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엔딩’을 들으며 생각하는 ‘해피엔딩’
전주온고을교회 황의찬 목사
우리는 노래를 참 좋아한다.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한다. 여름이면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를 부르고, 가을이면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을 흥얼거리다 ‘시월의 마지막 밤’을 부르고 겨울을 맞이한다. 봄을 맞으면서 부르는 노래는 무엇일까? 수년 전부터 ‘벚꽃엔딩’이라는 노래가 마치 벚꽃처럼 봄날 거리에 흩날린다.
봄은 시작이요, 벚꽃은 시작을 빛내는 휘황한 퍼포먼스다. 벚꽃이 우리의 출발을 핑크빛 꿈으로 부풀려 줌으로써 우리는 벚꽃처럼 화사한 새봄을 맞이해 왔다. 그런데 시작 곧 ‘비기닝’이 아니라 ‘엔딩’이라니! ‘벚꽃’에 ‘엔딩’은 가당치 않다. 그런데도 이 노래는 젊은이들의 가슴을 후볐다. 수년째 봄마다 벚꽃과 함께 음원차트 상위에 랭크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엔딩’은 영화가 끝나 불이 켜지고 관객들이 일어설 때 자막으로 흐르는 ‘엔딩 크레딧’과 어린 시절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 옛적 해님 달님 얘기의 결말 즉, ‘그래서 잘 먹고 잘 살았대요!’라는 ‘해피엔딩’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해피엔딩’을 꿈꾸며 살아왔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하여 숨 가쁘게 달려왔다. ‘저 고개만 넘으면 잘 먹고 잘 살게 되겠지!’ ‘지금 이 고통만 참아내면 불행 끝! 행복 시작!’ 그렇게 될 거라면서 허리띠를 졸라맸다. 이 신념에서 한 치도 흔들림이 없었다. 스스로 채찍질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독려했다. 이 모든 것이 ‘해피엔딩’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잘 먹고’는 된 것 같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잘 살기’는 오히려 전만 못한 것 같아 허탈해진다. 잘 먹는데 왜 잘 살지는 못할까? 우리가 몰랐던 것이 있다. 애초에 잘 먹는 것과 잘 사는 것은 마치 ‘벚꽃’과 ‘엔딩’만큼이나 이질적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잘 먹음’을 ‘잘 삶’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또 하나는 ‘해피엔딩’의 허구다. 사람이 숨을 쉬는 한 아무 문제없이 잘 먹고 잘 사는 해피엔딩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몰랐다. 살아있다는 것은 꿈틀거린다는 뜻이고, 꿈틀거리는 동안에는 항상 문제가 발생한다는 진리를 몰랐다.
인생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문제들을 거부하지 않고, 하나하나 힘들여 오르는 여정이다.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그래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해피엔딩의 언덕은 살아 있으면서 도달하는 곳이 아니다. 아무 걱정 없이 그저 즐겁고 흥겹기만 한 상태의 지속은 삶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무덤 저 편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착각한다. 내가 저 사람과 결혼을 하기만 하면 세상을 얻은 것처럼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 나와 저 사람 사이에 이것만 해결 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착각, 사업에서 대박이 나면 행복이 덤으로 따라올 것이라는 착각, 지금 앓고 있는 이 질환이 완치되어야 정상이 된다는 착각, 이러한 기대감은 우리를 성급하게 하고, 짜증나게 만든다.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삶이고, 관계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인격이고, 건강회복보다 더 시급한 것은 지금 잘 견디는 것이다. 이루고 난 후에 여유를 갖겠다는 생각보다 지금 넉넉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벚꽃엔딩’은 활짝 핀 벚꽃보다는 비바람에 흔들려 떨어지는 꽃잎을 밟고 지나가면서 부르는 노래다. 꽃잎은 떨어져 흩어질 때도 꽃잎이다. ‘해피엔딩’은 조급함으로 도달하는 언덕이 아니라, 지금 내가 걷는 인고의 길, 질곡의 도로 위에 벚꽃 잎처럼 구르는 행복의 알갱이들이다. 이 봄에는 허리를 굽히고 내 구두에 짓밟히는 행복을 모아보자!
첫댓글 글을 쓴다는 일은 쉬운 듯 하면서도 어렵습니다. 목회하다보면 가끔 원고 청탁을 받기도 합니다. 위의 글은 대전에 있는 을지병원 교회가 발간하는 계간지 '시믄나무' 봄호에 실린 글입니다. 뭘 쓸까 뭘 쓸까? 한참을 찾다가 써서 보냈는데, 부족함에도 실어주었네요! 우리교회 자유 게시판이 조금이나마 풍성해지도록 졸고를 올려봅니다. 읽어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황의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