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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논리: 11. 넌센스(무의미), 12. 파라독스, 13. 분열증 환자와 어린 소녀.
- 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pp. 83-91, 92-100.
들뢰즈는 자신이 이 책의 33장 “엘리스의 모험들” 속에서(273-275쪽), 앞에서 쓰여진 내용 중에서 1-3장은 장소(lieu)에, 4-7장은 방향(orientation)에, 8-12장은 요소(élément)에 관한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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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넌센스”라는 무의미에 대해서 다루면서, 무의미가 사실은 의미와 내재적으로 연관이 있기 때문에, 무의미가 무의미가 아니라 의미로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의미의 논리학”에서 의미가 성립할 수 있는 것만큼이나 무의미도 성립한다. - 그렇다면 의미는 실재성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과 양식의 합으로서 추리의 과정과 계열 모두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무한이나 제로라는 의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미의 기본은 부정법일 것이고 분석기학에서 부정수x, y에 해당할 수 있다. x+y = 12일 때 x가 셋이라면 y는 아홉이라는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물론 x는 다섯일 때 y는 일곱이다. 이런 수학적 추리와 달리 입말에서도 명제에서는 주어와 술어 사이에도 연관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입말에서 하늘나라는 아름답다 이외에도 도덕적 부정어를 제외하고 어떤 술어든지 속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주어와 술어 사이에 현실적 사물처럼 의미를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늘나라에는 모든 이들이 다 있다도 성립한다. 모든 생명체는 사라진다고 하듯이 모든 생명체가 현존한다고 한다. 역설은 “의미” 있다는 명제로부터 무한하게 생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철학에서 개념의 생성과 다른 차원으로, 무의미는 상징계에서 의미를 생산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종교는 무에서 모든 의미와 모든 무의미를 생산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56MKB)
12장 “역설”에서는, 의미와 무의미가 대립적으로 또는 모순적으로 서로 연관 속에서 성립하듯이, 독사(믿음, 견해)에 대해서도 달리 여러 파라독스가 성립한다. 전자(의미)에서는 입말의 관계 항목처럼 이루어지듯이, 후자에서는 항목의 경계를 긋는 그 순간(moment)에 경계와 인접에서 닮음에서 또는 대립과 반대에서 새로운 견해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경계선과 더불어 생성에서는 실재성이 관여하는 정도의 차이뿐만이 아니라, 강도의 차이에서도 생겨난다. 강도의 차이는 의미-무의미와 달리 인접과 닮음의 부분들에 의해 여러 방향과 경향으로 생겨날 수 있다. 방향과 경향이란 차이를 나누는 미분화의 것이 아니라, 차히를 생산하는 세분화에서 일어난다. 이점에서 의미-무의미는 지성의 조작적 작업이 관여한다면, 역설에서는 본능과 같은 다른 내재적 작동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다. 어쩌면 전자에서는 양심(syneidos, 도덕의식)의 혼동에서 온다면, 후자의 경우는 공감성(synaisthesis, 성찰의식)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내가 보기에 들뢰즈가 벩송의 공감성(synaisthesis)을 몰랐지만, 관념과 개념상으로 양심(syneidos, 도덕의식)의 차원에 기준과 규칙을 부여하는 것이 언어에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 같다. 그런데 행동과 실천은 함께 인정해야 하는 공감성을 필요로 하는 위상에서라도 기준(구체적 일반화)이 있기에 다른 기준에 대해 파라독스가 성립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관념과 개념에서 개념화(일반화) 작업은 명사화(실체화)에 관계하기에 추상적 일반화인 데 비해, 공감성의 일반화는 구체적 삶의 터전에 관계하는 이들 또는 공동체와 연관에서 성립한다. 이 공동체와 연관에서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연대와 연맹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도덕론은 입말의 추상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연대와 연맹이든지, 구성원들의 교감과 공감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때 연대든 교감이든 각 특이자가 누구에게 지시받거나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실행하는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권능을 표출하며 같은 경향성을 발휘 할 때 일 것이다.
나로서는 들뢰즈가 벩송의 ‘꼴레쥬드 프랑스 강의록’을 읽지 못했지만, 비슷한 문제의식으로, 언어를 통한 상징계에서 도덕론을 논하는 것이 의미 있다고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도덕론은 살아있는 터전에서 현실적으로 상호연관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입말의 중요성은 왜 제기될까? 경계를 그을 수 있는 상황이 그리 쉽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경계가 흐릿한 현실에서 입말은 상징계에 힘입어서 의미를 생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실재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데는 전혀 다른 양태들이 있다. 양태들에는 신체적 습관도 있고, 오래 익숙해져왔던 삶의 태도도 있다. 그런 양태들에 대해 새로운 양태로서 특이성의 삶은 경계선의 접선에서 위상을 지니고 있고, 그 위상은 연합[편집증]이 아닌 이합[분열증]에 의해 다른 경향성과 방향성을 보일 것인데, 이 제3의 양태는 제1과 제2의 양태에 비해 달리 살아가기인데, 이를 언어로 표현하게 되면 파라독스(독사에 대한 다른 견해)가 될 것이다. 세상에는 이 제3의 양태가 많은데, 사람들은 덕후 또는 상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벩송은 강의록에서 별종이라 한다. (56MKB)
13계열에서 들뢰즈는 캐럴과 아르토를 대결시킨다. 표면에서 일어나는 파라독스들은 당연하다. 원본(이데아)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의미에서 두 저술가는 도착자(pervers)이지만 짖궂은 (파라)독설가인 셈이다. 그런데 캐럴은 독사에 대한 파라독사이라면, 아르토는 아페이론에서 솟아나는 파라독사이다. 이런 점에서 표면의 제1화면과 생성의 제2화면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서 도착자들인 한에서 성적인 문제가 내포되어 있어서 도덕적 문제와 연관지울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캐럴은 순진한 편이고 아르또는 겂없이 드러내는 편이라 할 수 있다. 사회라는 평면에서 하나는 그래도 사회의 상식과 양식을 인정하는 편인데 비해 아르토는 사회자체가 변화를 능동적으로 대처할 때는 생성의 파라독스가 등장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가 암암리에 체제 인정의 파라독스와 체제 항거의 파라독스를 구별하려는 의미에서, 이 장에서부터 도덕론에 대한 기원 또는 근원을 제시하려고 한다. (56M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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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넌센스(무의미), 12. 파라독스, 13. 분열증 환자와 어린 소녀.>한 묶음이어야 한다. 스키조(분열증자)는 파라독스를 무한정하게 생산할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분열증자는 삶의 목소리이다. 의미를 생산한다고 여기는 파라노이아(편집증자)는 하나를 모델로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에 걸맞지 않으면 무의미이다. 그 무의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헤르메노이틱(엔테르프레타시옹)이라 한다. 그 의미부여가 넌센스이고 또한 무한정하게 소급 해석할 수 있다고 여긴다. 말하자면 분열증자는 삶의 응어리를, 편집증자는 원본이 있다는 가정하게 모방체들 조립한다. 전자에서도 분출과 생산을 시뮬라크르라 부르고, 후자에서 복사물과 모방물을 시뮬라크라부른다. 플라톤주의자는 후자에게서 진위를 구별하는 방식으로, 스토아주의는 전자에서 삶의 실천을 자각하려 한다. (56M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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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계열 : 무의미 (du non-sense)
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pp. 83-91
[의미의 논리학은 의미 대(對) 무의미가 대립 또는 부조리 관계로서 무의미가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가 서로 내재적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논리학이다. 즉 의미가 성립한 놀이 규칙은 무의미가 의미를 갖는 놀이 규칙과 같다. 결국 무한 소급의 중단에서 나온 의미, 이데아, 영혼, 세계, 이상 등은 역설적 요소인, 형용모순인 무의미를 단어로서 의미가 성립한 것이다. 이 무의미의 의미란 생산된 것이다. (41OMD)]
역설적 요소의 특성들 Caractères de l'élément paradoxal 83
83 움직이는 영속(perpetuum mobile)과 같은 역설적 요소의 특징들을 요약해 보자. 이 요소들은 이질적인 계열들을 돌아다니면서, 한편으로 그 계열들을 좌표화하고, 공명하게 또 수렴하게 만들며, 다른 한편으로 그들을 가지치게 만들고, 그 각각에 복수적인 선언들(disjonctions multiples)을 도입한다. 그것은 동시에 단어=x 이자 사물=x 이다. (83) - [영혼은 움직이는 영속이다. 이 단어는 관념론이나 본질론에서 보면 형용모순이나, 그러나 변화중인 영혼은 단어, 사물, 변화(동사)의 세 측면을 지닌다. 이 셋째로부터 철학이 가능하다고 본 것은 벩송이다.] - [강의록에 따르면 종합감성, 공감성, 공감에서 철학이 출발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역설적 요소는 과잉이면서 동시에 결핍이며, 빈 칸이자 정원 초과된 대상이며, 임자 없는 자리이자 자리없는 임자이며, 떠다니는 기표이자 떠있는 기의이며, 신조어이자 비의적 단어[신조어](mot ésotérique)이자 동시에 개방적 대상(objet exotérique, 현시적)이다. (83) [제8계열 참조 64-66] 하얀 단어이자 검은 대상이다. [관념은 백색이며 대상은 검은 색이며, 영혼(동사)은 붉은 색이다.]
[예 1, 캐럴의 작품에서] “왜냐하면 스나크는 부줌(Boujoum)이었으니, 한번 모습을 그려보라.”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 160-210) ... “블리투리(Blituri)는 스킨답소스(Skindapsos)였으니, 한번 구분해보시오.” (83)
한 계열에서 단어=x, 다른 계열에서 사물=x ... 아이온 위에 제3측면, 즉 행위=x의 측면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83)
그것은 무엇으로 된 무의미인가 En quoi il est non-sens; les deux figures du non-sens
84-1 우선 빈 단어(mot blanc, 하얀단어)는 어떤 신조어들(cela, chose, Snark 등)에 의해 지시된다. 이 빈 단어 또는 일차적인 능력을 지닌 이 신조어들은 두 이질적인 계열을 좌표화하는 기능을 한다. .. 이 두 능력에 두 상이한 형태(figures différantes)가 상응한다. (84)
1) 일차적 형태(Première figure): 역설적 요소는 단어이자 동시에 사물이다. 우리는 의미를 부여받는 모든 이름(mot)들의 정상적인 법칙은 정확히 그들의 의미가 오로지 다른 이름(mot)에 의해서만 지시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n1-> n2-> n3...) 그 자신의 의미를 말하는 이름(mot 단어)은 무의미(non-sens) 즉 Nn[무한 퇴행의 극한은 한 개념을 성립시킨다.] 일 수 밖에 없다.
2) 두 번째 형태: 단어-손가방 자체도 대안의 원리이며, 이 원리를 통해 또한 두 항을 만든다. (frumieux = fumant-et-furieux ou, furieux-et-fumant) (84)
그래서 무의미는 두 가지 형태를 갖는다. 하나는 소급적인 종합에 상응하며, 다른 하나는 선언적인 종합에 상응한다. (84)
84-2 누군가 이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반박할 것이다. (84) .. 이러한 논박의 근거는 없다. 진짜 말놀이가 있다면, 그것은 의미를 가질 수 없는 무의미가 의미를 가진다고 말할 때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설을 이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의미는 그의 고유한 의미를 말한다고 제안할 때, 우리는 반대로 의미와 무의미는 하나의 내재적 관계, 진위의 관계를 모방해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 즉 단순히 상호배제의 관계로서 간주될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미의 논리학이 가장 일반적으로 제시하는 문제이다. (85)
의미의 논리학은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내재적 관계, 즉 같이 나타남/공현전(coprésence)의 양상이라는 본래적 유형을 정립할 수밖에 없다. 현재로서 우리는 이 사실을 무의미를 그 고유한 의미를 말하는 하나의 말로서 다룸으로써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85)
부조리의 두 형식 Les deux formes de l'absurde (sans signification) qui en découlent
85 역설적 요소는 앞에서 말한 두 형태[소급적 종합에 상응하는 형식과 선언적 종합에 상응하는 형태] 하에서 무의미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법칙들은 이 두 형태에 정확히 대립하지는 않는다. (85)
의미를 부여받은 단어들은 이 법칙들에 복속 되는 한에서, 이 단어들은 [의미화]기호작용의 결정(détermination de signification)을 수용한다. (85)
그래서 무의미의 두 형태에 부조리의 두 형태가 대응하며, 이 두 형태는 기호작용을 박탈당한 그리고 역설들(paradoxes)을 구성하는 형태로 정의된다. 요소로서 포함되는 집합, 자신이 전제하는 집합을 분할하는 요소 - 모든 집합의 집합, 군대의 이발사. 따라서 부조리는 때로는 소급적 종합에서 형식적 층위들의 혼동(confusion)이고 때로는 선언적 종합에서 악순환(cercle vicieux)이다. (86)
그러나 여기에서 단순히 동일성의 연결아래서 논리적 결과만을 본다면, 그것은 틀린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가언적 명제를 구성하는 항들의 층위를 변별했다. 그래서 우리는 ‘낮이 되다(faire jour).’나 ‘아이를 낳았다(avoir enfnanté)’를 그것이 근거하는 상위 유형의 속성들(‘밝다, faire claire)’, ‘가슴에 젖이 나온다(avoir du lait)’)의 기표로서 간주할 수 있다. (86)
의미와 더불어 무의미의 공현전 coprésence du non-sens avec le sens
87 무의미는 기호작용의 결정일 뿐만 아니라, 의미를 줌(donation de sens)이라는 역할을 수행한다. (87)
요컨대, 의미는 언제나 하나의 효과이다. 단지 인과적 의미에서 효과가 아니라, ‘광학적 효과(effet optique)’, ‘음향적 효과(effet sonore)’, 더 나아가서는 표면효과, 위치효과, 언어 효과(effet de language)이다. 이러한 효과는 결코 하나의 외관(apparence)이나 착각(illusion)이 아니다.(88)
하나의 고유명사는 그것이 이러한 유의 효과와 연관되는 한에서만 충분히 하나의 기호로서 간주될 수 있다. 그래서 물리학은 ‘켈빈(Kelvin)효과’, ‘제베크(Seebeck)효과’ ‘지만(Zeemann)효과’ 등에 대해 말하며, 의학은 병들을 그 징후들의 표를 제시한 의사들의 이름을 따서 지시한다. .. 의미의 발견의 경우에는 크뤼시포스 효과, 캐럴 효과 등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88)
최근에 구조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저자들은 사실상 별다른 공통점이 없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들에게 의미란 - 결코 외관으로서 의미가 아니라 표면과 위치의 효과로서 의미란 - 구조의 계열 안에서 빈칸의 순환에 의해 생산된다는 생각이다. (죽음의 자리, 왕의 자리, [망막의]맹점, 떠다니는 기표, 제로 값, 무대 측면(cantonnade) 또는 부재하는 원인 등) 구조주의는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스토아적-캐럴적 영감과의 만남을 추구한다. 구조란 결국 비물체적 의미를 생산하는 기계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구조주의가, 의미는 무의미에 의해 그리고 무의미의 항구적인 자리옮김에 의해 생산된다는 것이라는 것을, 이런 방식으로 보여줄 때, 우리는 [구조주의가] 여기서 부조리의 철학이라고 불린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유를 보게 된다. (88) - [실존주의가 부조리의 철학에서 나왔다고 볼 때, 구조주의와 실존주의는 별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구조주의 문학의 짝은 까뮈(Albert Camus, 1913-1960)가 아니라 캐럴이다. 왜냐하면 부조리의 철학에 있어 무의미란 단순히 의미와 대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부조리는 의미의 결핍, 부족함(..이 충분하지 않다)에 의해 정의된다. 반대로 구조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언제나 너무나 많은 의미가 존재한다. 과잉은 자체 결핍으로서 무의미에 의해 생산되고 과잉 생산된다. (88)
야콥슨이 정의한 제로 음소, 즉 어떤 규정된 음운학적 값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음소와 대립하기보다는 음소의 부재에 대립하는 음소처럼, 무의미는 어떤 특정한 의미도 없지만, 그 생산물과 우리가 원하는 단순 배제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것이 과잉생산하는 의미에보다는 의미 부재에 대립된다.무의미란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렇게 때문에 의미를 줌을 수행함으로써 의미의 부재에 대립된다. 이것이 우리가 무의미(non-sense)라는 말에 의해 이해해야할 바의 것이다. (89)
효과로서 의미 Le sens comme "effet"
89 마지막으로, 철학, 나아가 사유 전체에 있어 구조주의가 지니는 중요성은 그것이 경계선들을 옮긴다는 데 있다. 의미의 개념이 본질들의 무기력해진 연결(relais)을 대체했을 때, 철학적 경계선은 의미를 새로운 초월성, 신의 새로운 화신(avatar), 변형된 하늘, 인간과 그 심연 속에서 - 즉 깊은 새로운 도가니, 지하 속에서 - 의미를 발견하는 것들 사이에 수립된 것으로 보였다. (89) [발견이 아니라 생산이다.]
하늘에 있건 지하에 있건 의미는 원리(Principe), 보관소(Réservoir), 저장(Réserve), 기원(Origine)으로서 제시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천상의 원리가 근본적으로 잊혀지고 덮혀버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하의 원리는 심층적으로 말소되고 포기되고 소외되었다고 말한다. (89)
그래서 이제 새로운 소식의 울림을 듣는 것은 행복하다. 즉 의미는 결코 원리나 기원이 아니다. 그것은 생산된다. ... 그것은 어떤 높이나 깊이에도 속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그 고유한 차원으로서 표면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표면 효과일 뿐이다. (89)
예컨대, 우리는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에게서 전복(renversement)의 예언자도 넘어감(dépassement)의 예언자도 찾지 않는다. .. [그의] 격언과 시는 의미를 생산해내는 기계이다. .. 우리는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에게서 인간 중심적 심층이나 기원적 의미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무의식에 의해 의미를 생산하는 무의식 기계의 놀라운 발견자들 본다. (90)
빈 칸...; 특이성들..; 이 모든 것들은 순환들을, 메아리들을, 요소들을 가로질렀는데, .. 빈칸을 순환시키는 것, 전(前)개체적적이고 비인칭적인 특이성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 요컨대 의미를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인 것이다.(91) [철학은 개념의 생산이란 말과 의미의 생산이란 말을 같은 것일 것이다.] (41OLI)
제12계열 : 역설(sur le paradoxe)
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pp. 92-100.
[역설은 양식에도 상식에도 대립된다. 이점에서 관념적 사유에도 대상적(상식적) 사유에도 대립된다. 역설은 새로운 의미의 창조성, 생산성을 지니고 있다.]
양식/일방향의 본성, 그리고 역설 Nature du bon-sens, et paradoxe
92-1 루이스 캐럴에게 적합한 것은 논리학에 대해서도 적합하다. (92)
그렇다고 역설들은 사유의 그릇된 이미지, 엉터리 같으며 쓸데없는 비비꼬인 이미지라고 말해서도 안될 것이다. .. 역설들은 우리가 그것을 사유의 단초들(initiatives)로서 인정할 때에만 오락(récréation)이 되는 것이다. ‘사유의 열정’(Passion de la pensée)으로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다. [오락이 아니다]. 여기서 ‘사유의 열정’이란 사유될 수만 있는 것, 말로 될 수만 있는 것, [사유와 말이 따로 있을 수 있기는 하지만], 사유될 수 없고 표현될 수 없는 것, 즉 정신적으로 빈 것(Vide mental), 즉 아이온을 발견하는 것을 뜻한다. (92) - [역설은 인간의 사유가 만든, 양식과 상식과 다른 차원으로서, 새로운 사유 평면이다. 언어의 2차적 조직화일 것이고, 이것이 인간의 분열증의 기초일 것이다.]
역설들의 힘은 바로 그들이 모순되지 않으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모순의 생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92)
92-2 기호작용[의미화]의 역설은 비정상적인 집합(l'ensemble anormal, 요소로서 포함되거나 상이한 유형들의 요소들을 포함하는 것)이며 전복적인 요소들(l'élément rebelle, 그것인 현존을 전제하는 집합의 부분을 이루며, 또 그것이 결정하는 두 부분 집합에 속하는 것)이다.
의미의 역설들은 본질적으로 (언제나 과거-미래이며 현재는 결코 아닌) 무한 하부 분할(la subdivision à l'infini)이며 (닫힌 공간이 아닌 열린 공간에 배분되는) 노마드적 배분(la distribution nomade)이다. 그러나 이 역설들은 두 방향으로 동시에 나아가며,.. 동일화를 불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엘리스의 이중적인 모험이며, 미친 생성, 상실된 이름이다. (92-93)
역설(paradoxe)는 신념(doxa 통념)에 대립, 즉 통념의 두 측면 즉 양식과 상식에 대립된다. (93)
양식(bon sens)은 일방향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은 한쪽으로만 나 있는 방향이며, 하나의 방향을 선택해 그에 만족하도록 하는 한 질서의 요구를 표현한다. .. 양식/일방향은 그것이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을 가지게 된다. ... 양식/일방향이 열역학에서 그 심층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에 그것은 보다 고도의 모델들에 의존한다. 양식/일방향은 궁극적으로 배분자(repartiteur)이다. .. 양식/일방향이 함축하고 있는 이러한 배분은 정확히 고정된 또는 정주적인 배분으로 정의된다. 양식 일방향의 본질은 하나의[어떤] 특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며, 그러기 위해서(pour) 특이성에 의존하지만 특이성을 내쫓거나 희석시키는 보통의 규칙적 점들로 이루어진 선들 위에 그것을[특이성] 펼치기 위해서이다. 양식/일방향은 전적으로 가연적(combustif)이고 소화적(digestif)이다. (93)
양식/일방향은 토지 문제와 울타리설치 문제로부터 뗄 수 없는 농업적(agricole)이다. .. 증기기관과 울타리 쳐진 목장, 또한 재산과 계급은 양식/일방향의 살아있는 원천들이다. (93-94)
그러므로 양식/일방향의 체계적 특성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유일한 방향을 긍정하는 것; 이 방향을 보다 분화된 것에서 덜 분화된 것으로, 특이한 것에서 규칙적인 것으로, 특별한 것에서 보통의 것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 이 규정에 따라 시간(과거와 미래)의 화살에 방향을 수립하는 것; 현재를 이 수립 안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 이렇게 가능하게 된 예견의 기능(la fonction de prévision)을 하는 것; 이 모든 특성들이 서로 결합하게 되는 정주적 배분(distribution sédentaire)의 유형을 띠는 것 등이다. (94)
94 양식/일방향은 기호 작용의 규정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이 수행이 의미의 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는 양식/ 일방향이 언제나 이차적으로 도래했기 때문에, 그것이 수행하는 정주적 배분이 .. 어떤 다른 배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94)
볼츠만(Ludwig Eduard Boltzmann, 1844-1906, 오스트리아의 이론물리학자) ... “우주 전체에서, 시간의 두 방향은 공간에서처럼 구분할 수 없다. 위도 아래도 없다.” (즉 높이도 깊이도 없다) (95)
여기서 우리는 크로노스와 아이온의 대립을 다시 발견한다. [§10 이상적 놀이, 78 et 80] 크로노스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현재이며.. 언제나 과거에서 미래로 흐름으로써 과거와 미래를 자신의 두 인도된 차원들로 간주하는 시간이다. 아이온은 추상적인 순간의 무한한 분할 내에서의 과거-미래이며, 언제나 현재를 피해가면서 끊임없이 두 방향으로 동시에 분해된다. (95)
상식의 본성, 그리고 역설 Nature du sens commun, et paradoxe
95 상식/공통감각에 있어서 상스(sens)는 더 이상 하나의 방향을 뜻하지 않으며, 하나의 기관(un organe)을 뜻한다. 사람들이 ‘공통의’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기관, 하나의 기능, 하나의 동일화 능력이며... (95-96)
주관적으로 상식/공통감각은 영혼의 다양한 능력들을, 또는 신체의 분화된 기관들을 포함하며, 그들을 자아(Moi)라고 말할 수 있는 하나의 통일성에 관련짓는다. .. 객관적으로 상식/공통감각은 주어진 다양성을 통일시키며 그것을 대상의 특수한 형상이나 세계의 개별화된 형상의 통일성에 관련시킨다. (96)
우리는 양식/일방향과 상식/공통감각이라는 두 힘의 상보성(complémentarité)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 자아, 세계, 신(방향들 뒤에서 솟아오르는 존재이자 동일성들의 지고한 원리)이 연맹(alliance)을 이루는 것은 양식/일방향과 상식/공통감각의 이 상보성에서이다. (96)
역설은 바로 이 양식과 상식을 동시에 전복시키는 존재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동시에 미친 생성이면서 예측 불가능하게 변하는 두 방향으로서, 다른 한편 상실된(perdu) 동시에 알아보기 힘들게 된(irréconiscible) 동일성의 무의미로서 등장한다. 이상한 나라(Wonderland)는 언제 분할되는 양 방향을 띤다. .. 실비와 브루노에서 요정들의 나라(Fairyland)는 공통의 장소와 대립된다. (96-97) - [역설의 두 가기 능력(faculté)에서 하나는 과학 인식의 예측성에 대한 전복이며, 다른 하나는 형이상학적 관념의 통일성(정체성)에 대한 전복이다. 인간의 자유와 정체성은 다른 차원, 새로운 생성에서 찾아야 한다.(41OMD)]
* 의미와 무의미 [역자 이정우 만든 항목]
97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즉 모든 양식/일방향과 상식/공통 감각을 앞서는 이 영역에서, 의미생성이 이루어진다. .. 우선 엘리스에서, 모자 장수와 화성의 산토끼 .. (97)
트위들둠과 트위들디는 두 방향의 구분 불가능성을 그리고 그들의 집을 가리키는 갈자지는 길 위에서 각 방향으로 두 방향의 무한한 분할을 증명해준다. .. 험프티 덤프티는 왕도적 단순성, 단어들의 주인(le Maître), 의미의 부여자(le Donatuer)이다. (98)
“우리는 언제 대머리가 되는가?” 또는 “얼마만큼이 쌓여야 더미가 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크뤼시포스(Chrysippos, 전279?- 206? 스토아학파)는 차라리 계산하는 것을 그치고 잠을 자면서 그 후를 보자고 대답했다. 카르네아데스(Carneades 전214?- 129? 회의주의학파)는 그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98)
크뤼시포스는 사태를 보다 상세히 설명한다. 즉 우리는 언제나 둘로 만족할 수 있으며, 기울기가 커질 때 머리카락을 늦추거나 다른 한 손을 증가시킬 때 한 손을 줄인다.왜냐하면 “다른 순간이 아니라 왜 이 순간인가?” “물의 성질은 왜 0도에서 변하는가?” 등이 문제가 된다면, 이 물음은 0도를 온도의 연속체에서 하나의 보통 점[일반화의 점]으로 간주하는 한 잘못 제기된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그것이 하나의 특이점으로 간주된다면, 그것은 그 안에서 발생하는, 보통 선에서의 그 현실화와 관련해 제로로 일컬어지는, 언제나 와서는 곧 지나가버리는 사건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98-99)
무의미, 의미, 이차적 언어의 조직화 Non-sens, sens et organisation du langage dite secondaire
99 이제 우리는 표면에서의 언어의 전개와 명제들-사물들 경계선에서 의미 부여를 부여하는 하나의 표(un tableau)를 제시할 수 있다. 이 표는 언어에 고유한 것이며, 이차적 조직화(organisation secondaire)를 보여준다(99).
그러나 바로 무의미는 의미와 내적이고 본래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각 계열의 항들에 의미를 제공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항들이 서로 상대적으로 가지는 위치들을 그것[무의미]과 관련해 가지는 절대적인 위치에 의존한다. 의미는 결국 계열들을 돌아다니는 심급에 의해 그들 안에서 생산된 하나의 효과이다. (99)
따라서 어떤 계열을 기표로서, 다른 계열을 기의로서 규정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의미의 두 측면, 내속과 열외존재이며, 또 그들의 원천인 두 측면 즉 무의미 또는 역설적 요소, 빈칸과 정원 초과된 대상 - 한 계열에서 임자없는 자리와 다른 계열에서 자리없는 임자 - 이다. (99) [의미는 한 방향이 아니라 두 방향이다. 그래서 두 계열을 규정해 준다.]
그러나 의미 생성은 역시 기호작용의 조건들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일단 의미를 부여받은 계열들의 항들은 제3조직화(organisation tertiaire) 안에서 이 기호 작용에 결국 복종하며, 이 제3 조직화가 그들을 가능한 현시들과 지시들의 법칙들(양식/일방향, 상식/공통감각)과 연관시킨다. (100) [참조: 17계열(144쪽) 구조의 집합에서 구조는 언어의 제3의 배치(l'ordonnace tertiaire)를 형성한다.](41OLI)
(정리, 6:34, 56LMF) (8:36, 56M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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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계열 : 분열증 환자와 어린 소녀(du schizophrène et de la petite fille)
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pp. 101-114.
[제목의 분열증 환자는 프랑스 시인 아르또(Antonin Artaud 1896-1948), 어린 소녀는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1832-1898)의 이상한 나라 엘리스의 주인공을 지칭한다.]
아르토의 분열증에서 혼합된 언어와 캐럴의 접속(connection)이 안 된 혼합된 언어 사이에 유사성이 있지만 다르다. 아르토의 분열증은 제2화면처럼 형이상학적이고, 캐럴의 접속 안 된 분열은 발생적 미숙으로 제1화면의 분절의 현상이다. 광신도의 방언(放言)과 선사의 일갈(一喝) 둘 다 이해로서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하나는 표면에서 하나는 심층의 울림의 제2화면에서 성립한다. 이 제2화면을 표면의 종합으로 인위적 가공물을 만드는 것과 다르다. 캐럴은 표면의 논리인데 비해 아르토는 심층의 발생 또는 생성을 말한다. (40LLF)
아르또와 캐럴 Antonin Artaud et Lewis Carroll - 101
101 표면만큼 연약한(fragile)[되돌릴 수 없는] 것은 없다. 이차적인 조직화는 .. 강한 괴물들에 의해, .. 형태없고 바닥없고 무의미들에 의해 위협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101)
우리는 무의미의 매우 다른 기능들과 심연들에, 단어-손가방의 이질성에 주의해야 한다. 이 때, 단어-손가방들은 이것들을 발명하는 자와 이것들을 사용하는 자들 사이에 어떠한 혼합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어린 소녀[캐럴]는 Pimpanicaille를 노래할 수 있고, 한 예술가는 frumieux를 쓸 수 있고, 분열증환자는 perspendicace를 말할 수 있다. (101-102)
덧붙여, 논리학자들이 무의미에 대해 말하면서 범하는 잘못은, 마치 어린 소녀가 노래하고 위대한 시인이 말하고 분열증 환자가 지껄이는 것을 생전 들어보지 못한 듯이, 그 자체로서든 증명을 위해서든 면면하게 구축된 앙상한 예들을 제시하는 점에 있다. 논리학이 드는 예들은 러셀(Russell, 1872-1970)이 루이스 캐럴에게 자극받아 제시한 예들을 제외한다면 형편없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역시 논리학자들의 부족함이 우리에게 그들에 대립해 다시 삼위일체(trinite)를 구축할 권리를 주지는 않는다. (102)
102 그런데 [캐럴과 아르토 사이에] 대체적 유사성들을 설정할 경우, 우리는 함정에 빠진다. 이 유사성의 함정과 더불어 두 텍스트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102) [캐럴과 아르토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표면에서 방출되는 캐럴캐럴(Carroll, 1832-1898)의 언어와 신체의 심층에서 마름질되는 아르토의 언어사이의 거리를, 그 문제들의 차이를 동시에 측정한다. 그래서 ‘로데즈(Rodez)로부터 편지’에 의해 인용된 아르토(Artaud, 1896-1948)의 다음 언급을 이해하게 된다. .. 빠리조(Parisot, 1908-1979)와 브루니우스(Brunius, 1906-1967) 같은 다른 프랑스 번역가들의 번역에 충분히 유비적인 번역규칙들에 부합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둘째 행의 마지막에서부터 미끄러짐이, 더 나아가서는 우리를 다른 세계, 다른 언어로 초대하는 핵심적이고 창조적인 함몰이 생겨난다. (102-103)
[텍스트 1] “나는 재버워키에 입각해 작업하지 않았습니다. ... 나는 감화된 유치함으로 보이는 이 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 나는 표면의 시들이나 언어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 재버워키는 머리를 써서 잘 차려진 음식을 포식하고 타인의 고통을 즐기고자 하는 모리배의 작품입미다. .. 그것{배버위키}는 실컷 먹는 인간의 작품이죠. 그의 글에서는 이런 느낌이 전해 옵니다.” (103)
요약하면, 아르또는 캐럴을 도착자(pervers), 즉 작은 도착자로 간주한다.(103)
캐럴의 놀이는 아르또에게 유치하게 보이고, 캐럴의 영양[자양분]은 너무 세속적이고, 캐럴의 똥(fécalité)은 위선적이고 너무 고양되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104)
먹기-말하기와 분열증적 언어Manger-parler, et le langage schizophrénique
[캐럴의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이중성과 아르또의 분열증은 유사하게 보이지만 다르다. 안티-외디푸스는 아르토의 분열증에 대한 해명이다.]
104 아르토의 천재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그 아름다움과 면밀함이 임상적 상태를 유지한 다른 하나의 텍스트를 생각해보자. (104)
환자자체로 불리는 자와 랑그로 연구하는 분열증 환자는 구강성의 두 계열의 존재와 선언을 체험한다. 이는 사물들-말들, 소비들-표현들, 소비 가능한 대상들-표현 가능한 대상들의 이원성이다. 먹기와 말하기 사이에서 이원성은 보다 폭력적으로 표현하여 지불하다-말하다, 똥싸다-말하다이다. 그러나 특히 이 이원성은 두 종류의 단어들, 명제들, 두 종류의 언어들 이행되고 재발견된다. (104) [구강성: 27계열]
마찬가지로 안토냉 아르또가 그 자신의 이율배반적 계열들, “존재하는 것과 복종하는 것, 살아있는 것과 존재(실존)하는 것, 행위 하는 것과 사유하는 것, 물질(matière)과 영혼, 물체(corps)와 정신”을 전개할 때, 그는 그 자신이 캐럴과 예외적인 닮음의 인상을 갖는다. ... 그렇지만 왜 아르또는 자신과 캐럴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덧붙인 것일까? ... 캐럴의 두 계열은 표면에서 분절된다(s'articuler). (105) [두 계열은 신체 표면의 한 부분(목구멍, 구강성)에서 두 갈래이다. 즉 말하다-먹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캐럴의 작품이 거울 효과처럼 상연하는(jouer, 놀이하는) 곳은 표면의 조직화에 있다는 것이다. (106) [여기서 놀이하다는 들뢰즈가 벩송의 MM 3장을 염두에 두었을까?]
분열증과 표면의 실패 Schizophrénie et faillite de la surface - 106
아르토는 말한다. “그것은 단지 표면적인 것이다” 약간의 분열증 증세만 있어도 아르토의 천재성을 가능하게 한 계시를 알아볼 수 있으며, 그 자신 그렇게 살 수 있다. (106)
아르또에 있어서 표면은 없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분열증적 신체의 최초의 측면, 그것은 일종의 신체-여과기(corps-passoire)이다. 프로이트(Freud, 1856-1939)도 표면과 피부를 수많은 구멍들의 통로로서 파악하려는 분열증 환자의 이 성향을 강조했다. (106)
모든 것이 신체의 혼합물이며, 신체 안에서 쟁여짐과 침투가 있다. 아르또가 말하듯이, “우리는 등 위에 고통의 못이 박힌 살찐 척추동물들을 얹고 있다. ... ”
신체-여과기(Corps-passoire), 조각들로 된 신체(corps-morcelé), 분해된 신체(corps-dissocié), 이 셋은 분열증적 신체의 최초의 세 차원을 형성한다. (107) [이 세 가지는 표면의 실패(faillite, 좌절)이다]
수동적 단어와 능동적 단어 Le mot-passion et ses valeurs littérales éclatées, le mot-action et ses valeurs toniques inarticulées -
[전자의 경우 캐럴의 것으로, 터져나온 문자적(음운적) 언어가치들이고, 후자의 경우 아르또의 것으로 분절되지 못하지만 (감성적, 강도) 강세를 지닌 언어가치들이다. - 후자에서 현실적 인격의 분열증의 생성의 출발점이 있다.]
표면의 이런 좌절(faillite)에서 단어[말] 전체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 말이 어떤 지시능력을 간직할 수 있지만, 공허(vide)로 느껴질 것이고, 표출의 능력을 무차별(indifférent)로, 의미화의 능력을 ‘거짓’(fausse)으로 느껴질 것이다. (107)
신체의 부분들, 즉 기관들은 이들에 영향을 주고 또 이들에게 공격하는 분해된 요소들에 의해 결정된다.이 수동(passion)의 과정에서 언어의 효과 대신에 순수 언어-감화(affect)가 대체 된다: “모든 글쓰기는 욕설(COCHONNERI)” (말하자면, 정지되고 그려진 모든 단어는 시끄럽고, 영양적이고, 분변(糞便 똥)적인 조각들로 분해된다)(107-108)
이제 분열증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의미를 복구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 제거된 표면 아래의 심층에서 말을 파괴하는 것, 애정(affect, 감화)을 쫓아내는 것, 또는 신체의 고통스런 열정을 승리의 행위로, 즉 복종을 명령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108)
모든 문자적, 음절적, 음성적 가치들이 쓰여진 것이 아닌 오직 강세적인 가치들(valeurs exclusivement tonique)로 대체된다. 이 후자의 가치에 분열증적 신체의 새로운 차원인 영광스런 신체가, 부분들 없는 에 신체가 상응하며, 이 부분 없는(sans parties) 신체는 취입[주입, insufflation], 영감[흡입], 증발, 유동적 이동에 의해 전체를 이룬다. (아르또의 기관없는 신체 또는 상위신체(corps superieur)) (108)
흐름은 그래도 수동적 극에 즉 불완전한 혼합물들의 쟁여짐과 타박상(멍)에 대립해서 능동적 극을, 즉 완전한 혼합을 형성한다. 분열증에서 물체적 두 혼합 방식 사이에 스토아적 구별로 살아가는 방식이 있으며, 두 혼합 방식이란 부분적이고 변질적인 혼합과 (신체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두는) 총체적이고 액체적인 혼합을 말한다.(109) [영혼의 상호침투를 물질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액체적 혼합이란 말이 성립한다. 벩송의 설탕을 물에 녹이는 비유를 참조.]
이차적 언어, 즉 행위의 절차는 실질적으로 그 자음, 후음, 유기음의 과잉에 의해, 그 내부적 강세와 아포스트로피에 의해, 그 기식(氣息, 숨결)과 각운 나누기에 의해, 그리고 음절적인 아나가 문자적은 모든 가치들을 대체하는 그 소리 변화에 의해 정의된다. 단어로 행위를 만든 것인데, 단어를 분해 불가능한 것으로, 와해될 수 없는 것으로, 즉 분절없는 언어(language sans articulation)이게 하는 경우이다. (109) [언어의 행동으로 이어짐]
러시아 단어 나무 ‘derevo’에 관하여, 입말들로서 연구자는 복수인 derev’ya가 있는 것을 환호한다. 거기에서 내부 아포스트로피는 연구자에게 자음들의 융해를 보증해 주는 것 같다(언어학들의 물렁한 기호). 자음들을 분리하게 하고 또 자음들을 발음가능하게 하는 대신에, 사람들은 젖은[습한] 기호로 환원된 모음이 자음들을 적시게 함으로써 그들을 분리불가능하게, 독해불가능하게, 아나가 발음불가능하게 만들며, 그로부터 연속적인 숨결 안에서 그만큼의 능동적 외침을 만들어낸다고 말해왔다. (109)
안토낭 아르또가 제버워키(Jabberwocky) 속에서 “Jusque là où la rourghe est à rouarghe a rangmbde et rangmbde a rouarghambde”라고 말했을 때, 단어가 조각난 유기체의 수동이 수동이기보다, 단어가 부분들 없는 신체의 능동이 되기 위해서 그 단어를 활동하게 하여 취입하게 하고 적시고 불타게 하는 [능동적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110)
즉, 아르또(Artaud, 1896-1948)의 ‘Ghore Uk’hatis’는 잃어버린 돼지들, 캐럴(Carroll, 1832-1898)의 ‘mome raths’, 파리조(Parisot, 1908-1979)의 ‘Verchons fourgus’의 등가물이 아니다. (110)
심층의 무의미와 표면의 무의미의 구별: 언어의 일차 질서와 이차 조직화의 구별 Distinction du non-sens de profondeur et du non-sens de surface, de l'ordre primaire et de l'organisation secondaire du langage. -
[표면의 무의미는 캐럴에, 심층의 무의미는 아르또에, 전자는 수동의 공포의 극장이며 후자는 능동의 잔혹의 극장이다]
110 사람들은 분열증적 단어[말]의 이중성을 충분히 주목하지 못했다. .. 음성적(phonétique) 가치 대 강세적(tonique) 가치, 수동 단어 대 능동 단어, 조각난 신체 대 기관없는 신체 .. 이 두 단어는 두 개의 극장, 수동이자 공포의 극장 대 본질적으로 능동적 잔혹의 극장에 귀착된다. (110)
모든 것은 여기서 일어나는데, 의미의 그 아래서, 표면으로부터 멀리서, 능동하고 수동한다. 아래-의미이자 내부의미인 하부의미(Untersinn)는 표면의 무의미로부터 구별되어야만 한다. 휄더린(Hölderlin, 1770-1843)의 말에 따르면, “의미로부터 빈 기호(un signe vide du sens)”, 이러한 것은 두 측면 하에서 언어이며, 그럼에도 하나의 기호이며, 신체의 능동 또는 수동과 혼합되어 있다. (111)
분열증적 언어... 더 이상 계열은 없다. 두 계열은 사라졌다. 무의미는 표면에 의미주기를 그쳤다. 무의미는 기표의 측면에서나 기의의 측면에서나 모든 의미를 흡수하며 삼켜버린다. (111)
아르또는 그의 시론을 「루이스 캐럴에 반대하는 반대문법적 시도」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캐럴은 보다 엄밀한, 그리고 물체들을 반영하고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거울로서 이긴 하지만, 물체들의 굴절과 분절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단어들의 굴절과 분절을 모으는 역할을 할 하나의 문법을 필요로 한다. (112)
“먹기-말하기” 같은 유형의 표면 계열들은 외관적으로 유사한 심층의 극들(pôles)과 실제적으로 아무런 공통점을 가지지 않는다. 계열들 사이에 의미를 분배하는, 표면에서 무의미의 두 모습(deux figures du non-sens)은 표면을 끌어내고 삼키고 재흡수하는 무의미의 두 잠수(deux plongée du non-sens)와 관계없다. 말더듬기의 두 형태, 간헐적과 강세적(clonique et tonique) 형태는 분열증적 언어와 조잡한 관계를 맺을 뿐이다. 표면의 절단과 심층의 분열(Spaltung)과 공통점이 아무 것도 없다.(112) [베르그송의 추억 절단면의 이마쥬와 기억의 이마쥬는 전혀 관계없다. 이마쥬-추억과 순순 추억을 질적으로 본성상 차이로 구별하는 것과 같다. 전자는 신체의 운동기제와 관련있고, 후자는 기억의 사유이다. 인격성은 분열의 문제임을 베르그송은 이미 말했다. 「인격론」에서]
우리는 그 어린이에게서[엘리스] 분열자적 지위(position schizoïde)를 발견할 수 있다. .. 어린이에서 표면의 정복, 분열증 환자에서 표면의 실패, 도착이라 불리는 자에서 표면의 지배, 이 모든 것을 뒤섞는 것은 고약하고 화난다는 것이다. (112) [세 가지를 섞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언제라도 루이스 캐럴의 저작들을 일종의 분열증적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아르토의 경고가 튀어나온다. “나는 번역을 시도하지 않았다. [...]나는 이 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표면의 시들이나 언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 구조주의는 형상과 질료가 그들을 조직화해 주는 독창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구조에서만 한정지워야 한다는 것은 일리가 있다. 정신분석학은 역사적 일화[사례집]이기 이전에 기하학적 차원에서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삶은, 심지어 성(性)조차도, 발생적 질료들과 생겨난 형상들에서 있기 이전에 이 차원들의 조직화와 방향성에 있기 때문이다. (113) [분열증은 층위의 차원이다.]
우리는 캐럴의 모든 저작들과 아르또의 한 쪽(page)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아르또는 문학에서 절대적인 깊이를 달성한, 살아있는 신체와 이 신체의 놀라운 언어를 발견한 유일한 작가이다. 그가 말했듯이, 엄청난 고통을 대가로 치르고서. 그는 오늘날까지도 알려지니 않은(inconnu), 하위의미(infra-sens)를 탐험했다. 그러나 캐럴은 너무 잘 알려져 있어 탐험할 필요가 없다고 간주되었던 표면의 주인이자 측량사(arpenteur)로서 머문다. 그럼에도 그 표면에서 모든 의미의 논리가 유래한다. (114) [측량은 기하학이 아니다. 측량은 기하학의 경험적 표면일 뿐이다.] (40LLF-41OMC)
(13첨가, 14:26, 56MLC) (14:32, 56M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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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 크뤼시포스(Crysippe, Χρύσιππος Chrysippos, 전279?- 206?) 스토아학파. 스토아학당에서 클레안테스 다음 3대학장(전232-206)
214 카르네아데스(Carneades 전214?- 129?) 고대 회의주의학파.
106 키케로(Cicéron, Marcus Tullius Cicero, 전106-전43) 이탈리아 아르피눔 출생, 로마의 정치인, 변호사, 라틴어 작가. Academica, 전45: fr. Les Académiques(Academica Priora, Academica Posteriora)(trad. José Kany-Turpin, préf. Pierre Pellegrin, 2010)
O
160 섹스투스 엠페리쿠스(Sextus Empiricus, Σέξτος Ἐμπειρικός, 160-210) 회의주의 철학자, 고대 경험적 의학파 의사. Adversus Logicos(Against the Logicians, 1935),
1813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 덴마크 작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철학자. 실존주의 형성자. 철학적 단편(Philosophiske Smuler: 1844: Miettes philosophiques (1843) 철학적 단편에 부치는 비학문적인 해설문(Afsluttende uvidenskabelig Efterskrift, 1846: Post-scriptum aux Miettes philosophiques)
1832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1832-1898) 본명 찰스 럿위지 도지슨(Charles Lutwidge Dodgson, 1832-1898), 영국 작가, 수학자, 사진사이다. 놀라운 나라의 엘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1865),
1844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독일 철학자. 시인. 도덕론에서 권능을 강조하였다. 삶의 현실은 주사위 놀이와 같다.
1844 볼쯔만(Ludwig Eduard Boltzmann, 1844-1906)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철학자. 통계물리학의 선구자. 원자들의 현존을 열렬히지지[구조주의자?]. 기체이론 강의(Vorlesungen über Gastheorie: Conférences sur la théorie des gaz.(I. Theil: Vol. I, 1896; II. Theil: Vol. II, 1898.)
1856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유대계 오스트리아 의사, 정신분석가. "l'inconcient"(1915), in Métapsychologie
1859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 독일 철학자. 논리연구(Logische Untersuchungen: Recherches logiques, 1900-1901)
1866 뒤마(Georges-Alphonse Dumas, 1866-1946) 프랑스 의사, 심리학자. 심리학 개론(Le Traité de psychologie (1923-1924)을 편집하였다.심성 질병들에 따른 초자연과 신들(Le Surnaturel et les Dieux d'après les Maladies Mentales. 1946)
1872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인식론자, 정치가, 도덕론자.
1882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 1882-1941) 영국 작가. Portrait de l'artiste en jeune homme (1916) Ulysse (1922) Finnegans Wake (1939), - 블룸(Bloom)이라는 기표 계열을 율리시즈의 기의 계열에 연관시킨다. (53)
1892 코이레(Alexandre Koyré, 1892-1964) 러시아 유대계 프랑스 철학자. 과학사가. 1912년[스물]에 벩송 강의를 들었고, 동시에 브랑슈비끄 강의도 들었다. 에피메니데스와 거짓말쟁이: 일체와 범주(Épiménide le Menteur. Ensemble et Catégorie. 1947)
1896 아르또(Antonin Artaud, 1896-1948) 연극 이론가. 배우, 작가, 수필가, 소묘가, 시인. L’Arve et l’Aume, accompagné de 24 lettres inédites à Marc Barbezat, 1989) 그 중에서 「[입말로]나무와 인간, 루이스 케롤에 반대하는 반대-문법적 시도(L’Arve et l’Aume, tentative anti-grammaticale contre Lewis Carroll)」, L’Arbalète, n° 12, 1947.
[Jabberwocky], Antonin Artaud
Il était Roparant, et les Vliqueux tarands
Allaient en gibroyant et en brimbulkdriquant
Jusque-là où la rourghe est à rouarghe à ramgmbde et rangmbde à rouarghambde:
Tous les falomitards étaient les chats-huants
Et les Ghoré Uk'hatis dans le Grabugeument
Antonin Artaud, tentative antigrammaticale contre Lewis Carroll. L'Arbalète, issue no. 12, 1947
Quoted by Henri Parisot in the foreword of Carrol, Lewis. De l'autre coté du miroir et ce qu'Alice y trouva. Roman traduit de l'anglais par Henri Parisot. Collection Bouquins. Éditions Robert Laffont, Paris, 1989.
La Tour de feu, 1961 [LA TOUR DE FEU N° 69. AVRIL 1961 DE LA CONTRADICTION AU SOMMET, COLLECTIF, Published by LA TOUR DE FEU, 1961.
1906 브뤼니위스(Jacques Brunius, nom d'artiste de Jacques Henri Cottance, 1906-1967) 프랑스 배우, 영화감독, 라디오 진행자 작가. 가명이 많다: pseudonymes : Borel, Jacques Borel, Brunius, J.B. Brunius, Jacques B. Brunius, Jacques-Bernard Brunius, John La Montagne, Olaf Apollonius, Jacques Berne / 번역으로 Lewis Carroll, Le Jabberwocky, 1948(재판 1994).
1908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2009), 마르셀 모스의 “사회학과 인류학”의 입문(Introdution à Sociologie et Anthropologie de Marcel Mauss, 1950
1908 빠리조(Henri Parisot, 1908-1979) 프랑스 번역가 편집인, 초현실주의자들의 친구. 루이스 캐럴 번역가.
1913 까뮈(Albert Camus, 1913-1960) 알제리 태생, 프랑스 작가, 철학자. 소설가, 수필가. 레지스탕스 참가자.
1914 판코프(Gisela Pankow, 1914-1998) 독일 출신 프랑스 신경의학자, 정신분석학자. 신경증에서 역동적 구조작동(Structuration dynamique dans la psychose - Contribution à la psychothérapie analytique de l'expérience psychotique du monde, préface du Dr. J.Favez-Boutonier, Huber, Berne, 1956
1918 알뛰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 프랑스 철학자. 공산당원, 그는 맑스 사상을 구조주의에 연합된 전망으로 새롭게 하고자 했다.
1921 파리스(Jean Paris, 1921-2003) 프랑스 수필가 대학교수, 셰익스피어, 조이스, 라블레 전공자.
1923 크라헤(Franz Crahay, 1923-1988) 벨기에 철학자, 대학교수, 논리학, 인식론, 철학사 전문. (논리-수학의 형식주의와 넌센스의 문제(Le Formalisme logico-mathématique et le problème du non-sens, 1957)
1931 울프슨/볼프슨(Louis Wolfson, 1931-) 뉴욕 출생, 프랑스어로 글 쓰는 미국 작가. 스키조와 말쌈들(Le Schizo et les langues. Connaissance de l'inconscient, 1970)(1970년 프랑스 출판, 갈리마르 출판에서, 입문(Introduction)을 들뢰즈가 썼다).
1935 오지에(Jean Pierre Osier, 1935-), ENS, 철학교수자격, 인도와 이란 연구, 스피노자 연구도 있다. 종교연구가(이슬람+유대)인 것 같다. fr.Wiki에 없으며, 프랑스에서 소개보다 영어로 소개가 더 많은 이유가 뭘까? 유대연구가 중심인 것 같은데 ... L'Essence du christianisme[de Feuerbach], trad. Jean-Pierre Osier, éd. Maspér, 1968. 이 책의 서문을 썼다. / « Ou Spinoza ou Feuerbach » comme dit encore J.-P Osier à propos de la théorie de la religion dans sa présentation de L’essence du christianisme (rééd. Tel-Gallimard, 1992, p.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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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계열: 역설(sur le paradoxe)의 셋째 절 “무의미, 의미, 이차적 언어의 조직화 Non-sens, sens et organisation du langage dite secondaire)에서 이차적 언어의 조직화라는 것을 언급했다. 들뢰즈가 보기에 원본을 통한 독사를 일차적으로 보았고, 심층의 생성들의 다양한 가치치기에서 오는 파라독스들을 이차적 언어 조직화로 보았던 것 같다. 벩송의 꼴드프 강의록에서는 두 가지가 분리되어(분해되어) 작동하는 것으로 보았다. 기억의 세 형식 중에서 MM의 두 형식에 따르면 습관에 의한 일반화가 있고 내재의식을 통한 공감(감응, 조화)의 일반화가 있다. 이 강의록을 읽지 못했던 들뢰즈는 두 가지 계열을 분류하면서 하나는 상층에서 표면으로 독사를, 다른 하나는 심층에서 표면으로 파라독사들로 분류하였다. 전자는 구조주의자들의 방법 또는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해석의 방법인데 비해, 후자는 생성과 개념창조의 방법이며 달리 사는 방법(되기 방법, 덕후되기)일 것이다. 신기하다 말이야 이런 사유를 21세기에 박홍규와 들뢰즈가 거의 비슷하게 하는 것이 신기하다. (56MK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