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국제 결혼도 일반화되었고 내 이웃에 외국인과 가정을 이루고 살아도 특별한 일이 아니다.
개방과 자유화시대의 단면일까 생계와 관계없이 흑인을 엔조이 상대로 택하는 여성들도 있다한다.
전설같은 이야기로 묻혀가지만 반세기 전만해도 여성의 정조는 목숨과도 같은 시대였다.
그 시대에 살던 처녀가 검은 아이를 낳았다면 어떤 심정이였을까 ,
사생아로 태어난 검은아이는 세상에 버림받은 아이로 좌절해버렸을까?
그시절 이야기다.
가수 "샌디김" 본명은 김복천 "복천은 해방이 되고 2년후인 47년에 태어났다.
대구에 어느 집성촌에서 곱게 자랐던 복천의 어머니는 22살되던해 이름도 姓도 모르는
美주둔군 흑인병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하여 복천을 임신을 하게된다.
처녀몸으로 부끄러운 일을 당한 복천의 어머니는 대구 수성못에 3번이나 몸을 던졌다.
그러나 운명은 질겼다 그때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생명이 건져졌다.
처녀의 몸으로 검은 피부의 아이를 낳고는 그곳을 떠나야 했기에 외진 산골에 22살이나
연상인 홀아비와 결혼했다.
심성이 고운 그 아버지는 그 아이를 하늘에서 내려준 복덩어리라 하여"福天"이라 이름 짓고
세상에 버림 받을 처지의 모자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7살되던해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구를 떠나 강원도 양구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는 남의집 허드래일 군인들 빨래 그리고 노점에 국화빵을 구어팔았고
아버지는 고물수집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1958년 겨울 강원도 양구. 살을 에는 매서운 추위에 10살 소년 복천은 집 근처 개울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국화빵 노점상을 마치고 집으로 오던 어머니 宋씨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고 다가갔다.
복천은 잔 자갈이 섞여있는 모래를 움켜쥐고 자신의 얼굴과 살갗을 문지르고 있었다.
칼바람속에 검은 소년 얼굴에는 검붉은 핏물이 맺혀 졌다.
학교에서도 마을에서도 아이들이 '깜둥이'라고 놀리기 때문에 피부를 벗겨보려고 한 짓이다.
어머니는 검은 아들을 부둥겨 안고 서럽게 울었다.
한번은 몹시 놀리는 친구와 싸우면서 병조각으로 손등을 긁었다. 그 친구의 손등도 긁어버렸다.
손등에 번지는 핏자욱을 가르키며 "임마" 피부색은 달라도 흐르는 피색깔은 똑같지 않느냐고 울부짖었다.
놀림감이 되면서 친구들에게 얻어맞지 않을려고 25리나 떨어진 당수도장에 다니면서 주먹 단련도 했다.
설움이 북받칠때는 방황하며 홀로 노래를 부르며 서러움을 달래기도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피부색깔이 다르다고 마땅히 받아주는 데가없자 건달처럼 떠돌기도했다.
외톨이 그는 타고난 목청으로 이마을 저마을 노래자랑 콩쿠르에 나가 상을 휩쓸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연예잡지에서 배우 이낙훈씨 기사를 읽게된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왔다는 기사를 읽고는 무작정 이낙훈씨를 찾아갔다.
이낙훈씨에게 이곳에서는 살수가 없으니 미국으로 가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매달렸다.
이씨는 외모가 독특하니 탤런트시험에 응시해보라고 권유한다.
69년 탤런트시험에 붙어 연속극 수사반장과 그외 외모에 부합되는 특정배역에 출연하는
연기생활을 하면서 다음해 작곡가 김학송을 만난다.
김학송은 복천의 그간의 살아온 과정을 듣고는 예명을 -모래알- "샌디 김"이라하여
1970년 박일명 작詩 "잃어버린 고향"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준다.
"-고향이 어데냐고 묻지는 말아다오 서럽게 태어난 몸이라서 할말도 못하겠네
날 나 주신 우리부모 그 어데 계시온지 가슴엔 슬픔만 쌓여 가는데
모두가 날버리고 차갑게 외면해도 입술을 깨물고 참아가며 한평생살으리라
샌디김은 혼혈 1세대 가수로 등장 하게된다.
윤수일 박일준 인순이 혼혈출신들이 연예계 진출하기 전이다.
연기자로서 가수로서 조금식 이름이 알려 지면서 "검은 눈물"이라는 노래를
후속타로 발표한다. 문진 작詩 ,
녹음하면서 설움이 북받쳐 울먹이며 하는 노래가 듣는 이의 가슴을 찡하게하는데...
-생각마다 눈물인걸 잊어버리자 수없이 다짐을 해보는 몸이
그러나 떠나지 않는 숙명속에서 쓰린운명 타고난 서러움을
저주하며 흘리는 검은 눈물
노래를 음미해보자니 "잃어버린 고향"은 편견의 사회에 대한 불만의 부르짖음 처럼 들리고
"검은눈물"은 자신의 설움 처럼 처럼 들린다.
한국사회는 혼혈인 그를 따뜻하게 대하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한국을 떠나 피부색이 같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미국으로 가고 싶었다.
81년 아는 兄의 도움으로 오래전 부터 원하던 미국땅에 발을 딛게된다.
흑인들이 많이 사는 마을에 정착을 하면서 이런 저런 일을 열심히했다.
어머니를 데려오기 위해 83년 미군에 입대하여 복무후 시민권도 얻었다.
굳은일에도 몸을 아끼지 않는 성실함에 흑인들 뿐만 아니라 미국사회에 뿌리내리고 사는
이주 한인들로 부터도 좋은 평을 받으며 경비원 경험을 바탕으로 경비용역회사를 차리게된다.
92년 4월 LA지역 흑인폭동사태가 발생했다.
한인가게에서 흑인소녀를 도둑으로 몰아 흑인사회의 감정을 건디린 것도 폭동의 단초가 되었다.
한인들이 운영하는 상가는 엄청난 피해를 입게되는데 그때 샌디김은 흑인 경비원들을 데리고와서
한인 상가를 지키는데 일조를 한다.
한국사회는 그를 냉대 했지만 그는 이국에서 동포들의 이익되는 일에 앞장을 섰고 누구를 만나도
자신은 한국사람이라고 자신있게 소개한다고 한다.
칠순인 그는 지금 미국에서 경비용역회사를 운영하며 한국인 아내와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이다.
ㅇ 가요에는 샌디김의 음반처럼 숨은 사연 노래들이 더러있다.
※모두가 날버리고 차겁게 외면해도 입술을 깨물고 참아가며 한평생살으리라
노래가사 처럼 그는 냉대와 역경을 이겨낸 인간승리자다.
귀로 듣지 말고 가슴으로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https://t1.daumcdn.net/cfile/blog/2141235056454B3606)
오아시스레코드 OL748 (70..7.25) 잃어버린고향, 검은 눈물 (샌디 김)
첫댓글 노래보다 해권 해설이 마음이 찡하내.
울산서 김해까지 잔치왔다가 잘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