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우란분절’의 내력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란분盂蘭盆’은 梵語 Ullambana의 音譯이고, 한역으로 음사해서 ‘우란분’이라고 하고, 번역하면 ‘도현倒懸’이 된다.
의미는, 육체의 고통과 같이 ‘자기 가랑이 밑으로 세상을 보는 식’으로, 주위의 풍경을 거꾸로 보는, 사리에 맞지 않게 보는 고뇌를 가리킨다. 즉 ‘倒見=倒懸’이다.
인도의 불교도는 우기雨期 3개월간은 외출하지 않고 수행을 한다. 그것을 하안거라 한다. 그 안거安居가 끝나는 날이 7월 15일로, 이 날을 자자일自恣日이라고 한다.
‘자자自恣’라는 것은, ‘자유롭게, 자의로’라고 하는 의미로, 위에서 명령을 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말하고, 남에게 충고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날이다.
따라서 7월 15일을 ‘우란분[倒懸]의 苦를 구제하는 自恣日’이라고 한다.
결국 우란분의 7월 15일은 人生行路의 旅人이 한데 모여서 서로 코스의 오차誤差를 바르게 하는 내용을 갖는 날이다.
“불신佛身을 보는 사람은 佛心을 볼 수 있다”라고 古人은 말하고 있다.
불상이나 불화를 보는 자는 그 佛身 안에 있는 부처님의 마음, 다시 말하면 진실한 자신을 만난다고 하는 것이다. 거울을 보는 것이 자신을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 자신의 더러움을 보고 자신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거울을 보는 최종목표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마음을 거울로서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보고, 자신의 마음에 부처님의 마음을 옮기는 것이 수행이다. 부처님을 만난다는 것은 부처님이 보고 계시다고 믿는 것이 시작이다. 이렇게 바르게 자신을 비추어보는 것이 즉 ‘正見’이다.
수행도 信心도 더할 나위 없을 때, 부처님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으로 옮겨져 온다. 그러나 이것은 이해하는 것만으로 용이하지는 않다. 그래서 ‘부처님이 보고 계시다’고 믿는 것이 가장 알기 쉽다.
결국 ‘見’이 ‘信’과 동의어가 된다.
★ 목련目蓮은 ‘자신이 어머니를 아귀로 만들었다…’고
우란분에 관련이 있는 목련존자의 설화가 있다. 목련존자는 부처님의 10대제자의 한 사람으로, 신통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어느 날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하여 신통력으로 살펴보니, 아귀계에 떨어져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그는 놀라서 물과 음식물을 드렸다. 그런데 음식물이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화염덩어리로 변했다. 결국 음식물이 타버려서 먹지 못한 것이다. 목련존자는 놀라 슬피 울면서 세존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다. 그러나 세존은 쌀쌀하게 그를 밀쳐버리셨다.
“그대의 어머니는 악업이 심해서[罪根深結] 그대 한사람의 힘으로는 구제할 수 없다. 그대의 효심의 소리가 천지를 울려도 어떻게 할 수 없다”라고.
‘정성을 들인 음식물이 타버린다’라고 하는 소박한 표현에 ‘도현倒懸과 도견倒見’의 苦를 볼 수 있다.
호의를 악의로 받아들이고, 충고를 매도로 느끼는 것이 倒懸(見)苦로, 현재에도 많은 예를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악의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집이 그렇게 시키는 것이다. 자기중심의 판단이 倒懸(見)苦를 부른다는 것을 우리들은 배운다.
경전에 기술은 없지만 목련존자의 고뇌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왜 저 좋은 어머니가 아귀계에 빠졌는지…. 내 자식에 대한 집착은 자칫하면 배타적이 된다. ‘저 자식도 이 자식도 전부 내 자식’이라고 표면적으로는 이해하지만, 실제는 자타의 자식을 구별하여 내 자식만이라고 하는 망애妄愛가 되어 악업을 쌓는 것이다.
목련존자는 “내가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했다”
“내가 어머니를 아귀로 만들었다”라고, 망모亡母의 아귀의 모습을 통하여 자신을 보고 자신 속에 있는 아귀의 모습을 본 것이다.
어머니의 도현고倒懸苦가 연緣이 되어 목련존자는 자신의 마음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때 세존은 이렇게 가르치셨다. “7월 15일의 自恣日은 수행자의 德도 깊기 때문에 이 날에 많은 수행자에게 봉사(공양)하면 좋다”라고.
목련존자도 수행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자일에 어머니를 괴롭게 하는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남들에게 말한 것이다. 같은 길을 걷는 동료끼리 자신의 아픔을 서로 말하고 남의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倒見에서 正見으로의 바른 눈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사자死者의 과실을 구제하는 데에는 생자生者 자신의 자각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는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正見은 가르침을 믿는 緣에 의하여 얻을 수 있고, 또 믿음으로 바르게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