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도 두텁게
거실에서 내려다보는 산비탈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일본으로 향하는 태풍의 영향인지 창문 너머 부딪히는 바람은 창문이 덜컹거릴 정도다. 파란 하늘에 높게 펼쳐져 있는구름이 계절의 변화가 다가왔음을 알린다.
한낮의 더위는 집을 벗어나 발걸음을 찻집으로 옮기게 만든다. 아내와 커피를 마시며 손주의 재롱 영상을 보고 또 보면서 웃음으로 시원함을 즐긴다. 빈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이전과 달리 담화의 장소가 바뀌었다. 세월의 흐름에 묻어간다.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잎사귀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바람의 세기를 보여준다. 세차게 울던 매미 소리도 사라졌다. 거실에 와 닿는 기운이 달라졌다. 습도가 높아 냉방기기 가동이 잠 깬 시간부터 저녁 잠 잘 때까지 연속이었는데 잠시 쉬어 갈 정도다.
금요일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직장에서 지방으로 협의회를 간 자식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체 일정을 마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단다. 지명을 따로 말하지 않아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다. 떠오르는 곳은 남자 친구를 만나러 가는 모양이리라. 사흘이 멀다 하고 만나 서로에게 믿음을 주면서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만나지 않는 날은 전화와 카톡이 반복된다.
딸에게서 문자가 왔다. 몸이 아파 집에 갈 수 없단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괜히 걱정이 앞서 온갖 생각들이 짧은 순간에 스쳐간다. 기다리지 못하고 연락을 해 본다. 잠깐의 시간이 이렇게도 늦게 흐르는가. 시간을 두고 보내온 자식의 답장을 보고는 당황스럽다. 아니 얺짢아진다. 아픈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남친이란다. 언제부터 부모는 뒷전이 되고 사귀는 남자가 우선인지. 서로에게 다가가는 감정이 장작에 기름을 끼얹듯 걷잡을 수 없게 되었나보다. 언젠가 한번은 밖에서 자고 다음날 집에 들어오더니 그날 이후는 태연하다. 이제는 한 주 건너 반복이다. 나이 들어 이성의 친구를 만나 사랑의 시간을 엮어 가는 자식을 너무 간섭하는 것인가.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기는지 모르겠다. 적은 나이도 아닌데 자기 일은 자신이 처리 한단다. 딸의 귀가를 기다린다. 그의 말처럼 언제부터 ‘알아서 해 왔던가.’ 말로는 무엇을 못하랴.
만남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보인다. 하지만 아직 겉으로 드러난 확실한 언약은 없다. 두 사람이 장래를 약속하고 집안끼리 인사가 이루어진 뒤라면 한번 쯤 생각해 볼 일이다. 어쩌면 미래 계획까지 세워져 있을지 모른다. 딸에게 맡기고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일이 순서대로 나아가기를 기원해야 하는가. 나의 조급함이 큰 부담으로 남지는 않을까. 다 큰 자식을 둔 부모의 괜한 극성으로 비쳐지는 것인가. 부끄러워하는 얼굴빛도 찾을 수 없다. 짝을 찾아가는 자식을 고마워해야 하나.
세대와 세대 간 인식의 차이는 크다. 자식이지만 가끔 어른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자신의 행동을 이해 못하는 기성 세대로 인식되어도 도리가 없다. 자기 표현이 강한 MZ세대라지만 사람의 기본 태도를 지켜야 한다. 윗 세대가 세상을 떠나고 어쩔 수 없이 집안의 웃어른이 되었다. 대소사를 결정짓는 과정도 예외는 아니다. 일가친척이 얼굴보며 대대로 이어져 왔던 시사가 얼렁뚱땅 중단되었다. 겨우 벌초만 할 뿐이다. 제사는 기제사만 형제들이 모여 지내고 명절에는 상을 차리지 않는다.
시대의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다. 민주적 절차에 따라 각자의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나의 입장은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정한 규칙은 지켜야 한다. 내키지 않아도 달리 방법이 없다. 전통은 하나 둘 사라지고 편리한 것만 좇아 가는 모습이 내내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