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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인
교회로 세워 나가라
(엡1:22-23)
시작하는 말
은퇴 후 인생에 남는 것은 교회와 성도들 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세상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보다 더 소중하고, 귀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성도들은 세상에 남기고 가는 것은 개인적인 자산이 아니라 우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밖에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교회를 성경적인 모범교회로 세워 나가는 것이 쉬운 일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더욱 아니다. ❶첫사랑을 상실한 에베소 교회와 같은 교회를 형제우애가 넘치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세워나가야 한다 (계2:4-5, 계3:10). ❷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였든 사데교회와 같은 교회를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까지라도 죽도록 충성한 서머나 교회와 같이 세워나가야 한다(계2:10, 3:1-3). ❸니골라당과 발람의 교훈을 따르든 버가모 교회와 선지자 이세벨을 용납한 두아디라교회와 같은(계2:15-16, 2:22-23)교회를 이단과 끝까지 싸웠든 에베소교회와 같이 세워나가야 한다. ❹차지도 덥지도 않고 떳떳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교회를 성령의 불이 훨훨 타오르든 예루살렘 교회와 같이 세워 나가야 한다.
성경에 소개된 가장 이상적인 모델 교회는 역시“예루살렘교회”(행2:1-47)였다. 오순절에 예루살렘 어느 다락방에 성령이 강풍처럼 강림하셨다. 여기서부터 예루살렘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은혜 받은 사도들과 성도들이 전한 복음이 태풍처럼, 쓰나미처럼 온 세상을 덮치고 지나갔다. 그 결과로“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9:31)고 전하고 있다. 할렐루야~~~
성경적인
모델교회는 교회 ?
사람의 인격과 품격은 그 사람의 외적인 꾸밈이나 조건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적, 정신적, 영적인 가치관(values)”에 따라 평가된다. 성경에 소개된 초대교회와 한국의 초대교회는 혼탁한 세상에 하고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현실교회는 꺼져가는 심지(등불)나 맛을 잃고 짓발피는 소금과 같은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오히려 세상풍조가 교회에 깊숙이 파고 들어와 나쁜 영향을 많이 끼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상은 “성경적인 교회의 가치관”이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다.
일부 현실교회는 ➀그리스도의 피가 흐르지 않고 인간의 피로 얼룩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➁성령이 숨 쉬지 않고 그리스도의 향기대신 인간의 악취가 진동하고 있다. ➂임마누엘교회는 막을 내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말씀이 떠난 이가봇 교회(삼상4:21)로 전락하고 있다. ➃에벤에셀교회가 아벡교회로 급속히 변질되고(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지역 삼상4:11) 있다.
사도 바울은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2-23)고 말씀하셨다.
쉬운 성경에는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시고,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모든 것을 넘치도록 채우시는 분이 계신 곳입니다. ”고 알기 쉽게 번역했다. 교회는 원리적으로는“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공동체”이다.
모범적인
교회의 지도자 ?
사도 바울은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➀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➁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➂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3)고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감독과 집사의 직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딤전3:1, 8-9). 현실교회는 감독을 목사와 장로로 구분하여 취급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의 핏값으로 사신 교회를 아무나 맡기지 않으신다. 신성한 공동체를 신성하고 신령한 지도자들에게 맡기신다. 가룟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반열에는 들어갔으나 사도의 반열에는 들지 못했다. 맛디아는 제자의 반열에는 들지 못했으나 사도의 반열에는 들었다.
❶ 목사는 그리스도의 사신이다.
목사의 배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목사의 성경적인 명칭은 ➀목자(벧전5:2-4). ➁그리스도의 종, 그리스도의 사역자((빌1:1,고전4:1, 고후3:6), ➂장로(벧전5:1-3), ➃교회의 사자(계2:1), ➄그리스도의 사신(고후5:20, 엡6:20), ➅교사(딛1:9, 딤전2:7, 딤후1:11), ➆전도인(딤후4:5), ➇청지기(눅12:42, 고전4:1-2)등으로 소개된다.
목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지교회에 파송된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 그리스도를 대신한다는 것은 특권이 아니라 사명이다. 보낸 자와 그분의 명예를 위해 조심,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충성, 충성, 또 충성해야 한다.
목사는 지교회를 섬긴다. 당회장 권은 목자의 지팡이와 같다. ➀모세의 지팡이는 자기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지팡이었다. 그 지팡이로 한번 잘못 휘두르는 실수를 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➁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같다. 아론의 지팡이는 움이 듣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 살구 열매를 맺는 생명력이 있었다(민17:8). 백성에게 유익을 주는 지팡이로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믿음 없는 자들과 야합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지팡이를 들고 춤을 추는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 ➂주님의 지팡이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기 양떼들을 보호하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지팡이였다(시23:4,미7:14). ➃유다의 통치자의 지팡이(the ruler's staff)는 일명 치리자의 지팡이로서 백성들의 죄(범과)를 다스리는 역할을 했다(창49:10,시89:3). 지팡이를 잘 활용하면 공동체에 큰 유익을 끼치지만 잘못 활용하면 공동체에 큰 해를 끼치게 된다.
일부 개념 없는 목회자들은 ➀교회는 팽개치고 빌라도와 같은 정치가가 되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➁가야바처럼 율법주의자가 되어 교회 안에서 법대로, 법대로를 외치며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든다.
➂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서기관들과 율법사들처럼 외식주의 자가 되어 교회앞에 쇼하기를 좋아한다. 과시용으로, 전시용으로 아까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이런 목사들치고 목회 성공하는 자들 못봤다. 그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싫어하고, 성도들이 원치 않기 때문이다.
목사의 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이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의 길이다. 예루살렘에서~갈보리 언덕까지 약 800m의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을 말한다. 비아 돌로로사는 Latin어로 “슬픔의 길, 굴욕의 길, 고난의 길, 고통의 길, 목마름의 길, 피흘림의 길, 멸시와 천대의 길, 수치와 모욕의 길, 십자가와 죽음의 길,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의 길, 그리고 매장당하는 길”을 말한다. 이 길은 기도 없이는 절대 못가는 길이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한발자욱도 갈 수 없는 길이다.
목회는 직장생활이 아니다. 목사는 십자가 길의 기수(旗手, jockey)와 같다. 교회와 함께 죽고 교회와 함께 살아나는 길이다. 교인들과 함께 울고, 교인들과 함께 기도하고, 교인들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 죽음의 길로 올라가는 길이다. 함께~ 함께의~ 길이다.
비아돌로사의 길을 외면한 자들의 설교는 그럴듯하지만 마음에 와 닿거나 감동이 없다. 교인들이 감동과 은혜를 못 받으면 생활에 변화가 없다. 몇 년 못가 목회와 교회를 거들내고 만다. 그들이 지나간 흔적은 상처와 혼란만 있을 뿐이다. 바벨탑의 흔적만 남을 뿐이다.
진정한 목회자는 하나님과 수시로 미팅을 하고 하나님과 늘 교감하며 자나 깨나 하나님과 동행한다. 그 결과로 말씀에 감동이 있고, 교인들의 생활에 변화가 일어난다. 감동과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방패와 울타리가 되어 준다.
그러한 목회자는 감히 누가 건드리지 못한다. 혹시 건드려 봐야 헛발질에 불과하며, 바람을 잡으며 허공을 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참되고 진정한 목회자는 하나님이 친히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 피난처”(렘15:20)가 되어 주신다.
❷ 장로는 교회의 선도자이다.
장로는 봉사와 충성의 선도자이다. 선도자를 일명 선구자(pioneer)라고도 한다. 장로는 성령이 교회의 감독자(선도자)로 삼으신 자들이다. ➀감독자들은 자기를 위해, 온 양떼를 위해 삼가야 한다. ➁하나님이 자기 피로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다. ➂사납고 흉악한 이리가 들어와 양떼를 해칠 때 맞서 싸워야 한다. ➃교회가 위급할 때, 교회가 큰 사역을 할 때 앞장서야 한다. 광야의 세례요한과 같은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장로들은 세례요한의 비전(vision)을 가져야 한다.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30)고 외쳤다. 장로들은 목사에 대하여 이런 마인드가 필요하다.
장로들은 목회자의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한다. 장로는 목회자에게 걸림돌(stumbling block)이 아니라 디딤돌(stepping stone)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누구를 위해서? 주님이 사랑하시는 양떼들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자기와 자기의 3-4대의 후손들을 위해서(민14:18)~~~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5:17)고 권하고 있다. 교회에 배나 존경받을 만한 장로들이 계속 등장했으면~~~
장로의 치리권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보호하고 지키고 유지하기 위한 지팡이(방패)로 주셨다. 수많은 장로들이 이 치리권을 귄세의 칼로 여기고 마구잡이로 휘두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장로들 중에는 “치리장로”를 굉장히 강조하는 자들이 있다. 교회에 장로를 세운 목적은 어린 양들을 때려잡거나 목자에게 걸림돌이 되라고 세운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삼가고 또 삼가야 한다.
장로는 목사에게 건설적인 제안은 많이 할수록 좋다. 은퇴를 하고난 후 그때 그 일에 장로들의 말을 들었을걸 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가슴을 저미며 스쳐 지난간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
교회는 천국을 모형 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이다. 사도 바울은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➀자기 분량대로 역사하라. 사람의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다. 여러 지체는 각 지체의 분량에 맞게 역사해야 한다. 분량을 채우지 못하는 지체도 있지만, 분량에 넘쳐 과부하(過負荷, overloading)에 걸려 정신을 못 차리는 자들도 있다. 이런 자들을 우리는 시험에 든 자들이라고 한다.
➁자기 분수에 지나치지 말라 . 각 지체는 각자의 분량을 초과하여 분수에 넘치거나 모자라면 공동체가 어려움을 당한다. 공동체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피차 불행하게 된다. 나아가서는 파국을 맞게 된다. 분수에 맞게 행동하라는 말씀이다.
➂무익한 분쟁을 멀리하라. 고린도 교회는 당파로 말미암아 분쟁이 심한 교회였다. 사도 바울은“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divisions)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전 11:18-19)고 말했다.
교회는 전국각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끼리 어울릴 수 있다. 문제가 생기면 파당이 생길 수 있다. 거룩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사탄의 공작과 시험에 걸려 들 수도 있다. 그 결과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면 사탄은 기름까지 퍼부어 가면서 불을 지르고 부채질을 한다. 그 결과 교회는 “분쟁의 대명사, 싸움과 투쟁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전도의 문이 서서히 막히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는 분쟁이 없어야 하지만 혹시 있다할지라도 그 분쟁 중에서 하나님은 옥석(의인과 악인)을 가려내신다. 시시비비(是是非非), 옳고 그름은 분쟁이 지난 후 가려진다. 누가 교회의 공신인지, 누가 교회의 역적인지는 조만간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분쟁이란 “시험과정(testing process)”을 통해 알곡과 가라지, 진짜와 가짜(玉石)를 가려내신다는 말씀이다. 교회 안에서는 한번 좋지 못한 역적의 낙인이 찍히면 좀처럼 회복하기가 어렵다. 성경적인 직분자의 자기 명예는 자기가 지켜야 한다. 누가 절대 지켜 주지 않는다.
➃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 한다.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서로, 서로, one another”함께 노력해야 한다. 서로 서로가 안 될 때 문제가 생긴다.
우리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to serve)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라는 말을 고린도전서 18번, 후서까지 32번, 바울서신에서 132번 사용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5:13).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은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to serve one another in love.)”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들에게 종노릇했다.“유대인들, 율법아래 있는 자들, 율법 없는 자들, 약한 자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의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다”(고전9:20-23)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 교회는 다른 사람을 쳐서 복종시키는 곳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곳이다. 누구를 이기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이겨내야 한다.
➄거룩한 고난에 동참하라. 사도 바울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자신의 몸이다(행20:28). ➀예배당은 교인들의 피같은 물질을 바쳐 세웠다. ➁해외선교는 뜻이 있는 일꾼들이 거금을 드리고, 귀중한 통장을 털어가면서 세계 여러 곳에 예배당을 지어 헌당했다. 지금 부흥들 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➂교회 안에 가난하고 불쌍한 형제들을 위해 쌈짓돈을 털어 가면서 어려움을 함께 나누었다.
➅기도의 제단을 쌓으라.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제물로 드리려고 했다. 모리아 산은 아브라함의 기도의 제단이다. 그 기도의 제단에서 “여호와이레”의 응답을 받았다. 여호와이레의 응답은 자신의 목숨을 바칠 각오로 덤비는(dash) 자에게 주어진다.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
기도에는 공짜가 없다. 기도하면 반드시 영육 간에 건지는 것이 있다. 기도하는 자는 빈손으로 돌려보내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여호와이레”의 선물을 주신다.
기도의 용사들은 교회가 어려울 때 함께 제단뿔을 붙잡고, 함께 울부짖고, 함께 피땀흘려 기도하여 난관을 극복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살아 있는 역사이다.
성경에는 신구약 교회의 역사에 일어났든 신비한 일들이 많이 기록돼 있다. 성경자체가 신비한 책(Holy Scripture)이다. 그 신비를 우리는 믿는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체험한다. “하나님과의 은밀한 미팅을 통해서, 조용한 묵상을 통해서, 비몽사몽간에, 성경을 보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깊고도 신령한 체험을 한다.
끝맺는 말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3요1:2)고 축복했다.
사도 바울은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라”(고전8:3). ➀하나님이 알아주시는 교회, ➁하나님이 알아주시는 목회자, ➂하나님이 알아주시는 당회 원들, ➃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직분 자들, ➄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성도들, ➅하나님이 알아주시는 기도의 동지들이 되어 예루살렘 교회와 같이 모범적인 교회로 세워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