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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라고 하는 이 역사비평서의 제목이 상당히 이채롭다. 한국의 고대사를 욕망을 버리고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 같기도 하고, 욕망 너머에 한국 고대사가 있다는 말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책을 대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이 든다. 나름대로 철학, 인문학, 불교에도 관심을 가져보지만, 역사 공부가 체질에 맞는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다.
2018년 ‘젊은 역사학자 모임’이라는 단체에서 펴낸 이 책의 저자들은 10명의 젊은 역사학자들이 지금까지의 역사교육에 대해 스스로 비판하기위해, 지난 수십 년 동안 역사교육이 ‘과거에 대한 순수한 지적 호기심과 인간과 사회에 대한 보편적 이해를 담았다기보다 애국심을 고취시키는데 역사교육의 목적이 있었다’고 진단하면서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책을 냈다고 한다. ‘사이비 역사학의 득세에는 역사학계의 책임도 있으므로 역사학자로서 반성도 하고 과거의 주류 역사학이 가졌던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다’고도 했다.
사이비란 ‘비슷하지만 아닌 것’을 가르키는 말로 《맹자》에 나온다. 우리말로는 ‘가짜 역사학’또는 ‘유사 역사학’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슈도 히스토리(pseudo history)’라고 하는데, 어떻게 부르든 간에 그것은 ‘학문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의미는 같다.
【1】〈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여인열전〉등 여러 역사책의 저자이기도 한 이덕일 선생은 ‘올바른 역사관을 가졌구나’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일제 식민사관이 우리 역사를 수렁에 몰아넣었다고 비판했는데 그것에 공감했다. 그런데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이 책에서는 이덕일 같은 이가 사이비 역사학자라고 비판한다. 헷갈린다. 역사적 소양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하고 생각해 보지만 둘 다 틀린 말 같지 않으니 더욱 공부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덕일은 ‘낙랑이 한반도 밖에 있었다’고 하고, 이 책은 ‘아니다. 낙랑은 평양이 중심이었다’고 한다. 단군신화는 고조선 당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인지, 고조선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고조선의 중심지는 어디인지, 고조선을 대표하는 유물인 동검, 탁자식 고인돌, 미송리형 토기는 정말로 고조선의 유물이 맞는지 등을 따지고 들면 고조선의 역사는 불확실 투성이다. 고조선에 대한 문자 기록은 극히 적고 유물은 말을 못 하니 신중한 해석을 거쳐야 한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인에게 고조선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의미를 넘어서는 무언가로 인식됐다. 고조선이라는 이름에는 종교적·정치적 함의가 강렬하게 부여됐고,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도 만들어졌다. 〈한단고기〉로 대변되는 가짜 역사서의 존재와 이를 신봉하는 사이비 역사가들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우리가 고조선의 역사를 보는 데는 한 발짝 떨어져서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욕망의 거품’을 걷어내고 보편적 역사로 고조선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덕일은 낙랑군에 대해 “낙랑군=평양 설은 1913년 일제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처음 주장한 것인데, 해방 후에 이병도 교수가 〈신수(新修) 한국사대관(韓國史大觀, 1972)〉같은 책에서 계속 이를 지지하면서 정설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것에 유물과 유적은 물론 심지어 중국문헌까지 증명한다. 그 증명은 여기에 옮기지는 않을 생각이다. 다만 낙랑군이 한반도 밖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 심리 저변에는 나름의 요소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식민지 콤플렉스다. 고대 한반도 내 외부 세력이 식민지를 설치했다는 것이 감정적으로 싫은 것이다. 그러나 고대에 설치된 중국의 군현을 근대의 식민지 개념과 동일시하는 것은 부적절할뿐더러 설령 낙랑군이 평양이 아닌 한반도 바깥에 있었다 하더라도 고조선이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해 멸망하고, 그 자리에 낙랑군이 들어섰다는 역사적 사실까지 변하는 것은 아니다. 낙랑군이‘한반도만 아니면 돼’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유치하다.
둘째는 고조선이 대륙에 존재했던 아주 큰 나라였다는 영토적 허영심을 충족하려는 것이다. 사이비 역사가들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광대한 대륙을 호령했던 우리 역사를 반도 안으로 축소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대륙의 역사는 우월하고 반도의 역사는 열등하다’는 인식을 내포하고 있다. 넓은 영토에 대한 환상과 욕망에 취해 정작 발을 딛고 살고 있는 한반도를 혐오·폄하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야말로 과거 식민주의 사학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평양에 낙랑군이 설치된 이유는 그곳이 고조선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중요하고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한국인 입장에서 낙랑군 설치를 기를 쓰고 거부해야 할 일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고 거기에서 어떤 역사적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역사학의 정도다. - 카톨릭대 기경량 교수의‘고조선 어떻게 볼 것인가?’‘낙랑군은 한반도에 없었다?’
【2】만주 집안에 광개토왕비가 있다. 고구려가 중국 한나라가 설치했던 낙랑군 등 군현들을 모두 몰아내고 만주와 한반도 중북부를 모두 차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시대(391∼491년)가 가장 강성했다는 의미기도 하다. 높이 6.4m, 무게 10톤에 육박하는 이 비가 왜 문제가 되는지는 여러 번 살펴본 바 있다.
《삼국사기》에도 기록이 없는 이 비가 처음 알려진 것은 조선시대다. 15세기 중반의 ‘용비어천가’에 ‘평안도 강계부 서쪽 강 건너 140리에 큰 돌이 있고, 그 가운데 옛 성이 있다. 민간에서 말하길 대금황제성이라 한다. 성북쪽 7리에 비가 있는데 그 북쪽에 돌로 만든 고분이 둘 있다’ 현지인들의 진술을 토대로 이때까지 국내성과 광개토왕비를 금나라 유적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시기 평안 감사 성현(성현, 1439∼1504)도 옛고성에 천척비(千尺碑)가 있다고 했으나 광개토왕비라는 것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광개토왕비가 알려지게 된 것은 1883년 일본군 중위 사코우 가게노부가 만주지역을 조사하다가 우연히 이 비를 발견하고 탁본을 구해 일본으로 반입하면서부터다. 이로 인해 일본은 《일본서기》내용을 근거로 4세기 왜가 한반도 남부의 가야를 비롯해 백제·신라까지 정치적 영향력 아래 두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강력히 주장하기에 이른다.
일본측은 이 부분, 즉 신묘년 조에 대해 ‘백잔, □□, 신라는 옛날부터(고구려의)속민으로 조공해 왔다.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했다. 순수한 학술적 동기만으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려는 속셈을 갖고 이를 활용한 것이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식민치하 한국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백잔과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은 것은 왜가 아니라 고구려라는 것이었다. 연세대 정인보 교수에 이어 북한의 사학자 김석형도 이에 맞장구를 쳤다.
1970년대 들어서는 재일사학자 이진희에 의해 비문조작설이 설득력을 얻기도 하였으나 중국인 학자 왕젠춴에 의해 사코우 탁문은 조작된 것이 아니라 현지 중국인이 탁본을 뚜렷이 보이게 하기 위해 석회를 바른 사실을 밝힘으로써 조작설은 힘을 잃었다. 결국 원석탁본과 조작설의 탁본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해 원래부터 일본측 판독에는 문제가 없음이 입증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아직도 진행 중이다. 391년경 왜가 백제·가야·신라를 격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록은 고구려인의 기록으로 그것을 사실대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비석은 죽은 자의 유지를 받들어 주변 사람들이 작성한 기록이다. 자손들이 봐주기를 바라는 욕망을 기록한 것이다. 그 때문에 죽은 자의 생전 모습을 기록한 것이지만 때로 실제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이 담겨 있기도 하다. 광개토왕이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하는 무렵(371∼391)백제는 근초고왕, 근수구왕, 진사왕 시대로 이들은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케 하기도 하고, 도곤성을 함략시키고 200명을 사로잡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고구려는 백제를 막기에 급급했던 때였다. 백제가 고구려를 침략하면서 왜를 끌어들였을 가능성은 있다. 고구려는 광개토왕의 비문에 왜를 부각시켜서 백제를 무시하고 광개토왕의 업적을 높이려고 한 것은 아닐까?
19세기 이후 비문 해석을 두고 한·일 양국은 역사적 사실 자체에 대한 탐구보다는 제국주의 욕망과 이를 부정하려는 한국의 욕망이 서로 대립해 온 과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다가 1600여 년 전 고구려인의 욕망을 끄집어냈고 현재는 실제 비문을 작성한 고대 사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어떤 형태였고 이면에 감춰진 객관적 진실이 무엇인지 추적하는 단계에까지 와 있다. - 안정준 서울 시립대 교수 ‘광개토왕비 발견과 한·중·일 역사전쟁’
【3】‘백제는 정말로 요서(遼西)에 진출했는가’하는 문제는 우리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중국의 고대 왕조들은 장구한 역사를 소상히 기록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오호16국(五胡十六國)시대 양쯔강 유역의 송(宋), 제(齊), 양(梁), 진(陳) 왕조를 남조시대라고 하는데 백제는 이 나라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다. 남조의 역사서 《송서》에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정작 백제가 진출했다고 하는 요서에 있던 북위(北魏)는 그런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 않으니 어떻게 된 일일까?
요서지방에는 이와 관련한 유물이나 유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북방 민족을 상대로, 고구려와 대치하던 상태에서 백제가 정말로 요서로 진출했을까 하는 문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아무튼 백제의 요서 진출은 역사학계의 오랜 논쟁거리 중 하나로 민족의식 함양이라는 역사교육의 목표로 1974년 국정교과서에 처음 내용이 긍정적으로 반영되기도 했으나 문제 제기로 최근에 발간된 교과서에는 ‘백제의 요서 진출은 아직 풀지 못한 논쟁거리’라고 정리했다.
우리는 왜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던 군주에게 열광하는 것일까? 우리의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증거가 아닐까? 한반도는 반 토막으로 나뉘었고 남·북간 갈등과 반목은 오랫동안 이어져 오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주변 나라는 초강대국들뿐이다. 앞으로 예상되는 정세 역시 불투명하지만 이런 현실 세계의 불안과 불만이 고대사의 영광스러웠던 시대에 투영돼 현재의 어려움도 그때와 같이 극복되리라는 위안을 얻고자 하는 때문은 아닐까? - 백길남 한성백제박물관 학예연구사 ‘백제는 정말 요서로 진출했나’
【4】일본 나라현(奈良縣)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 깊숙한 곳에 보관돼 있던 칠지도는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내려준 하사품이인가 아니면 일본왕에게 헌상한 것이었나? 역사적 갈등과 숙원을 돌아보게 하는 칠지도에는 쉽게 풀기 어려운 숙제가 숨어 있다. 그래서 가까이하기인 너무 먼 이웃이란 말이 실감 나는지도 모르겠다.
언제 누구 만들었는지도 짐작할 뿐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후왕에게 전하니 후손들의 시대에도 보이도록 하라’는 62자의 글자가 새겨진 여기에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풀어줄 비밀이 숨어 있다. 여기에 새겨진 글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철로 만든 재질에 홈을 파고 금으로 상감(象嵌)한 칠지도는 앞면에 35자, 뒷면에 27자가 새겨져 있다. 글자 해석이 분분하지만 널리 알려진 것을 보면 이렇다.
» 앞면, ‘태화 4년 1□월 16일 병오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된 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많은 적병을 물리칠 수 있어 후왕(侯王)에게 주기에 알맞다. □□□□가 만들었다’
» 뒷면, ‘선조들의 시대 이래로 이러한 칼은 없었다. 백제왕의 치세에 기이하게 성음(聖音)이 생겼으므로 왜왕의 요청을 위해 만들었다. 후손들의 시대에 전해 보이도록 하라’
이 해석이라면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내려준, 즉 하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많은 논란을 빚는 이유는 《일본서기》의 기록 때문이다. 거기에는 헌상한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52년 가을 9월 … (백제 사신이) 칠지도 한 자루와 칠자경(七子境)한 점, 그리고 귀중한 여러 보물을 바쳤다. 이에 아뢰기를 ‘신의 나라 서쪽에는 강이 있는데 곡나칠산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너무 멀어서 7일간 가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 물을 마시다가 문득 산의 철을 취하니 성스러운 조정(聖朝)에 영원토록 바칩니다 … 이 이후로 매년 조공이 이어졌다” - 《일본서기》권9 진구황후 52년 9월조
그러나 1970년대 X선 판독기술 등으로 글자가 정밀 판독되면서 일본 내부에서도 《일본서기》진구황후 기록이 과장됐다는 비판이 일면서 칠지도의 성격은 세 갈래로 갈려져 정리됐다. ① 칠지도는 백제의 하사품이다. ② 칠지도는 동진(東晉)에서 만들어 백제를 거쳐 일본에 전해졌다. ③ 칠지도는 백제와 왜 사이의 상징물 혹은 선물이라는 견해다.
고구려와 격렬한 전쟁을 치르던 백제에게 필요한 것은 후방의 안정과 군사적 지원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왜는 좋은 파트너였을 것이다. 광개토왕비나 《일본서기》에 기록된 왜의 활동은 백제를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는 왜에 왕자를 보내는 등 다양한 외교 노력을 했던 기록도 있다.
과거의 일본은 한반도를 침략하기 위한 ‘필요’에서 칠지도를 헌상품으로 이해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점차 칠지도가 백제의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면서 백제와 왜의 실제 관계가 어떠했는지 당시의 상황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 임동민 고려대 한국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칠지도가 들려주는 백제와 왜 이야기”
【5】삼국의 변방이던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있다. 《삼국사기》처럼 긍정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발해와 신라가 공존한 시대를 ‘남북국시대’라 하면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거나 신라가 아닌 고구려나 백제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면 우리 역사와 영토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통일의 주역 김춘추는 외세를 끌어들인 민족배반자, 사대주의 원흉이라고 비판하기도 하고 심지어 민족을 팔아먹었다고 매도하기도 한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 민족사학자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김춘추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을 멸한 ‘매국노’로,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친 것과 같으니 내 어찌 통일의 영웅이라 칭송하겠느냐?”라고 평가한데 영향이 크다. 그러나 시대적 배경과 외세 배척이라는 저항적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자주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하기도 하는데 후대의 이런 평가와 상관없이 고구려의 역사를 과장하고 신라의 삼국통일은 한국사를 한반도로 축소 시킨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왜곡된 인식에 대중매체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문제가 더 커진 것이다.
돌아다 보면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381년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나 마찬가지 위치에서 고구려 사신과 함께 전진(前晉)에 들어가 방물(方物)을 바치기도 했으나 동행만 했을 뿐 독자적으로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고, 521년에는 백제 사신을 따라 양나라에 갔으나 “신라는 문자가 없으므로 나무에 금(줄)을 그어 신표로 삼는다.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고 자신들을 따라온 신라 사신을 소개한 내용이 《양서》와《양직공도》에 나온다. 하지만 521년이면 신라가 국가체계 법과 제도의 근간이 되는 ‘율령’을 반포한 다음 해로 신라가 백제의 업신여김을 몰랐을까? 아니면 모른채 했던 것일까? 500년에 만든 포항 중성리 비, 503년에 만든 포항 냉수리 비, 524년에 만든 울진 봉평비 등에 적힌 기록들을 보면 높은 수준의 정치체제와 문자사용 능력을 보여 준다.
이런 업신여김을 받든 신라에 걸출한 인물 심맥부지(진흥왕)가 나타나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당항성(화성)에서 곧바로 중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나 북쪽에는 고구려, 서쪽에는 백제와 경계를 이뤄 국경을 경비하는데 애를 먹기도 했다. 이 무렵에 김춘추는 딸 고타소의 남편, 즉 사위 김품석을 대야성 성주로 보냈다. 그런데 김품석이 부하 장수 검일의 아내에게 흑심을 품음으로써 검일의 반란으로 대야성은 백제 장수 윤충에게 내준다. 신라는 서쪽 요로를 잃고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서쪽 경계 40여 성을 차지한 백제는 선대 성왕이 관산성에서 신라군에게 잡혀 죽은 원한도 갚을 겸 여세를 몰아 신라를 삼킬 기세였다.
위기를 느낀 김춘추는 선덕여왕으로부터 승낙을 받고 곧바로 고구려와 왜를 차례로 찾아가 군사동맹을 맺고자 했으나 실패하자, 탐탁치는 않았으나 부득이 아들 법민을 데리고 당나라로 건너가 원병을 청하기에 이른다. 드라마에서 풍채(風采) 좋게 나오는 당태종은 “그대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도둑을 불러들이게 돼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 내가 왕족 중 한 사람을 보내 그대 나라의 왕으로 삼되, 군사를 보내 호위하게 하고 그대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려서 그대들 스스로 지키는 일을 맡기려고 한다”고 《삼국사기》신라본기 선덕여왕 12년조에 전한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 상황에서 구원을 요청하자 왕이 여자이기 때문에 왕을 바꾸라는 등의 답변에 들은 김춘추는 치욕을 느꼈을 것이다. 이 난감한 문제를 김춘추는 어떻게 풀었을까? 《삼국사기》에는 문제를 황룡사 9층탑을 세워 불법으로 타개하려 했다고 했다. 9충탑을 세우던 645년까지 신라는 당나라를 신뢰할 수 없는 경계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별로 기대 없이 648년 아들과 당나라에 간 김춘추는 당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는다. 그동안 매년 사신을 보냈지만 김춘추가 가장 고위급 인물인데다가 당태종과 개인적 친분을 맺는데 성공한 김춘추는 태종으로부터 먼저 무엇을 원하는지 질문까지 받기에 이른다. 김춘추는 “폐하께서 당나라의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희 나라의 인민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회도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고 했고 당태종이 옳다고 여겨 군사 출동을 허락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신라 입장에서 고구려와 백제는 상황에 따라 적국이기도 하고 동맹국이 될 수도 있는 타국이었다. 서로 언어가 통한다거나 문화적으로 공통점이 있다 할지라도 같은 민족으로서 도와야 한다는 생각보다 각기 다른 국가로서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합종연횡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삼국의 관계에서 민족이라는 터울을 씌우는 순간 역사는 역사가 아닌 현재의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관점만 보는 상상 속 산물이 되고 만다. 그런 산물 속에 김춘추는 사대주의자로 비판받고 폄하된다. - 이성호 동국대 사학과 강사 ‘생존을 위한 전쟁, 신라의 삼국통일’
【6】‘내 몸속에도 신라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가끔 신라 왕실의 피가 선비족의 후예라거나, 흉노족의 후예라는 말에 그것이 사실일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기도 한다.
지난 2009년 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한 여자의 묘지명이 발견되었는데, 묘지명이 국내에도 소개되면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33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부인의 묘지명은 당나라 수도 장안(시안)에서 864년에 묻힌 것이었다. 묘지명이 주목받은 데는 그녀의 품행이나 후사에 대한 내용이 적힌 때문이 아니라, 김씨 성의 유래에 대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세워 평안히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냈으니 소호씨 금천이라고 불렀다. 이는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갖게 된 조상이다. 그 후 많은 파가 생기고 갈래가 나누어져 번창하고 빛나서 온 천하에 가득 차니 그 수가 더욱 많아지게 됐다. 먼 조상의 이름은 일제로 흉노의 조정에 몸담고 있다가 서한에 귀순하여 무제를 섬겼는데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겼다. 벼슬이 올라 시중과 상서를 역임하고 투정후(秺亭候)에 봉해졌다. 이후 7대손까지 벼슬을 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 한나라의 덕이 쇠하여 난리로 병들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런 까닭에 우리 집안은 멀리 요동으로 가서 사는 곳을 달리하게 됐던 것이다. …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크게 번성했다.”
김씨 부인의 아버지는 김공량, 할아버지 김충의로 《구당서》에 기록이 있으며 당나라에서 벼슬을 했고, 특히 김충의는‘신라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김씨 부인의 묘지명에는 신라 김씨와의 관계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를 김씨 시조로, 김일제(金日磾)를 선조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들이 누구이길래 신라 김씨의 시조로 보는 것일까?
소호금천씨는 중국에서 전설상 삼황오제 가운데 한 명인 황제 헌원의 아들인 청양이 금덕을 갖춰 금천씨라 불렀고, 김일제는 흉노 부족의 태자였으나 흉노의 위협에 시달리던 한나라 무제가 이전까지 해오던 화친보다 전쟁을 택해 싸우면서 젊은 장수 곽거병이 흉노를 물리치고 변방을 안정시킬 때 포로로 끌려왔다. 어린 나이에 끌려온 김일제는 궁에서 말 기르는 일을 하다가 무제의 눈에 띄어 시중과 부마도의 등 관직에 임명되기도 했는데 이 무렵 김씨 성을 하사받은 것이다.
김씨 부인 묘지명에 먼 조상이라고 한 김일제를 우리 언론이 주목하여 ‘신라 김씨는 흉노족의 후손’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했던 것이다. (KBS 역사스페셜, KBS 역사추적 등) 또 김씨 부인의 묘지명뿐만 아니라 신라 제30대 문무왕 능비에도 신라 김씨와 김일제와의 관계를 서술한 듯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소호금천씨 – 김일제 – 신라김씨로 이어지는 이런 계보 의식은 9세기 이전에도 신라 김씨 왕실에서는 갖고 있었던 것일까?
근세까지 7세기 신라 문무왕릉비(문무왕릉은 동해 감포 대왕릉으로서 릉이 없으나 릉비편만 경주에서 발견되었다)에 보이는 계보와 9세기 중반 당나라 김씨 부인 묘지명이 일치한다고 봤다. 소호금천씨를 시조로 하고 김일제를 먼 조상으로 본 김씨 부인 묘지명의 계보가 태종무열왕 대에 만들어져 8세기 김씨 부인 증조부가 당나라로 이주한 이후에 가문이 전승돼 김씨 부인의 묘지명이 남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연구를 통해 문무왕릉비에 보이는 계보와 김씨 부인 묘지명 계보에는 차이가 있음이 밝혀졌다.
《삼국사기》에는 김씨 성의 유래에 대해 두 가지 설을 소개하고 있다. “신라 고사에 이르기를 하늘이 금 궤짝을 내렸으므로 성을 김씨라 했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신이 역사서를 편찬함에 그 전승(금궤짝 탄생설)이 오래됐기 때문에 그 말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그런데 또 들으니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씨라 했고, 고구려 역시 고신(高辛)씨의 후예이므로 성을 고씨라 했다고 한다. 고사에 이르기를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같이 나왔다고 했으며 또 진나라·한나라 난리 때에 중국인이 해동으로 많이 도망해 왔다고 했으니, 삼국의 선조가 어찌 옛 성인의 후예가 아니겠는가?”
그러면서 김부식은 김씨가 소호금천씨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김유신비’와 ‘삼랑사비’를 직접 봐서 알았다고 했다. 이 비들은 모두 9세기 때 세워졌으며 신라 김씨가 소호금천씨 후예라는 인식도 이 무렵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신라 김씨는 김알지를 시조로 인식하다가 언제부터 소호금천씨를 시조로 인식했을까? 가장 빠른 기록은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묘비에 있다. 김인문은 7차례나 당에 들어가 황제를 숙위했는데 그 기간이 22년이나 된다고 한다.
그는 694년 66세 나이에 장안에서 죽었다. 당 황제는 관에 시신을 넣어 신라로 보냈고 이듬해 신라에서 장례를 치렀다. 그의 묘비는 이때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데 묘비에 ‘소호는 구허(口墟)하여, 금천은 … 태조 한왕은 천년을 열고 성인은 백곡의 …에 임하여’등 구절이 보이는데 이는 신라 김씨 왕조를 소호금천씨 후예임을 밝힌 것이다. 또 전하지 않지만 김유신 비에도 ‘헌원의 후예이며 소호의 자손이다’라는 기록이 있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신라 왕족들은 언제부터 성을 쓰기 시작했을까? “보통 2년(521)왕은 성이 모(募), 이름은 진(秦)이다, 처음 사신을 보냈는데 백제를 따라와 토산물을 바쳤다”고 《양서》에 기록된 신라 법흥왕의 성은 김이 아니라 모였다. 524년 세워진 울진봉평비에는 ‘모즉지(牟卽智)매금왕’, 539년 쓰진 천전리 각석에는 ‘무즉시(무卽知)태왕’으로 나오는 이들은 둘 다 법흥왕을 이른다. 법흥왕 때까지 왕도 성 없이 이름만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 때에 처음 김씨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모든 신라 사람이 성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568년에 세워졌다고 추정되는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에는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도 성 없이 ‘무력지’라는 이름만 표기되어 있다.
선조들에 대한 기록에는 후대의 욕망이 투영돼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고대사를 바라보며 여러 가지 욕망을 투영한다. 신라 왕실의 선조에 대한 기록 가운데 유독 김일제가 선조였다고 하는 데는 우리 민족의 범위를 확장하고 싶은 욕구가 반영돼 있다. 김일제가 김씨 왕조의 선조이면 흉노를 아우르던 드넓은 영토가 우리 민족의 영토가 되고 중국 왕조를 위협하던 흉노의 강한 군사력이 우리 민족의 힘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김일제란 인물은 이민족으로서 중국 왕조에 충성을 바친 상징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은 어떨지? - 최경선 연세대 박사과정 수료 ‘신라 김씨 왕실은 흉노의 후예였나’
【7】‘임나일본부설’은 아무리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공부일지도 모르겠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할 때 ‘임나일본부설을 사실로 믿은 일본인들에게 조선 침략은 더 이상 침략이 아니라 본디 그래야 하는 과거 회복이었다’제국주의자들보다 먼저 조선을 침략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그들과 같은 생각으로 조선을 침략한 것이라는 명분까지 그들은 찾은 것이다. 그들에게 역사는 지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 쓸모가 있는 무기 그 이상이었다.
‘진구황후가 임신한 상태로 남장을 하고 신라를 공격해 항복을 받아 내자 겁먹은 고구려와 백제 왕이 스스로 와서 항복했다’는 이야기는 차치하더라도, 369년 가라 7국 평정을 시작으로 야마토 정권의 임나 경영을 그들은 사실로 믿었다. 또 《일본서기》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광개토왕비와 중국의 《송서》까지 이용했는데, 광개토왕비문의 신묘년 조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고, 《송서》의 ‘왜국왕이 왜·신라·임라·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의 벼슬을 인정 받은’기록은 야마토 정권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중국에서 인정해준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이런 내용이 담긴 스에마쓰의 학설이 객관성과 실증성을 갖추었고,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발견된 칠지도 역시 백제가 일본에 바쳤다는 진구황후 조 기록을 입증하는 유물이라며 그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의 학설은 움직일 수 없는 정설로 인정받은 것이 되었다. 하지만 스에마쓰가 경성제국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검은 두루마기에 항상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서 양손을 턱에 괸 채 교수를 째려보던 ‘불손한 제자’김석형은 달랐다.
김석형은 《일본서기》의 기록은 일본열도 안에 있었던 한반도 분국과 야마토 정권 사이에 일어난 일로 오히려 한반도 여러 세력이 일본열도를 경영한 사실을 알려주는 것으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와는 상관이 없다고 했다. 김석형의 논문은 일본 역사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의 주장에는 한·일 양국에서 발견된 풍부한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했으므로 스에마쓰의 학설과는 분명하게 대비가 되었다. 특히 《송서》에 열거된 나라 가운데 ‘모한’과‘진한’은 삼국의 성장과 함께 사라졌으므로 5세기에 그 존재를 찾을 수 있는 공간은 일본열도 말고는 없다고 했다. 김석형의 주장이 스에마쓰 주장보다 개연성이 높자 일본학자들은 고민에 빠졌다. 김석형의 분국설은 북한에서는 아직도 정설로 굳어져 있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이제 학설로서 생명력을 거의 상실했다. 그의 학설 성립의 결정적 근거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역사학계에 경종을 울리고 본격적으로 《일본서기》에 대한 비판의 길을 열었던 것은 사실이다.
일본 열도에서 발견되는 한반도계 유적들은 한반도와 열도 사이에 가로 놓인 바다가 당시 사람들에게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가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일 수 있다. 《일본서기》에서 보이는 외인계 관료들이 한반도를 넘나든 활동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임나일본부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말로 하긴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긴 어려운 임나일본부 연구의 내일로 향하는 길도 결코 만만치 않아 보인다. - 위가야 성균관대 박물관 학예연구사 ‘임나일본부설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8】‘발해사’는 중국의 역사인가? 우리의 역사인가? 하는 문제도 심각한 문제로 보인다. 발해는 고구려가 망한 30년 뒤인 698년에 고구려의 옛땅에 대조영이 세운 나라다. 처음 국호는 국력을 사방에 떨친다는 진국(振國)이라 했고, 713년부터 ‘발해’라는 정식 국호를 썼다. 스스로 황제국을 표방하였으며 그 무렵 최치원이 당나라에 건너가 관료선발 시험에 합격했듯이 당나라는 자국민을 대상으로 진사과(進士科)를, 외국인을 대상으로 빈공과(賓貢科)라는 과거시험을 치렀는데, 발해는 신라·일본·페르시아 학생들과 같이 빈공과 시험을 봤다. 이것만으로 발해는 당나라 지방정권이 아니라 독립국임이 증명된다.
하지만, 현재 중국은 독립국으로서 발해를 부정하고 당에 예속된 지방정권이었다고 공식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런 무리한 주장을 왜 반복하는 것일까. 그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리의 역사라고 하더라도 우리는‘발해’에 대해 잘 모르는 것 또한 사실인 것 같다. 발해는 고구려 전성기를 떠올릴 만큼 넓은 영토를 가졌는데 중국 동북 3성(라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과 러시아 연해주 및 북한 북부 지역에 걸친 광활한 지역이었다. 남쪽은 패강(대동강), 동북은 쑹화강을 경계로 하여 말갈을 대부분 복속시켰으며 서쪽은 요하를 잇는 부여부에서 거란과 접했다. 광활한 영토로 인해 발해사는 한국과 북한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도 자국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국, 러시아, 한국은 어느 나라도 중심이 아닌 변병이고 북한은 스스로 고구려-발해-고려-조선의 정통을 이어받은 국가로 규정하면서 발해의 중심이었다고 우기고 있는지 모른다.
중국은 발해를 당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데 이어서 발해가 말갈의 나라라고 한다. 말갈은 만주족의 조상으로 발해가 만주족이면 중국 소수민족으로 자연히 중국사에 편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북한 학자들은 발해의 지배층이 말갈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는 발해 건국 세력의 핵심에 관한 문제다.
고구려가 나․당에 의해 멸망하자 당은 고구려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고구려 유민을 탄압했다. 결국 이들은 두만강 너머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반당 투쟁은 신라와 당의 전면전으로 번졌다. 675년 당은 20만 대군으로 신라를 공격했지만 매초성(양주)에서 대패해 한반도에서 당의 지배력은 와해 되었지만, 고구려지역에서 정비한 당군이 676년 11월 기벌포(금강 하구)를 통해 다시 신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패함으로써 점령지 정책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당은 고구려지역에 대한 영역화를 포기하고 보장왕을 다시 고구려왕에 올려 요동 지역만이라도 통치하는 지배체제로 전환했다.
하지만 보장왕은 681년 당의 기대를 저버리고 고구려 부흥을 도모했다. 4년간 반당 투쟁을 전개했으나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과 그의 아들 천헌성이 당 지배에 협조하는 바람에 고구려 유민은 결국 말갈과 손을 잡았다. 말갈이 반당 투쟁에 참여했던 고구려 유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의가 사전에 발각되어 보장왕은 쓰촨성으로 유배되어 이듬해 사망했고, 당은 더 이상 고구려 유민들이 모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669년과 681년 두 차례에 걸쳐 당 남부와 서부 변경으로 유민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이주 과정에 대조영 부자와 말갈의 추장인 걸사비우 등 유민들이 중간 경유지인 영주에 머물 때, 멸망해 가던 돌궐이 부흥해 당의 변경을 침략하고 695년 5월 영주에 큰 기근이 들자, 거란 추장 이진충이 군사를 일으켜 영주를 점령해 버렸다. 영주에는 거란을 비롯해 동호계 부족인 해(奚)와 말갈, 고구려 유민 등이 함께 거주했는데 이들은 이진충의 난에 적극 동조 했다. 걸걸중상, 대조영 부자와 걸사비우 등 유민들이 이진충의 난에 참전함으로써 697년 6월 당은 자력으로 거란을 막을 수 없었고, 돌궐의 도움을 받아 1년 만에 가까스로 반란을 진압했다. 하지만 요동은 여전히 거란의 세력권이었고 당의 지배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이듬해 당은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高寶元)을 ‘충성국왕’에 임명해 고구려 유민을 다스리게 하고, 걸걸중상을 진국공, 걸사비우를 허국공에 책봉하는 포섭을 시도했다. 그러나 걸사비우는 이를 거부하고 ‘안동도호부’는 요동지역 만을 관할 하는‘안동도독부’로 축소하였고, 이해고를 보내 반란군 토벌에 나섰다. 이때 고구려 유민의 운명을 짊어진 대조영은 당의 공세를 피해 동쪽으로 달아나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이해고가 천문령까지 추격하자 대조영은 유민들과 말갈을 규합해 맞서 싸웠다. 대조영은 천문령에서 크게 승리했음에도 동쪽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698년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을 이끌고 무단강(목단강) 유역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진국왕이 되었다. 대조영은 곧바로 돌궐과 신라에 사신을 파견했으며, 신라는 대조영에게 신라의 다섯 번째 관등인 대아찬을 제수했다. 대조영의 출신이 어디인가가 중요한 문제일 것인데《구당서》에는 대조영을 ‘고려별종’으로 기록한 반면에, 《신당서》는‘속말갈’로 기록하고, 왕명도 《구당서》는 진국왕(振國王)으로, 《신당서》는 震國王으로 달리 표기했다.
발해사는 중국사인가 한국사인가? 문제에 대한 결론은 중국과 한국은 발해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근대의 민족 혹은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체 창출에 나서야 할 것이다. 같은 생존방식을 도모하는 유럽공동체에서 보듯이 우리도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럼으로써 역사학에서도 중심과 주변, 지배와 종속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주변부 역사도 조망해야 하고 차이의 역사도 인정해야 한다. 순조로운 출발이 될 수는 없겠지만 언제까지나 ‘발해사는 누구의 역사인가’라는 제국주의적 ‘양자택일’의 물음에만 묶여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 권순홍 성균관대 역사학과 박사과정 수료‘발해사는 누구의 역사인가’
【9】고대 국가의 전성기를 언제로 봐야 하는가? 하는 물음은 흥미로운 주제다. 고대 국가들과 고려와 조선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고려는 귀주대첩으로 이민족의 침략을 막아낸 11∼12세기, 조선은 세종 때가 전성기겠거니 생각하기 쉽지만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시기를 전성기로 본다면 고려는 공민왕대 이고 조선은 세종 때 4군 6진이 설치되고 국경선이 완성되었다고 초등학교 시절에 이미 배웠다. 그러나 조선의 땅이 가장 넓었던 시기는 고종 때다. 4군 6진 가운데 4군은 관리가 어려워 세조 때 폐지되었다가 정조 때 무창군만은 복구됐지만 3군은 여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수백 년 동안 중강진 등에 대한 실효적 지배가 없다가 3군이 회복된 것은 고종 때였다. 6진을 넘어 새로운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19세기 말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주목되는 점이다. 조선의 행정력이 가장 넓게 미친 시기가 고종 때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를 조선의 전성기로 보는 사람은 없다.
위로 올라가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일정한 세력권을 확립하고, 중국 측으로부터 이를 인정받은 시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광개토왕·장수왕·문자명왕의 치세 시기로 대략 5세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수·당 전쟁 당시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때는 말갈을 동원해 수나라를 막았는데, 고구려의 전성기를 6세기 후반∼7세기 초로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또 백제의 전성기는 근초고왕대로 본다. 황해도 일대를 영유했고,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으며 전남 일대 마한의 잔존 세력을 통합했고 무엇보다 일본 열도에 힘을 뻗쳤다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교과서에 기초한 이런 내용은 정말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치 않은 경우가 많다. 근초고왕 당시 요서지역에 교두보를 마련했다고 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백제가 해외에 식민지 같은 거점을 확보하고 이를 운영했을 확률은 매우 낮다. 일본 열도에 힘을 뻗쳤다는 주장 역시 실체가 없다. 칠지도는 우호적 관계 속에 오간 외교적 선물일 가능성이 높다.
마한의 잔존 세력을 병합하고 가야 소국에 영향을 행사했다는 것 또한 《일본서기》의 기록인데, 여기에는 249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근초고왕의 치세(346∼375)와는 맞지 않으며, 전남 일대를 백제가 지배했다는 증거도 뚜렷지 않은데 ‘명실상부한 백제 땅이 되었다’는 교과서 내용에도 이견이 많다. 그후에도 전남 일대는 상당 기간 독자적인 문화를 향유 했기 때문이다. 백제의 전성기는 근초고왕대가 아닌 무령왕과 성왕대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백제의 전성기는 고구려와 직결돼 있다. 이미 집권체제를 수립한 고구려와 이제 막 통합의 구심점을 키워가던 백제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격차가 있었다. 그렇기에 고구려가 체제 정비를 끝마치고 남진을 개시하면서 백제의 황금기는 동요되었다. 하지만 그 뒤에도 백제는 끊임없이 피고 졌다. 한성 함락과 웅진 천도의 아픔을 딛고 6세기 무령왕 때 다시금 꽃을 피웠고, 관산성 전투로 좌절을 맛보기도 했으나 중흥의 기치를 높이려고 했다. 어쩌면 시대적 상황과 환경 속에 끊임없이 절치부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백제사의 매력이다.
4세기 백제, 5세기 고구려, 6세기 신라라는 교과서상 도식에서 보듯이 신라의 전성기는 6세기 중후반으로 볼 수 있다. 일순간에 한강유역을 차지한 진흥왕의 위업에 전성기가 아니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진흥왕 시기에 신라가 한반도 패권을 차지하거나 백제, 고구려를 압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라의 전성기는 삼국통일 이후다. 당나라를 몰아내고도 탐라와 우산국까지 손에 넣지는 못했어도 사실상 한반도에 존재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신라는 더 이상의 위업을 재현하거나 넓히지는 못했다. - 강진원 경기대 융합전공대학 교양학부 교수 ‘고대국가의 전성기는 언제로 봐야 할까’
【10】《한단고기》는 정사인가? 아닌가? 1981년에 자칭 목사이자 전직 국회의원이었던 김산이 ‘단제한배검’즉 단군을 《구약성서》의 아브라함과 같다며 《규원사화》라는 위서를 인용해 《성경》의 창세기와 닮았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국도현모지도’라는 말이 주목되었는데, 이는 일찍이 최치원이 우리 민족에게는 유교·불교·도교를 아우르는 진리가 있음을 설명하면서 사용한 말로 한국은 예로부터 종교의 진리의 원천이 되는 ‘한국신선사상’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신선사상’의 또 다른 주창자 임승국은 한발 더 나아가 ‘인류의 역사상 천신(天神)의 피를 받은 자는 한민족뿐’이라고 했다. 종교의 여러 가지 가르침 가운데 유독 혈연적 민족의식에 기반한 선민사상을 강조한 셈인데 그는 소비니즘(국수주의)이라는 지탄을 받는 줄 알면서도 주장을 계속했고 나아가 1980년에는 ‘민족주의는 공산철학의 유일한 천적’이며 ‘공산주의와 대결하고 이겨야 한다는 싸늘한 현실과 숙명’이 우리에게 있다고 했다.
같은 시기 사이비 역사학자 박창암도 ‘이스라엘 민족의 고대사가 구약성서’라면 ‘우리 배달겨레의 고대사 또한 당연히 우리의 구약성서’로 대접해야 한다면서 민족사관을 관장하는 ‘국사편찬위원장’자리는 우리 민족 최고의 성직이라고 주장했다. 민족사관이 어떻게 민족주의 종교로까지 나아갔는가를 보여 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1990년 8월 《역사비평》이란 잡지에 박광용 교수(성심여대)가〈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규원사화》《환단고기》의 성격에 대한 재검토〉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자 임승국은 ‘구상유취한 행패’라고 ‘말참견’말라며 반박했다.
·박광용 영혼 속에 깔린 민족종교 멸시 천대라는 사상이 몸서리쳐지도록 증오스럽기만 하다.
·박 교수는 ‘군사문화’를 떠벌리다가 군의 비수에 찔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저‘오흥근 기자 피습사건’* 을 연상케 한다. 국민과 군 사이에 불신풍조를 조성하려는 박 교수의 의도는 무엇인가?
*1988년 8월호 〈월간중앙〉에‘오홍근이 본 사회,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라는 칼럼이 기고되자, 육군 정보사령부 소속 4명이 오홍근 기자를 폭행한 백색테러 사건
역사연구에 있어서 강단과 재야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수많은 역사적 자료 중에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끄집어내 과거를 구성하는 역사서술은 연구가 아니다. 일관된 논리로 매끈하게 작성된 개인의 회고록을 역사가들은 좀처럼 믿지 않는다. 《한단고기》를 비롯한 사이비 역사서와 역사가들의 글을 기존 사학계가 연구서로 대접하지 않은 이유이다.
“역사책을 뒤척일 때마다 언제나 마음 한구석을 떠나지 않는 회의가 있다. 거기에 기록된 내용을 도대체 어느 정도 믿을 수 있을까 해서다 … 극단적인 예로 남한의 사학자와 북한의 사학자가 집필한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의 한국사를 상정해보면 더욱 확연한 일이다. 3백 년 혹은 5백 년 뒤의 우리 후손들이 이 상반된 내용의 국사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 더구나 고대의 사적(史蹟)이란 극히 제한된 소수의 어용학자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많다. 그 내용을 굵은 줄거리 외에 세부면에서 과연 그대로 믿어도 좋을 것인가? (1977년 한국문학가 손창섭) - 김대현 연세대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한단고기》에 숨은 군부독재의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