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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이씨 청파공(靑坡公) 이육(李陸)선조의 생애 및 연보 (조선왕조실록에서 연보를 직접 발췌하였습니다) http://cafe.naver.com/gosung17/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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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세종20년(1438년 4월16일) 고성이씨(13世)로 태어났다. 휘(諱)는 육(陸),자(字)는 방옹(放翁),호(號)는 청파거사(靑坡居士) 또는 부휴자(浮休子),시호(諡號)는 문광(文光)이다.고조부는 고려조 공민왕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행촌(杏村) 이암(李嵒),증조부는 고려조(高麗朝) 밀직부사(密直副使) 이강(李岡),조부는 세종(世宗)때 좌의정(左議政) 이원(李原),아버지는 돈녕부정(敦寧府正) 이지(李墀),어머니는 감찰(監察) 연일정씨 (延日鄭氏) 정보(鄭保)의 딸이며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증손녀이고,부인은 교하 현감(縣監) 고령(高靈) 박씨(朴氏)수림(秀林)의 딸이다.
거주지는 한성(漢城) 남산기슭으로 기록되 있다. 푸른 야산의 언덕이 많다고 청파(靑坡)라 부르는 지역특성을 따서 호(號)로 불리어지는 것을 볼때, 현 서울 용산구 청파동(靑坡洞)부근에 사신 것으로 보인다.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 세조(世祖)10년 춘방문과(春坊文科)에 장원(壯元)급제하는 등, 과거시험에 5번이나 합격하였고 겸예문(兼藝文)에 선발되어 세자(世子)에게 문학,예문응교(藝文應敎) 등을 시강(侍講)하고 겸대(兼待)하였다.예문관(藝文館)의 관직은 높은 기준에서 선발된 고선(高選) 관원이니,선택에 든 자는 당시의 명유(名儒)이거니와 조석으로 유악(帷幄)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셔서 은총이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관직은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4도(경기도,경상도,충청도,강원도)관찰사(觀察使),4부(호조,예조,병조,형조)참판,중국 명(明)나라 사신 2차례 파견,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는 등,관리능력과 문명(文明)이 뛰어나서 중앙의 주요 관직과 지방 관직을 두루 거쳤다. 모든 서적에 통달한 가운데,특히 사서(史書)에 밝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특이한 사항으로 성종8년(1477년), 40세의 나이로 충청도관찰사를 제수 받았는데, 아버지 사암공(思菴公)이지(李墀)는 1473년부터 괴산군수로 이미 봉직하던 중이라 성종(成宗)은 부자간에 교대복명할 절차가 심히 곤란할 것임을 알고 체환(遞還) 전지(傳旨)를 내려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로 제수하여 영광스럽고 희귀한 사례의 표본이 되었다고 한다.
연산군(燕山君)때에는 생모 윤씨(尹氏)의 사건에 집착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대사헌(大司憲)으로서 시폐(時弊)의 시정을 직언하여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며 ‘성종실록(成宗實錄)’편수에도 참여 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생애(生涯) 260 여회나 이름을 올리고, 61세가 되던 해인 1498년(연산4년 3월17일)에 성품이 정한(精悍)하고 정치에 재간이 있으며 글을 잘한다고 졸기(卒記)하였다.
어려서부터 기품이 호방(豪放)하고 의협심이 많아서 무슨 일에나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배움을 즐기고 덕(德)을 숭상하였다.젊었을 때 지리산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풍류에도 초범(超凡)하시어 명승절경을 많이 탐방하였으며, 강릉 해안 기암(奇岩)이 있는 안인진리 해변가 암석(岩石)을 자주 찿으셨는데 당시 학덕이 높은 정승 허종(許琮)과 이육(李陸)이 시유(詩遊)하는 곳에서 유래되어 두사람의 성씨를 따서 이 곳을 허이대(許李臺)로 오늘까지 불리어 지고 있다.
저서는 청파집(靑坡集), 청파극담(靑坡劇談),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이 있다.유품(遺品)은 중국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효종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옥피리가 있다.이 옥피리는 우리 고성이씨 사암공파 진주 월당공 종중에서 보존해 오다가 1853년(철종4년) 진주에서 중간보완 간행했던 ‘청파집’ 판목40매와 함께 2004년1월27일 국립진주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목동 선영에 있으며,비명(碑銘)은 사마시(司馬試)와 발영시(拔英試)에 같이 급제하여 30여년간 동료로 지낸 용재(慵齋) 성현(成俔)판서가 지었다.
[청파 이육 선조의 연보]
-1452년(문종2년):15세,사마시(司馬試) 급제
-1459년(세조5년5월5일):22세,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잇달아 급제함. 관직에 나가지 않고 지리산 단속사(斷俗寺)에서 제자백가 (諸子百家) 등, 3년동안 입산하여 학문에 전념함.
-1464년(세조10년3월7일):27세,세조의 온양(溫陽)행차 별시 문과(춘방문과)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제수
-1464년(세조10년7월6일):겸예문(兼藝文) 관리로 지명(인재양성을 위하여 예문관의 관직을 띠고 학업을 닦게함),세자(世子)에게 시강원(侍講院)의 문학(文學)을 시강(侍講)하였고,예문관(藝文館)의 응교(應敎)를 겸대함.
-1466년(세조12년5월8일):29세,발령시(拔英試)급제, 종학원 사회(宗學院 司誨)가 됨. 왕명으로 영능(英陵)에서 인지의 측량시험
-1467년(세조13년10월13일):인지의(印地儀)로 도성의 지도를 제작함
-1468년(세조14년2월14일):문과중시(文科 重試) 을과로 급제
-1469년(예종1년3월12일):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에 제수되어 대관(臺 官)으로 활약,예문관(藝文館)전한(典翰)을 겸직함.시폐(時弊)를 진언한 공로로 당상(堂上)에 오르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추천되었으나 사양 하자 원종공신(原從功臣)의 호(號)를 받고 호분위(虎賁衛) 대호군(大護 軍)으로 발탁됨
-1470년(성종1년4월5일):사헌부 장령에 예문관(藝文館)을 겸관(兼官)제수
-1471년(성종2년9월6일):통정대부(通政大夫)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 事)제수
-1472년(성종3년12월9일):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 제수
-1474년(성종5년윤6월27):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曺參議)제수
-1476년(성종7년1월27일):명나라 도사(都司)선위사(宣慰使)로 사신파견
-1476년(성종7년2월14일):도사 선위사 필단(匹段)1필 하사(下賜)
-1477년(성종8년8월):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제수
-1478년(성종9년11월17일):통정대부(通政大夫) 예조참의(禮曺參議) 제수
-1479년(성종10년1월6일):통정대부(通政大夫)이조참의(吏曺參議)) 제수
-1479년(성종10년11월2일):통정대부(通政大夫)호조참의(戶曺參議) 제수
-1480년(성종11년7월12일):도사 선위사(都司宣慰使) 제수
-1483년(셩종14년6월15일):통정대부(通政大夫)병조참지(兵曺參知) 제수
-1484년(성종15년4월26일):통정대부(通政大夫)형조참의(刑曺參議)제수
-1484년(성종15년6월23일):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제수
-1485년(성종16년1월27일):가선대부(嘉善大夫)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제수,재직시 영녕전(永寧殿) 종헌관(終獻官)으로 참여하여 안구마(鞍具馬) 하사
-1488년(성종19년3월29일):가선대부(嘉善大夫)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 府事)제수
-1488년(성종19년5월7일):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참판(刑曺參判) 제수
-1488년(성종19년10월24일):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제수
-1489년(성종20년10월3일):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曺參判) 제수
-1490년(성종21년10월13일):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 북경에 가서 하정 사(賀政使) 수행
-1491년(성종22년3월4일):정조사(正朝使) 북경(北京)에서 돌아와 복명함
-1491년(성종22년3월20일):의정부(議政府)에 둑소(纛所) 설치 건의
-1493년(성종24년3월23일):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曺參判) 제수
-1494년(성종25년12월24일):명나라 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 로,성종승하(成宗昇遐)사실을 부고(訃告),시호(諡號)와 승습(承襲)을 청함
-1495년(연산1년1월1일):고부청시청승습사 명나라 예의에 따르라고 전교
-1495년(연산1년1월13일):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이육(李陸) 명나라 고부표(告訃表)와 청시표(請諡表)를 바침
-1495년(연산1년2월28일):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제수
-1495년(연산1년4월29일):성종(成宗) 부고사신(訃告使臣)으로 명나라 효종 알현후 복명
-1495년(연산1년7월2일):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제수
-1496년(연산2년6월24일):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제수
-1496년(연산2년8월4일):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제수,성종실록 (成宗實錄) 편찬에 참여
-1496년(연산2년9월11일):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제수
-1497년(연산3년4월3일):호조참판(戶曺參判) 제수
-1497(연산3년12월17일):병조참판(兵曺參判) 제수
-1498년(연산4년3월17일):병조참판(兵曺參判) 이육(李陸) 졸기(卒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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