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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73권
55. 아비발치품(阿毘跋致品)을 풀이함, 아비발치의 모양
“세존이시여, 어떠한 행(行)과 어떠한 종류[類]와 어떠한 모습[相貌]으로써 그가 바로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인 줄 알 수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범부의 지위[凡夫地]와 성문의 지위[聲聞地]와 벽지불의 지위[辟支佛地]와 부처님의 지위[佛地]를 잘 아는 것이니라.
이 모든 지위의 여한 모양[如相] 가운데서 둘이 없고 구별도 없으며 또한 생각하지도 않고 또한 분별하지도 않으며,
이 여(如) 가운데에 들어가 이 일을 들으면 곧장 뛰어나면서 의심함이 없나니,
왜냐하면 이 여 가운데에는 하나의 모양도 없고 둘의 모양도 없기 때문이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또한 무익한 말은 하지도 않고 다만 이익과 상응한 말만을 하며 다른 사람의 장단점도 보지 않느니라.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을 지니면 그가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고 아느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다시 어떠한 행과 종류와 모습을 지니면 그가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인 줄 아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온갖 법에는 행도 없고 종류도 없고 모습도 없다고 관찰하면, 그가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에 행도 없고 종류도 없고 모습도 없다면, 보살은 어떠한 법을 굴리면서도[轉] 굴리지 않는다[不轉]고 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물질 가운데서 굴리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가운데서 굴리면 이것을 바로 보살은 굴리지 않는다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단바라밀 가운데서 굴리고 나아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굴리며,
내공 가운데서 굴리고 나아가 무법유법공 가운데서 굴리며,
4념처 가운데서 굴리고 나아가 18불공법 가운데서 굴리며,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 가운데서 굴리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가운데서 굴리면,
이것을 일컬어 보살마하살은 굴리지 않는다고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물질은 성품이 없거늘 이 보살은 어디에 머무르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성품이 없거늘 이 보살은 어디에 머무르겠느냐?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외도와 사문과 바라문의 얼굴이나 언어를 관찰하지도 않으며,
‘이 모든 외도와 사문과 바라문은 진실로 알고 진실로 보아 혹은 바른 소견을 말하기도 하는 이런 일은 일을 수 없다.’라고도 생각하지 않느니라.
다시 보살은 의심을 내지도 않고 계취(戒取)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삿된 소견[邪見]에 떨어지지도 않고 또한 세속의 길한 일[吉事]을 구하면서 청정한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으며,
꽃과 향ㆍ영락ㆍ번기ㆍ일산 및 음악으로 다른 하늘[天]에게 예배하거나 공양하지도 않느니라.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를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은 언제나 하천(下賤)한 집에 태어나지도 않고 나아가 8난(難)의 집에 태어나지도 않으며 항상 여인의 몸을 받지도 않느니라.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를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항상 열 가지 착한 길[十善道]을 행하면서 자기 자신이 살생(殺生)하지도 않고 남에게도 살생하지 못하게 하며 살생하지 않는 법을 찬탄하고 살생하지 않는 이를 기뻐하면서 찬탄하며,
나아가 자기 자신이 삿된 소견[邪見]을 지니지 않고 남에게도 삿된 소견을 지니지 않게 하며 삿된 소견의 법을 찬탄하지 않고 삿된 소견을 지닌 이를 기뻐하거나 찬탄하지도 않느니라.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를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꿈속에서까지도 열 가지 착하지 않은 길은 행하지 않나니,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를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온갖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단바라밀을 행하며, 나아가 온갖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느니라.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를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온갖 모든 법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해설하고 바르게 기억하나니, 이른바 수투라(修妬羅)에서 우바제사(優波提舍)까지이니라.
이 보살은 법 보시[法施]를 할 때에 생각하기를,
‘이 법 보시의 인연 때문에 온갖 중생들의 소원이 만족되며 이 법보시의 공덕을 온갖 중생들과 함께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리라’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를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매우 깊은 법 가운데서 의심하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느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매우 깊은 법 가운데서 무슨 인연 때문에 의심하지도 않고 뉘우치지도 않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은 의심할 여지가 있는 그 어떤 법도 보지 않으며,
물질ㆍ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 의심할 여지가 있는 법과 뉘우칠 여지가 있는 어떤 법도 보지 않느니라.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를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의업(意業)이 부드럽나니,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를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인자함[慈]으로써 신업ㆍ구업ㆍ의업을 성취하나니,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를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음욕(婬欲)ㆍ진에(瞋恚)ㆍ수면(睡眠)ㆍ도회(悼悔)ㆍ의(疑)의 5개(蓋)와 함께하지 않나니,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를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온갖 처소에 애착하는 바가 없나니,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를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들고 나고 가고 오는 데나 앉고 눕고 다니고 서는 데서 항상 한 마음[一心]을 염(念)하며,
들고 나고 가고 오는 데서나 앉고 눕고 다니고 서는 데서나 발을 들고 발을 내리는 데서 안온하고 의젓하면서 항상 한 마음을 염하며 땅을 보면서 다니나니,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를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입고 있는 의복과 모든 침구를 사람들이 더럽다고 여기지도 않고 정결하게 하기를 좋아하며 질병도 적나니,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를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언제나 사람 몸속에는 8만 마리의 벌레가 있으면서 그의 몸을 갉아먹고 있거니와 이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의 몸에는 이런 벌레가 없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의 공덕은 세간을 초월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이 보살에게는 벌레가 없고 이 보살의 공덕은 더욱 불어나며 그 공덕에 따라 몸이 청정하게 되고 마음이 청정하게 되느니라.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를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몸이 청정하게 되고 마음도 청정하게 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그의 얻는 바에 따라 선근(善根)이 더욱 불어나면서 마음이 굽은 것과 마음이 삿된 것을 없애버리나니,
수보리야, 이것을 바로 보살마하살의 몸이 청정하고 마음이 청정하다고 하느니라.
이 몸과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넘어서면서 보살의 지위 안에 들어가느니라.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를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양을 귀히 여기지 않으며, 비록 12두타(頭陀)를 행한다 하더라도 아란야(阿蘭若)의 법을 귀히 여기지 않고 나아가 단지 세 벌의 옷만을 가지는 법[但三衣法]도 귀히 여기지 않느니라.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를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항상 간탐(慳貪)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파계(破戒)하는 마음과 성내면서 동요하는[瞋動] 마음과 게으른[懈怠] 마음과 산란(散亂)한 마음을 내지 않으며 어리석은 마음을 내지 않고 질투하는 마음을 내지 않느니라.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를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마음이 머물러 동요하지 않고 지혜에 깊이 들어가 한 마음[一心]으로 듣고 받으며, 따라 들었던 법과 세간의 일이 모두 반야바라밀에 합치되느니라.
이런 보살마하살은 만들어 내는 일[産業]이 법성(法性)에 들지 않는 것을 보지도 않고 이런 일의 모두가 다 반야바라밀과 합치하는 것을 보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수보리야, 이것을 바로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의 모양이라 하느니라.”
【論】
【문】 지금까지 곳곳에서 아비발치의 모양을 해설했거늘 이제 무엇 때문에 다시 묻는가?
【답】 위의 곳곳에서는 간략하게 해설했고 지금은 자세히 해설하려 한 것이다.
이 가운데서 대부분은 아비발치의 모양이기 때문에 아비발치상품(阿鞞跋致相品)이라 한다.
또 위에서는 반야바라밀의 모양을 해설했고 다음에는 악마의 인연이 반야바라밀을 파괴하는 일을 해설했으며,
여기서는 반야바라밀을 믿고 받는 이가 바로 아비발치임을 해설한다.
그 모양을 해설하려 하기 때문에 수보리가 묻는 것이다.
또 보살이 처음 발심해서부터 행해 온 인연과 얻은 바의 과보는 바로 아비발치이니, 수기(授記)를 받아 반드시 부처님이 될 것이다.
마치 사람이 직책을 받은 뒤에 임명장을 받으면 마음에 다시는 의심이 없는 것과 같다.
또 성문(聲聞)이 행하는 뭇 행은 모두가 사문의 네 가지 지위[四沙門果]이듯이,
아비발치는 바로 결정된 안온한 자리에서 범부를 초월하고 2승(乘)의 지위에 들지 않으며,
비록 아직은 부처님 도에 들지 못했다 하더라도 세간을 위한 복전(福田)이 된다.
이런 일은 미묘하여 얻기 어렵기 때문에 수보리는 행과 모습을 묻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본래 수보리에게 명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하게 하기 때문에,
수보리는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아비발치에는 어떠한 행과 종류와 모습이 있는지요?”라고 한다.
【문】 이 세 가지의 일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세 가지 일은 모두가 하나의 이치로되 이것으로써 아비발치인가, 아비발치가 아닌가를 알게 된다.”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행(行)은 바로 아비발치 보살의 신업ㆍ구업ㆍ의업이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을 말하니, 이 행으로써 아비발치의 매우 깊은 지혜를 표시한다.
종류[類]란 모든 보살을 그는 아비발치이다, 아비발치가 아니다라고 분별하여 아는 것이다.
모습[相貌]이란 행과 종류를 제외한 그 밖의 갖가지 인연으로 아비발치의 모양을 알게 되는 것이다.”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그 이치를 말씀하시면서,
“만일 보살이 다섯 가지 바라밀을 구족하고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에 깊이 들어가면 그 때문에 반야바라밀에 집착하지 않고 다만 여(如), 즉 모든 법의 실상(實相)만을 관찰하나니,
보살은 그때에 범부와 2승의 지위를 하천(下賤)하다 여기지 않고 부처님의 지위[佛地]를 고귀(高貴)하다 여기지도 않는다.
그것은 모든 법의 여에 들어가기 때문이다.”라고 하신다.
모든 법의 여(如) 가운데에는 두 가지 법을 분별함이 없고 다만 여(如)로써 여에 들어가면서 다시는 그 밖의 일이 없으며 또한 분별하면서 모양을 취하지도 않나니, 왜냐하면 여는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들어간 이는 곧 모든 부처님의 법장(法藏)에 들어가 마음에 의심을 내지도 않으며 다시 모든 법의 결정된 모양을 구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경에서 말씀하되,
“수보리야, 범부의 지위로부터 부처님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여한 모양[如相] 가운데에는 둘도 없고 구별도 없다.”라고 하신다.
이와 같은 법을 얻음을 아비발치의 행과 종류와 모습이라고 한다.
또 간략하게 이 뜻을 설명하면 보살은 모든 법의 여(如), 즉 필경공(畢竟空)으로 인하여 온갖 세간의 일을 버리되 필경공에 머무르지도 않나니,
왜냐하면 모든 법의 필경 청정한 실상을 얻기 때문이다.
보살은 설령 이런 의지가 없는 법[無依止法]을 듣고도 마음에 의심이나 후회도 없이 의지를 염하지도 않나니,
이로부터 위의 일은 바로 아비발치의 당체[正體]요 이로부터 이하는 모조리 필경공을 행한 결과이다.
필경 공을 얻기 때문에 마음이 순숙(淳熟)하고 적멸(寂滅)한 모양이 되어 무익한 말은 하지도 않는다.
말한 바는 언제나 법답고 그르지 않으며, 말한 바는 모두가 진실하여 거짓말이 아니며,
말한 바는 부드럽고 거칠지 않으며, 모두가 자비로운 마음으로 말을 하고 성내는 마음으로 하지 않으며,
말이 때에 알맞아 항상 기회를 얻고 사람 마음을 관찰하면서 그 지방의 풍속을 따른다.
지금 이 가운데서는 간략하게 이익되는 말을 하면서 부처님 도와 2승과 인간ㆍ천상의 길을 가르친다.
또는 지금 세상에서 죄짓지 않는 즐거움을 얻음은,
항상 입의 네 가지 악[四惡]을 여의기 때문이요
중생들에 대하여 자비로운 마음이 크기 때문이며,
또 스스로가 모든 번뇌를 꺾어 희박하게 하기 때문이니,
이런 갖가지의 인연으로써 모든 이익되는 말씀을 하신다.
【문】 성문은 곧장 열반으로 나아가므로 다른 사람을 관찰하지 않을 수 있거니와,
보살은 중생 보기를 마치 아들처럼 여기면서 항상 교화하려 하거늘 어찌하여 그 장단점[長短]을 보지 않는가?
【답】 만일 중생으로서 조복할 수도 없고 교화할 수도 없는 이러한 이들이면 관찰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만일 좋은 마음으로써 가르쳐 주면 그는 자기를 시새운다고 여기기 때문이니,
마치 칼로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아서 아무 이익된 바도 없으면서 다시 그의 죄만 더해 준다.
이 때문에 장점ㆍ단점을 관찰하지 않는다.
또 보살은 마땅히 생각하기를,
‘모든 부처님께서는 일체지(一切智)를 지니고 번뇌의 습기가 다한 이인데도 오히려 중생을 모조리 제도할 수 없거늘 하물며 나는 아직 보살의 신통을 얻지도 못하고 아직 장애 없는 지혜[無碍智]도 얻지 못했거늘 어떻게 중생을 두루 관찰할 수 있겠느냐’고 해야 한다.
아비발치에는 신통을 얻은 이도 있고 얻지 못한 이도 있나니,
얻지 못한 이는 아비발치를 얻은 뒤에 따로 신통의 도를 닦아서 얻게 된다.
만일 먼저 신통을 얻은 이면 완전히 다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두루하게 관찰할 수도 없다.
【문】 수보리는 처음에 행과 종류와 모습을 물었는데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곧 행과 종류와 모습은 없다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이제 이 가운데서 바야흐로 설하시는가?
【답】 처음에 물을 때는 중생들이 아직 아비발치의 모양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공한 모양[空相]을 말씀하기도 하고 혹은 존재하는 모양[有相]을 말씀하기도 하셨거니와,
이제는 중생들이 아비발치의 모양에 집착하면서 범부로부터 아비발치의 지위에 들어가려 하므로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온갖 행도 없고 종류도 없으며 모습도 없다.”라고 말씀하신다.
수보리는 다시 묻기를,
“만일 모든 법이 모조리 공하다면 무엇 때문에 어느 법에 대해서 굴리는 것을 법을 굴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지요?
마땅히 범부의 지위에서 굴리고 부처님의 지위에서는 굴리지 않아야 합니다.”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만일 보살이 물질 등의 모든 법은 공하여 아무것도 없다고 관한다면 모든 집착하는 마음을 굴리기 때문에 부처님 도에서는 굴리지 않는다.”라고 하신다.
물질 등의 법은 화합한 인연으로부터 생기며 보살은 이 유위(有爲)의 허물을 알기 때문에 이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모든 법은 공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마음을 굴리고 집착하는 마음을 굴리기 때문에 굴리지 않는다고 한다.
또 아비발치 보살은 바른 지위[正位]에 들기 때문에 마음이 결정되어 의심하지 않는다.
온갖 외도(外道) 가운데서도 진실한 지혜[實智]가 있으니, 만일 진실한 지혜가 있다면 외도라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것을 아비발치의 모양이라 한다.
【문】 여기서는 ‘의심을 내지 않는다’고 하고, 뒤에서는 ‘깊은 법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두 가지로 의심하지 않는 데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여기의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네 가지 진리[四諦] 가운데서 마치 수다원이 끊는 바와 같으며,
뒤의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아시는 깊은 법 가운데서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보살은 복덕과 지혜의 힘 때문에 비록 수다원이 되지 않고 아직 부처님이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런 두 가지 의심이 없다.
‘계금취[戒取]’는 외도의 계율이다.
외도의 계율을 행하면 열반을 얻지 못하며 그 밖의 네 가지 소견[四見]도 모두 삿된 소견이라 한다.
업(業)ㆍ인연(因緣)ㆍ과보(果報)를 깊이 믿기 때문에 길한 일[吉事]을 구하지 않고 꽃과 향 등으로써 하늘에게 공양하지도 않으며,
도를 구하면서 교만의 근본을 깨뜨리기 때문에 언제나 하천한 집에 태어나지 않고,
다른 이의 공덕을 막지 않으면서 항상 권하고 돕기 때문에 8난(難)의 처소에도 나지 않으며,
음욕을 꺾어 얇게 하면서 아첨하는 마음을 여의기 때문에 여인의 몸도 받지 않는다.
또 그 밖의 사람들이 비록 열 가지 착한 길[十善道]을 행한다 하더라도 혹 하나거나 둘이거나 셋이어서 네 가지를 두루 갖출 수 없거니와,
이 보살은 대비(大悲)의 마음으로 착한 법을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완전히 갖추어 네 가지를 행하며, 항상 열 가지 착한 길을 닦고 쌓기 때문에 꿈속에서까지도 열 가지 착하지 않은 길[十不善道]을 행하지 않는다.
그 밖의 사람들이 닦는 바의 복덕은 다만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작은[小] 보살은 비록 중생들을 위한다 하더라도 역시 자기 자신을 위하거니와,
아비발치 보살이 짓는 모든 복덕은 중생을 위한 것이요 그 몸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만일 복덕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면 모조리 다 중생에게 주며,
다시 자기 자신만이 닦아 익히면서 줄 수 없는 것이면 그 때문에 보살은 12부경(部經)으로써 중생들을 교화하나니, 역시 중생들을 위할 뿐이요 자기 자신을 위하지는 않는다.
또 보살은 신근(信根) 등의 5근(根)이 예리하기 때문에 아직 부처님이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모든 법에서 부처님을 믿는 것이며,
부처님께서 이 가운데서 다시 공한 인연을 말씀하시면 보살은 물질 등의 법을 보지 않기 때문에 의심을 낼 곳이 없다.
또 이 보살은 항상 자비로운 마음을 내기 때문에 의업(意業)이 부드러우며, 의업이 부드럽기 때문에 몸과 입의 인자한 업[慈業]이 성취된다.
【문】 자비로운 마음은 외도에게도 있거늘 어떻게 그것이 바로 아비발치의 모양이라 하시는가?
【답】 외도에게도 비록 있다 하더라도 깊지 않으므로 두루 중생들을 생각할 수도 없고 항상 있는 것도 아니니, 모든 법의 실상(實相)에 화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살은 그렇지 않다.
또 이 보살은 5욕(欲)을 꾸짖고 5개(蓋)를 제거시키며 5지(支)의 초선(初禪)에 들고 5개와는 함께하지 않나니,
5개가 마음을 덮으면 지혜를 소모시키고 부처님 도를 파괴시키면서 악마의 길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이 보살은 온갖 유위(有爲)의 만들어진 법은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아서 마치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거니와,
무위(無爲)의 법은 공하여서 아무것도 없고 적멸상(寂滅相)임을 아나니, 이 때문에 온갖 법에 대하여 애착하는 바가 없다.
중생에서 부처님까지도 집착하지 않고 법에서 열반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애착하지 않는다.
성내는 것[瞋]은 거친 죄[麤罪]이어서 작은 보살들도 이미 끊었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으며,
애착은 깊고 미미하여서 끊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 설명하는 것이다.
또 이 보살은 깊이 선정에 들기 때문에 온갖 중생들을 수호하고 온갖 중생들을 수호하기 때문에 항상 한 마음[一心]으로 염하면서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다.
계율을 깨뜨리지 않았기 때문에 들고 나고 오고 가는 등이 안온하고 의젓하다.
‘한 마음이 되어 발을 들고 발을 내리되 땅을 보면서 간다’고 함은,
뭇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요, 산란한 마음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또 이 보살은 오랜 동안 한량없고 그지없는 착한 법을 닦고 쌓았는지라 몸속에는 8만 마리의 벌레가 없으며 또한 질병도 적기 때문에 의복과 침구 등이 항상 정결해서 더러움이 없으며,
모든 법의 실상(實相) 등과 선근(善根)의 힘을 얻었기 때문에 몸속에는 8만 마리의 벌레가 없고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몸과 입 등도 청정하다.
거짓되고 삿되고 굽은 일 등의 하천한 번뇌를 여의었기 때문에 마음이 청정하며,
두 가지 일이 청정하기 때문에 비록 세간 일을 한다 하더라도 모든 핍박과 고뇌를 여의는 것이며,
마음이 싫증내거나 침몰하지 않기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뛰어넘는다.
이 보살은 부처님 도를 귀히 여기기 때문에 이양을 귀히 여기지 않고,
비록 두타(頭陀)를 행한다 하더라도 그 법을 귀히 여기지 않으니,
이 법은 구경도(究竟道)의 인연으로 볼 때는 적은 부분이요 구경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로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의 행과 종류와 모습이라고 한다.
【문】 이 보살은 아직 부처님 도를 얻지 못하고 아직 모든 번뇌를 끊지 못했거늘, 어떻게 항상 간탐 등의 모든 나쁜 마음을 내지 않는다고 하시는가?
【답】 아비발치 보살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을 때에 모든 번뇌는 끊었으나 아직 그 습기[習]를 끊지 못했을 뿐이다.
만일 끊지 않았다면 어떻게 항상 모든 간탐 등 도를 장애하는 마음[障道心]을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치 경에서
“수다원 내지는 아라한은 곧 그것이 보살에게는 무생법인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보살은 6바라밀을 행하고 깊이 모든 공덕을 닦고 쌓았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꺾어지고 희박해져서 마음속에서 나지 않기 때문에 항상 나지 않는다.”라고 한다.
또 이 보살은 한량없는 세상 동안에 선바라밀(禪波羅蜜)을 행한 까닭에 마음이 머물러서 동요하지 않으며,
반야를 쌓고 익혔기 때문에 깊이 지혜에 들어간다.
이 보살은 법미(法味)의 미묘함을 알기 때문에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들으면 일심으로 듣고 받으며,
법을 좋아하는 마음[情]이 깊기 때문에 들은 법이 3승(乘)의 법이거나 외도의 법이거나 혹은 세간의 법이거나,
자신의 마음이 묘한 까닭에 모두가 반야와 화합하면서 법모양을 깨뜨리지 않는다.
비유하건대 마치 장부(壯夫)가 병이 없으면 먹은 음식물마다 소화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고,
또 부처님께서는 가장 좋은 맛[味相]을 얻으신지라 비록 쓰고 맵고 맛없는 음식을 드신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입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두가 으뜸가는 맛으로 변하는 것과 같다.
또 석밀(石蜜)을 끓일 때에 갖가지 물건을 그 속에 섞으면 모두가 석밀이 되는 것과 같으니, 묘한 맛이 왕성하기 때문이다.
보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반야바라밀의 힘이 왕성하기 때문에 갖가지 법은 모두 반야와 화합하여 한 맛이 되면서 모든 허물을 없어지게 한다
또 세간의 일이란 보살이 일으키는 신업(身業)ㆍ구업(口業)의 모든 업이다.
이는 모두가 가엾이 여겨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이며 이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모두가 반야바라밀에 들어가는 첫 문[初門]이다.
또 세간 모든 일의 인연은 앉고 일어나고 다니고 음식을 먹고 말을 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항상 중생을 안온하게 할 것을 생각하나니,
이 오고 가고 하는 등의 법은 모두가 법 성품[法性]에 들어가는 것으로서 오고 가는 일을 타파한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다.
‘만들어 내는 일[産業]’도 또한 그와 같나니, 이것을 아비발치의 모양이라 한다.
【經】 “다시 수보리야, 악마가 아비발치 보살 앞에서 변화로 팔대지옥을 만들어 놓고 그 낱낱 지옥 안에는 천만억의 보살들이 모두 불에 타고 삶아지는 등의 갖은 고생을 받게 하면서 (악마가) 보살에게 말하기를,
‘이 보살들은 모두가 아비발치이며 부처님께서 수기하신 이들인데 대지옥 안에 떨어져 있다.
그대도 만일 부처님에게서 아비발치의 수기를 받게 되면 장차 이 대지옥 안에 떨어질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그대에게 지옥의 수기를 주리니, 그대는 도로 보살의 마음을 버리는 편이 낫다.
그러면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에 가 날 것이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이 보살이 이런 일을 보기도 하고 이런 일을 듣기도 하면서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놀라지도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아비발치 보살이 지옥과 축생과 아귀 중에 떨어진다는 일은 끝내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하면,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가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악마가 변화로 비구가 되어 가사(袈裟)를 입고 보살에게로 와서 보살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먼저 이와 같이 청정하게 6바라밀을 닦아야 하고, 나아가 이와 같이 청정하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수행해야 한다고 들었을 것이나 그 일을 그대는 빨리 뉘우치고 버리도록 하시오.
그대는 먼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처음 발심해서부터 그 법이 머무르기까지 그 중간에 지은 모든 선근을 따라 기뻐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廻向)할 것이나 이런 일도 그대는 빨리 버리도록 하시오.
만일 그대가 빨리 버린다면 나는 그대에게 참 부처님 법을 말해 주겠소.
그대가 먼저 들었던 바는 모두가 부처님의 법이 아니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어서 모두 그것은 말만 그럴 듯하게 꾸며 모아 놓은 것일 뿐이오.
내가 말한 바가 바로 진실한 부처님의 법이오’라고 하느니라.
만일 이 보살이 이런 말을 듣고는 마음에 놀라거나 의심하거나 후회한다면,
그 보살은 모든 부처님의 수기를 얻지도 못했고 아직 아비발치의 성품 가운데에 확고히 머물러 있지도 못하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만일 이 보살이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놀라지 않으며 의심하지 않고 후회하지도 않으면서 지음이 없고[無作] 생김도 없는[無生] 법에 수순하고 의지하며 다른 이의 말을 받지도 않고 다른 이의 행을 따르지도 않으면,
6바라밀을 행하면서 다른 이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요,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행하면서도 역시 다른 이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다른 이의 말을 믿지도 않고 다른 이의 행을 따르지도 않으며 현재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보고 있으므로 악마가 그를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아비발치 보살마하살도 또한 그러하여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도를 구하는 사람으로서는 그 보살을 파괴할 수도 없고 그의 마음을 조복할 수도 없느니라.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은 틀림없이 아비발치의 지위 안에 머물러 있으므로 다른 이의 말을 따르지도 않고 부처님의 말씀까지도 곧이곧대로 믿거나 취하지도 않거늘 하물며 성문이나 벽지불을 구하는 사람이나 악마ㆍ외도ㆍ범지의 말이겠느냐?
그런 일은 끝내 있을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은 따르고 믿을 만한 어떤 법도 보지 않기 때문이니,
이른바 물질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과 물질의 여(如)로부터 분별의 여까지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도 보지 않거늘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여이겠느냐?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를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악마가 비구의 몸으로 변화하여 보살에게로 와서 보살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행하는 것은 바로 나고 죽고 하는 생사의 법이요, 살바야(薩婆若)의 도가 아니오.
그대는 지금의 몸으로 괴로움[苦]을 취하여 모조리 증득하시오’라고 하고,
이때에 악마는 보살을 위하여 세간의 행을 이용하면서 도(道)와 유사한 법을 설하느니라.
이 도와 유사한 법이란 바로 삼계(三界)의 매임[繫]이니, 이른바 골상(骨相)과 또는 초선(初禪)으로부터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까지가 그것이니라.
그리고 선남자에게 말하기를,
‘이 도(道)를 이용하고 이 행을 이용하면 장차 수다원의 과위를 얻고 나아가 아라한의 과위를 얻을 것이니, 그대는 이 도를 행하면서 이 세상에서의 괴로움을 다하십시오.
그대는 나고 죽고 하는 동안에 갖가지의 고뇌를 쓰고 받고 하는데 지금의 이 4대(大)로 된 몸으로조차도 오히려 쓰거나 받지 않아야겠거늘 하물며 다시 미래의 몸을 받는 것이겠는가?’라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이 보살마하살이 마음에 놀라지도 않고 의심하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이 비구는 나에게 이익되게 함이 적지는 않구나. 나를 위하여 도와 비슷한 법을 말해 주니 말이다.
이 비슷한 도의 법을 행하면 수다원의 과위에도 이르지 못하고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도에도 이르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를 수 있겠는가?’라고 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더욱더 기뻐하면서 생각하기를,
‘이 비구는 나에게 이익되게 함이 적지 않구나. 나를 위하여 도에 장애되는 법[障道法]을 말해 주니 말이다.
나는 이 도에 장애되는 법을 알아서 3승(乘)의 도를 배우는 데에 장애되지 않게 하리라’고 하느니라.
이때 악마는 보살이 기뻐하는 것을 알고는 말하기를,
‘선남자여, 그대는 보고 싶은 것이오?
이 보살마하살은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께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 등의 살림에 필요한 것을 공양하였고,
또한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단바라밀과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을 행하였으며,
또한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을 친근하면서 보살마하살의 도(道)를 물었소. 곧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보살마하살의 승(乘)에 머무르며 어떻게 단바라밀과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과 4념처(念處)로부터 대자대비(大慈大悲)까지를 행합니까≻라고 하면서 말이오.
그런데 이 보살마하살은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그와 같이 머무르고 그와 같이 행하고 그와 같이 닦았고, 이 보살마하살은 그와 같은 가르침에 그와 같이 닦았는데도 오히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고 살바야를 얻지 못했거늘, 하물며 그대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소’라고 하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런 일을 듣고 마음이 달라지지 않고 놀라지도 않으면서 더욱더 기뻐하며 생각하기를,
‘이 비구는 나에게 이익되게 함이 적지 않구나. 나를 위하여 도에 장애되는 법을 말해 주니 말이다.
이 도에 장애되는 법으로는 수다원도 얻지 못하고 나아가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도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느냐’고 하느니라.
이때에 악마는 이 보살의 마음이 침몰하지도 않고 놀라지도 않는 것을 알고는 곧 이곳에서 많은 비구들을 변화로 만들어 놓고 보살에게 말하기를,
‘이들 모두는 뜻을 내어 부처님 도를 구한 보살인데 지금은 모두 아라한의 지위에 머물러 있소. 이들도 오히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했거늘 그대가 어떻게 얻을 수 있겠소’라고 하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곧 생각하기를,
‘이것은 바로 악마가 유사한 도법행(道法行)을 말하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바꾸지 말아야 하고, 또한 성문이나 벽지불의 도 안에 떨어지지도 말아야 한다’고 하느니라.
그리고는 다시 생각하기를, ‘단바라밀ㆍ시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선바라밀ㆍ반야바라밀에서 일체종지까지를 행하는데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한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조차 없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가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다시 생각하기를,
‘만일 보살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반야바라밀의 마음 내지는 일체종지를 멀리 여의지 않으면 이 보살은 끝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며,
만일 보살이 악마의 일인 줄 깨달아 알면 역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잃지 않을 것이다’고 하면,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것이 바로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의 모양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느 법에서 움직이면[轉] 움직이지 않는다[不轉]고 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물질의 모양에서 움직이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모양에서 움직이며,
12입(入)의 모양과, 18계(界)의 모양과,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모양과, 삿된 소견의 모양과,
4념처의 모양 내지는 성문이나 벽지불의 모양과 나아가 부처님의 모양에서 움직이니,
이 때문에 물러나지 않는[不退轉] 보살마하살의 모양이라 하느니라.
왜냐하면 이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은 이 자상공(自相空)의 법으로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고 무생법인을 얻기에 이르면서도 조그마한 법도 얻을 수 없으며,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짓지도 않고,
짓지 않기 때문에 나지도 않으므로 이것을 무생법인이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로서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을 지닌 이면 그가 바로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論】 해석한다.
악마는 이 보살이 바로 아비발치인 줄 분명히 알면 다시는 무너뜨리려고 하지 않지만, 만일 아직도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갖가지 인연으로 시험하면서 파괴하려 한다.
혹은 팔대지옥을 만들어 놓고 수없는 보살들을 변화로 만든 뒤에 그 안에서 불에 타고 삶아지게 하면서 그 보살에게 말하기를,
“이들은 모두 아비발치이며 모든 부처님의 수기를 받은 이들이다. 그대도 만일 수기를 받았다면 지옥의 수기를 받은 것이다.”라고 한다.
【문】 악마가 무슨 인연 때문에 선(善)을 행한 이에게 지옥의 수기를 받았다고 하는가?
【답】 악마는 이 보살이 온갖 중생들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지옥의 수기를 받았다고 하면서
‘만일 복덕을 행하여 천상에 가 날 이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중생에 관여하는 일은 없다’고 한다.
만일 보살이 이런 말을 듣고 마음이 동요하여 의심하고 후회하거나 또는 악마의 말을 믿고 받아들이면 그는 아직 아비발치의 수기를 받지 못한 이인 줄 알 것이다.
어떤 보살은 이런 일을 듣고도 의심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고 놀라지도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아비발치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얻었기 때문에 온갖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나아가 조그마한 죄도 내지 않거늘 하물며 3악도(惡道)의 죄이겠는가?
마치 불 가운데에 물이 있고 물 가운데서 불이 생긴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한다.
또 어떤 악마가 비구 몸이 되어 가사를 입고 와서 보살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먼저 하찮은 스승[小師]으로부터 6바라밀의 법을 듣고 닦았으나,
모두가 그것은 허망한 것으로 쌓은 바요 따라 기뻐하는 마음[隨喜心]의 공덕도 역시 거짓이오.
그대가 먼저 들었던 것은 모두 거짓되고 말로 꾸민 것으로 진실이 아니며,
그것은 부처님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가 아니오.
지금 내가 그대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참된 부처님의 법이니,
그대는 빨리 그것들을 버리시오”라고 한다.
만일 보살이 이런 말을 듣고 마음이 동요되면서 성을 내거나 의심을 내면 모든 부처님에게서 아직 수기를 받지 못한 이인 줄 알 것이니,
비유하건대 마치 가짜 금을 불에 태워 쳐 보면 검게도 되고 붉게도 되고 희게도 된 뒤에야 비로소 진짜가 아닌 줄 아는 것과 같다.
만일 보살이 이 말을 듣고도 성을 내지도 않고 의심을 내지도 않으면서,
나는 것도 없고[無生] 없어지는 것도 없고[無滅] 일어나는 것도 없고[無起] 짓는 것도 없는[無作] 법에 따라 6바라밀의 모양을 행하는 가운데서 스스로 알아 다른 이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가 바로 참된 아비발치인 줄 알아야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아라한이 번뇌가 다했기 때문에 어떠한 악마의 일이 와도 파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아비발치 보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그를 항복시킬 수 있는 이가 없나니, 그것은 스스로 눈앞에서 모든 법의 실상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악마가 부처님의 몸이 되어 와서 말한 것이라도 법 모양[法相]과 다르면 역시 믿거나 받지 않는다.
비유하건대 마치 개가 사자의 가죽을 덮어쓰면 모든 짐승들이 보고 두려워하기는 하나 소리를 들으면 그것이 개인 줄 아는 것과 같거늘 하물며 그 밖의 몸 등으로 변화하는 것이랴.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그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이 보살은 물질 등의 법이 공한 줄 보기 때문이거늘 그 누가 다른 이의 말을 따르겠느냐?”라고 하신다.
또 악마가 비구의 몸이 되어 와서는 보살에게 말하기를,
“이 6바라밀은 모두가 나고 죽고 하는 길[生死道]이며,
보시 등 복덕의 인연 때문에 욕계(欲界) 안에서 복락(福樂)을 받고 선바라밀(禪波羅蜜)의 인연 때문에 색계(色界) 안에서 즐거움을 받는 것이오.
이 반야바라밀은 일정한 모양이 없기 때문에 거짓된 법이라 하며,
5도(道) 가운데에서 돌아다니므로 스스로 나고 죽는 길에서 벗어날 수 없소.
사람들은 그대를 속이면서 이것이 일체종지(一切種智)의 도라 말했지만 나는 이제 진실한 말을 한 것이니,
그대가 열반을 취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 괴로움을 다하게 되는 것이오”라고 한다.
이 보살이 이를 듣고도 잠자코 있으면 악마는 곧 그를 위하여 도에 비슷한 법[似道法]을 말하면서,
“만일 36종의 부정(不淨)한 것을 관(觀)하거나 뼈만 남은 사람[骨人]이나 들숨 날숨[出入息]을 관하면 이 도로 인하여 4선(禪)과 4무색정(無色定)을 얻으며, 그대는 이 선정으로 인하여 수다원 내지는 아라한이 될 것이오.
그대의 지금 이 몸은 바로 죄의 인연으로 생긴 것이니, 부처님께서도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동안도 다시 몸을 받는 것을 찬탄하지 않겠다고 하셨거늘 하물며 오랫동안 나고 죽는 가운데에 머무는 것이겠소”라고 한다.
아비발치 보살은 이런 일을 듣고 기뻐하면서 생각하기를,
‘이 비구는 나를 크게 이롭게 하는구나. 나를 위하여 도에 비슷한 법을 말해 주니 말이다.
나는 이 도에 비슷한 법을 얻고서 곧 진실한 도를 얻은 것이니, 마치 길가는 사람이 삿된 길을 알면 바른 길을 찾을 줄 아는 것처럼 도를 장애하는 것도 역시 그렇다’고 하느니라.
아비발치는 바로 대인(大人)이요 귀중한 이이기 때문에 그 비구와 다투지 않는다.
악마는 보살이 잠자코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말을 받아들이는구나.”라고 한다.
그리고는 그 보살에게 말하기를,
“선남자여, 한량없는 보살들이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6바라밀 내지는 보살의 도법(道法)을 묻고 받들어 행하면서 그 앞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모조리 받고서는 보살의 행을 행하였는데도 오히려 위없는 도[無上道]를 얻지 못하고 이제 모두가 아라한이 된 것이오. 그대는 이들을 보고 싶은가?”라고 한다.
보살이 이런 일을 듣고서도 잠자코 있자,
악마는 그곳에서 곧 변화로 수없는 아라한 비구를 만들어 놓고 보살에게 말하기를,
“이 모든 비구들은 모두가 오랫동안 위없는 도를 행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아라한이 된 것이오. 그대는 이제 무엇 때문에 유독 부처님이 되려고 하는가?”라고 한다.
아비발치 보살은 다시 기뻐하면서,
‘이 비구는 나를 위하여 도에 비슷한 장애되는 도법(道法)을 말하고 있다.
이 보살이 실로 6바라밀의 모든 공덕을 행했다면 반드시 2승(乘)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마음에 항상 6바라밀 등의 모든 공덕을 여의지 않았는데 위없는 도를 얻지 못했다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고 하신 것과 같다.”라고 한다.
보살이 만일 이것이 바로 악마의 일인 줄 알면 곧 크게 이익을 얻으면서 잃는 바가 없나니,
이 때문에 보살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니, 이것을 아비발치의 모양이라 한다.
그때 수보리는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어느 법에서 굴리는 것을 굴리지 않는다고 하는지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물질 등 법 가운데서의 유전과 환멸을 위에서는 간략하게 말하였거니와 여기서는 자세히 말하겠노라.
만일 보살이 물질 등의 모양에서 모두 굴리면 그것을 바로 온갖 법의 성품이 공한 것을 행하여 무생법인을 얻고 보살의 지위에 들어간다고 하느니라”라고 하신다.
무생법인이라고 함은, 미세(微細)한 법에 이르기까지도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큰 것이겠는가?
이것을 생멸이 없다[無生]고 하고 생멸이 없는 법을 얻으면 모든 업행(業行)을 짓지도 않고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을 무생법인을 얻었다고 한다.
무생법인을 얻은 보살을 바로 아비발치라 한다.
이와 같이 한량없는 행과 종류와 모습들이 아비발치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