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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민권의 보편적 원리[通義]
- 2장 「저항과 위대한 영혼(한얼): 전병훈, 나철, 이기, 서일」
이규성(李圭成, 1952-) in 한국현대철학사론: 세계 상실과 자유의 이념,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2, pp 209-225 (P.975)
유학자로서 이기는 배운 바 대로 유학의 대동을 당대의 민권 사상에 결합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이기가 루소를 읽었는지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기가 군주나 사대부들이 아니라 인민주권으로 사상을 틀을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동학 농민 항쟁에서 혁명의식의 개화를 보았고, 이 물꼬를 개혁이 아니라 혁명으로 나아가길 바랐지만 더 이상 깊이 관여하지 못하였다. 대종교가 조선조 유학의 토대를 버리지 않고, 유학 안에서 대동사상 등 인민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사상이 있었다고 한다면, 천도교의 동학은 이미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여 농민과 대중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면 유학과는 다른 측면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게 노동하는 인민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아닐까. 불교에 빗댄다면 상좌부가 아닌 대중부로서 사회 변화의 동력을 삼으려고 한 것이 아닐까. 들뢰즈 표현으로 상층이 아니라 심층의 도래의 시기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도교보다 대종교가 더 일제에 의해 계획적으로 말살 당한 것은 아닌가? 해방후에 대종교가 남아서 활동영역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일제의 한자문화에 의재 지워졌다기보다, 상해 임정의 구성원들로 보아 망명정부에서 활동을 하거나, 또는 만주 무장 투쟁의 독립운동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 아닐까? - 예전에 읽었을 때, 그 기억은 거의 사라졌다. (52RLH)
제1부 자유와 현실 39
1장│표현과 개벽: 최제우, 최시형, 이돈화. 김기전 41
2장│저항과 위대한 영혼(한얼): 전병훈, 나철, 이기, 서일 181
1. 공화(共和)와 겸성(兼聖)의 원리 181-197.
2. 연금술적 위생학(衛生學) 197-209
3. 나철(羅喆)과 이기(李沂)의 벽파(劈破) 209-221
4. 민권의 보편적 원리[通義] 221-225
5. 성리(性理)와 의지[志氣]
6. 하나의 무[一無]와 위대한 영혼(한얼)
7. 본연의 성(性)과 씨알 인성론
8. 고요한 무와 움직이는 유[靜無動有]
9. 아(我)와 대동(大同)
# 4. 민권의 보편적 원리[通義] 221-225
해학 이기(李沂, 1848-1909)는 47세(1894)에 동학혁명에 의존하여 조정의 타도를 전봉준(全琫準, 1854-1895)에게 건의하지만 김개남(金開南, 1853-1894)에 의해 거부되자, 혁명노선을 떠나 개혁으로 돌아선다. 따라서 그의 개혁론은 이후의 견해이다. (221)
그의 「국가 제도(國制, 국제)」(1902)에 의하면 “천하의 천하로서 일인의 천하가 아니다[천하지천하, 비일인지천하(天下之天下, 非一人之天下)]” .. 천하의 주인은 원리적으로 천하, 즉 천하 만민이 주인이라는 뜻이다. 태초의 황금시대인 요순시대 이전은 초월적 권력이 있을 수 없었던 시대였다. (221)
그에 의하면 요순 시대 이전의 ‘공화지치(共和之治)’는 ‘상쟁’ 때문에 삼대(三代)에 와서 ‘입헌지치(入憲之治)’로 바뀌었으며, 진한(秦漢)대 이후로는 전제지치(專制之治)가 되어 그 이후의 학문도 그 영향하래서 발전했다. (222)
진한 이우를 전제정치로 보는 관점은 강유위(康有爲, 1858-1927), 담사동(譚嗣同, 1865-1898), 양계초(梁啓超, 1873-1929) 등의 변법사상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들은 황종희(黃宗羲 1610-1695)의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에 나오는 ‘천하는 천하의 것((天下之天下)’이라는 원리를 루소(Rousseau,1712-1778)의 민권론과 자유주의 정치론과 결합하여 입헌공화제를 주장하고 이를 넘어 대동(大同)이라는 유토피아적 이상사회론으로 나아갔다. .. 이기에 의하면 민권은 고대에 있었다고 가정된 공화가 파괴된 이후 무시되었다. 입헌이 무너져 “군권은 점차 무거워지고, 민군은 점차 가벼워졌다.(君權漸重 民權漸輕, 군권점중 민권점경)” ... 전병훈(全秉薰, 1857-1927)의 언어로 말하면, 이는 ‘공익(公益)’ 또는 ‘홍익(弘益)’을 ‘인류 공리(公理)’로 구현하는 것이다. (222)
인민이 천하의 주인이라는 점에서 해학 이기의 민권론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에 의거한 인민주권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 (222)
그는 질재고(質齋藁)의 「천당지옥(天堂地獄)」에서 ‘인심(人心)’을 ‘천하공동지심(人心卽天下共同之心)으로 보았다. .. 그는 당시 시점에 적합한 정체를 “민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민에 가까이 가는 정치를 실해하는[以畏民之心 行近民之政, 이외민지심 행근민지정]” 형태의 것으로 주장했다. (223)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천성(天性)이 원래 타인을 사랑하여 베푸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천성에 반하여 타인을 사랑하지 않으면, 외롭게 되고, 베푸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면 천하게 된다. 간결함을 안다는 것[인간, 認懇]은 타인의 간난(艱難)을 자기가 당한 것처럼 아는 것이다. 타인에게 위급한 간난(艱難)이 있을 때, 방략을 간구하는 것은 힘에 있지 않고, 타인을 자기처럼 사랑하는[愛人如己, 애인여기] 데에 있다. 긍휼의 마음이 발현되는 것은 자애의 마음[慈心, 자심]이 친소도 없고 선악도 없이[無親疏 無善惡] 오로지 불상함을 본 즉시 발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맹수가 달려들어도, 오히려 그를 구한다.” (223)
보편적 도덕 원리는 그것을 기(氣)를 통해 실현할 실천적 의지를 필료로 한다. 보편적 가치는 인간의 본성적 ‘성리(性理)’이다. (224)
실천적 의지와 시대의 급선무(時務, 시무)를 강조하는 그의 경세론은 기존 이학(理學)이 사회에 초월적 입장을 취하는 것과는 다른 기학적 기초를 갖고 있다. 그가 보기에 기존의 이학은 평온한 자유의 향유[優遊(우유)], 즐거운 평온[옹용(雍容)]의 기상을 고상한 심성의 단계로 추구했다. (224)
주렴계(周敦頤: 1017-1073, 濂溪)와 정자(程子)에서 드러나듯이 이학의 연원에는 도교와 선종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한 정적주의 측면은 평화시에는 문화 창조의 산실이 되지만, 어려운 시국에는 자신의 평화만 추구하다가 망국의 상황을 방관하게 할 수 있다. 해학이기는 송(宋)의 이학을 남송의 멸국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본다. 그는 전통 이학자들을 자기만을 위하는 위아론자(爲我論者)인 양주(楊朱, ?-?)[400-300]에 빗댄다. 물론 해학 이기의 철학도 이학의 구도를 갖는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이학의 정적주의적 요인을 약화시키고, 장자(莊子, 전369?-전286))의 호매하여 매이지 않는[호매불기(豪邁不羈)] 자유정신과 묵자(墨子, 전470?-391)의 평등한 사랑[겸애(兼愛)]을 결합한 형태의 철학이었다. (225)
그는 「양주와 묵자의 차이에 관한 논변(楊墨辨, 양묵변)」에서 유자들의 비양심적 학술의 폐단을 비판한다. .. 해학 이기는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맹자가 묵자는 물리치고 양주를 물리치지 못했다고 한다. .. 그는 묵자의 겸애에 담긴 하층민을 위한 평등 정신과 공익 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225)
그의 평등한 사랑은 현실에 저항하는 기세(氣勢)와 결합되었다. 기(氣)와도 동일시되는 이러한 기세(氣勢)가 사랑의 원리를 실현하는 매체가 된다. 그는 기가 발현하면 이가 타는 기발이승(氣發理乘)이라는 주기론적 원리에 따라 시대를 극복할 수 있다는 역동적 의지를 실현하고자 했다. (225)
(3:20, 52RLH)
#4. 민권의 보편적 원리[通義] # 인명록
1848 이기(李沂, 1848-1909) 해학(海鶴) 조선 말의 실학 사상가, 계몽운동가. 전북 김제 출생. 본관은 고성, 자는 백증(伯曾), 호는 해학(海鶴)·질재(質齋)·재곡(梓谷)이다. 1906년 대한자강회, 자신회를 조직하였고, 1909년에는 나철, 정훈모, 오기호 등과 함께 서울에서 단군교(檀君敎)를 세워 대종교의 기초가 되었다. 「與朴君載春書」 박재춘(朴載春, s.d.)
1853 김개남(金開南, 1853-1894) 1894년 동학 농민 선언의 지도자이자 혁명가로서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사람이다. 교과서 등에서는 전봉준, 손화중과 동학농민군 3대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1854 전봉준(全琫準, 1854-1895) 조선의 농민 운동가, 동학 종교 지도자. 동학 농민 운동 당시의 남접의 지도자. 본관은 천안(天安), 초명은 명숙(明淑), 다른 이름은 영준(永準)이며 호는 해몽(海夢)이다. 키가 작아 붙여진 별명이 녹두장군(綠豆將軍)이다.
1857 전병훈(全秉薰, 1857-1927) 구한말의 사상가. 호는 성암(成庵), 본관은 정선. 평안남도 출생했다. 조선 철종 9년(1857)에 태어나, 고종 29년(1892)에 의금부 도사, 대한제국 광무 3년(1899)에 중추원 의관을 지냈으며, 순종이 즉위하던 해(1907)에 관직을 버리고 중국 광동으로 건너가 정신연구에 몰두하였다. 자는 서우(曙宇),호는 성암(成菴)외에도 취당(醉堂)이 있으며 도호는 현빈도인(玄牝道人)이다.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 1920)
1956 박종혁(朴鍾赫, 1956-) 성균관대학 박사(1991), 국민대학 교수, 해학이기, 주역, 장자 등 논문. 해학 이기의 사상과 문학, 아세아 문화, 1995, 105쪽.
박재춘(朴載春, s.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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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0 묵자(墨子, 전470?-391) 또는 묵적(墨翟). 묵적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송 허난 성에서 탄생한 사상가이자 철학자이다. 초기 전국 시대에 제자백가 중 묵가를 대표하는 위인이다. 핵심 사상은 겸애(兼愛)이고 《묵자》에 전한다. 유교와 도교와 대립하였다.
양주(楊朱, ?-?)[400-300] 중국 전국 시대 초기 사상가. 자(字)는 자거(子居). 위(衛) 사람이다. 개인주의 사상인 위아설(爲我說, 자애설)을 설하였다. 양주(楊朱)의 전기는 모호하다. 묵적(墨翟)과 아울러 그 사람의 설이 천하에 가득 차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맹자(孟子)》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에 걸쳐 그 학설이 유행했던 듯하다.
372 맹자(孟子, Mèngzǐ 멍쯔[*], 라틴어: Mencius전372-전289?), 공자의 사상을 이어 발전시킨 유학자이다. 전국 시대 추(鄒)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가(軻)이고,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이다.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상하고,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켜 유학을 후세에 전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사단(四端) 오륜(五倫)
369 장자(莊子, 전369?-전286) 중국 전국 시대 송(宋)나라 몽(蒙; 현재의 안휘성 몽성 또는 하남성 상구 추정) 출신의 저명한 중국 철학자로 제자백가 중 도가(道家)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노자(老子)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 본명은 주(周)이다. [그리스 회의학파의 퓌론(Pyrrhon, Πύρρων 기원전 365-275) (90살)과 비슷한 시기이다.].
712 두보(杜甫, Dù Fǔ 두푸, 712-770) 당나라 시인.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중국 고대 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시성(詩聖)이라 부르며, 그의 작품은 시사(詩史)라 부른다. 이백과 함께 이두(李杜)라고도 일컬으며, 그 당시 정의가 없는 경제구조로 고통받는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시로 묘사한 민중시인이다. [이백(李白, 701-762) 당나라 시대 시인, 이다.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시선(詩仙)”]
1017 주돈이(周敦頤: 1017-1073) 또는 주염계(周濂溪)는 중국 북송(960-1127)의 유교 사상가이다.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존칭하여 주자(周子)라고도 한다. 송나라 시대 유학의 형이상학적 사유는 주돈이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말해지곤 한다. / 동시대의 유학자 장재(張載: 1020-1077)의 사상과 더불어 주돈이의 저술인 《태극도설》(太極圖說)이나 《통서》(通書)에 보이는 깊은 사색은 주돈이의 제자인 정호(程顥: 1032-1085)·정이(程頤: 1033-1107)의 2정자(二程子)를 통해 계속 이어져 나간 송나라 시대 도학(道學)의 방향을 설정하는 단초가 되었다.
이정자(二程子) 또는 정자(程子)는 송나라 시대의 유학자 정호(程顥: 1032~1085) · 정이(程頤: 1033~1107)의 두 형제를 통칭하는 존칭이다.
1610 황종희(黃宗羲, 1610-1695) 자는 太冲, 호는 梨洲, 余姚 사람,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황종희와 고염무(顧炎武, 1613-1682), 왕부지(王夫之, 1619-1692)를 3대 사상가로 든다. 그리고 당견(唐甄, 1630-1704) 역시 저명한 사상가로 4대 사상가로 포함시켜 말하기도 한다.
1858 캉유웨이(康有爲, 강유위, 1858-1927) 중국 사상가이자 정치가. 1898년의 ‘변법자강책(變法自彊策)’.《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대동서(大同書)》 ,《일본변정고》, 《아대피득변정기(俄大彼得變政記)》
1865 담사동(譚嗣同, 1865-1898)[서른셋] 호: 장비(壯飛), 자: 복생(復生), 중국 청말의 사상가이자 정치개혁자이다.
1873 양계초/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 중국의 근대 사상가이자, 개혁가, 문학가, 사학가, 언론인, 교육가이다. 당시 뛰어난 대학자였던 캉유웨이의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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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 루소(盧梭 로사, 讓-雅克·盧梭, Jean-Jacques Rousseau,1712-1778)是啟蒙時代的法國與日內瓦哲学家、政治理論家和作曲家,出身于当时还是独立国家的日内瓦。)
1853 이쉴(Paul Robert Achille, 1853-1922: 흉상 동상 1980년 세움) 대구 계산 성당 초대본당 주임으로 프랑스인 로베르 (Paul Robert Achille, 1853-1922) 신부. 한국식 이름: 김보록, 金保祿) 신부를 임명하였다. 1882년부터 경상도 사목 담당. 1885년 대구 본당설립. / 로베르 아킬레오로 쓰는 곳도 있다. 내가 보기에 폴이 세례명이고 본명은 로베르 아쉴일 것이다. 동상에 쓰인 표현이 맞을 것이다. (대구의 사도) 김보록(로베르)신부 서한집(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부설 영남교회사연구소, 1995,) (계산 성당 역사에는 Achille Paul Robert이다)
(5:15, 52RL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