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궁극적인 원인들
그린란드의 노르웨이 사회는 애초부터 붕괴될 운명이었을까?
도저히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생활 방식을 영위한 까닭에 그들의 아사(餓死)는 기간 문제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들보다 수천 년 앞서 그린란드를 들락거렸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에 비해 그들이 모든 면에서 불리했던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누이트에 앞서 네 종족이 캐나다 북극권에서 그린란드로 들어왔지만 모두가 사라지고 말았다.
북극권의 기후 변동으로 사냥에 의존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이던 사냥감들,
예컨대 순록, 바다표범, 고래 등의 이동 경로가 비뀌면서 개체 수가 들쑥날쑥했고,
때로는 대폭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누이트가 지금까지 거의 8세기 동안 그린란드에서 존속하고 있지만
그들의 인구도 사냥감의 수에 따라 크게 변동이 심했다.
고고학자들은 타임캡슐처럼 봉해진 이누이트의 집들을 적잖게 발견했다.
그 집들에는 굶어 죽은 듯한 가족의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
덴마크 식민지이던 시기에는 한 이누이트가 비틀대는 결음으로 덴마크 정착촌을 찾아와 ,
한 이누이트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이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굶어 죽었다는 끔직한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그린란드에 정착했던 네 종족과 이누이트족을 비교해 볼 때
노르웨이인에게는가축이란 든든한 식량원을 가졌다는 이점이 있었다.
실제로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그린란드의 초목에서 얻은 이익은 초목을 먹고사는 순록, 혹은 토끼를 사냥한 것뿐이었다.
노르웨이인도 순록과 토끼를 먹었지만 소, 양, 염소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초목을 젖과 살코기로 바꿀 수 있다는 커다란 이점을 누렸다.
이런 점엣 노루에이인은 ㅜ헐씬 다양한 식량원을 가졌고,
따라서 그린란드의 다른 정착자들보다 살아남을 확률이 훨씬 높았다.
따라서 노르웨이인들이 순록, 이주성을 지닌 바다표범, 점박이 바다표범, 등과 같은 야생 동물 이외에
물고기, 반달바다표범, 고래까지 먹었더라면 살아남았을 수도 있다.
이누이트가 반달바다표범과 고래를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틀림없이 보았을 텐데
노루웨이인들이 그 동물들을 사냥하지 않은 것은 자체의 결정이었다.
요컨대 그들은 넘치는 먹을 거리를 눈앞에 두고도 굶어 죽었다.
왜 그들은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우리가 보기에는 자살의 길을 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가치관과 경험에서 본다면 그런 결정은 결코 자살을 자초하는 길이 아니었다.
그들의 가치관에는 네 가지 생각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첫째는 그린란드의 변덕스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렵다는 생각이었다.
요즘의 생태학자와 농학자에게는 그린란드가 여간 까다로운 곳이 아니다.
기후가 상대적으로 포근했을 때 그린란드에 도착한 것이 노르웨이 인들에게는 행운이었으면서도 불운이었다.
그린란드의 과거를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온난기와 한랭기가 반복된다는 것을 몰랐다.
따라서 그린란드의 기후가 한랭기로 접어들면 가축을 키우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 수 없었다.
20세기에 덴마크인들이 양과 소를 그린란드에서 다시 키우기 시작했지만 소의 방목을 곧 포기하고 말았다.
요즘의 그린란드는 자급자곡하지 않는다. 덴마크의 원조와 유럽연합에서 받는 어업권료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기준에서도 중세 노르웨이인들이 통합 경제의 형태로 450년을 버티었다는 사실은
결코 자살의 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류의 개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었다.
둘째, 노르웨이인들은 백지 상태로 그린란드에 들어가지 않았다.
따라서 그린란드의 문제를 편견 없이 해결하기 힘들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모든 식민지 개척자들이 그랬듯이 그들에게도
노루웨이와 이이슬란드에 살면서 몸에 밴 생활습관과 문화적 가치관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낙농가, 기독교인, 유럽인, 특히 노르웨이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노르웨이 조상들이 무려 3,000년 동안 낙농을 성공적으로 영위해왔다는 확신이 있었다.
게다가 언어와 종교, 문화가 같다는 사실도 그들과 노르웨이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였다.
미국인과 오스트레일리아인도 이런 이유에서 수세기 동안 영국과 관련성을 가지려고 애쓰지 않았던가!
그린란드에 파견된 주교들고 모두 노르웨이 본토인이었다.
그린란드에서 태어나 자란 노르웨이인이 안이었다.
이런 공유된 가치관이 없었더라면 노르웨이인들은 그린란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 협력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소의 방목, 노르드르세타에서의 사냥, 교회 건설은 순전히 경제적 차원에서 계산하면
인력을 최적으로 활용하는 방향은 아니었지만 이런 맥락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요컨대 노르웨이인들은 그린란드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근거를 과거의 동일한 정체성에서 찾았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인류의 역사에도 흔히 눈에 띄며, 현대 세계에서도 우리는 몬태나의 예에서 똑같은 현상을 보앗다.
사람들이 부적절한 조건에서 가장 고집스레 집착하는 가치관은
과거에 역경을 이겨낸 승러의 근원이었던 가치관이다
우리는 제14장과 제16장에서, 즉 고수해애 할 핵심적 가치관이 무엇인지 찾아냄으로써
성공을 거둔 사회들을 연구할 때 이런 딜레마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셋째, 중세의 중세의 다른 유럽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인들도 비(非)유럽권의 이교도들을 경멸했다. 따라서 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몰랐다.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로 시작된 탐험의 시대 이후에야, 유럽인들은 원주민을 경멸하더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원주민을 이용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식 처세법을 터득했다.
그린란드의 노르웨이인들은 이누이트에게 배우기를 거부했고, 그들의 처신에 이누이트는 적으로 변해갔다.
그 후로도 북극권을 탐험한 많은 유럽인이 이누이트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한 까닭에 소멸 되는 비극을 맞았다.
특히 1845년 138명의 영국인으로 구성된 프랭클린 탐험대는
넉넉한 지원을 받아 캐나다 북극권 횡단에 나섰지만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주변 곳곳에 살고 있던 이누이트들의 지원을 거부한 탓이었다.
북극에서 성공을 거둔 유럽 탐험가들과 정착자들은
이누이트의 방식을 최대한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로버트 피어리(Robert Peary)와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이 대표적인 예이다.
끝으로 그린란드의 노르웨이 정착지에서 권력은 지배계급, 즉 족장과 성직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지배계급이 가장 좋은 목장을 비롯해 대부분의 땅을 소유했다.
또한 그들이 배의 주인으로 유럽과의 교역을 도맡았다.
따라서 그들의 권위를 세우는 데 필요한 물건들, 즉 집을 꾸밀 사치품,
성직자들을 위한 의복과 장식품, 교회를 장식할 스테인드글라스와 종 등을 주로 수입했다.
사냥꾼들이 노르드르세타로 사냥을 나갈 때 그들의 배를 내준 것은
그런 수입품의 대가로 치러야 할 수출품(해마의 상아와 북극곰의 가죽)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
족장들은 두 가지 이유에서, 지나치게 풀을 뜯어 초지를 훼손시킬 수 있었던 양의 대규모 방목을 허락했다.
하나는 양모가 그린란드의 주요 수출픔 중 하나였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소규모의 독립목장주가 초지의 훼손으로 지원을 필요로 할 때
추종자로 끌어들여 다른 족장들을 압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노르웨이인들은 혁신을 통해서 물질적 조건을 충분히 개선할 여지가 있었다.
예컨대 사치품의 수입을 줄이고 철을 더 많이 수입할 수 있었고,
마크란드를 자주 찾아가 철과 목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이누이트의 배를 모방하거나 아예 다른 형태의 배를 만들 수 도 있었고,
색다른 사냥술을 개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혁신은 족장들의 권력과 권위에 위협을 갈 수 있었다.
엄격하게 통제된 사회였고 상호 의존적이었던 사회였던 까닭에,
족장은 그런 혁신의 시도조차 억누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이런 사회 구조에서는 지배계급의 근시안적인 이익 추구와
사회 전체의 장기적인 이익 추구 간에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족장들과 성직자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사회 전체를 위협하는 암덩어리인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사회적 가치관은 그들의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그린란드에서 유럽식의 획일적 사회를 건설해낸 까닭에,
유럽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450년을 굿꿋하게 생존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사회를 성급하게 실패한 사회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미국이 북아메리카에서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그들이 그린란드에서 살아간 시간이 훨신 길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족장들은 모든 추종자를 읽고 말았다.
그들에게 허락된 마지막 권리는 최후에 굶어 죽는 특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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