
<전황>
- 동북부 전선의 미 제10군단(미 제7사단 미 제1해병사단), 중공군 포위 속에서 장진호 철수 작전 개시
- 미 제8군, 제24사단 제5연대 및 영국 연방군 1개 대대의 지원으로 청천강 교두보에서 철수
- 평양지구 헌병대, 평양에서 우언비어 유포 혐의자 500여 명 검거
<국내>
- 사형 금지법 (법률 제156호) 공포
- 전차 이용료, 20원에서 60원으로 인상
<해외>
- 유엔 각국 대표, 트루먼 대통령의 원자탄 사용 언명에 중국의 한국에서의 평화적인 철수 방안 강구 제안
1950년 12월 2일(토) 아주 맑음
<전황>
- 장진호에 중공군 압력 가중, 미 해병대와 치열한 전투
- 미 제7사단 소속 제31 제32 보병연대, 하갈우리로 후퇴
<국내>
- 이승만 대통령, 임시토지수득세 물납세 실시에 특별협조 요청
- 부산-경주 열차 정상 운행
1950년 12월 3일(일) 눈 흐림
<전황>
- 동부전선, 중공군 약 6개 사단이 미 해병대와 보병부대 포위하여 격전
- 장진호 부근에서 중공군, 미군 포로 27명 석방
- 서부전선 유엔군, 순천 숙천에서 철수, 중공군 평양 목표로 남하 태세
<국내>
- 이승만 대통령, 현금 납세는 곡물정책에 차질을 초래하므로 지세현물납세에 특별 담화 발표
- 이승만 대통령, 각 부락까지 무장 촉구하는 대국민 메시지 발표
- 신성모 국방부장관, 유엔에 원폭 사용 요청
1950년 12월 4일(월) 아주 맑음
<전황>
-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중국이 북한에 100만 대군 집결 중이라고 언명
- 서부전선의 우익에 대한 중공군의 침투 계속
- B26 경폭기, 유엔군의 철수 옹호, 공산군 폭격
<국내>
- 유엔신한국위원회, 정부위원과 비공식 회의
- 인천항에 적재된 구호양곡, 창고 내 외국쌀 2,519톤, 압맥 1,358톤, 야적분 3,152톤
<해외>
- 인도대표 중국대표 간에 회담 계속, 각국 대표는 회담 결과를 초조하게 대기
- 캐나다대표, 캐나다 외무장관의 연설문 인쇄지 유엔 본부에서 각 회원에게 배부
- 요시다 일본 수상, 일본은 한국에 의용군 파견 불허한다고 언명
1950년 12월 5일(화) 맑음
<전황>
- 미 제7사단, 혜산진에서 신흥리로 철수 완료
- 미 제5공군, 24시간 출격, 서부전선에서 중공군 2,500명 잔멸
<국내>
- 신임 유엔한국위원회 의장 펜데이스톤 대표, 서울시민에게 최대 원조 공약
- 국립박물관, 중요물품 부산으로 소개 명령, 출발
1950년 12월 6일(수) 맑음
<전황>
- 장진호 부근의 유엔군, 중공군의 포위망 돌파, 후방전선과 연결 성공
- 곡산 재탈환
<국내>
- 순국열사 유가족에 대한 국가부조 재개
-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 이승만 대통령 방문
<해외>
- 유엔총회에서 미국 등 각국 대표, 중국의 불법침략 규탄, 한국문제 일대 선전
- 유엔정치위원회, 중국의 즉시 철퇴 요구 포함한 6개국 신 결의안 상정
- 엣삼 파샤 유럽연맹 사무총장, 한국의 정전명령 선포를 이 유엔 사무총장에게 제출
- 트루먼 대통령 에틀리 수상, 중국 유화정책은 불가라고 언명, 북대서양동맹 각국의 군사력 강화에 합의
1950년 12월 7일(목) 눈, 흐림
<전황>
- 유엔 공군, 장진호 좌측 맹폭, 동북전선의 유엔 구출작전 진척
- 유엔 해군, 원산지구 함포사격, 서해안에서는 영국 네델란드 함대가 작전
<국내>
- 허정 사회부장관, 사회부 기구를 전시체제로 개편 피력
- 전쟁구제봉사단, 100만 달러 상당의 중고의류 원조 제공
1950년 12월 8일(금) 흐림
<전황>
- 장진호의 미군, 혈로 타개에 치열한 전투 전개, 미 해병대와 미 제7사단 소속부대는 고토리까지 탈출
- 유엔군과 국군, 겸이포-중화-수안-곡산-신계선에서 방위진지 구축
- 고토리 남방 80km에서 중공군과 격전
<국내>
- 이승만 대통령, 미국에 한국군 50만 병력 무장 요구
- 계엄사령관, 부녀자 소개는 자유라고 언명
1950년 12월 9일(토) 맑음
<전황>
-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 흥남에서 미 제10군단 해상 철수, 부산 마산 울산으로 부대 이동시켜 미 제8군사령관 지휘 하에
편입하라고 명령
- 혜산진에 돌입한 미 제7사단 소속 제17연대 국군 소속부대, 중공군에 포위
<국내>
- 서울시 경찰국, 초비상경계 실시
- 비상계엄지역 내에 한해 체포나 기타에 영장 불필요
- 워커 미 제8군사령관, ‘서울을 포기하지 않는다’라고 서울 방위 언명
<해외>
- 중국에게 38선 정지를 호소한 13개국 대표 불참
- 임병직 외무장관, 유엔정치위원회에서 유엔의 중국에 대한 유화책 내지 굴복은 부당하다고 연설
1950년 12월 10일(일) 아주 맑음
<전황>
- 동부전선의 유엔군, 장진호 등지에서 중공군 포위망 뚫고 흥남 도착
- 황해도 서해안 일대의 패잔 북한군, 안악 방면 집결
<국내>
- 50만 북한 동포, 자유 찾아 남하 피란
- 북한 동포 피란민, 연백에 집단 수용
<해외>
- 리 유엔 사무총장, 중국과의 타협 가능을 기대한다고 언급
- 영국 캐나다 양국 수상 회담, 세계정세 합의
1950년 12월 11일(월) 맑음 흐림
<전황>
- 장진호 철수 작전 완료, 중공군 3개 사단 격파
- 미 제1해병사단, 유담리에서 흥남으로 철수 완료
- 중공군, 곡산 수안 신계 도달
<국내>
- 이승만 대통령, 수도 서울 사수 언명
- 임시국회 제1차 의회 개최, 행방불명자 제외한 국회의원 현 재적인원 178명
1950년 12월 12일(화) 맑음 흐림
<전황>
- 미 제8군사령부, 유엔군 38선 이북에서 작전 중이라고 발표
- 유엔군, 흥남에서 해상 철수 개시
- 국군, 연천 방면에서 포천 방면으로 남하하는 북한군과 격전
<국내>
- 이승만 대통령, 중국과의 타협 거부 기자단에 언명
- 아동구조연맹, 중고 및 신의류 5,033달러 상당의 원조 제공
1950년 12월 13일(수) 흐림
<전황>
- 이천 신계 방면의 공산군, 유격대와 합류하여 남진 기도
- 국군, 화천 사창리 양구 방면의 공산군 제25 35연대의 공격 저지
- B29 전폭기, 평양 폭격
<국내>
- 상공부, 점령 하 전력요금 면제 경감 징수 지시
- 사회부, 비전투원 소개방침 발표
<해외>
- 유엔총회, 서남 아프리카령 관리기구 설치 가결
- 마오쩌둥, ‘인민지원군은 반드시 38선 이남으로 전진하라’라고 펑더화이에게 답신 전보
- 트루먼 대통령, 양당 및 정부 요인, 미 군사력 증강에 합의
1950년 12월 14일(목) 맑음
<전황>
- 미 해병대 2만 5,000명과 미 제7사단, 중공군 포위망 탈출하여 흥남 교두보로 철수
- 이천-철원 연결하는 산악지역의 국군, 북한군과 대치하고 사창리 화천 양구에선 격전
<국내>
- 정부 발표, 인천항에 체화된 구호양곡은 외국쌀 맥분 등 2만 2,867톤
<해외>
- 유엔총회, 13개국 한국정전결의안에 의하여 3인 위원회 설치안 채택, 임명 가결
1950년 12월 15일(금) 아주 맑음-흐림
<전황>
- 중공군, 동부전선의 유엔군 교두보에 집단 공격, 미 제10군단의 반격으로 거의 격멸
- 중공군 대부대, 평양지구 남쪽에서 남동쪽으로 이동
<국내>
- 이승만 대통령, 국민총궐기를 요망하는 격려사 발표
- 정부, 국회에 부역행위특별처리법 개정안 제출
1950년 12월 16일(토) 눈-흐림
<전황>
- 미 제10군단, 흥남 교두보 방어 및 해상 철수 작전
- 서부전선에서 유엔군과 북한군 접전
<국내>
- 국민방위군설치법안 국회 수정안대로 통과
- 유엔총회 정전안 지지 메시지 국회에 통과
- 니카라과, 쌀 100톤 주정 5,000kg 원조 제공
1950년 12월 17일(일) 아주 맑음
<전황>
- 평양지구 중공군, 별다른 변동 없음
- 북한군, 공백지구 계속 남하하여 신진지 접근 기도
<국내>
- 장두관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총기 취급에 관해 경고문 발표
<해외>
- 유엔 3인위원회 회합
- 에치슨 미 국무장관, 브뤼셀 향발
1950년 12월 18일(월) 맑음-눈
<전황>
- 흥남 동북 지역 공산군, 북한군으로 확인
- 국군 제1군단, 흥남에서 해상 철수하여 묵화 상륙
- B29 전폭기, 진남포-신안주 간 공산군 야영지 폭격으로 피해 심대
<국내>
- 미 국무부, 한국의 공산부역자 처리에 주의 환기
- 뉴질랜드 야포부대 선견대, 부산 입항
1950년 12월 19일(화) 흐림-눈
<전황>
- 유엔군, 흥남 교두보 방위진지 강화 중 공산군 공격의 점증에 포격으로 저지
- 서해안-양양 간 전방위선 완성
- 유엔 해군 공군 화력, 중공군 진출 저지, 미조리, 랜트 쏠, 로체스터 함선 참가
<국내>
- 조병옥 내무부장관, 방공훈련에 각계 협력 요망
- 거제도에 피난민수용소 건축, 부산시내에 천연두 발생
<해외>
- 유엔평화감시위원회, 미국대표 그로스 대사 임명
-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콜롬비아의 보병대대 한국 파병 승인
1950년 12월 21일(목) 눈 – 맑음 <180일차>
<전황>
- 북한군 3개 대대, 춘천 북방에서 공격
- 미 해군 로켓함 최초로 행동 개시
- 동부전선의 유엔군 교두보, 북쪽에 대한 북한군(2개 사단 배후에 중공군 3개 사단 존재) 공격 계속
<국내>
- 정부, 국회의원 재적수에 관한 특별조치법 (법률 제173호) 공포
- 경남지구 병사구사령관, 월남 피란장정의 강제징병 없다고 언명
- 북한군, 평양방송 재개
<해외>
- 이범석 주타이완 대사, 타이베이행
- 마오쩌등, 한국전쟁 정세와 작전부대에 관하여 펑더화이에게 전문
1950년 12월 22일(금) 눈-흐림
<전황>
- 연천-김화, 김화-화천지구에 상당수의 중공군 집결 이동
- 미 제5공군의 전과, 연 출격 250대, 공산군 사상 250명, 파괴 건물 102동
<국내>
- 통신부령 13호에 의거, 육군중앙야전우체국(육군본부 내) 및 해군중앙야전우체국(해군본부내) 개설
1950년 12월 23일(토) 흐림
<전황>
-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 전선 시찰 도중 의정부 남쪽에서 지프 사고(전사)
- 연천 김화 화천지대에 상당수 중공군 집결
<국내>
- 이승만 대통령, 주한유엔군에 감사 표시
- 경남북지구 계엄민사부장, 미국 군속 통역관 범죄는 한국 헌병이 취급한다고 발표
<해외>
- 베이징에서 ‘항미원조 문예작품발표회’ 개최
- 미국, 월남군사원조동맹 체결, 동시에 라오스 캄보디아와도 동맹 체결
1950년 12월 24일(일) 흐림-눈
<전황>
- 국군 포함한 10만 5,000명 유엔군 및 9만 1,000명 피란민, 132척 수송선 동원하여 흥남지구 완전 철수, 흥남철수작전 완료
- 중공군, 춘천 동북쪽에서 남하 기도했으나 격퇴
<국내>
- 이승만 대통령, 중공군 참전으로 서울시민에게 피난 명령
- 부산 신창동 국제시장에 화재 발생, 점포 65동 소실
<해외>
- 유엔한국정전 3인위원회 회합
- 12개국(아시아 아랍 13개국 중 필리핀 불참) 대표 긴급회의
1950년 12월 26일(화) 맑음-흐림
<전황>
- 연천 부근 중공군 집결, 춘천 방면에서 북한군과 교전
- 미 제8군 보고, 중공군, 서울을 목표로 38도선 이남으로 진격 기도
<국내>
- 이승만 대통령, 정부 이전설 부인, 이승만 대통령, 국군 제1사단 장병 표창
- 신임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중장, 한국 도착
1950년 12월 27일(수) 아주 맑음
<전황>
- 유엔군, 개성에서 철수
- 유엔군, 춘천 동북방 관대리, 내평리 사이의 중공군 침투기도 저지 위한 격전 전개
<국내>
- 리지웨이 중장, 신성모 국장부장관 및 유엔신한국위원회와 협의
- 북한, 김무정 등을 패전 책임으로 숙청
<해외>
- 유엔한국정정위원회, 실패에 대한 보고서 기초
- 연합국최고사령부 코뮈니케, 북한군의 전력증강 확인
1950년 12월 28일(목) 아주 맑음
<전황>
- 유엔군, 춘천 동북방에서 내평리 부근 북한군에 대하여 맹공격
- 서해안-고랑포선에 중공군 제39·50·66군 집결 배치
<국내>
- 부산의 요정과 여관 등 개방하여 군경 유가족 우선 수용
- 유엔신한국위원회, 전재민원조에 관하여 유엔에 보고
<해외>
- 아시아·아랍 12개국 유엔대표, 긴급회의 소집
- 호치민군, 하노이 북방 64KM에서 프랑스군 맹공
- 유엔군사령부, 중공군이 제4야전군 19개 사단을 서울 북방에 배치하고 일대 공세준비 중이라고 발표
1950년 12월 29일(금) 흐림-비
<전황>
- 춘천 동북쪽에 공산군 패잔병 재집결, 유엔군 전초부대 38선 북방 8km까지 진출
- 유엔군, 동쪽 전선에서 전략적 전진하고 중공군 동쪽으로 이동 개시
- 중공군, 임진강에 가교 설치 기도
<국내>
- 장면 국무총리, 리 유엔 사무총장에게 메시지 전달
-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 부산으로 이전
1950년 12월 30일(토) 아주 맑음
<전황>
- 유엔군, 전 전선에서 38선 이남 16km 지점까지 철수
- 35~40대 MIG15, 미 세이버 제트기 15대를 공격, 공산순기 1대 격추
<국내>
- 서울시 소재자 84만 여명 (49%)
1950년 12월 31일(일) 아주 맑음 -- 190일차
<전황>
- 중공군, 야간부터 중대 공격 개시
- 공산군, 38도선 부근에서 점차로 병력 증강화, 제3차 공세 개시
- 국군 제6사단, 동두천 북쪽에서 중공군 3개 사단과 교전 끝에 격퇴
<국내>
- 이승만 대통령, 전국 도로 수리에 국민 총궐기 호소
- 북한에 서울 잔류 영화인(최인규, 이명우, 홍개명, 박기채, 방한준, 안철영 등) 납북
<주> : 본 자료는 6.25전쟁 1,129일간 일지(1950.6.25~1953.7.27) 내용이며,
- 저자는 부영그룹 창업자인 이중근회장 편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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