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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투기하지 않는 것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시험을 본 후 틀린 문제를 흘려버리지 않고 따로 정리하여 점검하는 것을 봅니다. 왜 틀렸는지 꼼꼼히 따져보고 문제를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자신의 취약한 분야를 단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오래 참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온유와 덕으로 상대를 품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언행을 살펴본다면 짧은 시간 안에 영적인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번에 다룰 사랑의 항목은 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투기는 마음의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기, 질투가 있으면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사랑 받을 때 마음이 불편합니다. 나보다 지식이 많고 부유하며 능력이 많은 사람을 보면 자존심이 상하고, 비슷한 조건을 가진 상대가 승승장구하면 부러움을 느낍니다. 심지어 상대가 밉고 그가 가진 것을 빼앗아 행복을 짓밟고 싶어 하지요.
한편으로는 ‘저 사람은 인정받고 사랑받는데 나는 뭔가? 왜 나는 늘 이 모양인가?’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상대와 자신을 비교하여 마음이 상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낙심하는 마음은 시기, 질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상대가 잘될 때에 낙심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지요. 낙심하거나 자책하며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자아가 살아 있기 때문에 자존심 상하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악한 말과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투기입니다. 투기가 심해지면 상대에게 해를 가하거나 죽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투기가 지나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없애려 합니다. TV 사극 등을 보면, 종종 궁중의 여인들끼리 시기하여 저주를 하거나 주술적인 행동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상대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화살을 쏘거나, 상대의 인형을 만들어 놓고 바늘로 찌르는 등 악한 영의 힘을 빌려서라도 상대를 해치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의한 마음과
행함이 도를 지나쳐서 보통 사람들의 양심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들이 나오는 것이 바로 투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투기는 악하고 추한 마음의 죄성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기에 투기하는 사람은 구원받기 어렵습니다.(갈 5:19~21). 눈에 보이도록 드러나는 죄, 곧 현저한 육체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투기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성 간의 사랑에서 비롯된 투기
이성에게 더 사랑을 받으려고 투기하는 것입니다. 바로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의 경우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 야곱에게는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매지간으로 외삼촌 라반의 딸들입니다. 언니 레아는 외삼촌의 속임수로 뜻하지 않게 맞이한 아내였고, 동생 라헬은 야곱이 연애하여 무려 14년이나 외삼촌에게 봉사하고 얻은 아내입니다. 자연히 야곱은 라헬을 더 사랑했지요. 그러나 레아가 아들을 네 명(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이나 낳는 동안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그 당시에는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면 큰 수치로 여겼습니다. 이 때문에 라헬은 끊임없이 언니를 투기하지요. 질투에 눈이 멀어 억지를 쓰며 남편을 괴롭히기까지 합니다.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창 30:1)
이후에도 라헬과 레아는 자신들의 몸종을 남편에게 첩으로 주면서까지 그의 사랑을 차지하려고 다툽니다. 만약 그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영적인 사랑이 있었다면 상대가 남편의 사랑을 받는 것을 기뻐했겠지요. 투기는 결국 레아, 라헬, 야곱 모두를 불행하게 했습니다. 나아가 자녀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상대가 나보다 나으므로 투기하는 경우
사람은 저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부러움을 느끼는 분야도 다릅니다. 그러나 대체로 상대가 부유하고 지식이 많으며 외모나 능력 면에서 앞서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고 인정받을 때 투기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모습은 가정, 일터, 학교 등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신보다 앞서고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미워하고 헐뜯습니다. 내가 잘되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짓밟아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한 예로, 회사에서 승진하기 위해 경쟁자의 약점을 알리기도 하고 누명을 씌워 상사의 눈 밖 에 나도록 합니다. 학생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공부 잘하는 친구를 따돌리거나 선생님들에게 사랑받는 아이를 괴롭히는 일도 있지요. 가정에서는 부모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 더 많은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형제간에 다투며 헐뜯기도 합니다.
인류 최초 살인자 가인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시자 가인은 불타는 투기를 견디지 못하고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담과 어머니 하와에게서 짐승을 잡아 드리는 피의 제사에 대해 누누이 들어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농사지은 곡물로 제사를 드렸지요.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반면 아벨은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양의 첫 새끼로 정성껏 제사했습니다. 혹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니 양으로 제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결코 아닙니다. 그는 부모에게서 배운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그 뜻대로 순종하려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지요. 이때 가인은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기는커녕 동생을 시기합니다. 한번 불붙기 시작한 투기는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습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악을 참지 못하고 동생을 죽인 것입니다. 이로 인해 아담과 하와가 받았을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믿음의 형제들 간에 투기하는 경우
질서나 직분, 또는 신앙이 앞서거나 열심히 충성하는 형제, 자매를 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경우 보통 자신과 나이나 직분이 비슷한 상대, 잘 아는 사람에 대해 많이 나타납니다. 상대가 나에게 어떤 잘못이나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불편하고 부글부글합니다. 서로를 잘 알다보니 자신보다 별로 나은 것도 없고 이런저런 부족함도 많은데 사랑받고 인정받으니 불만스러운 것이지요. 만약 그가 자신이 섬겨야 하는 윗사람이라면 그의 말에 순종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주변에 윗사람의 허물을 전하기도 합니다. 어찌하든 상대를 깎아내리려고 하지요.
또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 19:30)하신 것처럼 나보다 나이나 연륜, 직분이 낮은 사람이 더 앞선다면 시기, 질투를 강하게 느낍니다. 이러한 투기는 성도 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종과 성도 사이에, 혹은 교회와 교회 사이, 교단 사이에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함께 기뻐해야 하는데 오히려 헐뜯고 비방하며 이단이라 정죄하는 것입니다. 만일 한 핏줄을 타고 난 자녀들이 서로 다투고 미워한다면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아무리 좋은 것을 드린들 기쁠 리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끼리 싸우고 다툰다면, 주님의 몸 된 교회 간에 투기한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탄식하시겠습니까.
다윗을 투기한 사울 왕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투기로 인생을 허비한 사람입니다. 그에게 다윗은 나라를 구한 은인입니다. 블레셋의 적장 골리앗의 위험 앞에서 군사들의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혜성같이 등장하여 물맷돌 하나로 단번에 적장을 쓰러뜨렸습니다. 싸움의 승패는 이미 결정 났지요. 이후에도 다윗은 이스라엘 변방에 있는 블레셋의 잦은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데 큰 몫을 감당했습니다.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승리하여 돌아오는 사울과 다윗을 환영하던 인파 속에 몹시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히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
사울은 불쾌했습니다. ‘감히 나와 다윗을 비교하다니! 한낱 양치기에 불과했던 아이가 아닌가.’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다윗을 칭송하는 백성도 못마땅하지만 그간 다윗의 행동이 새삼 다르게 보였습니다. 행동 하나하나가 백성의 마음을 얻으려는 듯 계산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제 분노의 화살이 다윗에게 향합니다.
‘이미 백성의 마음을 얻고 그들을 등에 업었다면 그가 왕위를 찬탈하는 것은 시간문제 아닌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사울은 다윗을 없애기 위해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마침 자신이 악신에게 고통 받을 때 다윗이 찾아와 수금을 타주었습니다. 사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향해 날카로운 단창을 던졌지요. 다행히 다윗이 급히 피하여 위험한 고비를 넘겼습니다. 하지만 투기로 불타오른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전쟁터에 보내기도 하고, 군사를 이끌고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죽이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었기에 추호도 해칠 마음이 없습니다. 사울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럼에도 한번 일어난 투기의 불꽃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를 괴롭혔지요. 결국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투기 때문에 한시도 평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모세를 투기하여 거스른 사람들
민수기 16장에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나옵니다. 레위 자손이었던 고라와, 르우벤 지파에 속했던 다단과 아비람 형제는 모세와 그를 돕는 아론에게 불만을 품습니다. 한때 애굽의 왕자로 살았던 화려한 이력이나, 도망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에서 이름 모를 양치기로 살았던 그가 자신들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자신들도 지도자 자리에 오르고 싶은 시기심도 작용했지요. 그래서 은근히 사람들과 접촉하며 동조자를 만들어 갑니다.
고라, 다단, 아비람 세 사람은 250명의 동조자를 얻은 뒤 이참에 주도권을 얻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찾아가 따집니다.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화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민 16:3)
정면으로 모세와 아론을 비난하는 그들을 향해 모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꿇어 엎드려 기도한 뒤 그들의 잘못을 깨우쳐 주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를 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은 그 처자와 모든 물건과 함께 산 채로 음부에 빠지고 그들에게 동조했던 250명은 불로 소멸되었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해롭게 한 일이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민 16:15). 오히려 지도자로서 진액을 다해 백성을 이끌었지요. 또한 그는 따라는 이적과 기사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애굽에 열 재앙이 내리는 것을 보여 주었고, 홍해를 갈라 마른 땅으로 건너며, 반석에서 물을 내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기까지 놀라운 일을 베풀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모세가 스스로를 높인다.’ 비방하며 대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투기한 이들의 죄가 얼마나 큰지 모든 백성에게도 깨우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운 사람을 판단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을 판단 정죄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름으로 사역하는 교회를 ‘잘못되었다. 이단이다.’라고 함부로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이기 때문에 투기는 그만큼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됩니다.
헛된 것을 위해 투기하는 어리석음
우리가 투기한다고 해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저도까지는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고 앞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없습니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 도다”(약 4:2)
오히려 욥기 4장 8절에 “내가 보건데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말씀한 대로 자신이 행한 악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옵니다. 자신이 뿌린 악의 대가로 병을 얻거나 가정과 일터에 재앙을 당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 14:30) 한대로 투기는 자신을 상하게 하니 백해무익할 뿐입니다. 따라서 남보다 앞서고 싶다면 투기함으로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물론 구한다고 다 얻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서 4장 3절에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하신 대로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니 받을 수 없지요.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욕심을 따라 구하고 있습니까? 오직 자신의 안위와 자랑을 위해 재물과 명예와 권세를 구합니다. 간혹 목회를 하다 보면 안타까운 것이 그것입니다. 재물과 명예와 권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혼이 잘되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린다 해도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안개와 같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7절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했고, 전도서 12장 8절에는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셨습니다. 헛된 세상의 것에 연연함으로 형제를 시기하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합당한 마음을 이루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마음의 소원을 이루시고 영원한 천국을 얻게 하십니다.
투기와 영적인 욕심은 달라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투기하는 이유는 믿음이 적고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적으면 세상 부와 명예, 권세 등을 더 갖기 위해 투기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에 시민권이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으면 주 안에서 맺어진 형제, 자매가 가족 이상의 존재가 됩니다.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설령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이라도 구원으로 인도해야 할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확고한 믿음 위에 참사랑이 임한만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되니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내가 잘된 것처럼 기쁘고 행복합니다. 이처럼 진정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세상의 헛된 것들을 추구하지 않고 어찌하든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하려고 주의 일에 열심을 냅니다. 곧 영적인 욕심을 갖게 되지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 11:12)
영적인 욕심은 투기와는 분명 다릅니다. 주 안에서 누구보다 더 열심히 변화되어 뜨겁게 충성하려는 마음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지나쳐서 진리를 벗어나거나 상대를 실족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열심을 내더라도 항상 주변을 살피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주며 화평을 좇아야 합니다.
첫댓글 자신이 화를 냈다든가, 무례하게 했다든가, 자랑했다든가, 교만했다든가 또는 타인의 굴욕에 화가 부글부글 났다든가 등 사랑과 상반되는 죄를 지었을 때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과
갈2:20를 생각고 '자아'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주님앞에 회개하고 그 자아를 십자가로 가져가 자아가 죽는 반복적인 회개를 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더 주님을 닮아갈 것 같습니다.
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망천국님, 제가 올린 글들에 관심 가져주시고 소중한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려요^^ 주님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하시길 바램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