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딸아이의 초등학교 졸업식이다. 평소 아이들의 학교행사에 잘 참석을 하지 않지만 졸업식만큼은 빠지지 않고 참석을 한다. 유치원 때도 초등학교 때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아마 졸업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던 가슴 아프고 슬펐던 나의 중학교
졸업식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세월만큼이나 졸업식 풍경은 참 많이 변했다. 요즘 아이들에게 졸업이란 그냥 즐거운 축제인가 보다.
그 시절에는 재학생의 송사 졸업생의 답사가 이어지면 여기저기 훌쩍거리는 친구들도 종종 볼 수 있었고 단상의 선생님들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시기도 했는데 송사 답사 같은 촌스러운 순서도
후배들이 불러주던 졸업식 노래도 없다. 아이돌 가수의 노래에 맞춰 신나게 춤추며 환호하는 모습에서
정든 학교를 떠나는 아쉬움이나 진지함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시대가 변하였는데 아이들에게 예전 우리들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졸업식이 끝나고 나면 모두 중국집으로 몰려가 짜장면에 일 년에 한두 번 먹어보기도 힘든
탕수육을 특별한 날이라며 시켜주신 부모님께 얼마나 감사했고 짜장면 한 그릇에도 행복 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이 그냥 그립다.
최신 스마트 폰을 졸업선물로 당연시 하는 요즘 아이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더 맛있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은 무엇으로 채워야하나!
마산국민학교의 졸업식 징크스가 있는데 그것은 송산중학교와 꼭 한날한시에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3년 터울로 자녀를 둔 부모들은 어쩔 수 없이 한분은 큰아이 다른 한분은 작은 아이 졸업식으로 가면서 왜 매번 같은 날 졸업식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에 찬 목소리가 적잖게 흘러나왔다.
그런 징크스는 혹시나 했던 나의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막내 여동생의 마산국민학교 졸업식이
같은 날에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난 졸업식에 혼자 가야만했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 내게 어머니는 어떡하냐 혼자 가서 그냥 오지 말고 꼭 짜장면 한 그릇 사먹고
들어오라며 돈 만원을 지어주시며 안타까워하셨다.
그런 어머니께 괜찮다고 걱정 마시고 막내 졸업식에 잘 다녀오시라고 말씀드리고 웃으며 대문을 나섰다.
어머니가 막내 졸업식에 가셔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거고 아쉬운 마음이야
없지 않았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적어도 졸업식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내 마음은 그랬다.
학교에 도착해 졸업식이 거행되는 체육관으로 들어서 자리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 꽃다발을 들고 뒤따라온 부모님들이 몰려들어오기 시작하고 내 자식이 어디 있나 찾아다니느라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이내 자식을 찾은 부모님들은 아들딸의 이름을 반갑게 부르며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면서 아침에 집을 나서던 그 의연함은 온데간데없이 조금씩 고개를 떨구고
어깨는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마치 시들어 가는 꽃잎처럼
그리고 머릿속은 온통 졸업장을 받고 빨리 학교를 벗어나려는 생각뿐이었다.
아 ~ 선생님 제발! 학교에서 무섭기로 소문나 있던 당시 교도주임 담임선생님은
평소와 같지 않은 다정한 모습으로 식이 끝난 후 일일이 반 학생들과 악수를 하며 졸업장을 나누워
주는 것이다 그것도 번호순으로 주위에 몰려든 부모님들은 졸업장을 받아든 자식의 손을 낚아채듯이
붙잡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난 거의 마지막으로 체육관을 나왔다.
이미 운동장은 울긋불긋한 친구들의 꽃다발과 형형색색 한껏 멋을 내고 차려입고 나오신
부모님들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빨리 저 교문을 빠져 나가야 하는데 다리가 움직이질 않는다.
도저히 저 많은 인파를 헤집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갈 자신이 없었다.
잠시 주위를 서성거렸다 혹시 어떤 친구가 같이 사진이라도 찍자고 불러주지나 않을까
그러나 다들 가족들과 기념사진을 찍으며 웃고 떠드는 모습이 마치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혼자 서성이고 있는 나를 구경하며 조롱하는 웃음소리로 들려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 나도 모르게 뛰어 들어간 곳이 화장실이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왜 우리 아버지는 뭐가 그렇게 급하셔서 어린 자식들을 남겨두고 서둘러 세상을 떠나셨을까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하나뿐인 아들을 혼자 졸업식에 보내야만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안타깝고 서글프셨을까 어머니에 대한 가여움과 오늘 같은 날 회사 하루 빠지고 와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서울에서 직장 생활하는 두 누나에 대한 야속함과 심지어 동네 어른들은
그래도 우리 집 사정을 아실 텐데 같이 짜장면 먹으러 가자고 하면 못 이기는 척 따라가려고 했는데
나도 짜장면 값 가지고 왔는데 친구 부모님들에 대한 서운함으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은 단지 졸업식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서만은 아니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지나온 3년의 시간은 남겨진 우리가족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고 힘겨운 삶의 시간이었다.
그 3년의 시간이 파노라마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며 억눌렸던 설움과 슬픔을
용암처럼 토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곧장 책가방을 던져놓고 혼자 고생하시는 어머니
일손을 돕기 위해 들녘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어떤 날은 내 어머니가 논두렁에 털썩 주저앉아
목 놓아 통곡하고 계신다. 두려웠다! 그냥 뒷걸음질 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아들인 나조차도 차마 다가가서 위로할 수 없을 만큼 두려운 한 여자의 절망의 울부짖음이었기 때문이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 무엇인지를 난 너무 일찍 알게 되었다.
밥을 먹을 때면 어머니는 늘 아들인 내 밥을 가장 먼저 퍼주셨다.
아버지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기에
난 어른인 것처럼 생각하고 어른인 것처럼 행동해야만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냥 수줍음 많고 해보고 싶은 것도 많고 이유 없이 부모에게 투정도 부려보고 싶은
또래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사춘기 청소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맞지도 않는 어른 옷을 걸쳐 입고 삶의 무게에 버거워 신음하고 있는 내안에 진짜 재복이와
마주한 그날은 한없는 자기연민에 빠져 좀처럼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깊은 상념에 빠져든 나는 그 지저분한 변소에서
두어 시간을 넘게 있었다.정신을 가다듬어 보니 밖이 쥐죽은 듯 조용하다. 빠끔히 문을 열고 나왔다.
그 많던 사람들이 썰물 빠져나가 듯 사라지고 어느 친구의 꽃다발에서 떨어졌을까 여기저기 나뒹구는
꽃송이는 꼭 처량한 내 모습 같다. 타박타박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나섰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 눈물과 망각이라 했던가! 학교를 나와 긴행길을 걷는데 마치 한겨울에 목욕탕에서 막 나왔을 때 느껴지는 그런 상쾌함에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했다.가슴에는 졸업장과 우등상보다도 더 자랑스러웠던 9년 개근상패를 꼭 품고
빨리 집에 가서 엄마한테 보여드려야지 배가 몹시 고프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십오리 길을 걸어 동네어귀에 도착했는데 저 멀리 마루턱에
그렇게 보고 싶던 우리엄마가 때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신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울지마! 울지마! 울면 엄마 마음 아파하셔 입술을 깨물고 다짐을 해봐도 그저 공허한 메아리일 뿐
한걸음 한걸음 내 어머니께 다가갈수록 다 말라버려 더 이상 나올 것 같지 않았던 설움의 눈물이
또다시 흘러내린다. 어느새 종종걸음으로 달려오신 우리 엄마가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무슨 말이 필요 하겠는가 우리 모자는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안고 신작로에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도시의 밤이 깊어간다. 거실 창밖에 불빛들이 하나둘 사그라지어가고 거리를 오가는 자동차의 불빛도
뜸하다. 아이들의 방문을 열어 본다 세상에 곤히 잠든 딸아이의 얼굴처럼 사랑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아빠밖에 모르는 딸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컸을까 이제 사춘기 딸아이는 아빠와의 스킨십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 밤에는 딸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어 본다.
아빠가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말을 마음속으로 건네며.......
아들의 방문을 열어본다. 어느덧 아빠와 눈높이를 맞출 만큼 키가 훌쩍 자란
아들은 아직도 철없는 행동으로 종종 엄마에게 꾸중을 듣는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내 아들은 또래 아이들처럼 철부지 아이로
자라날 수 있어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본다. 아들아 괜찮아 아빠가 널 지켜줄거야.
그러고 보니 꼭 우리아들만 했을 때 난 소 다섯 마리를 거두며 학교를 다녔었구나.......
소파에 앉아 졸업앨범을 펼쳐본다 자꾸 잊혀져가는 친구들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본다.
벌써 군데군데 세상 떠난 친구들도 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삶은 참 모순적이지 않은가!
사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 가는 게 우리네 인생이 아니던가!
단지 죽음을 망각하고 살아갈 뿐이지 그러고 보면 망각은 또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하지만 아주 가끔은 우리 인생의 끝이 있음을 반추해본다
그래서 삶은 의미 있어야 하고 밥벌이하는 바쁜 일상가운데서도 재미있고 즐거운 시간들로
채워 가야하지 않을까! 어찌 보면 가장 고통스럽고 힘겨웠던 삶의 시간들을 잊지 않고
애써 기억하려 하는 것은 그저 별일 없는 때론 권태롭기 까지 한 이 일상이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야할
삶의 시간인지를 잊지 않고 살아가고픈 간절함 때문일 것이다.
30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3학년 1반 열 다섯 살 나와 마주할 때면 안쓰럽고 측은하다.
재복아 그날 정말 가슴 아프고 슬펐지!
괜찮아 다 ~ 지난일이야 굵은 눈물방울이 중년남자의 주름진 얼굴로 흘러 가슴을 적신다.
# 지난 주말 시골집에 다녀오면서 잠시 중학교에 들러봤다.
가끔 운전을 하고 학교 앞을 지나다니긴 했지만 이렇게 교정을 둘러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 대부분 건물들은 신축을 했거나 구조 변경을 해서 학교 다닐 때 같은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지만
구석구석 둘러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월요일마다 전체조회가 열렸던 흙먼지 날리던 위 운동장은
곱게 잔디를 깔아놓았다.
# 유일하게 우리 학창시절 때 여학생들이 공부했던 교실은 외벽도색만 새로 했을 뿐
예전모습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교실로 사용되지는 않는듯했다
농촌인구감소와 요즘은 자녀들도 많지 않다보니 학생 수도 많이 줄었다고 한다.
늘 한번 들어가 보고 싶었던 곳인데 금남의 구역이라 학창시절 한 번도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 본관 뒤쪽 예전에 1, 2학년 남학생들이 사용했던 건물인데 증축을 한듯하다
당시 미술실인가 음악실만 2층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 아침등교시간이면 교문에 예부라고 학생회 간부 선배들이 명찰이나 배지를 착용하지 않거나
복장이 불량한 학생들의 이름을 적고 토요일 방과 후에
이곳 뒤 운동장에 모여 기압도 받고 남학생들은 더러는 맞기도 했고 잡초제거도 하던 곳인데
지금은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 이곳이 체육관으로 내려가는 계단 바로 옆에 남학생 화장실이 있었던 곳이다.
예전에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공터로 남아있다.
교정을 둘러보면서 잠시 머물러 있었더니 아내가 여기가 화장실 있던 자리구나!
참 여자의 직감은 가끔 소름 돋게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배구부가 가끔 전국대회 우승이라도 하면 개선장군처럼 카퍼레이드를 하며 돌아오는 선수들을
전교생이 일렬로 사강시장 양편에 늘어서서 환영행사를 하기도 했다.
배구부의 요람이자 학교선배 가수 조용필의 배구부 후원 공연을 하기도 했던 졸업식이 열렸던
송백관(松柏館) 더 웅장한 모습으로 신축을 했다.
#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했던가! 흙먼지 날리는 울퉁불퉁한 긴 신작로 양편에 군데군데 미루나무와
아카시아 나무가 서있었고 주위는 전부 논밭이었는데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어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하던 길이 이렇게 변했구나!
# 마침 이날이 사강장날이라 집사람하고 예전 학교 다니던 이야기도하며 장구경도할겸해서
시장 통을 둘러보자고 했다. 학교 바로 앞에 있었던 문방구 간판만 없어졌지 예전모습그대로다
사실 [학생사]라는 문방구 간판을 걸어놓고 주로 핫도그 떡볶이를 팔던 남학생들 분식집이었다.
나무막대에 소시지 하나 꽂고 반죽을 둘둘 말아 빵가루를 묻혀 식용유도 아닌 쇼트닝에 튀겨낸 핫도그가 얼마나 맛있었던지 뭐니 뭐니 해도 핫도그는 케첩을 발라 먹어야 제 맛인데 주인아주머니는 등 뒤에
케첩 통을 감춰놓고 딱 한번 씩만 발라주셨는데 어쩌다 아주머니 한눈팔 때 원 없이 발라가며
먹다 들켜서 욕 얻어먹고 지금도 그때 먹었던 핫도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 얼마 전에 관람했던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주인공 덕수가 월남에 가는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국기 하강식이 거행되자 말다툼을 멈추고 일어서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장면을 보고 얼마나 우습던지 하교 시간에 이 길을 걷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국기 하강식이 거행되면 모두 가던 길을 멈추고 학교 쪽을 바라보며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던 마치 삼류 코미디 영화 같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혹자는 그런 장면들이 국가주의라고 비난을 하기도 하지만 뭔가 함께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 예전에 컴퓨터 오락실건물이 있었던 자리인데 신축을 했다. 지금이야 전 국민이 손에 스마트폰 하나씩 들고 다니는 세상이지만 컴퓨터라는 말도 생소했고 윈도우가 나오기 전에 도스시절 컴퓨터 오락실은
최신 시설의 놀이터였다.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게임이 갤러그였는데 50원 동전을 넣으면 3판을
할 수 있었다. 근데 난 한 번도 보너스를 받지 못할 정도로 게임을 못했는데 동창 친구 중에
기환 이는 보너스에 보너스를 받으며 정말 게임을 잘했다.
그런데 매번 다른 빈자리가 있는데도 꼭 내 옆자리에 앉아서 벌써 게임오버냐며 빈정거리면서
어찌나 건방을 떠는지 주먹질을 하고 싶을 정도로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고 다시는 오락실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선생님 아들이었고 공부도 훨씬 잘했고 운동도 잘했던 자식이 왜 그렇게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남자의 핵존심을 건드렸는지 모르겠다.
혹시 반에서 배구부 다음으로 컸던 내 키가 부러워서 그랬을까!
참 이상한 건 오히려 그렇게 앙금 있던 친구들이 더 보고 싶고 생각도 난다.
아마 아직 동창회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친구들이 나를 꽤 많이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워낙 애들을 괴롭히며 학교를 다녀서 ㅋ ㅋ ㅋ
# 학생들이 가장 많이 드나들었던 문화서점 2층에 살림집이 있고 예전 그대로다.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 흔치않았던 강화유리로 출입문을 달아서 참 고급스러워 보였던 건물 이다.
여기 주인아주머니가 기억에 남는다. 아침 이른 시간에도 언제나 단정하신 모습으로 학생들을
반겨주셨는데 여느 시골 아주머니 같지 않게 얼굴도 참 고우셨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에 볼펜이라도 몇 자루 사려고 문을 열어봤더니 장날에도 장사를 하지 않는다.
창가에 색 바랜 문구용품들이 정말 이곳이 문화서점인가 왠지 쇠락해 가는
예전 사강 시장 길의 오늘을 대변하는듯하다.
# 시골 생활이란 것이 예나 지금이나 집안밖에 손보며 살아야할 곳이 왜이리도 많은지
전선줄 이어 전등 하나 달지 못하는 여자들만 집에 여섯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화서점보다 더 자주 드나들었던 삼거리 철물점이다.
당신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실 줄 아셨는지 아버지는 아들에게 손재주를 물려주셨다.
뭐든지 곧잘 고치고 잘 만들었다. 그래서 집에서 누나들이 부르는 별명이 순돌 아빠였다.
한 지붕 세 가족 이란 예전 드라마에서 탤런트 임현식씨 직업이 만물 수리상 이었고
아들 이름이 순돌이었다.
누나들도 그 시절이 그리운 걸까! 아니면 잊을 수 없는 걸까! 요즘도 가끔 순돌 아빠라고 부르는데
그리 듣기 싫지는 않다.
# 유일한 동네병원이었던 홍의원. 여기 원장 선생님이 외과 전공의라는데 당시에는 아픈 곳이 있으면
무조건 홍의원 으로 달려가서 진료를 받다보니 사실상 동네 종합병원이었다.
아마 우리친구들도 한 두 번씩은 홍의원에서 진료 받은 기억이 있지 않을까 싶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팔순이 넘은 원장선생님이 지금도 진료를 하신다고 한다 .
# 사강 5일장이면 도로 양옆에 천막을 치고 장사를 하던 노전들과 장보러 나온 사람들이 차와
뒤엉켜 복닥복닥 거리던 길이었는데 지금은 휑하니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보이질 않는다.
시장 통은 새로 지은 건물은 별로 없고 리모델링한 건물들이 대부분이지만
아직도 예전 건물 그대로 장사를 하거나 비어있는 건물들도 적잖게 남아있었다.
# 아직도 2일 7일이면 사강오일장이 명맥은 유지하고 있다. 전통시장 현대화 사업으로 정비되어
규모는 예전 같지 않지만 장날 분위기는 느낄 수 있었다.
이골목이 어렸을 때 우시장 골목이었는데 우시장이 없어지고 한동안 공터로 비어있다.
고등학교 때 롤러스케이트장이 이곳에 문을 열어서 토요일 방과 후면
신나는 팝송에 맞춰 개폼을 잡으며 롤러를 타던 생각이 난다.
그늘 한 점 없는 고등학교 입구 마늘장이 서는 곳이다. 어머니는 여름장날이면 농사지은 마늘을
내다 파셨는데 그런 날이면 학교버스대신 어머니와 일반버스를 타고 나와서 이곳까지 마늘보따리를
들어다 드렸다. 그럴 때 마다 혹시 아는 친구나 만나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고 그런 아들의 마음을
아셨는지 어머니는 괜찮다며 학교 버스를 타고 가라고 하셨지만 그 무거운 마늘 보따리를
외면할 만큼 인정머리 없는 아들은 아니었다.
그날은 시험기간이라 오전시험을 마치고 친구들과 교문을 나서는데 저 멀리 어머니가 마늘을
팔고 계시는 것이다 아차! 오늘이 장날이구나. 친구들에게 학교에 두고 온 물건이 있다며
다시 황급히 학교로 들어갔다.
한동안 운동장을 서성거리며 교문 틈으로 밖을 내다보니 아직도 마늘을 팔고 계신다.
버스 시간은 다가오고 학교 담을 넘어 농협 뒷골목 쪽으로 내려와 지화리 버스에 올랐다.
혼자 버스에 오르는 나를 보고 동네친구 재효가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야! 왜 혼자 타냐 어머니 못 만나 뵈었냐. 너 짜장면 사주신다고 교문 앞에서 기다리시던데!
그날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아들이 교문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고도.
마흔이 넘어서야 알았다 마흔이 얼마나 젊고 좋은 나이라는 것을
그 좋은 시절을 홀몸으로 당신 한 몸 희생해 육남매를 지켜주신 내 어머니가...
어머니가 아니라 한 여자의 일생이 너무 가여웠다! 얼마나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도대체 왜 그랬을까! 왜! 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 가여운 내 어머니에게
한달음에 달려가 우리 육남매 지켜주셔서 정말 고맙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꼭 한 번 안아드렸다면 이렇게 가슴을 짓누르는 마음의 빚은 없었을 것을.......
어떻게 어떻게 이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한단 말인가! 시간을 되돌릴 순 없지만
한여름 뙤약볕을 머리에 두른 수건 한 장으로 맞섰던 그 철의 여인 같은
당신은 아니지만 반백의 머리 굽어진 다리 나약하고 쇠잔해진 노인의 모습으로라도
지금 내 눈앞에 계시지 않은가! 하지만 아들이 엄마 한 번 안아드리는데
그렇게 큰 용기가 필요한 줄 몰랐다.
몇 수십 번을 망설였다 나중에 하면 되지... 다음에 하면 되지...
그러나 그 거친 손 한 번 잡아보고 그 쇠잔해진 몸 한 번 안아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날이 시나브로 다가오는데 또 그때 가서 미련 맞게 부질없는 후회를 하겠지...
두 번 다시 그런 가슴 아픈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시골집에 내려갔다 돌아오는데 조심해서 올라가라며 늘 따라 나오신다.
장성한 아들이 뭐 그리 걱정이 되서 늘 저러시는 걸까 하지만 가슴이 벅차도록 행복하다.
이내 그 후덥한 여름 장날로 내 마음이 달음질 친다. 등을 돌려 엄마를 꼭 안아드렸다.
정말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엄마 아들로 태어나서 하나님께 정말 감사하다고
뜻하지 않은 아들의 행동에 조금 당황하신 듯 했지만 눈물을 글썽거리시며 아들 고마워!
오래전에 이미 어머니는 못난 아들을 용서하셨을 거다
내가 철부지 중2 아들을 수없이 용서하는 것처럼 그것이 부모 마음이라는 것을
자식을 키워가며 비로서 배워간다.
고등학교 앞에 있는 아서원 이다 주인은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30년 가까이 이곳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집이다. 그날 학교 담을 넘지 않았다면 이렇게 어머니와 마주앉아
짜장면에 탕수육을 먹었겠지.사실은 짜장면 한 그릇 먹고 가고 싶은 마음에 아내에게
장 구경을 가자고 했다. 탕수육 소자도 하나 시키라고 했더니 많이 먹으라며 중자를 시킨다.
주방에서 탕수육 나왔다는 소리와 함께 홀 선반에 탕수육 접시가 놓였는데
장날이고 점심시간이라 홀 일손이 무척 바빴다 아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설마 저거 우리 탕수육 아니겠지 불안한 듯 속삭이며 내 눈치를 살핀다.
잠시 후 탕수육이 우리 테이블위에 놓였다. 아내가 풉~~~ 입을 막는다.
거봐, 내가 소자 시키라고 했어 안했어 여기가 강남인줄 알어! 여기 내 고향 화성이야!
아내는 너무 재미있는지 사진을 찍어서 친구들과 채팅을 한다.
시댁 가는 길에 짜장면 먹고 가는데 탕수육 중자가 이렇게 많다며
친구들의 반응은 대박이라고 한다. ㅋ ㅋ ㅋ
나이가 들어가는 걸까 요즘은 촌스럽다는 말이 정겹고 좋다.
재작년 서초동에서 결산 모임 때가 생각난다.
용균이가 이름난 맛집 이라고 예약을 한 곳인데 코스요리가 끝나고
연포탕하고 공기 밥이 나왔는데 밥뚜껑을 열었더니 두어 숟가락정도 밖에 안되는 양이었고
시골친구들이 종업원에게 이거 누가 먹던 밥 아니냐며 왜 이렇게 양이 적으냐며 밥 더 달라고 하자
여자 친구들은 여기가 화성인줄 아냐 여기 강남이다 강남사람들은 다 이렇게 먹고 산다며
촌스럽게 굴지 말고 주는 대로 먹으라고 면박을 줘서 박장대소 했던 일이 생각난다. ㅎ ㅎ ㅎ
첫댓글 재복이의 감수성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만은 아니었구나~~~~
어릴 때 '난쏘공" TV에서 보고 울었던 기억도 나네
현인들이 말씀하시길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고,
초년 고생은 노년 행복의 필수품이라고....
좋은 글 올려 줘서 고맙다!!!
즐거운 설 명절 보내라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길
그리고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한다. 부담 주는 것 아니야 시간 되면
정말 현인들이 그런 말씀 하신거야! 혹시 나 위로해 주려고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겠지 ㅋ
친구의 말에 진심으로 위로를 받느다! 그래 말년이라도 좋아야지 안그러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잖어!
부담 같은거 없어! 끄적거리느거 좋아해서 머리에 떠오르는 상념들 연습장에다 적어놨다가
시간날때 다듬고 정리해서 그림책이 더 재미있듯이 사진 몇장 같이 올리는거지.
그래도 자라온 환경이 비슷한 친구들이니까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도 많고 그래서 더 좋다!
야~ 정재복 !
너 사람을 이렇게 가슴 짠하게 만들래 ㅠㅠㅠ
난 신이주신선물이라는 망각에 기억들이 가물가물한데...
한동네서 어릴때부터 자랐어도 특별나게 나는 추억도 그다지없고...
내기억속의 재복이는 양볼이 불그스름하게 수줍게 미소짓는 개구쟁이 동갑내기정도인데 말야..
나두 좋은글 올려줘서 고맙고 부담주지않겠지만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부탁해^^
어머니가 지금도 가끔 너희 아버님 말씀하신다. 정말 살아계실때 고마웠던거 잊지 못하겠다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논농사 아무것도 몰라서 너무 막막했을때 자기집일 미뤄놓고 어머니 모시고 다니면서
하나하나 가르쳐 주시고 우리집일 먼저 해주시고 당신네 일은 나중에 하셨다고 그렇게 도와줘서 사셨다고...
내 기억에도 참 법 없이도 사실 분이었어 근데 약주를 너무 좋아하셔서 안타깝게 일찍 돌아가셨지만.
9년개근이라 그럴사람이아닌데 ~~~~ㅎㅎ
조카 오랜만이야!
9년개근 찍고 12년개근 했거덩~
공부 못하는 애들이 원래 가방은 무겁고 결석은 안해ㅎㅎ
울아빠도 마산국민학교 3회 졸업생이셨다^^
김영배 교감선생님이 옛날 은사님이셨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