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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럭키슈퍼 / 고선경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입니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홍시를 까마귀가 쪼아 먹네요
나는 럭키슈퍼 평상에 앉아 풍선껌 씹으면서
나뭇가지에 맺힌 열매를 세어 보는데요
원래 낙과가 맛있습니다
사과 한 알에도 세계가 있겠지요
풍선껌을 세계만큼 크게 불어 봅니다
그러다 터지면 서둘러 입속에 훔쳐 넣습니다
세계의 단물이 거의 다 빠졌어요
슈퍼 사장님 딸은 중학교 동창이고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닙니다
대기업 맛은 저도 좀 아는데요
우리 집도 그 회사가 만든 감미료를 씁니다
대기업은 농담 맛을 좀 압니까?
농담은 슈퍼에서도 팔지 않습니다
여름이 다시 오면
자두를 먹고 자두 씨를 심을 거예요
나는 껍질째 삼키는 게 좋거든요
그래도 다 소화되거든요
미래는 헐렁한 양말처럼 자주 벗겨지지만
맨발이면 어떻습니까?
매일 걷는 골목을 걸어도 여행자가 된 기분인데요
아차차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지는데요
바람이 불고 머리 위에서 열매가 쏟아집니다
이게 다 씨앗에서 시작된 거란 말이죠
씹던 껌을 껌 종이로 감싸도 새것은 되지 않습니다
자판기 아래 동전처럼 납작해지겠지요 그렇다고
땅 파면 나오겠습니까?
나는 행운을 껍질째 가져다줍니다
▲1997년 안양 출생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詩 부문 심사평
이문재·시인 / 정끝별·시인
시의 봄은 세상의 봄보다 빨리 온다. 시의 나라에서는 새해 첫날이 새봄의 첫날이다. ‘신년문예’가 아니고 ‘신춘문예’인 까닭이다. 엄동설한에 봄을 열어젖히는 신춘 시처럼, 시의 시제(時制)는 언제나 미래다. 천 년 전을 노래하는 시라고 해도 그 시가 좋은 시라면 시의 마지막 행은 미래로 열리기 마련이다. 이번 새해 첫날에도 시의 나라는 설레는 마음으로 ‘입국 비자’를 발급한다. 시인의 숫자가 아니라 우리 시의 영토가 다시 넓어지는 순간이다.
입국 심사대에 올라온 본심 대상작 열 분 중 네 분이 남았다. ‘폭우’(외)는 일상의 균열을 포착하는 감각적 묘사와 시적 통찰이 빛났으나 예견 가능한 시적 구도가 아쉬웠다. ‘팝콘꽃’(외)은 가족이라는 근원적인 상처 혹은 폭력을 겨냥한 팝콘처럼 튀는 비유적 상상이 매력적이었다. 튀려는 시적 욕망을 조금만 더 제어했으면 싶었다. ‘덫’(외)은 언어를 어떻게 마르고 잇고 매듭짓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언어의 압침들이 꽂힐 언어 이전이나 언어 너머의 지점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졸업반’(외)을 내려놓는 데는 긴 논의가 필요했다. 그의 시편들은 시가 노래와 만나는 지점을 잘 알고 있었다. 리듬감이 좋았고 시의 완성도도 높았다. 시편들에서 엿보이는 시에 대한 열정과 내공이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그 자연스러움에서 묻어나는 기시감이었다.
‘럭키슈퍼’(외)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최근 시의 파장 안에 있으면서도 지금-여기의 사회 현실과 청춘의 당사자성이 감지된다는 미덕이 있었다. 버려진 과일(홍시), 낙과(사과), 씨는 물론 껍질째 먹는 과일(자두), 그리고 부풀었다 터지는 단물 빠진 풍선껌, 헐렁한 양말, 납작한 동전을 먹는 자판기 등이 있는 ‘럭키슈퍼’가 화자의 현주소다. 젊은이의 미래와는 먼 오브제들이다. 화자는 ‘농담 맛’이 가득한 ‘럭키슈퍼’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화자의 동창이자 ‘럭키슈퍼’ 사장 딸은 감미료로 비유되는 ‘대기업의 맛’을 맛보고 있다는 대비도 능청스럽다. 퉁치면서 눙치고, 관(貫)하면서 통(通)하는 ‘행운’의 의미를 농담과 엮어내는 시적 패기를 높이 평가했다. 신춘 같은 미래를 향해 “푸른 도화선 속으로 꽃을 몰아가는”(딜런 토마스), 그런 시의 힘을 기대한다.
■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경유지에서 / 채윤희
중국 부채를 유럽 박물관에서 본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나는
딱정벌레 날개 위에 누워 있다
한때 공작부인의 소유였다는 황금색 부채
예수는 얼핏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약속의 땅은 그림 한 뼘
물가로 사람을 인도한다는 뿔 달린 짐승은 없다
한 끝이 접혔다가 다시 펼쳐진다
떨어진 금박은 지난 세기 속에 고여 있고
사탕껍질이 바스락거린다
잇새로 빠져나와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받아 적을 수 없는 소리
파란색을 좋아하는 나는
물총새 깃털을 덮고 잠든다
멸종에 임박한 이유는 오직 아름답기 때문
핀셋이 나를 들어올리고
길이 든 가위가 살을 북, 찢으며 들어간다
기원에 대한 해설은 유추 가능한 외국어로 쓰여 있다
따옴표 속 고어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오랜 세월 파랑은 고결함이었고 다른 대륙에 이르러 불온함이 되었다
존재하지 않던 한 끈 열릴 때
나, 아름다운 부채가 되기
열망은 그곳에서 끝난다
▲1995년 부산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졸업
● 심사평 시시간-공간 넘나드는 활달한 상상력, 매력적으로 다가와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대체로 무난했다. 달리 말하면 위험도 모험도 드물었다는 말이다. 안정적 기량이 우선인 것은 틀림없지만 개성적인 목소리가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균일함은 우리가 보낸 한 해의 격동과도 거리가 있어 보였다. 시가 삶의 불안을 고스란히 드러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시대의 삶의 환경과 동떨어진 기예를 겨루는 경연도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본심 심사위원들이 만나서 가장 먼저 나눈 얘기는 바로 이 의아함에 대한 것이었다.
오래 논의한 세 작품은 ‘남겨진 여름’, ‘씨앗의 감정’, ‘경유지에서’였다. ‘남겨진 여름’은 문장의 신선함이 눈에 띄었고 근경과 원경을 오가며 사유를 전개하는 리듬도 흥미로웠다. 다만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시의 마지막 연에서 상투형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쉬웠다. 압축과 절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씨앗의 감정’은 이질적인 이미지를 하나의 시상을 중심으로 그러모으는 솜씨를 보여줬다. 씨앗을 소재로 한 사유가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변주되는 양상은 신선했다. 그러나 시의 마지막 대목에서 대사를 그르쳤다. 모든 시가 기승전결과 대미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심사위원들은 긴 논의 끝에 ‘경유지에서’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활달한 상상력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나아가 찰나적 순간을 자신의 삶에 대한 사유로 길어오는 기량도 믿음직스럽다. 함께 투고된 작품들이 고른 기량을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한 작품을 고르라면 이 작품일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한 동의가 있었다. 기대와 더불어 축하의 마음을 전한다.정호승 시인·조강석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문화일보 시 당선작
상자 놀이 - 김보나
내 방엔 뜯지 않은 택배가
여러 개 있다
심심해지면
상자를 하나씩 열어 본다
오래 기다린 상자는
갑자기 쏟아지는 풍경에 깜짝 놀라거나
눈을 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건 착각이야
세계는
누군가 눈을 뜨기 전에
먼저
빛으로 눈꺼풀을 틀어막지
나는 상자가 간직한 것을 꺼내며 즐거워한다
울 니트의 시절은 지났고
이 세제는 필요하다
새로 산 화분을 꺼내
덩굴을 옮겨 심으면
내 손은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된다
그래도 돼
뮤렌베키아 줄기가 휘어지는 방향을 따라가도 돼
친구는 이것을 선물하면서
식물은
쏟아지는 빛의 자취를 따라가며
자란다고 말했지
방을 둘러보면
여전히 상자가 수북하다
이삿짐이거나
유품 같다
빈 상자가 늘고
열 만한 것이 사라져 가면
나는 이 방을 통째로 들어
리본으로 묶을 궁리를 해 본다
▲1991년 서울 출생
▲성신여대 교육학과 졸업
■ 시 심사평
심사는 예심과 본심을 통합해 진행됐고, 논의를 거쳐 10여 편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 이 중에서 ‘가뭄’ ‘포도’ ‘청년 희망 회복’ ‘상자 놀이’가 경합한 끝에 ‘상자 놀이’가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마지막에 아쉽게 수상의 영예에서 밀려난 다른 작품들 역시 서정적 울림과 개성을 지닌 높은 수준을 보여줬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중론이었다.‘가뭄’은 자연어의 결합을 통해 영혼의 갈증과 슬픔을 형상화해내는 언어 감각이 눈에 띄었다. ‘포도’는 도입부의 돌발적인 이미지가 끝까지 유지되는 흡인력과 의미의 여운을 증폭시키는 간결한 시상 전개가 인상적이었다. ‘청년 희망 회복’은 변두리 재개발지와 도시계획 차원에서의 개발행위의 상관관계를 통해 사회적 관심을 환기해내는 시선의 힘이 돋보였다. ‘상자 놀이’는 평범한 일상의 소재에서 운문적 리듬감을 이끌어내는 풍부한 상상력과 감성이 감탄을 자아냈다.이 작품들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일차 의견 교환이 있고 난 다음 ‘가뭄’은 언어 감각의 화려함에 비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불투명하다는 점, ‘포도’는 돌올한 언어 배치가 인상적이지만 한편으론 그것이 행간의 깊이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이 각각 지적돼 제외됐다. 최종적으로 ‘청년 희망 회복’과 ‘상자 놀이’가 남았다. ‘청년 희망 회복’은 재개발지에 꽂힌 ‘깃발’을 통해 세계가 재편되고 그 안으로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적하는 사회적 비판의식과 구체적 사실감이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다소 시가 직설적이고 산문적이라는 점이 고심케 해 당선작이 되지 못했지만 이 응모자의 앞날을 기대하게 한다. 결국 끝까지 남은 ‘상자 놀이’가 별다른 이견 없이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우선 ‘상자 놀이’는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여백의 미가 서정시로서 갖춰야 할 품격을 한층 높인다. 시상을 전개하는 맑고 순수한 시행의 흐름이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에서 막힘없이 운용돼 운문적 리듬감으로 충일하다. 또 시행과 시행을 건너뛰는 간결함과 담백함으로 우리 마음의 여백에 잔잔한 파문을 남기는 풍부한 상상력이 여운을 자아낸다. 이 시는 “뜯지 않은 택배”라는 평범한 일상의 소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태의연하게 쓰지 않고 현실에 발을 댄 독특한 시선으로 변주하는 공간 변용 능력과 감정의 안배가 뛰어나다. 상자의 닫혀 있음과 열림, 그를 통해 드러나는 어둠과 빛이 팬데믹 시대의 도시적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내를 주거 공간에 집약해낸다. 무엇보다 당선작과 함께 보내온 응모작들의 수준이 고른 점도 안심케 하는 대목이다. 산문화와 장식적인 수사가 대세를 이루는 오늘날의 시적 풍경 속에서 이 신예시인이 현실 세계와 상상 세계를 덧대어 어떤 삶의 박동과 리듬을 우리에게 선물해줄지 큰 기대를 가지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심사위원 나희덕·박형준·문태준
■ 세계일보 시 당선작
비 오는 날의 스페인 / 이신율리
죽는 사람들 사이로 날마다 비가 내린다
사과는 쓸모가 많은 형식이지 죽음에도 삶에도
수세미를 뜬다 사과를 뜬다
코바늘에 걸리는 손거스러미가 환기하고 가는 날씨
를 핑계로 미나리 전이나 부칠까
미나리를 썰 때 쫑쫑 썰어대는 말이 뒤섞인들 미나리
탕탕 오징어를 치며 바다가 보인대도 좋을
다행히 비 내리는 날이 많아 그 사이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
올리브 병에서 들기름이 나오면 핑계 삼아 한판
사과나무에서 다닥다닥 열린 복숭아를 다퉈도 되고
소금 한 주먹 넣으며 등짝도 한 대
단양과 충주 사이에 스페인을 끼워 넣는다
안 될 게 뭐 있어 비도 오는데
스페인보다 멀리 우린 가끔 떨어져도 좋을 텐데
철든 애가 그리는 그림 속에선 닭 날개가 셔터를 내리고 오토바이를 탄 새가 매운 바다에서 속옷과 영양제를 건져 올렸다 첫사랑의 정기구독은 해지했다
꽃병에 심야버스를 꽂았다 팔다리가 습관적으로 생겨나는 월요일, 아플 때마다 키가 자라는 일은 선물이었다
불꽃이 튀어도 겁나지 않은 나이는 이벤트였지
단풍 들지 않는 우리를 단양이 부른다 스페인은 멀고
안전벨트를 매고 접힌 색종이처럼 사진을 찍는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누군가 멀리 떠난다
▲1959년 충남 부여 출생
▲용인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악과 졸업
◆심사평 - 안도현·유성호
202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응모작들은 예년에 비해 숫자는 조금 줄었지만 그 수준과 내실은 더욱 탄탄해졌다고 할 수 있다. 역량 있는 신인들이 이렇게 다양한 작품을 투고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게 다가왔다. 심사위원들은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을 읽어가면서 다수 작품이 빼어난 언어와 안목을 보여주었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시단의 주류 시풍이나 관습적 언어를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의 경험적 언어에 오랜 시간과 정성을 쏟았을 작품들이 많았다. 침체기에 있는 한국 시는 이들의 언어를 통해 새로운 개진을 해갈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그 가운데 김하미, 이신율리, 조민주씨의 작품을 오래도록 주목하였는데, 숙의 끝에 상대적으로 균질성과 언어적 안정감을 가진 이신율리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신율리씨의 ‘비 오는 날의 스페인’은, 비가 내리는 풍경 속에서 구성해가는 사람살이의 외관과 생태와 속성이 인생론적 깊이를 함축하고 있는 수작이다. 그 안에는 음식들에 관한 숱한 기억의 구체성과 함께, 스페인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더 멀리 떠나 있어도 좋을 사랑과 불꽃과 시간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수없는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의 파노라마가 환상성과 역동성을 함께 거느리면서 그림처럼 사진처럼 다가온 선물이자 이벤트였다. 더욱 성숙한 시편으로 세계일보 신춘문예의 위상을 높여주기 바란다.
당선작이 되지 못했으나 구체성과 심미성을 두루 갖춘 사례들이 많았다는 점을 부기한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는 타자들을 애정 깊게 응시한 결실도 많았다. 다음 기회에 더 풍성하고 빛나는 성과가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응모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마음 깊이 당부 드린다.
■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 백가경
1920년 변호사 세바스챤 힐튼은 어린이들에게 3차원 공간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고자 정글짐을 발명했다
*
x가 머리 위에 달린 축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다 높이를 미처 재지 못한 x의 발이 바닥에 거의 닿을락 말락 누군가 실컷 타다 뛰어내린 그네처럼 어안이 벙벙하다
x의 팔과 다리가 점점 빠르게 버둥거린다 x는 하나의 커다랗고 검은 점이 되는가 싶더니 그 어떤 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x값이 무한 증폭된다
y님 행복을 주는 치과 생일 축하드립니다. 임플란트 10% 할인 1
어떻게, 잘 지내? 1
은평구도서관 ‘세상의 끝’ 연체 49일 빠른 반납 요망 1
소액 대출 최저 이율로 신용등급 모두 가능
y는 몸을 정육면체 안으로 구겨 넣는다 점점 y값을 잴 수 없고 그럴수록 y는 생각한다
이 모든 되풀이는 나의 결과 값 “(경제적) 자유”를 위한 것
z의 미래 값: 직사각형 화장실 천장에 도시가스 공급관이 노출돼 있음 장판과 텐트 사이 혈액이 말라붙어 표백제와 기타 용액을 계산한 것보다 한 통 더 사용함 청구 예정
z의 현재 값: 중위소득 85% 이하 가정에서 자란 3학년 C반
*
발가락 하나로 자신의 목숨을 지탱한 x는 같은 위치 옥상에 사는 주민이자 애인 z를 찾아 창백한 타일로부터 그를 무한 증식시킨다 열화 과정에서 z는 기체로 변할 수 있게 되고 y가 연체한 ‘세상의 끝’을 대신 반납한 후 49일을 1초 만에 앞당겨 ‘세상의 끝 역자 후기’를 대출한다 y가 연탄과 소주를 담아 온 마트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을 때 자연스럽게 제목을 볼 수 있도록 책을 비스듬히 세워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
범우주아카이빙센터 12호 연구소장은 x, y, z 세 어린이를 한 차원에 모아 두고 질문을 시작한다
말을 끊어서 미안하지만 여러분 어떻게 연결되었으며 이런 건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세 어린이 동시에 말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연구소장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어린이들 모르게 언어 변환 버튼을 누른 후 짧게 욕을 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능력은 어떤 문헌에서 찾은 것인가요?
어린이 일동, 문헌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 Hypercube 4차원에서 모든 변의 길이가 같은 도형, 10개 이상의 처리기를 병렬로 동작시키는 컴퓨터의 논리 구조
▲1991년 생
시부문 심사평
심사위원 박준·김행숙·김현
우리 삶의 시간은 ‘살아내는’ 능동과 ‘살아지는’ 수동이 얼마간 뒤섞이기 마련이다. 반면 우리가 시를 쓰는 시간은 온전한 능동만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투고된 작품들은 언어와 삶의 주체를 회복하려는 저마다의 고투다. 이 흔적을 따라 읽는 것은 경외가 가득한 것이었고 이들 가운데에서 한 편만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것은 고민을 더하는 일이었다.
5명의 작품을 정해 더 깊은 논의를 이어나갔다. 이미 모두 자신만의 것을 가지고 있는 고유함들. 김소영은 구어와 문어의 적절한 활용을 통한 활달한 에너지로 일순간 세계의 이면을 서늘하게 드러낼 줄 안다. 박규현은 개성 있는 호흡과 리듬이 돋보였다. 행의 배열이나 문장이 끝나는 지점을 어슷하게 두어 여운을 발생시키는 감각도 좋았다. 원예린은 무심한 듯 부리는 언어들로 미감을 이끌어내는 능이 상당했고 시적인 것을 발견해내는 밝은 눈도 인상 깊었다. 박다래의 원고는 끝까지 놓지 못했다. 평이한 진술 가운데 묘한 긴장감을 불러내는 능력. 숨어 있는 서정을 잡아채는 감각. 다만 문장의 반복이나 중복이 만들어내는 효과에 대해 스스로 한번쯤 의심해주었으면 하는 고언을 드리고 싶다.
백가경의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외 4편을 당선작으로 정한다. 백가경의 시는 명징한 언어로 작품을 구축한다. 어떤 모호성에 기대어 상상을 비약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사유와 진술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방법론은 자칫 단순해지고 평이해질 위험이 따르는 것이지만 시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 공고하게 세계를 확장시킨다. 미학적 자유로움은 정확함 위에서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름답고도 투명하게 상기시켜주는 시인이다.
앞으로도 내내 지난할 시간 속에서 시인만의 가장 고른 것들을 우리에게 꺼내주시길 기대한다.
■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시드볼트 / 오산하
눈을 감았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국가를 떠올리면서 습한 냄새를 맡으면서 안개 속으로 뛰어들면서 길거리의 새를 하나둘 세면서 걸어
눈이 마주쳐도 날아가지 않는 새 발로 바닥을 밟아도 도망가지 않는 새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넘어졌어 까맣게 피멍이 들었다
하루가 지나서 생일 축하해 문자를 받고 시차가 생겼어 하루 늦게 생일을 맞이하면서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과 선물 받은 오르골을 돌리면 모르는 노래가 나온다 노래는 언젠가 끝나겠지
전쟁과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언제가 가장 끔찍할 거 같아 라는 노르웨이에 가고 싶대 거기에 자신을 묻을 거라고 했어 나는 Green Day의 Holiday를 들으면서 반역자! 반역자! 죽어버린 사람들의 피가 흘렀어 아 곧 종말이구나 그래서 라는 노르웨이에 가고 싶구나
두 개의 음 두 개의 박자 머리 위로 떨어지는 15층의 사람과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차 사람의 바싹 마른 피부와 솟구칠 힘도 없는 피 물 물 물 전쟁이 끝나지 않은 곳에 다 녹아버린 얼음의 흔적과 끈적한 더위가 있어
라는 붙잡아도 부서진다 길을 걷다가 쪼그려 앉아서 새를 가만히 쳐다봤어 새가 내 눈알을 파먹으려고 해도 가만히 있었어 계속 굴러가다가 영원히 남도록 그곳은 마치 도서관 같다
추워 라는 시드볼트로 들어가 문을 닫았어 이건 한 세기 전 살아있던 사람의 눈알이구나
계속 걸었어 뚝 뚝 흘리면서 걸었어 끊어진 다리 뒤집어진 배 치지 않는 파도 하늘에서 떨어진 새 검은 새 검 눈동자 뽑힌 눈알 굴러가는 심장 굴러 떨어지는 법을 배운 나 깔깔 웃는다
▲1998년 경기도 성남 출생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예정
시부문 심사평
다락방에 몇 년은 묵힌 것 같은 누르스름한 종이에 볼펜으로 눌러쓴 시가 있었다. 잘 풀리지 않는 가정사의 고달픔과 그럼에도 살고자 하는 의지를 쓴 것이었는데, 시보다는 일기에 가까웠다. 당연히 박스에 다시 들어갈 원고였지만 어쩐지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시가 되든 안 되든 쓴다는 행위의 거룩한 순간을 가늠해보는 것이다. 그 중에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순간은 없을 것이다. 이번 신춘문예에 시를 보낸 모든 이들이 이미 시인이라 믿는다. 그분 중에서 한 명의 시인을 공식적으로 호명할 수 있어 두렵고 영광이다. 안타깝고 기쁘다.
문학상이나 신춘문예 혹은 각종 지원 사업 심사위원은 수많은 응모작 중에 당선작 일부를 골라야 하는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지 최근의 문학 흐름을 짚는 선지자나 응모작의 전반적 수준을 평가하는 심판자가 아니다. 누군가는 하긴 해야 하나 마땅한 이가 달리 없어 그 자리를 꿰찬 것이라 생각함이 옳다. 그러니까 심사위원은 각자의 양심과 문학관에 따라, 심사를 최대한 ‘잘하면’ 된다. 내가 무언가 놓칠 수 있다는, 겸손함에서 비롯된 불안감이 그 심사를 잘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차도하 씨의 ‘침착하게 사랑하기’ 외 4편이 불안감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골똘하게 보냈던 긴 예심 시간과 달리 본심에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만큼 탁월했다. 다소 작은 세계를 말하려는 듯한 제목과는 달리 쉬이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를 다루는 용기가 돋보였다. 천진해 보이는 어투가 단단한 세계를 뒷받침하고, 너른 시선이 가벼운 문체를 단속했다. 이 같은 특성을 묶어 범박하게도 ‘새로움’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리라. 무엇보다 기성 시인 누구도 쉽게 떠올릴 수 없게 한 개성의 충만함이 눈부셨다.
‘온몸의 외국어’외 5편을 보내준 고명재씨와 ‘모든 끝은 둥글다’ 외 4편을 보내준 윤혜지씨의 원고도 함께 논의했다. 충분한 시적 성취가 엿보였으나, 구태여 발견한 작은 이유들로 당선작으로 선하지는 못하였다. 어디에선가 다시 이름이 불릴 날이 있으리라 믿는다. 차도하 시인께 축하의 마음을 건넨다. 찬란한 순간의 공간에서 영원한 고통의 세계로 넘어온 것을 환영한다. 이제 시작이니, 크게 숨을 들여 마셔도 좋겠다.
서효인 시인
■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반려울음 / 이선락
슬픈 시를 쓰려고 배고프다, 썼는데 배으다라 써졌다
뒤에 컷서를 놓고 백스페이스 키를 누르자 정말 배가 고팠다
뱃가죽이 등에 붙어버렸나? 배가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고프다, 쓰자 배가 없어졌다. 등이 구부러지는, 굴절된 뼈 같은 오후
그래, 슬픔은 늘 고프지
어딘가 고파지면 소리내어 울자, 종이 위에 옮겼다
*
세면대에 틀니를 내려놓듯
덜컥, 울음 한마디 내려놓고 왔습니다.
그뿐인가 했더니
옆구리 어디쯤에 쭈그리고 있던 마음, 굴절되어 있네요
거품을 집어 삼킵니다 씹어도 건더기라고 없는 위밥
혓바닥이 마르고, 버썩거립니다
그래요 뭐든 버썩거릴때가 있어요 잠깐 눈 돌리면 쏟아지기도 하고...
난 수년 전 아이 몇몇 쏟아버린적도 있어요
그땐 내 몸도 깡그리 쏟아졌던 것 같아요 마지막 손톱을 파낼 땐 눈에도 금이 가고 있었죠
'얘야, 눈빛이 많이 말랐구나 눈을 새 뜨고 있는게 아니었어' 내가,
'손가락을 흘리고 다니지 말랬잖아요 근데 왜 까마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지...' 보송보송 털이 난 꿈속에서
*
배가 고프단 얘긴줄 알았는데. 그림자 얘기였어
부품해진 그림자론 날아오를 수 없다, 어떤 돌은 그림자도 생겨나지 않는다, 죽은 후론 배꼽도 떠오르지 않는다, 쏟아졌던 아이들
처음으로 수면에 떠올라
'배꼽은 어디 있을까'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깨지지 않는 것도 깨진 것이 되어버린 오후
이렇게 비좁고, 나는 깎아지른 맘뿐이었나
몇 줄 적지 못한 종이 한 장 찢어, 공중에 날리는
▲1957년 경북 경주 출생
▲건국대 수의과대학 졸업
[2022 신춘문예 시 심사평] 신해욱 오은 박연준
올해도 많은 분들이 새봄을 향해 시를 보내 주셨다. 오랜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읽었다. 예년보다 더 오래 숙고했는데, 손에서 쉽사리 내려놓을 수 없는 작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단단하게 짜인 세계를 횡단하며, 심사자들의 눈과 손이 시종 천천히 움직였다.‘오픈’이 보여 준 감춤과 들킴의 미덕, ‘물과 풀과 건축의 시’에서 감지한 조용한 폭발, ‘비닐하우스’가 만들어 낸 미묘한 긴장, ‘온몸일으키기’가 일으킨 위트와 블랙 유머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같이 머리와 가슴을 두드리는 시편이었다.당선작과 끝까지 경합한 ‘저기 저 작은 나라’ 외 네 편은 독특한 시적 세계관으로 심사자들의 고른 지지를 받았다. 자기만의 세계가 이미 상당 부분 구축돼 있어 앞으로 그 세계가 어디로 어떻게 뻗어 나갈지 궁금했다. 토씨 하나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 문장들은 묘한 리듬감을 자아내 읽을 때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띤 토론 끝에 ‘반려울음’ 외 두 편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젊음은 젊은 상태, 혹은 젊은 기력을 가리킨다. 젊은 시가 있다면 그 상태를 잊거나 잃지 않고자 기력을 쏟아붓는 시일 것이다. ‘고픔’과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시, 질문을 그치지 않는 시일 것이다. 일상의 한 장면에서 지나간 시간을 길어 올리고 작금의 감정을 그 위에 내려놓는 시일 것이다. ‘반려울음’은 쓰면서 고파지는 시, 배가 뱃가죽과 배꼽을 소환하는 시, 마침내 쏟아버리면서 동시에 쏟아지는 시였다. “버썩거리는” 일상을 비집고 다른 존재를 향한 유일한 감정이 솟아오르며 빛나는시였다. 울음을 껴안으면서 울음과 함께 살겠다고 다짐하는 시였다.시 쓰는 데 있어 이른 시간과 늦은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를 쓰는 시간은 모두 제시간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응모자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 한국경제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 박규현
친애하는 메리에게
나는 아직입니다 여기 있어요
불연속적으로 눈이 흩날립니다 눈송이는 무를 수도 없이 여기저기 가 닿고요 파쇄기 속으로 종이를 밀어 넣으면 발치에 쌓이던 희디 흰 가루들 털어도 털어도
손가락은 여전합니다
사람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녹지 않으니까
착하다고 말해도 되나요
의심이 없을 때
평범한 사람을 위해
젖은 속눈썹 끝이 조금씩 얼어가는게 느껴졌습니다 극야로부터 멀어지고 싶고
장갑을 끼지 않아 손가락이 아팠습니다 나에게도 손이 있다니 나무들을 베어 버릴 수 있을 만큼 화가 났습니다
메리에게 답장을 씁니다
천사 혹은 기원이 있을 곳으로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눈밭에 글씨를 써도 잊혀지는 곳으로 우리가 전부여서 서로에게 끌려다니는 곳으로
눅눅한 종이뭉치를 한 웅큼취고 있었는데
눈을 뭉쳐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희망해온 사람
무겁고 불편한 폭설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어 그들의 눈을 빌립니다 그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이가 될 것이에요 제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메리, 나는 겨우 있어요
내일과 같이 여전히
▲1996년 서울 출생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재학
■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왜소행성 134340* / 유진희
우주는 조금씩 부풀고 있고
우리는 같은 간격으로 서로 멀어지고 있어요
사방이 우주만큼 트여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
좌표만 같은 비율로 커지는 세계에서
시간만이 변수라고 한다면
아득한 게 쓸쓸한 일이 되고 맙니다
다시 올 것 같지 않게 멀어지다가
어느 계절엔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는 별을
찌그러진 궤도를 가진 별을
사람들은 무리에서 내쫓았습니다
이로써 우리 행성계는
완벽하게 끼리끼리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공전 주기를 늦추고 싶은
사람들은 서둘러 여행을 떠나지만
매진 행렬이 더 빠르게 이어지고
출발을 위한 서류는 늘어납니다
서류가 늘어날수록 안심하는 사람들을 위해
늘 거기 여기의 세계에서
서류는 잠식하는 불안처럼 불어납니다
모든 항의에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는 답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관료의 심장을 뚫어버릴 별빛은
어느 블랙홀에 갇혀버렸을까요
다른 시간 속에서 유영하던 우주비행사는
돌아오자마자 순식간에 늙어버립니다
*태양계에서 퇴출된 명왕성이 받은 새 이름
▲1976년 서울 출생
▲한신대 문예창작대학원 졸업. 국어교사
심사평
심사위원: 강성은(시인), 김문주(영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정호승(시인)
강성은 시인
이번 매일신문 신춘문예에는 총 1천785편이 응모되었다. 응모자들의 연령과 지역의 다양함에 심사 내내 놀랐다. 이러한 다양성이야 말로 우리 시가 가진 가능성이라고 생각해 설레는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도미노' 외 4편의 응모자는 사유의 집중력과 점착력이 돋보였다. 오랜 시간 시를 쓰며 응시한 세계를 완성도있게 쌓아올릴 줄 아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이 시가 갖는 깨달음의 형식이 신선하고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는 의견이 있었다.
김문주 문학평론가(영남대 교수)
'천사를 만나는 날은 오늘' 외 4편의 응모자는 시가 젊고 감각적이어서 최근의 경향과 발맞추어 기대감을 갖게 하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젊은 시인들의 감각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변별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조금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과 분위기를 넘어서는 지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왜소행성 134340' 외 4편의 응모자는 자기만의 목소리가 돋보이는 시인이었다. 우주와 지구와 이국과 모국의 거리를, 익숙하면서 새로운 감각들을 발견하는 시선이 재미있게 그려졌고 각 시마다 마지막 문장에서 시적 분위기를 다시금 낯설게 만드는 감각도 좋았다. 그러나 문체에 대해 아쉽다, '습니다' 종결어미가 변주 없이 쓰이고 있다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정호승 시인
세 분 다 수준 이상의 시를 쓰고 있었기에 당선자를 선정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세 분의 시를 두고 심사위원 셋이 고심을 거듭했다. 문청, 패션, 트렌드 및 시쓰기 감각에 대한 상당한 논의가 있었다.
'왜소행성 134340'의 유진희 씨를 당선자로 선정한 것은 다른 두 분에 비해 이견의 격차가 크지 않았다는 점과 유진희 씨가 응모한 다른 시들 모두 편차 없이 고루 좋았다는 점이 크게 작동했다. 유진희 씨의 시가 보여주는 매력적인 세계가 여기서 출발해 어디로든 멀리로 잘 떠날 수 있기를. 그가 꿈꾸던 여행이기를 기쁜 마음으로 응원한다.
■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숲에 살롱 / 최은우
자꾸 이야기하다 보니 말이 생깁니다 기분이 달라지고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기분 탓인가요? 그러자고 한 건 아닌데 수다장이가 돼서 오물조물 오래 씹어 쉴 새 없이 꺼냈어요 이야기라면 해도 해도 할 게 많아요 귀를 여는 자가 없다면 저 무성한 나뭇잎들이 있잖아요 이리 와서 들어봐요 늘 같은 이야기지만 오늘은 하나 더 추가시킬 예정이에요 극적인 요소는 늘 있어요 마녀들이 밤에 모여 항아리에 대고 떠들던 주문 같은 것도 있다니까요 인생은 재미 아니겠어요? 문밖 무성한 화분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야길 엿듣고 흉내 내느라 줄거리가 아니 줄기가 생겨서 풍성해졌어요 염치도 없이 나무 옆에 나무를 낳네요 자꾸만 나무들이 생기는 오후에 하나 더 있다고 하나 더 없다고 나무가 나무 아닌 것은 아니겠지요 비 오는 오후에도 어김없이 이야기에 중독된 여자들이 똑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감수분열하듯 옆에서 옆으로 다음 손님을 부르네요
여자는 거미 다리 같은 손가락으로 사뿐사뿐 머리카락을 잘라요 몸이 생기기 전부터 손가락만 있었던 것처럼 손은 여자를 떠나 가위를 들고 허공에서 춤을 춰요 원피스에서 요란하게 싸우고 있던 꽃무늬들이 살짝 얼굴을 빼자 잎사귀들이 떨어져요 떨어져서 허공으로 떠다니는 꽃들. 차를 마시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요 알지 못해요 가위질 소리에 맞춰 간간이 웃음소리를 끼워 넣을 뿐. 유리문이 밀릴 때마다 들어오세요 붙여진 팻말에서 글자들이 살짝 떨어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서죠 비밀과 상처는 오늘은 괜찮고 내일은 거대해지다 모레면 잊고 글피엔 주저앉게 만드니까요 쉽게 묻는 게 좋을까요 쉽게 말하는 게 좋을까요 수다장이들이 수다스럽게 찻잔을 부딪치며 그런 건 관심 없다고 하네요
▲1980년 전북 순창군 출생
▲원광대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심사위원 전동균·유홍준
506명이 보내온 1903편의 작품에 깃들어 있는 무게감. 당선작을 결정하는 일은 그것을 이겨내는 일이었다.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눈길을 끈 것은 ‘모두의 잠깐’ ‘뱉은 씨앗’ ‘숲에 살롱’ 세 편이었다.
‘모두의 잠깐’은 잘 쓴 시다. ‘우리는 중요한 일일수록/일의 틈틈마다 그 잠깐을 배치시켜 놓아요/하루가 연속성의 과정이라면/하루엔 얼마나 많은, 다양한 잠깐들이 있을까요’라는 진단은 휴식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마땅하고 옳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그 진단의 힘은 약해지고, 잠깐의 목록들을 호출, 나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뱉은 씨앗’은 ‘오물거리는 입속에서 톡톡 내뱉어지는/수박씨들, 저것은 아마도 최초의 농법’이자 ‘직파법’이라는 발상이 뛰어났다. 그러나 이 발상이 인간에게로 향하는 심화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시를 닫아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다.
‘숲에 살롱’은 재미있다. 읽고 있어도, 읽고 나서도,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어느 동네나 있을 법한 살롱(미장원)과 어느 동네나 떠돌만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요리조리 이야기의 잎사귀들, 시의 잎사귀들을 갖다 붙였다.
시가 독자를 억압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대면이 어려운 이 시대에, 이런 재미난 이야기의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즐겁다.
첨언 한 가지. 이 시가 만약 잎사귀가 아니고 꽃을 이야기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아무쪼록 좋은 시는 꽃이 아니라 잎사귀를 보기 좋게 매다는 일이다. 축하드린다.
■ 영남일보 시 당선작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 / 손연후
노란색 상자 안에
털실 뭉치 좋아하는 고양이를 기르는 일
누구나 동그란 노란색으로 웅크려본 날들 있었지
쉼표 모양 씨앗처럼 고요히 꿈꾸는 연습
감자야, 하고 부르면 눈이 동그래져서 딸꾹 하고
딸기향 나는 감기에 걸린 것 같아
당신 넥타이에도 딸꾹거리는 딸기가 묻었어,
우리는 서로의 코를 쿡 찌르며 웃어버렸지
커튼을 열면 우리도 고양이 꼬리처럼 기다랗게 기대어 보고
노란 고양이 무늬 닮은 햇빛이 머리 위로 얼룩덜룩 흘러내렸지
반짝이는 유리잔마다 함께 이름을 붙이던 날
사람은 이름대로 사는 거래, 여기저기 우리 이름을 붙이자
우리는 감자 눈동자 속에 살고 유리잔과 식탁보 넥타이 구두에도 살고
사람들 와르르 모였다 흩어지는 보도블록 횡단보도에도 길쭉하게 누워 있는 거야
수많은 버스 차창 손잡이에도 상냥한 고양이 키스처럼 토닥토닥 흔들리고 있는 거지
하늘이 자몽즙 같은 노을빛으로 젖어들면
기다란 빨대 꺼내 눅눅해진 하루를 보글보글 휘저어볼래
볼을 삐죽 부풀린 거품들 퐁퐁 터지고
푹 익은 노을 냄새 싫어하는 감자는 자꾸만 빨대를 타고 기어오르고
잭의 콩나무처럼, 하늘 위로 쑥쑥 자라나는 노란색 빨대를 올려다봤지
높이 더 높이, 어느새 굵어진 줄기에서는 샛노란 꽃잎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어
날마다 눈부시게 타오르는 구름 위로 훨훨 날아가는 꿈을 꿨어
감자는 점프를 잘했고 우리는 고양이 무늬로 웃으며 서로에게 손을 뻗었지
하늘에서 빨간색 노란색으로 뒤섞여 열리던 우리의 기다랗고 사랑하는 미래들
감자에 대해 말하자면 먼저 사랑에 대해 말해야 해
우리는 노란색이었고, 커튼을 열면 유리잔마다 함께 반짝이며 살아있었지
우리는 씨앗처럼 가벼워 이 계절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늘씬한 고양이처럼 숨차게 달려보지 않겠니
매일 밤 노란색 상자 안에서
우리는 털실 뭉치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었고
통통 고양이 발소리 다가오자
우리는 눈 맞추며 함께 큰소리로 웃어버렸어
심사평
손진은 안상학
본심에 올라온 스무 분의 시 가운데 장현숙씨의 '뭉친 나이' 외 2편과 김지영씨의 '뜨겁고 흰 유언' 외 16편, 홍담휘씨의 '카라멜마끼야또가 꽃피는 동안' 외 3편, 손연후씨의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 외 2편이 선자의 눈길을 끌었다. 장현숙씨의 작품은 시를 차분하게 끌고 가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만지는 솜씨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글에 생기가 부족하다는 점이 흠이었다. 김지영씨의 시에서 두드러진 것은 현실 묘사 능력이었다. 다만 완성도에서 "이거다!"하고 내세울 수 있는 한 편이 보이지 않았다.홍담휘씨와 손연후씨의 작품들을 놓고 장시간 논의가 있었다.홍담휘씨의 '젠가'는 젠가 게임을 통해 일상과 가족, 현대성의 문제, 지구온난화까지를 유머러스하고도 시니컬하게 담아내는 능력이 돋보였다. "마스크 쓴 계절도 빙하가 녹는 북극까지도 쌓아야 하는데/ 밤하늘이 하나둘 별빛을 빼내고 있었죠"를 비롯한 빼어난 표현이 촘촘히 박혀 있다. 이 작품만으로 본다면 당선작으로 뽑아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투고한 다른 시편들의 질적 균질감이 편차가 있었다.손연후씨의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를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이 시에서 유독 강조되는 '노랑'은 삶의 어둠과 우울을 들어 올리는 힘이다. 우리는 "노란색 상자 안에 털실 뭉치 좋아하는" 감자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기른다. 놀라운 건 감자와 교감을 하면서 마침내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 "노란색 상자 안에서/ 우리(도) 털실 뭉치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게 된다"는 것이다. 서두와 종결부의 아름다운 대응을 보라.그건 '감자'의 무늬에서 번지고 성장하는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유리잔과 식탁보 넥타이 구두에도" 산다. 그 사랑의 힘이 "눅눅해진 하루를 보글보글 휘저으며" 그때마다 "볼을 삐죽 부풀린 거품들이 퐁퐁 터진다." 이 당찬 신인은 자기만의 스타일로 경쾌한 시어와 발랄한 상상력을 구사한다. 이 싱싱한 능력은 이 신인의 미래의 가능성을 예고한다. 동봉한 '여름의 아이들을 아세요'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아깝게 당선에서 밀려난 홍담휘씨에게도 힘찬 응원을 보낸다.
■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일 잘하는 요즘 애들 / 전예지
프린터기가 또 말썽이다
이 애물단지를 버리든가 고치든가 이게 대기업의 수준인가요?
하루에 기본 다섯 번을 1층에서 2층으로
걸어야 하는 에스컬레이터 아니면 계단으로
왼쪽 끝 후문 쪽에서 오른쪽 끝 정문 쪽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프린터기를 하나 놔주면 이런 고생은 안 해도 될 텐데
겨우 몇 십 만원이 아까워서 사람을 갈아 버린다
두 여자는 욕이란 욕을 다 입에 담지만
차마 입을 벌리진 못한다 멋쩍게 서로 한숨만 쉴 뿐
낡고 늙은 마트에 새로 생긴 텅 빈 매장의 취급은 이 정도
[자리 비움]
자기는 왜 자꾸 마음대로 자리를 비워?
일하기 싫어?
하필 매니저가 없는 날
혼자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본부장이 찾아온다
억울한 아르바이트생은 그나마 매니저보다 깡다구가 있다
프린터기가 2층에 있어서 왔다 갔다 하려면 어쩔 수,
말대꾸도 하고 참 요즘 애들 무섭다
눈이 순간 흰자로 뒤덮여진 아르바이트생을 보고
머리 빠진 본부장은 혀를 찬다
죄송합니다
속으로 본부장이 매장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입으론 여전히
시부문 심사평
김윤배 시인·김명인 시인
202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의 관심은 뜨거운 편이었다. 비록 응모편수는 지난해보다 약간 줄었지만 응모작품의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는 게 중론이다.우선 응모자들의 연령대가 2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고루 분포되었지만 50~60대의 응모자가 많았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현상일 수 있다. 그만큼 사물을 응시하는 시각이 깊고 인식의 수준이 높았다고 보여진다.시가 죽었다고 말하는 시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시는 여전히 살아 있는 문학의 영역인 것을 응모 편수를 통해 알 수 있다.응모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경향으로는 거대담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생명 문제라든가 환경 문제라든가 통일 문제라든가 코로나 팬데믹 문제라든가 하는 거대담론을 다룬 시편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반면 개인의 일상생활에서 모티프를 얻거나 사소한 경험에서 소재를 찾는 경향이 도드라지고 있었다.실험적인 응모작을 만날 수 없었다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이는 안정된 작품으로 위험부담 없이 순항하고 싶다는 의지의 발현일 것이다.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예시영의 '카이트 서퍼', 김현주의 '그림자를 수집하는 방법', 전예지의 '일 잘하는 요즘 애들'이었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쉽게 합의에 이르지 못해 장시간 토론과 논의를 거쳤다.'카이트 서퍼'는 활달한 상상력과 긴 호흡이 미덕이면서 '그리고 바람이 불면/이 연서(戀書)가 당신에게 도달할지 모른다'와 같은 당돌한 문장이 시선을 끌었지만 응모작 모두 숨 가쁘게 긴 호흡이 문제였다. 압축미를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김현주의 '그림자를 수집하는 방법'은 어법이 새롭지 않다는 데 심사위원의 의견이 일치했다. 산문시의 군데군데 상투성의 혐의가 보이는 것도 문제일 수 있었다. 그러나 '푸른 별빛이 숨죽인 그들의 입속에서 검게 변해 자라졌다'와 같은 문장은 돋보였다.전예지의 '일 잘하는 요즘 애들'은 사무실의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다. 프린터기가 말썽이어서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내려야하는 고충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화려한 수사를 구사하지도 않았으며 다양한 은유를 보여주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역병의 시대에 이와 같은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신선한 어법이 이 작품의 힘이다.일상의 수없이 많은 흐름 속에서 한 장면을 포착해서 성화해낸 전예지의 시적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는 데 두 심사위원은 공감하고 당선작으로 합의했다.당선을 축하하고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목다보 / 송하담
아버지는 목수였다
팔뚝의 물관이 부풀어 오를 때마다 나무는 해저를 걷던 뿌리를 생각했다. 말수 적은 아버지가 나무에 박히고 있었다.
나무와 나는
수많은 못질의 향방을 읽는다
콘크리트에 박히는 못의 환희를 떠올리면 불의 나라가 근처였다. 쇠못은 고달픈 공성의 날들. 당신의 여정을 기억한다. 아버지 못은 나무못. 나무의 빈 곳을 나무로 채우는 일은 어린 내게 시시해 보였다. 뭉툭한 모서리가 버려진 나무들을 데려와 숲이 되었다. 당신은 나무의 깊은 풍경으로 걸어갔다. 내 콧수염이 무성해질 때까지 숲도 그렇게 무성해졌다. 누군가의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박히는 게 아니라 채우는 것. 빈 곳은 신의 거처였고 나의 씨앗이었다.
그는 한 손만으로 신을 옮기는 사람
나무는 노동을 노동이라 부르지 않는다. 당신에겐 노동은 어려운 말. 그의 일은 산책처럼 낮은 곳의 이야기였다. 숲과 숲 사이 빈 곳을 채우기 위해 걷고 걸었다.
신은 죽어 나무에 깃들고
아버지는 죽어 신이 되었다
나무가 햇살을 키우고
나는 매일 신의 술어를 읽는다
목어처럼 해저를 걷는다
■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 박재숙
침대에게 몸으로 물을 주는 건, 그에게서 달콤한 봄 냄새가 나기 때문이지 내 주변엔 봄이 너무 많아 침대도 나에겐 봄이야, 그건 아마도 침대를 향한 나의 일방적인 편애일지도 모르겠어
침대는 해마다 겨울이 알려주는 장례관습 따위엔 관심 없어 꿈과 현실 사이에서 철없이 스프링을 쿨렁거려도 푸른 봄은 여전히 아지랑이처럼 오고 있을테니까
침대 위에서 휴대폰 속 이미지나 사건들을 클릭하고 닫는 동작은 무의미해 그때마다 끝이 보이지 않던 내일이 침대 커버처럼 단순해질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침대의 생각은 참으로 명료해 홀쭉하게 들어간 배를 쓰다듬으며, 지난밤 겹의 무게 뒤에 펼쳐진 피로를 걷어내고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얻지, 그건 내일이 던져줄 공복을 향한 강한 의지인 거야
공복은 채움의 예비의식이기도 해 그러므로 내 침대는 늘 비어서 오늘 아침이 봄, 때때로 난 널 사랑해 내 생각대로 꽃피게 하고 싶어 레시피는 간단해 갖가지 감정의 재료들을 봄흙으로 만든 황토침대에 쏟아부으면 끝, 그럼 우린 하루 한 끼 제대로 된 꽃밭의 식사를 할 수 있어
사계절은 한결같아 언제나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불쑥 깨진 거울을 들이미는 봄의 손을 보고 있으면 거울 속의 내가 보여 나인 듯 내가 아닌 듯, 너무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거울의 트릭이 보여
그래도 방언 같은 아지랑이의 말을 기억하는 내 침대는 여전히 오늘 아침이 봄
▲1967년 전북 부안 출생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졸업
■ 경상일보 시 당선작
눈사람과 돌멩이와 한낮 - 신춘희
눈사람 한쪽 눈이 삐뚤게 붙어 있다
돌멩이 하나 머금었다
지금 조금씩 녹고 있는데
눈두덩이가 시릴 만큼 너를 오래 붙잡고 싶어
미안하지만 나는 점점 온기를 갖고
안타깝지만 너는 점점 부피를 줄이고
한동안 우린 밀착된 결빙으로 중력을 버티지
눈송이들 모여 숨겨둔 방
이곳은 해의 꼬리가 닿지 않아 심장을 두기 좋지
두근대는 돌멩이가 감정이라면
겨울은 안전한 밀실이야
사람들은 그저 눈빛을 얹어주거나
손끝으로 훑어볼 뿐
녹아내려야 하는 운명엔 관심이 없지
내가 너를 지키는 방법은
구름을 불러 모으는 일눈이 자꾸 짓물러지고 있어
눈 속에 갇힌 마음이 죄다 흘러내리고 있어
우리가 견뎌야 했던 것들을 생각해
처음 눈덩이 궁글렸을 때의 설렘 같은 거아
이들 모두 돌아간 뒤 입꼬리를 움직여본 거
별들이 싱싱해서 우리는 하나였던 거야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낮이야
돌멩이와 눈덩이가 분별되어야 하는 시간이야
마지막 냉기가 사라지면
너는 나를 놓아줄 테지
그때까지 나는 너의 공중이 될 거야
머리가 기울고 있어
몸에 금이 가고 있어
물의 장례가 시작되고 있어
툭, 돌멩이 하나 그렁그렁 쏟아져 내린다
■심사평-문정희 /
예술의 완성 향한 치열성 확인 반가워위험하고 슬픈 시대, 고립과 폐쇄의 시간을 밀치고 희망처럼 피어날 새로운 언어를 기다리며 예심을 통과한 응모작들을 깊이 읽었다. 언어에 대한 탐색과 예술의 완성을 향한 치열성을 확인할 수 있어 매우 반가웠다.행과 연을 무시한 산문성의 경향, 여백의 문제에 고민해 본적이 없는 소통 불가의 작품은 줄었지만 외래어에 대한 무자각과 상상력 보다는 사소한 현실과 현상에 대한 묘사에 치우친 경향은 여전했다.오늘날 지구를 위협하는 생태 문제로서 썩지 않는 플라스틱의 현실을 주제로 한 ‘5초 5분 500년’, 오래된 소나무를 통하여 역사와 인간의 발자국을 읽는 ‘나무 실록’과 함께 응모한 ‘눈사람과 돌멩이와 한낮’, 혼자가 시대의 모습이 된 오늘날의 자화상 같은 ‘고독에 물리지 않는 방법을 따라함’과 감각적인 포착이 돋보이는 ‘가베라에 대한 경배’와 ‘천사를 만나는 날은 오늘’이 선자의 손에 오래 남았다. 숙고 끝에 ‘눈사람과 돌멩이와 한낮’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나무 실록’이 완성도는 높았지만 신인답지 않은 사유와 안정된 진술이 오히려 긴장을 줄이고 있었다.신춘문예란 새해 아침 가장 신선하고 새로운 언어가 등 푸른 용처럼 뛰어 오르는 것이 아닐까. 등용문(登龍門)이라는 말도 다시 떠올려 보게 된다. 한국 시단의 강한 수압(水壓)을 잘 견디어 부디 좋은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약 력-1969년 월간문학 시 당선-목월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문학), 육사시문학상
■ 경남신문 시 당선작
엽록체에 대한 기억 / 이 경 주
숲을 떠난 푸른빛의 기억이 갇힌 방으로 들어간다
형광등 불에 달궈진 자갈과 모래알들이 바닥에 깔리어
전갈이 지나는 길을 만들고 있다
마른 바람이 눈에 익거나 때로는 낯선 발자국들을 지우는 한낮에는
미세한 먹이사슬들이 잠깐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하얗다
종일 내리쬐는 빛은 벽에 박힌 나무들의 뿌리와
그걸 바라보는 죽은 새들의 밥상과
좁은 틈새를 뚫고 머리를 든 작은 벌레들의
핏줄까지 하얗게 만든다
한번이라도 불빛에 닿은 것들은 제 본래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오후가 저물 때면 변색의 관성은 더욱 강해져
누구도 아침을 기억하지 못한다
방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나갈 수 없다
아무렇게 발을 들여 놓았다가
깊은 사막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폭풍에 갇히어 돌아설 수 없다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 있고
표정이라고는 창백한 빛뿐인 고요한 방이
암흑 속을 빠르게 날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이상하다 분명 하루가 지난 거 같은데
눈을 뜨면 다시 그 자리에 와 있고
녹색이 사라진 방으로 계속 나비들이 날아 들어온다
■ 심사평
코로나19로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단계적 일상회복으로 접어들면서 코로나 19 종식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으나 다시 확진자가 급증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는 등 여러 어려움이 많은 때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 때문인지 예년보다 신춘문예 시부문 투고량이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수백명의 시인 지망생이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해 와 뜨거운 문학적 열기를 느끼게 했다.
올해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에는 신춘문예에 응모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시적 역량을 보여준다는 것이 오히려 과도한 수사에 매몰되어 시적인 깊이와 사유의 넓이를 놓치고 있는 작품들이 눈이 많이 띄었다. 한 사물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집중력이나 정서를 짜임새 있게 압축하여 끌고 가는 긴장감이 부족한 경우도 많았다.
숙고 끝에 심사위원들은 김난(김향숙), 김휼, 나영채, 노수옥, 이경주, 이동우, 임승환, 최수안 제씨의 작품들을 본심에 올려 논의하였다.
몇 분은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현실 등 사회에 대한 인식을 담아내어 보여주기도 했지만 시대 정신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깊은 정서적 울림을 주지 못했다. 또 몇 분은 토속적인 정서에 기대어 서정의 영역을 파고 든 경우도 있었지만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내지 못하고 익숙한 어법에 머물러 있었다. 또 시적 발화가 너무 무성하여 이미지를 응집시키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것이다, 하고 단숨에 손꼽을 작품을 만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런 속에서 노수옥씨와 이경주씨의 작품을 만난 것은 기쁜 일이었다. 노수옥 씨의 응모작 가운데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끈 작품은 ‘입관’이다. 언어를 세공하는 솜씨가 우수했다. 주제에 대한 집중도가 높고 문장을 끌고 가는 힘도 좋았다.
이경주씨의 ‘엽록체에 대한 기억’은 현대인들의 고뇌를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시적인 틀을 만들어나가는 능력과 상상력이 돋보였다. 퇴색되고 변해가는 자아와 만나는 방의 풍경은 흡인력이 있다. “눈을 뜨면 다시 그 자리에 와 있고, 녹색이 사라진 방으로 계속 나비들이 날아 들어온다”는 환상성을 보여주는 문장이기도 해서 울림이 크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노수옥씨의 ‘입관’과 이경주씨의 ‘엽록체에 대한 기억’을 놓고 숙고하고 논의했다. 논의한 끝에 응모작 전편이 편차 없이 고르다고 판단된 이경주씨를 당선자로 합의했다.
축하하며, 한국시단을 이끄는 큰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안타깝게 당선을 놓친 노수옥씨에게 심심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심사위원 이성모·배한봉
■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빈집 / 박수봉
빗속에 집이 잠겨있다
태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지만 빈집은
날개를 접고 흔들리지 않았다
식구들은 모두 전주로 떠나버리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빈집
퇴행성관절염에 어깨 한쪽이 내려앉은 채
기울어 가는 생을 붙들고 있다
빈집의 담장을 지나다보면 허옇게 바랜 집이
손을 저으며 말을 걸어온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와 그 길로 져 날랐던
가난과 고단함에 대해서 빈집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빈 방에다 새긴다
행간마다 피어나는 유폐의 점자들
마당 우물터로 목마른 잡초들이 조촘조촘 들어서고
버리고 간 장독대엔 혼잣말이 웅얼웅얼 발효 중이다
죽은 참가죽나무에 앉아 종일 귓바퀴를 쪼아대던
새소리도 날아가고 귀가를 서두르는 골목
일몰의 욕조에 몸을 담근 빈집이
미지근한 어둠으로 눈을 닦는다
종일 입술을 다문 대문을 빈집은
몇 번이고 눈에 힘을 주어 밀어 보지만
끝내 대문 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당 깊은 곳까지 어둠이 차오르면 빈집은
눈을 들어 별자리를 더듬는다
식구들이 몰려 간 서남쪽 하늘
별이 기울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한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들쥐가
들어앉아 새끼를 낳았다
이따금 달빛이 새끼들의 털을 핥아주고 갔다
들쥐는 빈집의 뒷다리를 갉아 먹으며 자라고
집은 제자리에서 우물처럼 늙어간다
빈집의 늑막 아래로 어둠이 점점 차오른다
▲전북 장수 출생
▲경기대학교 졸업
■ 전남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미역국 / 강일규
산부인과 병원 근처엔 혼자 우는 울음이 많다
팔을 벌리고 부를 이름이 없어
한낮에도 울음이 바람을 끌어안고 멸망을 낳는다
저만치 뒤따라오던 아내가
전봇대를 붙잡고 이름 없는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다
미안
미안
건너편 정류장에서도
한 여인이 어리어리한 앳된 딸아이를 끌어안고 있다
괜찮아
괜찮아
대기실에서 마주쳤던
한 남자와 한 남자가 보호자란 인연으로
눈빛이 스칠 때마다 놓친 연과 놓은 연을 위로했다
아내의 울음이
자궁 밖으로 다 빠져나가길 기다렸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고기 반 근을 샀다
▲1958년 충북 영동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 중문과졸업
■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 / 이정임
잘방잘방
가을 강은 할 말이 참 많답니다
저렇게 눈부신 석양은 처음이라고 내가 입을 열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도무지 닫혀 있던 입
흰 귓바퀴 꽃을 봅니다
안개 짙은 그 하얀 꽃을요
나는 휠체어를 밀어주면서 한 바퀴 즐거운 나의 집, 두 바퀴 세 바퀴 현(絃)을 타 봅니다 눈감고 오물오물 따라하는 어르신 핑 돌아 떨어지는 눈물 한낮의 요양원 창밖으로 찔끔 찍어 냅니다 사람들은 먼 나무위에 앉아 졸고 가을 강은 나를 자꾸 떠밀고 갑니다 알 없는 안경너머로 두 다리 유니폼의 건장한 날이 있습니다 서슬 퍼런 기백이 있습니다 백지로 두고 떠나자고 말한 적 있답니다 구절초 강아지풀 억새 어우러진 둔덕 제 모습에 반해 석양을 품은
비록 비위관(脾胃管)에 연명하지만 포르르 동박새 동백나무에 오르고 옛 기억 하나둘 돌아옵니다 참 맑은 하늘이 도리질 치다가 풀썩 잠이 들라 합니다 퐁당 물구나무를 서거나 물비늘을 따라 멀리멀리 헤엄쳐가기도 하는
가을 강은 심하게 몸살을 앓는 중입니다
소실점 잘방잘방 아스라이 붉은
▲전북 임실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3학년 휴학중
■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엄마 달과 물고기 / 김미경
물고기는 내 오빠다
오빠가 물고기인줄 알면서도 내 엄마 달은 물살에 휩쓸려 떠밀려가는 물고기를 잡지 못한다
그러나 엄마는 달이다
눈물이 없는 달
우리가 잠든 밤마다 환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면서 놀라고 걱정스럽게 만드는 달 말이다
이런 달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생각만 많다
물거품이 이는 곳에 가면 은빛 곡선을 가진 오빠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아기가 발을 핥고 있어서 젖 물릴 때가 됐다고 한다
물고기의 얼굴은 내 얼굴
우리는 형제다
물속에 잠긴 달이 운구릉을 헤적거리다 곱은다리에서 암흑 속으로 내려간다
이번에는 검은 그림자에 싸여 비틀거리는 아빠도 함께다
그러나 엄마는 달이다
힘이 세다.
▲1964년 제주 출생
▲‘시와몽상'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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