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도와 히말라야에서 만났던 놀라운 몽골불교
나는 1994년 4월 몽골에 들
어왔다 . 내가 몽골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다람살라에서 밀교 미술을 공부하면서부터다. 거기서 몽골의 화집(畵集)을 보고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고, 인도와 히말라야 일대에 흩어진 티베트 난민들의 정착촌을 떠돌아다니면서 몽골의 노장 스님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스님들은 몽골이 공산화되고 불교 박해가 일어났던 1936년 이전에 청소년의 나이로 티베트에 갔다가, 거기마저 중국 공산군이 침략해오자 티베트 스님들과 함께 망명한 분들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분들이었다. 카투만두의 구루데바 린포체(전생이 확인된 큰스님들에 대한 명칭)는 달라이라마가 망명하기 훨씬 이전에 티베트의 앞날을 예견하고 티베트 고원을 내려왔다.
승속을 망라해 수많은 티베트인, 네팔인, 인도인에다가 서양 제자들까지 따르는 이 프론티어적인 린포체는 체구도 거대하고 법력도 대단했다. 그는 카투만두, 인도, 홍콩 등에 체인망을 이루는 카펫 회사 등을 경영해서 막강한 재력을 갖추고 있다가 처음 내려와 죽을 고생들을 하는 티베트 사람들에게 미리 지어놓은 큰 절들을 통째로 보시하는 등 그들이 인도와 네팔에 정착하는 것을 크게 도왔다.
생계 린포체는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지도급 린포체들이 탈출하거나 처형당한 티베트 본토에서 겔룩파의 근본 도량인 쎄라의 승원장을 맡아온 분이다. 몽골의 승려였지만 중국 치하의 티베트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며 불교를 이끌어준 린포체를 티베트 사람들은 달라이라마의 대리로 여기며 극진히 숭앙하였다.
달라이라마는 1959년 인도로 탈출하면서 생계 린포체에게 탈출하지 말고 남아서 티베트를 지켜달라고 부탁하였다. 린포체는 깊은 산으로 숨어 들어가 목숨을 부지하면서 티베트의 불교를 파괴하고 있던 문화혁명의 거센 불길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폐허로 변한 쎄라의 승원장을 맡았다. 1980년대 초부터 중국은 외화벌이를 위해 티베트를 서구 관광객들에게 개방하면서 쎄라뿐만 아니라 티베트의 일부 대사원들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건축, 회화, 조각 등 밀교 미술의 전 장르에 걸쳐서 이론과 실기를 겸한 라림빠 게쉬(최고의 박사학위)였던 생계 린포체는 이 복구 작업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지혜롭기도 하였지만 탄트라를 수행한 법력이 대단해서 악명 높은 중국 경찰들도 호통을 쳐대는 그를 함부로 다루지 못했다고 한다. 생계 린포체는 만년에 인도로 내려왔는데 달라이라마의 특별 초청으로 다람살라에 오셨을 때(1992년) 만나 뵈니 어째서 달라이라마가 티베트의 많은 린포체를 제치고 하필이면 몽골인이었던 그분에게 티베트를 지켜줄 것을 부탁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때는 이미 100세가 가까운 나이였는데도 목소리가 쩌렁쩌렁 하고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다람살라에 머무는 동안 달라이라마에게 어떤 탄트라 경전인가를 지도하고 있었는데, 날마다 달라이라마를 지도하고 함께 의식을 행하고 명상에 들었고 무엇을 묻고 상담하러 오는 학승들과 티베트인들이 쉴새없이 찾아오는데도 전혀 피곤해 하지 않았다. 생계 린포체는 몽골에 돌아가지 못하고 인도에서 열반했다(1995).
린포체는 담딘양생이라는 본존불(本尊佛)에 귀의해서 평생을 수행하였는데 다비를 했을 때 타지 않는 후두골에 담딘양생의 머리 위로 솟은 마두(馬頭)가 새겨져 있고 양팔의 뼈에는 담딘양생의 만다라가 새겨져 있었다. 다시 한번 그의 법력을 드러낸 이적은 큰 화젯거리였다. 내가 몽골불교를 처음 접한 것은 우연히 보게 된 몽골의 탕카(탱화) 화집을 통해서였다. 소련에서 만든 화집이었는데 처음 보는 몽골의 탕카는 티베트 탕카와 양식이 같았다. 몽골의 예술성이 티베트에 비해 얼마나 높고 빼어나며 그들의 기질이나 스케일이 얼마나 대범한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화집이었다.
내가 그 화집에 얼마나 빠져 있었던지 책 주인이었던 쉐르파 린포체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그 화집을 나에게 공짜로 주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몽골은 세상이 몽골에 대한 두려움을 잊어가고 있는 동안 세계 최대의 왕국을 이룰 수 있었던 그 지혜와 에너지를 온통 불교에 쏟아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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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이 공산화 되기전 종정이자 국가원수였던 제8대 잡춘담마 복드 칸. |
16세기 알탄 칸이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인 이래 불과 3∼4 백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학문과 예술, 의학과 과학에 걸쳐서 엄청난 정신문화를 축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티베트 불교가 많이 알려지고 있지만 몽골이 공산정권 시절에 파손된 불교를 다시 회복해 내고 나면 징키스칸으로 상징되는 몽골인들의 무력만큼이나 놀랍고 대단한 몽골인의 정신능력을 보여주는 몽골의 불교문화가 새로운 조명과 평가를 받게 될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아무튼 우리와는 너무나 오랫동안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몽골은 1936년 공산당의 불교말살 이전까지 정말로 대단한 불교 국가였다. 오늘날의 티베트나 부탄 사람들 이상으로 온 국민이 열렬한 불교 신자였다. 남자 인구의 30% 이상이 승려였다고 한다. 남자 인구의 반 이상이 승려인 아이막(주에 해당하는 몽골의 최대 행정 단위)들도 있었다.
중앙몽골(현재의 외몽골)에만 4천 개 이상의 절이 있었고 수천 명의 승려를 수용하는 대학촌 형태의 대사원이 700개 이상 있었다. 승려들은 수행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외과수술까지 할 수 있는 뛰어난 의사이었고 과학자이었으며 예술가와 장인이었고, 학자와 교육자이었다. 현재 티베트의 달라이라마처럼 ‘제8대 잡춘담바 복드 칸’(사진)이 종정인 동시에 국가의 최고통수권자였다. 절은 몽골사람들의 신앙의 중심이자 모든 생활과 문화의 중심이었다.
2. 갈 수 없는 나라 몽골에서 온 스님, 푸루밧
몽골의 불교미술에 반해 버린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몽골에 한번 가보리라고 마음을 먹고 인연을 짓기 위해 어쩌다가 몽골로 가는 티베트 스님들을 통해 몽골의 절에 보시금을 보내곤 하였다. 그러나 몽골에서 이렇게 눌러 살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몽골에서 다람살라로 유학을 온 푸루밧(사진 왼쪽)이라는 젊은 스님과 같은 은사들 밑에서 탕카며 입체 만달라, 참의 가면 등을 배우게 되었다. 푸루밧 스님은 이미 몽골의 노장 스님들 밑에서 기본을 닦기도 했지만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서 함께 공부하는 어떤 티베트 스님들이나 화가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진전이 매우 빨랐다.
나나 다른 티베트 스님들은 만달라나 탱화를 어떻게 그리고 만드는지 껍데기만을 배우기에도 벅찼는데 경전 해석에 뛰어났던 푸루밧 스님은 밀교미술의 기호들이 상징하는 심오한 탄트라의 내면을 파고들고 있었다. 나는 티베트 스님들에게 실기를 배우는 한편 푸루밧 스님에게 미술경전의 해석과 이론을 배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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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사의 도제 겔첸스님(중앙)푸루밧스님(왼쪽) 오른쪽이 필자. |
수수께끼처럼 풀어가는 미술경전뿐만 아니라 스님을 통해서 듣는 몽골의 불교도 새롭고 흥미로운 세계였다. 아름다운 몽골의 고대 신화들과 불교 설화들을 그림을 그려가며 들려주었고 공산당이 파괴해 버리기 이전 몽골의 찬란했던 불교문화와 겔에 사는 유목민들의 불교적인 생활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며 들려주었다.
중국의 내몽골과 러시아 영내의 브리아트, 칼묵 토와를 포함해서 5개의 몽골로 쪼개져 살게 된 몽골 민족의 처절한 역사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스님은 몽골에 없는 자료들을 수집하고 공부를 마치면 돌아가서 불교 미술학교를 세우고 불교문화를 다시 부흥시키는 것이 꿈이었다.
그렇게 해서 잠들어 있는 몽골의 민족혼을 깨우고 학생들을 데려다가 교육해서 각 몽골에도 민족문화인 불교문화를 다시 살려서 정치적 제약을 초월해 몽골 민족이 문화를 통해 다시 하나가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푸룻바 스님은 날더러 몽골로 들어가서 5∼6년만 함께 살며 자신을 도와 달라고 하였다. 그러면 껍데기가 아닌 밀교 미술의 진수도 가르쳐 주겠다고 하였다.
스님의 설득도 집요하였지만 분단국가에 태어난 딸로서, 그리고 조국의 문화가 서구 문화에 오염되고 찌들면서 한국인들이 자긍심과 주체성을 잃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나로서는 푸루밧 스님의 포부나 사명이 남의 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푸루밧 스님은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스님은 몽골에 먼저 들어와 브리아트와 칼룩 토와 몽골에서 온 학생들을 포함해 30여 명의 학생을 모집해서 1993년 가을 학기를 시작으로 간단 승가대학에 불교미술과를 열었다. 나는 우여곡절을 거쳐 1994년 4월에야 몽골에 들어올 수가 있었다.
3. 격렬하고 폭발적인 몽골의 불교
푸루밧 스님은 몽골불교센터인 간단사의 간단 승가대학이 보낸 유학승이었다. 그러나 말이 몽골 불교쎈터지 공산정권이 무너지던 1990년까지 몽골 전체에서 폐허로 남은 사원들 외에 절이라고는 간단사 하나뿐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였던 몽골에서 승복을 입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치열한 경쟁을 통해 간단 승가대학에 입학하는 길뿐이었다.
공산당이 아무리 대단했다지만 티베트나 부탄 같았던 불교 나라에 어떻게 절이 딱 한 개밖에 남을 수 없었단 말인가! 승려와 사원의 수도 엄청났지만 국민 모두가 불자였던 나라의 불교를 도대체 누가, 어떻게, 그렇게 철저하게 쓸어버릴 수가 있었을까? 몽골은 불교사조차도 너무나 몽골적이다. 다른 나라의 불교들이 발전한 것과 비교해 보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에 무성하게 일어났고 다시 하루아침에 거짓말처럼 없어져 버렸다.
짙푸른 하늘에 숨이 막히는 강렬한 태양이 작렬하다가 순식간에 검은 구름이 몰려와 세상이 온통 어두워지면서 콩알보다 큼직한 우박이 하얗게 쌓인다. 잠든 바다처럼 졸리운 대초원에 갑자기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일진광풍이 일어나고 마른번개와 벼락을 쳐대는 그런 몽골의 자연이나 기후처럼, 그리고 그 혹독한 자연을 극복하며 살아온 몽골인의 기질처럼 몽골의 불교사 역시 매우 폭발적이고 격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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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독립영웅 스쿠바타르 |
그런 까닭에 지금 비록 폐허처럼 돼버린 몽골의 불교이지만 그래도 뿌리가 안 죽고 살아 있으니 다시 불사조처럼 불쑥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일어나는 것을 아주 조급한 마음으로 바라니 못마땅한 것도 많았지만 내가 몽골에 들어온 지 불과 5년인데 그 동안 몽골불교가 발전하고 변해온 것을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면 이미 나는 그것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몽골에 비극이 다가온 것은 1936년이었다. 스쿠바타르(사진)의 결사대와 소련 공산군이 연합하여 러시아 왕정군을 몰아내고 독립을 선언한 몽골은 1924년 소련의 의도로 ‘몽골인민공화국’이 되었다. 그러나 민족의 독립과 불교를 위하여 공산군과 연합한 것이지 공산주의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나중에 공산당이 조작한 역사에 의해 혁명투사라고 이름 붙여진 열사나 투사들은 스쿠바타르를 비롯해서 모두가 독실한 불자들이었고 독립투사들이었지 공산주의자들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으로서는 몽골을 공산국으로 포섭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가 있었다. 소련은 스쿠바타르를 위시한 몽골의 독립투사들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으로 초청해서 의식 교육을 하였으나 심오한 불법을 공부한 이들에게 공산주의 이론이 먹혀들 리가 없었다.
소련이 보기에 불교가 있는 한 몽골에서 인민 혁명을 책동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할 소위 피지배 계급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모든 고난은 스스로 지은 업 때문이라고 믿으면서 지배계급에 해당하는 고위 승려들을 존경하고 우러르는 한 몽골은 이름만 ‘인민공화국’일 뿐이었다.
소련은 현대식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면서 그 지원을 수단으로 해서 위로는 정치지도부의 내적 분열을 획책하는 한편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특혜를 주고 우대하면서 하층민의 나이 어린 청소년들을 포섭하여 공산주의자로 교육하였다. 이런 준비과정을 거쳐 마침내 1936년, 스탈린의 노선을 거스르는 모든 정치인과 지성인들을 반동이라는 각종 죄명으로 숙청하고 암살했다.
절은 불태워졌고 승려들은 학살당했다. 그해 여름 어느 날 갑자기 동시 다발적으로 전국 각지의 절을 기습하여 주요 린포체들과 깝쥬(박사학위를 받은 승려) 및 지도급 승려들을 잡아다가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5∼6명이나 20여 명씩 군용 트럭이나 지프에 실고 나가 구덩이를 파게 한 다음 뒷머리를 총으로 쏘아서 구덩이에 떨어지게 하였다. 죄명은 거의가 반동, 반란 모반, 간첩행위 등이었다. 이때 희생된 승려의 숫자가 1∼2만 명이라고 한다.
그 후 공산정권은 나머지 승려들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자 다시 총살을 자행하였다. 그때 희생된 승려가 2만명 가량이라고 하지만 살아남은 스님들은 훨씬 더 많은 승려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때의 이야기를 증언해 주는 간단사의 노장 스님들은 승 속을 막론하고 몽골의 잘난 사람들은 그 시절에 다 죽고 찌꺼기만 남았다고 허탈하게 웃는다. 승려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자 공산당은 더 이상 총살을 하지 않고 비구 이상의 승려들은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고 비구가 아직 못된 승려들도 나이에 따라 강제노동수용소와 군대, 공장, 학교 기숙사 등으로 보냈다.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진 승려들은 대부분 토목공사나 광산에 동원되었는데 형기는 최소가 10년이었다. 몽골의 승려들은 겔룩파 승려들이기 때문에 계율을 생명보다 중요시했다. 많은 승려들이 생명을 잃을 정도로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면서 계율을 파계하도록 강요당하는 고통을 이중으로 겪어야 했다.
예를 들면 감시원들은 담배를 피우는 승려에게만 휴식시간을 주고 거부하는 승려에게는 온갖 조롱과 모욕을 퍼부었다. 휴식시간을 얻기 위해 담배를 물고 피우는 흉내라도 내야 했다. 승려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난 다음 빈 절들을 파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티베트나 만주 양식으로 벽돌과 나무로 된 건물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몽골의 독특한 사원 건축양식인 펠트로 조립된 건물들이었다.
양털을 다져서 만든 펠트로 된 건물은 분해하거나 태워버리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헐다가 남은 벽돌이나 나무로 된 건물은 사원의 장엄을 모두 제거하고 합판을 붙이고 페인트칠을 해서 단청과 벽화를 가린 다음 군용 막사나 창고 등으로 사용했다. 간단사를 비롯해서 현재까지 남을 수 있었던 극소수의 사원 건물은 모두 그렇게 남은 것들이다. 경전을 찍어내는 목각 경판들은 트럭으로 실어다가 군인들의 땔감으로 사용했다.
엄청난 양의 금동불, 황금 장엄들이 소련으로 실려갔다. 트럭으로 기차로 금속제 불교 용품을 실어내는 행렬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대부분이 무기를 제조하는 데 쓰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세계적인 문화재로 현재 러시아의 박물관이 소장한 몽골 미술품들은 모두 그때 실어간 것들이다. 시간이 지나 수용소의 승려들이 출소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그들을 결혼시키는 것이 당의 막중한 과업이 되었다. 정해진 기간 내에 결혼을 하지 않으면 다시 수용소로 보내는 등 온갖 압력을 가하는 한편 젊은 여성 당원들에게 특별한 교육을 시켜서 승려들을 파계시켰다.
이 여성 당원들이 얼마나 많은 승려를 파계시켰는가를 각자 자랑스럽게 발표하는 이상한 사회가 되었다.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어려움을 무릅쓰고 끝까지 계를 지키던 승려들도 이런 식으로 한 번 파계를 하고 나면 자포자기해서 결혼을 하곤 했다고 한다. 나이의 고하를 막론하고 아무렇게라도 짝을 지어야지 결혼을 하지 않고는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사회였다.
공산당의 불교 말살은 완전히 성공해서 1939년부터 외형적으로 몽골에는 단 한 명의 승려도 불자도 절도 존재하지 않는 불교의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944년에 처음으로 간단사에서 불교 의식이 행해지게 되었다. 미국의 부통령이 몽골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불교 국가인 몽골에 가면 불교 사원을 꼭 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시내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관음전을 비롯한 벽돌 건물 몇 개를 남겨서 소련군의 막사와 마구간으로 사용하고 있던 간단사 건물을 절로 다시 개조하기 위해 황급히 승려들을 모집했다. 참혹하게 불교를 말살한 공산의 불이 여전히 벌겋던 시절이었다. 무대를 한 번 펼친 후에 필요 없어지면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7명의 승려들이 용감하게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고 승려가 되기를 지원했다.
이중에 천신만고를 겪으며 내몽골로 도주했다가 돌아왔기 때문에 끝까지 계를 지킬 수 있었던 오쏘르 스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처승이었지만 간단사를 처음 시작한 이 7명의 승려들은 용감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온갖 모욕과 제약을 받으면서도 끈기 있게 견디고 지혜롭게 타협하면서 실낱같은 몽골의 불교를 지키고 키워온 스님들이다. 이제는 모두 돌아가시고 다욱장첸 노장님 한 분만 생존해 계신다. 미국 부통령이 돌아간 후에도 다른 외국 귀빈들의 관광을 위한 진열장으로 간단사는 계속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승려들은 승복을 입은 4명의 공산당원들에게 철저한 감시를 받으면서 그들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절로 출퇴근을 하는데 절의 담장 밖으로 승복을 입고 나갈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불교 의식은 공산당의 필요와 요구에 의해서 간단사 안에서만 행해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 승려가 되기를 지원했고 내몽골과 브리아트로 도주했던 일부 스님들도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지원을 한다고 모두 승려가 되고 승복을 다시 입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노장 스님들은 그때 조건이 어찌나 많고 까다로웠던지 지원을 해놓고도 다시 뒤로 쫓아다니며 사정을 하고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면서 보통은 몇 년씩 기다린 후에야 겨우 스님이 될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간단사가 더 확장되고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은 외신에서 몽골이 종교를 탄압하고 있다는 비난의 소리가 높아지자 몽골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다는 것을 외부에 선전하기 위해 1969년에 ‘아시아 불교대회’를 간단사에서 개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때 나이든 스님들만 있는 것이 이상하니까 승가대학 학생의 자격으로 브리아트 몽골에서 온 지원자들을 포함해 30명의 젊은 스님을 선발했고 이를 근거로 1970년에 간단 승가대학이 정식으로 설립되고 현재의 대학 건물과 직원 주택 등이 지어졌다.
4. 몽골불교의 중심 간단사에서의 생활
나는 간단사(사진) 경내에 있는 직원 주택에서 살았는데 낡은 목조 건물이지만 시에서 공급하는 난방장치도 있고 수도시설이 있었다. 인구의 반 이상이 상하수도 시설이 없는 판자촌에 살고 있는 울란바토르에서는 아파트에 버금가는 고급 주택이었다. 간단사의 청소부, 수위, 경리, 전기공 등이 가족과 함께 살고 남는 방에 노장 스님을 비롯한 몇몇 스님들이 처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승가대학의 교수나 임원을 맡은 대부분의 스님들은 절을 둘러싼 판자촌에서 살고 있었다.
아내가 다니는 직장에서 받은 아파트에서 사는 스님들도 더러 있었지만 한국의 총무원장 스님에 해당하는 간단사의 주지 스님도 내가 도착하기 얼마 전까지 노모를 모시고 판자촌의 겔(몽골의 이동식 가옥)에서 살았다. 정신노동자보다는 육체노동자를 중시하던 공산주의 사회를 실감할 수 있었다 간단사는 울란바토르 중심의 언덕에 위치해 있고 시내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초록색 지붕의 관음전을 중심으로 승가대학 건물과 법당, 도서관 및 직원숙소를 포함해 모두 15∼16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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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불교의 중심지 간단사. |
그러나 러시아식 건물과 아파트들이 들어선 깔끔한 도심의 한 가운데에 반경이 수 킬로에 달하는 거대한 판자촌에 둘러싸여 있는 간단사는 아주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정문 앞으로는 가로등까지 세운 멋진 아스팔트 대로를 뚫어놓았지만 그것은 공산시절이나 지금이나 외국인과 귀빈들이 차를 타고 입장하는 데 사용되고 보통은 판자촌 사이로 간단사를 향하여 방사선처럼 뻗친 골목들을 걸어서 경내로 들어오게 된다.
초라한 판자벽들 사이의 널찍한 흙길에는 똥 오줌과 쓰레기가 널려 있고 상하수도 시설이 없어서 길에 늘 구정물이 흘렀다. 날씨가 건조하여 그 구정물과 오물이 말라서 흙먼지가 되어 수시로 일어나고 시도 때도 없이 짝짓기를 하는 개들이 싸움질을 하며 떼지어 몰려다니고 죽은 건지 자는 건지, 취한들이 여기저기 쓸어져 있곤 했다.
더럽고 남루한 옷을 입고 물을 깃는 아이들이 수레에 제 몸뚱이보다 더 큰 물통을 실어서 끌고 지나다니는 요란한 소리에 판자벽들 너머로 들려 오는 아이 울음소리, 술취한 남편에게 두들겨맞는 아낙의 악다구니 소리가 뒤섞이는 그 길로 아침과 저녁이면 출퇴근을 하는 붉은 옷의 승려들이 지나다녔다. 이렇게 지저분한 판자촌이 꽉 들어찬 땅은 불과 60여 년 전만 해도 1만 명이 넘는 간단 사원의 승려들이 살던 청청한 절터로 여인들이 감히 발을 들이지 못하던 성역이었다.
나는 무슨 인연인지 수 백년 동안 청청했던 그 땅의 바로 중심인 간단사 경내에서 승려의 아내로 살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살던 그 자리는 몽골인들의 아픔을 구석 구석 그저 들여다볼 수만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내가 그 자리를 포기하지 않는 한 나의 삶 조차 그들의 아픈 삶에 섞여들지 않을 수 없었던 아주 힘들고 고통스러운 자리였다. 지나고 보니 그런 시절에 불교미술과를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그저 힘든 일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내용도 발전하고 규모도 커져서 곧 일개 학과가 아닌 인스티튜트로 등록될 예정이지만 처음에는 간단사가 내준 텅 빈 강의실 하나로 시작을 했다. 나머지 모든 것을 푸루밧 스님과 내가 해결해야 했다. 학생들에게 그림과 목조각를 우선 가르쳤는데 붓과 종이 물감을 비롯해서 일체 재료와 도구 문구류를 다 주어야 했다.
학생들에게는 돈도 없었지만 당시 몽골에서는 구할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이미 인도에서도 엄청난 짐을 지고 들어왔지만 한국에 나갔다 올 때면 그런 것들을 지고 오느라고 고추장 한 숟갈조차 무게가 나가서 마음놓고 가져올 수가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늘 짐을 등에 져야 했던 것은 기내에 부피가 작고 무거운 것을 최대한 많이 지님으로써 엄청나게 비싼 초과 짐 값을 조금이라도 적게 지불하기 위해서였다. 학생들도 거의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들을 했다.
수업이 끝난 다음 학교의 모든 기물과 용광로까지 직접 만들었다. 일이 끝나면 강의실의 맨바닥에 외투들을 덥고 잤다. 집에도 늘 상주하는 학생들이 서너 명씩 있었다. 한창 나이의 학생들이 노상 배가 고픈 걸 알면서도 줄 것이 없었다. 푸루밧 스님은 빈대 붙고 있는 식객들과 우연을 가장하여 식사시간에 찾아오는 그 많은 손님들에게 모두 먹을 것을 주라고 하는데 그들에게 주고 나면 밤을 새며 일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이 늘 굶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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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간단사 승가대학 불교미술과 학생들 |
이런 과정을 모두 극복하고 성장한 현재의 학생들(사진)은 불가능한 일이 없는 무적의 군단들 같다. 푸루밧 스님은 미술과 과장이기도 했지만 스님 노릇도 해야 했다. 인도에서 공부하고 온 특별한 스님으로 소문이 나서 날마다 평균 20명 이상의 사람들이 집으로 스님을 찾아왔다. 많이 오는 날은 50명도 넘게 왔다. 시도 때도 없었다.
밤 2시고, 3시고 부서질 듯이 문을 두드렸다. 한국이나 독일로 장사할 물건을 사러 가는데 축복기도를 해달라거나 국회의원에 꼭 당선되도록 기도해 달라는 좋은 내용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너무나 가슴 아프고 처절한 사연들을 가지고 와서 눈물을 흘렸다. 기도만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함께 가서 이야기를 해 달라, 돈을 꾸어달라, 병을 고쳐 달라는 것은 기본이고 별별 골치 아프고 어려운 청들을 하였다.
시골에서 온 사람들은 며칠이고 몇 날이고 심지어는 몇 달씩 묵다 가기도 했다. 4칸 짜리 그 좁은 집에 상주하는 학생들 외에 최소한 5명에서 10명 이상씩 끊이지 않고 묵는 식객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먹을 것이 귀하기는 시골도 마찬가진데 그 먼 길을 양고기나 우유를 들고 와서 스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시골 사람들도 많았다. 사냥한 여우나 늑대의 털가죽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공양물이 끊임없이 들어와서 그나마 식객들을 어느 정도 부양할 수 있었다. 또 어린 아들을 데리고 먼길을 찾아와서 스님으로 받아 달라고 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아이 아버지가 죽으면서 꼭 푸루밧 스님 밑으로 출가를 시키라고 유언을 했다면서 졸라대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가짜 도사와 종교 사기꾼들도 찾아왔지만 시골 각처에서 불사에 애쓰는 스님들이 찾아와 도움을 청하고 의논들을 했기 때문에 시골에 가보지 않고도 불교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5. 나를 서글프게 한 몽골인들의 신앙과 열정
내가 몽골에 첫발을 내딛을 당시에는 온 몽골이 불교를 향해서 뜨겁게 열광하고 있던 때였다. 최근에 와서는 한풀 꺾였지만 그때 그 열기는 내가 아는 한 어느 불교 나라 어느 불교사에도 있을 수 없는 아주 독특한 모습이었다.
과거의 몽골불교가 그만큼 대단했고, 박해할 때 탄트라를 수행한 스님들이 보여준 놀라운 신통력과 이적들이 구전되어 온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삶이 그렇게 고통스럽고 혼돈스럽다 보니 불교가 무엇을 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컸고 오랫동안 금지당한 반작용 등이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첫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치르바트는 취임을 하자마자 수십 년 동안 텅 비어 있던 간단사의 관음전에 동양 최대의 금동불인 26m짜리 관음보살 입상을 소련이 실어가기 전 그대로 복원하는 불사를 시작했다. 당시 먹을 것도 제대로 없던 몽골에서 그런 엄청난 불사를 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온 국민이 힘을 모았기 때문이었다. 거의 모든 몽골인이 보시금을 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물건이라도 들고 왔다.
1995년에는 달라이라마가 칼라챠크라 법회를 열기 위해 몽골을 방문했다. 달라이라마에 대한 몽골인들의 열광은 티베트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진하고 격렬했다. 몽골인들의 열광은 티베트인들처럼 사회 관습도 아니었고 격식도 없었기에 그 간절함과 절실함이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스승에 대한, 법에 대한 그 목마름을 목격하면서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에 수시로 눈시울이 붉어지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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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스님들의 의식집전 |
당시 몽골에는 휘발유가 귀해서 시내에도 다니는 차들이 드물었고 장거리 대중교통은 거의가 운행이 중단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씩 말을 달려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울란바토르로 모여들었다.
효자들은 병든 부모를 마차로 실고 왔다. 브리아트, 칼묵 토와에서도 오고 내몽골에서도 왔다.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고 한국 정부는 아직도 초청을 허락하지 못하는 달라이라마를 국가 영빈관에다 모신 몽골 정부는 중국이 암살자를 파견할지 모른다면서 삼엄한 경호를 했다.
달라이라마가 도착하는 날 특별한 명패가 없는 사람은 간단사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사람의 물결이 간단사의 담장을 에워쌌다. 주변의 가까운 지붕들은 더 잘 보기 위해서 올라선 사람들로 가득했다. 마침내 범패가 울려퍼지며 향로를 든 스님들을 앞세우고 달라이라마의 행렬이 가까이 다가왔다.
경찰들이 서로의 몸으로 사슬을 엮어서 막았지만 흥분한 군중들은 경찰의 플라스틱 곤봉으로 그렇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라도 좀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안간힘들을 쓰는 것이었다. 달라이라마가 간단사와 스타디움에서 며칠 동안 법회를 하는데 수만 명이 참석하였다. 8월이라서 날씨가 아주 덥더니 갑자기 추워지며 차거운 비가 연일 내렸다. 그때 몽골에는 우산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정성을 다해 차려 입은 옷을 다 적시고 며칠씩 비를 맞고 추위에 떨면서도 끝까지 그 고행을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들이 과연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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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스님들의 모습 |
1989년부터 지금까지 몽골 주재 인도 대사는 바쿨라 린포체다. 히말라야의 불교 왕국인 라다크의 왕자로 태어나서 라다크를 비롯한 인도 내의 소수민족을 대표해서 오랫동안 인도의 국회의원을 지낸 경력으로 세계에서 유일한 승려 외교관이다. 몽골 사람들은 린포체가 사는 인도 대사관저가 무슨 성지라도 되는 듯이 꼬라를 돌며 소원을 비는 것이었다.
린포체를 수행하는 비서들은 린포체의 옷자락이라도 한번 만지려고 아우성을 치는 군중들에게 연로하신 린포체가 다치기라도 할까봐 늘 긴장을 해야 했다.
푸루밧 스님이나 간단사의 노스님들과 어디를 가려고 택시를 타면 돈을 받지 않고 기도를 부탁하는 기사들이 많았다. 공산시절 승려들의 숫자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승려나 승려의 생활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승려에 대해서 환상들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불교나 승려에 대해서 그렇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이지만 불교의 교리는 물론이고 부처님의 일대기조차 잘 모르는 것이었다.
사유재산이 인정되고 이런 저런 장사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부자들도 생겨서 간단사의 모든 대중에게 공양을 올리거나 큰돈을 보시하고 집이나 회사에다 불단을 만드는 사람들도 있고, 인연이 되면 개인적으로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상담을 하고 기도를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인 신행 방법은 간단사의 창구에 길고 짧은 경전에 따라 한 번 읽는 데 얼마라는 금액표가 있어서 자신의 길흉화복에 따라 스님들에게 읽혀야 할 경전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등록하고 정해진 돈을 내고 다기(茶器) 물로 올렸던 정수와 향가루를 조금씩 파는데 그 것을 사 가지고 가는 것이다.
좀더 열성적인 신도들은 법당에 가서 예불에 참석하는데, 스님들이 경전을 읽으면서 예불을 하는 법당의 뒷켠에 그저 우르르 몰려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의 표정은 너무도 간절하고 지극하지만 불단에 머리를 부딪고 스님들에게 축복을 부탁하며 고개를 숙이는 것 외에는 절하는 방법조차 제대로 모른다. 일부 할머니들은 그래도 까마득한 어린 시절 조금이나마 보고 배운 것이 있어서 염주를 돌리며 만달라도 외우고 탑돌이도 하지만 젊은 세대는 아무리 마음이 간절해도 신행방법을 전혀 모른다.
볼만한 책도 전혀 없었고 가르쳐주는 장소도 조직도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 목이 마른 사람들이 끊임없이 간단사 경내에 들어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배회하는 모습들을 나는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었다. 어쩌다 한국에 가서 널찍한 포교당엘 들어서면 이런 포교당이 몽골에 한 개만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곤 했다.
한국에선 포교사나 스님들이 온갖 것을 다 가르쳐 주고 비위를 맞추면서 사람들을 부르려고 애들을 쓰는데 몽골에 이렇게 멋진 포교당이 공개된다면 부르지 않아도 미어 터지도록 스스로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몽골인들의 이런 신앙심은 불교 안쪽에서, 더구나 승려의 아내라는 특별한 위치에서 바라본 것이고 불교 바깥쪽에서 본 이방인들은 전혀 다르게 보기도 한다. 몽골 인구의 95%이상이 라마교도인데 라마승들이 형편없어서 국민들의 신뢰를 더 이상 받지 못하고 있다는 한국 학자들의 평가나 기행문을 자주 본다.
실은 그렇게 오해할 만도 하다. 나도 간단사에서 살면서 처음에 몹시 어색하고 의아했던 것은 속인들이 스님들에 대한 예의가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긴요한 부탁이 있어서 푸루밧 스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절을 하기는 고사하고 전혀 어려워 하는 기색이 없이 허락도 구하지 않고 성큼성큼 들어와 친구처럼 말을 걸기 때문에 말을 모르던 나로서는 번번이 아주 친한 지인이 찾아온 것으로 착각하곤 했다.
스님들 또한 예우를 기대하지 않았다. 내가 한국이나 티베트에서 하던 대로 예를 갖추면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이었다. 푸루밧 스님은 승가대학에 미술과를 열었지만 예술가를 배출하는 과의 특성을 살리겠다면서 대부분 속인 학생들을 선발했는데 승복을 입은 학생들도 몇 명 있었다. 나는 이 승려 제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몹시 난감했는데 학생 자신들은 존칭도 없이 아무개야 아무개야 부르면서 승속 간에 전혀 구별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으로 상영하는 영화나 코미디 프로는 사람들을 속여서 돈을 갈취하고 도인 행세를 하는 음탕한 승려, 어리석은 승려 등, 온통 승려를 비방하고 웃음거리로 삼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런 영화나 코미디를 보면서 스님 자신들조차 그다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몽골 사회에만 있는 불교나 승려에 대한 이중적인 사회 심리 현상을 체험할 수 있었다. 승려를 비방하는 역할을 자주 하는 희극 배우 하나가 누군가의 소개로 푸루밧 스님을 찾아왔다. 예술하는 사람으로서 양젠라모(예술과 학문을 관장하는 신) 탕카를 모시겠다고 하면서 스님의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그 배우의 연기 내용에 대해서는 스님도 그 배우도 언급이 없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직업으로 피차간에 묵인이 되는 모양이었다. 또 국립대학으로 몽골어를 배우러 다녔는데 외국인을 위한 어학교재에도 공산당의 업적을 찬양하고 승려를 비방하는 내용들이 많았다. 연세도 지긋하고 인품도 훌륭한 교수님들이 불교는 청나라의 식민지 정책이었고 지금도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믿는다면서 불교와 승려들을 비방하였다.
그러면서도 내가 간단사 스님의 아내라는 것을 알고는 다른 외국인 학생들에 비해 유독 친절하게 잘 대해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를 매개로 해서 모두들 푸루밧 스님을 만나고 싶어 하였다. 만나서 부탁할 일도 있고 물어볼 일도 있었던 것이다. 불교 비방은 교수라는 직업상, 지성인의 습관상 그냥 하는 소리라서 나에게 그것을 변명할 생각들도 하지 않았다. 공산시절에도 그랬다고 한다. 공석상에서는 불교와 승려들을 강력하게 비방하는 공산당의 고위 간부들도 밤이면 각자가 몰래 스님들을 찾아 다녔다고 한다.
바쿨라 린포체가 70년대부터 승복 자락을 휘날리며 몽골이나 브리아트를 드나들 수 있었고 공산정권이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던 89년에 인도 대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몽골인들의 불교에 대한 이중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6. 몽골의 스님들
공산시절에 간단사란 바로 승가대학을 의미했고 간단사의 스님이란 승가대학의 학생들과 교수를 담당하는 노장 스님들, 대학 졸업 후 이런 저런 소임을 보는 학자나 직원들로 80여 명에 불과했다.
대학과 절의 행정 및 운영은 모두 공산당에서 파견한 기관이 맡아서 하고 스님들에게는 주도권이 거의 없었다. 그런 제약 속에서도 승가대학은 1990년까지 200여 명의 승려들을 배출했다.
모두가 우수한 인재들로서 승복만 입으면 아무나 승려가 될 수 있는 90년 이후의 승려들과는 확실하게 구별이 된다. 현재 간단사를 드나드는 승려들은 수백 명으로 늘었지만 몽골사회가 인정하는 진짜 간단사 스님이라는 것은 노장들을 포함한 이들 승가대학 출신의 승려들이다.
비록 대부분이 결혼을 해서 처자식을 거느리고 있지만 몽골의 불교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공산시절에 노장들과 함께 불교를 지켜왔고, 승려를 그렇게 비방하고 비하하던 시절에 우수한 인재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선택할 수 있었던 신념의 소유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노장들이 생존해 있던 시절에 그들로부터 불교의 교학을 정통으로 전수받아 보유하고 있는 귀중한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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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란바토르 나카르짓의 비구니 사찰. |
현재 브리아트, 칼묵 등 몽골 각처로 흩어져 몽골불교를 다시 일으키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몽골은 결혼연령이 상당히 낮은 편이어서 1990년을 전후해서 졸업한 20대 중반의 스님들도 대부분 결혼을 한 상태이다.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은 스님들도 절 안에 스님들이 모여 살수 있는 공간도 제도도 없기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다. 아침이면 승복을 입고 간단사로 출근하고 저녁이면 퇴근해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가족들과 지낸다.
몽골의 신도들은 절로 가기보다는 스님들의 집으로 찾아간다. 집에서 찾아오는 신도들을 위해 기도도 해주고 상담도 해준다. 스님들의 집에는 늘 향 사르는 냄새가 나고 버터등잔을 밝힌 불단과 비단보자기로 싼 경전들이 쌓여 있고, 골동품상들이 눈독을 들이는 오래된 불상과 탱화와 불구와 가구들이 있다. 그리고 아내이건 스님의 노모이건 염주를 놓지 않고 만트라를 암송하는 나이든 여인이 하나쯤 있게 마련이다.
승려들이 처자를 거느리는 것이 사회적으로 당연시되고는 있지만 스님은 독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몽골 사람도 없고 스님 자신들도 그다지 떳떳하게 여기지 않는다. 젊은 스님들은 간혹 일반 옷으로 갈아입고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하기도 하지만 중년 스님들만 해도 승복 외에는 다른 옷 입으려고도 하지 않고 부인을 동반하는 경우도 드물다. 동부인이 불가피한 경우 부인은 남인 양 한 발치 떨어져서 따르는 것이 보통이다.
더구나 90년 이후 티베트 불교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티베트의 청정한 비구 스님들이 몽골을 자주 드나들고 몽골에도 결혼을 하지 않는 독신 승려들이 생겨나고 독신이 결혼한 승려보다 승진에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되자 결혼한 청장년층 승려들이 전에 없던 콤플렉스 내지 심리적 갈등을 겪고 있다.
나 역시 승려의 아내로서 아내가 있는 승려들이 느끼는 이런 콤플렉스가 몹시 답답했다. 그렇다고 승려 부인에 대한 사회인식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 반대로 어디에 가든지 간단사 스님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사람들의 태도가 대개는 달라지고 안 되던 일도 성사되곤 한다. 스님과 더불어 스님의 아내라는 것도 공산시절에 매우 희귀했기 때문에 수행을 하는 뭔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몽골에는 비구니 교단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여자 수행자들은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머리를 기르고 가정에 머물며 수행을 하던 전통이 있었고 요즘 새로 생겨나는 비구니들도 대부분 머리를 기르고 있다. 공산시절이나 지금이나 간단사의 스님들은 간단사가 주는 월급으로 생활한다. 도착한 첫 달에 푸루밧 스님이 월급을 받았다며 지폐를 여러 뭉치 주기에 큰돈인 줄 알고 기뻐하였더니 한 달 먹을 기본 식량인 고기와 밀가루도 살 수 없는 아주 적은 돈이었다.
그때는 대부분의 몽골 사람들이 끼니도 어려울 때였으나 스님들은 훨씬 나았다. 불교에 자유가 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스님들을 찾아가 기도나 독경을 부탁할 수 있어서 스님들이 절에서 주는 월급 외에도 돈을 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신도들이 선호하는 진짜 간단사 스님들은 불교의 자유와 함께 시작된 여러 가지 중요한 불사와 자기 자신의 공부나 수행으로 바빠서 신도들에게 독경을 해주고 돈을 벌 수 있는 여가가 거의 없는 편이다.
아내가 사업이나 장사를 하지 않는 한 지금도 대부분은 옹색하게 사는 편이다. 간단사의 스님들과 더불어 몽골불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또 다른 부류의 승려들이 있다. 간단사의 승려들과는 달리 90년 이후에야 비로소 승복을 새로 입었거나, 다시 입은 승려들이다. 다시 입었다는 것은 박해 이후 비록 승복을 입거나 계를 모두 지킬 수는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비밀리에 수행을 계속해온 옛 승려들이고, 새로 입었다는 것은 공산시절에 특별한 각종 인연으로 스승을 만나 역시 비밀리에 수행법을 전수받고 수행을 계속해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도시보다는 주로 외진 시골에 흩어져서 자신이나 스승이 속했던 옛 절을 복구하고 어린 승려들을 다시 키워내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런 스님들은 대개가 직접 나서지 않고 20대 초반의 아주 젊고 패기 있는 승려들을 앞세워 주지나 대표 등 주요 소임을 맡기고 뒤에서 봐주면서 주로 교육과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이 보통이다. 시골에 가서 이런 절들, 이런 스님들을 만나고 오면 새로운 희망과 힘을 느끼곤 한다.
몽골 승려의 대부분은 청소년들이고 도시나 시골 할 것 없이 예불하는 법당이나 겨우 꾸렸지 스님들이 거처할 요사채가 없다. ‘절에 산다’고 하기보다는 가족과 살면서 ‘절에 다닌다’는 말이 더 적절하다. 퇴폐 문화가 밀려들어오면서 날로 번잡해 가는 도시에서 절에 다니는 스님들과는 달리 텔레비전도 잘 나오지 않는 적막한 초원이나 사막에서 절에 다니는 스님들은 절이 가장 재미있는 장소일 수밖에 없다.
7. 다시 일어서는 모습들
지난 8월 인도 대사인 바쿨라 린포체는 간단사 바로 밑에 몽골에서 가장 큰 규모의 새 절을 완공하고 몽골의 불교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인도 수상을 비롯한 세계의 정치 및 불교 인사들을 모아 성대한 회향식을 가졌다. 이 절이 완공됨으로써 그 동안 린포체 밑으로 출가해서 공부해온 스님들이 라다크와 티베트에서 온 비구들의 지도와 감독을 받으며 정식 승가 공동체를 이루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아마르 베이쓰깔란트 대사원을 복원하여 구루데바 린포체가 이끌고 있는 승가 공동체에 이어 또 하나의 청청한 승가 공동체가 실현된 것이다. 간단사도 올 봄에 2층 건물의 요사채를 완성하여 지방에서 올라온 40명 가량의 승가대학 스님들이 입주했다.
아직은 그저 기숙사의 구실을 할 뿐이지만 일단 건물이 지어졌으니 앞으로 간단사의 승가 공동체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 동안 건자재뿐만 아니라 모든 물건이 너무나 귀했고 소련이 모든 것을 다 해주다가 떠났기 때문에 제대로 된 기술자나 전문가가 귀한 몽골에서 절을 짓는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린포체는 대사로 온 직후부터 절을 완공하기까지 무려 1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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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가면승무인 참댄스를 추는 모습. |
린포체는 라다크와 인도 각처에 여러 개의 불교대학과 강원을 건설한 경력자이고 인도의 대부호들과 고위 정치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서양인 지지자들도 있어서 재력도 충분했고 대사라는 막강한 지위도 있고 유능한 비서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같으면 한 달도 걸리지 않았을 시멘트 건물의 절 하나를 짓는 데 10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그러니 보통 몽골 스님들이 복원하고 있는 절들은 오죽하겠는가.
7∼8년이 지나도록 기초공사도 마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멘트 날림에 양철 지붕의 초라한 절들이 울란바토르 시내에 여기 저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여간 대견한 것이 아니다. 도시에서는 학교의 교실이나 건물의 방 하나를 빌려서 절을 시작하기도 하고 시골에서는 흔히 옛 절터나 절의 폐허에 우선 겔을 세워서 절을 시작한다.
97년 간단사의 통계에 의하면 전국에 140개 이상의 절이 생겼고 크고 작은 절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절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무하다시피 했던 불교서적도 많이 번역, 출판되고 있다. 돈이 없어서 잘 진행이 되지는 않지만 각 분야에서 좋은 불교사업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사람들도 많이 본다. 또 무조건 열광하던 90년대 초반이나 중반과는 달리 몽골불교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비판하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런 사실들 자체가 내게는 발전과 진보로 여겨진다. 도시에서야 걱정스러운 승려들도 자주 보지만 보이지 않는 몽골의 각처에서 그들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젊고 어린 스님들이 애를 쓰고 노력하며 성숙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푸루밧 스님과 함께 키우는 우리 학생들이 몹시도 대견하고 자랑스럽게 성장해가고 있다.
8. 몽골의 불교와 밀교에 관한 오해들
몽골의 종교는 라마교가 아니라 불교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라마란 산스크리트로 스승이라는 뜻인데 스승을 통하지 않고는 부처님의 깨우침이 내게서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스승(라마)을 매우 중요시한다.
그렇지만 참선을 중요시한다고 한국불교를 참선교라고 하지 않듯이 몽골 사람들도 자국의 불교를 라마교라고 하지는 않는다.
몽골의 불교는 현재 티베트와 부탄을 비롯해서 히말라야 일대에서 신봉하는 대승불교로 밀교, 금강밀승, 탄트라 불교라고도 한다. 세상에는 주로 티베트 불교로 통용되고 있는 그런 불교이다.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된 밀교는 티베트 불교가 아니라 성 에너지를 직접 이용하는 인도의 후기 좌도밀교였다.
그 자극적인 충격의 잔영이 남아 있는 데다가, 교합한 부모신(父母神)의 탕카나 불상들을 보면 일반인들로서는 밀교의 비밀 밀(密)자와 더불어 뭔가 성교와 연관된 종교를 연상한다. 또 밀교는 현교와는 달리 예술이 많이 발달되어 있다. 그런 까닭인지는 모르나 교리보다는 쉽사리 흥미를 끌 수 있는 예술과 의식이 흥밋거리로 많이 소개되었다.
굿이라도 하는 듯이 요란하게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는 의식 음악이나 잔인하고 끔찍한 형상의 분노한 불보살상들, 강렬하고 현란한 색채가 주는 이미지 등이 복합되어 몽골의 라마교는 정통 불교가 아니라 무속적이고 원시적으로 타락한 사이비 불교라는 인상을 만들어 왔다. 또한 공산기간 중에 몽골의 불교가 너무나도 심각하게 파괴된 탓에 불교를 제대로 알려줄 수 있고 증언할 수 있는 승려와 불교학자들이 극소수이며 그나마 제도권에 들어갈 수 없었던 재야 학자들이 대부분이라서 외국인으로서는 접근이 쉽지 않다.
손쉽게 의지하는 키릴 문자로 된 문서나 자료들은 몽골 민족에게 깊숙이 뿌리 박힌 불교를 제거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해 불교와 승려들을 비방한 황당무계한 거짓과 허위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재 몽골의 불교가 드러내 보여 주는 모습이 몽골불교의 참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의 거리와 사람들의 옷차림은 급격하게 변해 가는데 처자식과 함께 아파트나 판자촌에 사는 소위 라마승들은 때가 꾀죄죄한 낡은 승복을 입고 찌그러진 몽골 장화를 신고 버스를 타고 절로 출퇴근을 한다.
젊은 승려들은 삭발도 아닌 더벅머리로 절에 출근할 때만 승복을 입고 여가엔 진바지에 썬글레스를 끼고 돌아다닌다. 불자들이 그런 모습의 승려를 극장이나 유흥업소 같은 곳에서 만나도 놀라지도 않는다. 절 밖에서는 승복을 못 입게 하던 공산시절의 관습 때문이다. 새로 생긴 대부분의 절들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울긋불긋 유치한 장엄과 석고로 급히 만들어서 페인트칠을 한 불상들을 모시고 라마승들은 요란하게 북을 두드리고 나팔을 불면서 티베트어로 된 경전들을 읽고 있지만 뜻은 잘 모른다.
절에 열심히 오는 신도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거의 알지 못한다. 오로지 복을 구하겠다는 목적 외에는 없다. 불교 신자들조차 와서 보고는 한심하다면서 실망을 한다. 멀리서 온 불자들에게 미얀마 불교나 티베트 불교처럼 신심과 환희심을 안겨줄 요소가 몽골불교에는 아직 없다.
그러나 그 엄청난 탄압을 이겨내고 이런 모습일망정 몽골에 불교가 승려가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며 몽골불교의 잠재력과 위력을 보여주는 것임을 안다면 불보살들의 장대한 서원이 실재함을 확인하는 환희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