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패러디(perody) 시와 철학적 사유
- 김춘수와 뭉크 (Munch)의 작품을 중심으로 -
나 병 훈
1. 들어가면서
시인들은 시를 쓰기 위해서 자연으로 가능한 걸어 나갈수록 좋다. 어쩌면 주술적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왼 종일 자연에 머물러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위적 자연이라 할 수 있는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돌려보면 보면 어떨까? 그림을 시로 읽어낼 수만 있다면 그는 이미 시인이 아닐까? 일찍이 중국 북송 때의 화가 곽희는 "시는 곧 무형의 화畵요, 화畵는 곧 유형의 시"라고 했다. 그림과 시는 이미지로 구성되고 표현되는 동족의 예술이라는 애기로 읽힌다. 다만, 전자는 대상화되지 않는 허구인 반면 후자는 대상화되는 실재적 장르라는 것만 다를 뿐이다. 또한 그림이 시공간의 제한으로 제재 선택의 한계가 있는 반면, 시는 제재 선택에서 자유롭지만 언어의 구현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두 가지만 제한적인 범위만 제외한다면 양자는 문학예술에서 가장 닮고 싶은 서로의 너와 나라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동족임을 증명하는 사례라 할 수 있는 그림 패러디(perody) 시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그림을 기저로 한 패러디(perody)와 철학적 사유’의 깨달음이 적지 않은 도움을 주리라 본다. 본고는 그러한 시학적 견지에서 시의 동족으로서의 그림을 통해 융합하는 시의 패러디(perody)와 그 바탕을 이루는 철학적 사유에 대해 지면의 한계 상 개괄적인 범위만을 살펴봄으로써 보다 깊이 있는 시 짓기를 위한 디딤돌을 제공해 주고자 함에 있다.
2. 그림을 시로 읽어내는 패러디(perody)
- 김춘수 「나르시스의 노래」
무의미의 시를 통해 ‘꽃의 시인’으로만 알려진 김춘수 시인이 삶에서 마주치는 고통과 실체를 극복하는 ‘치유의 시학’을 제시한 장본인 이었다는 사실은 생기롭다. 그의 독특한 치유의 시정이 은근하게 흐르는 강물에 하나의 지류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그림을 시로 읽어내는 패러디(perody)’ 시로써 ‘시가 어떻게 그림과 만났을 때 패러디(perody)화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단비 같은 해답을 제시 해 주고 있다. 궁극적으로 그는 패러디(perody)의 대상이 되는 그림을 ‘의식적으로 전경화’시킴으로써 원작 그림과 패러디 시와의 ‘상호 대화성’을 낚아채어 이를 절묘하게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한 편의 창작시로 탄생시켰다. ‘전경화’는 낯익은 대상을 낯설게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느낌이나 자각을 일어나도록 하는 것임을 상기할 때 김춘수의 그러한 문학적 패로디 작시 기법은 눈여겨 볼만 하다. 그 대표적인 명편 패러디(perody) 시인 「나르시스의 노래 – 샅바도르 달리의 그림에」의 숲속을 탐사 해 본다.
여기에 섰노라. 흐르는 물가 한 송이 수선水仙되어 나는 섰노라.
구름 가면 구름을 따르고,
나비가 날면 나비와 팔랑이며,
봄 가고 여름 가는 온 가지 나의 양자를 물 위에 띄우며 섰으량이면,
뉘가 나를 울리기만 하여라. 내가 뉘를 울리기만 하여라.
(아름다웠노라 아름다웠노라)고,
바람 자고 바람이 다시 일기까지,
해 지고 별빛 다시 널리기까지,
한 오래기 감도는 어둠 속으로 아아라히 흐르는 흘러가는 물소리.....
(아름다웠노라 아름다웠노라)고,
하늘과 구름이 흘러가거늘,
나비와 새들이 흘러가거늘,
한 송이 수선(水仙)이라 섰으량이면,
한 오래기 감도는 어둠 속으로,
아아라히 흐르는 흘러가는 물소리.......
- 김춘수, 「나르시스의 노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에, 전문
패러디(perody) 시의 측면에서 보면 김춘수는 ‘그림과 시가 어우러져 사는 동족의 나라’ 시인 대통령이었을 것이다. 시문학사를 더듬어 보면 그는 시 창작에 있어서 시와 동족인 비 장르 문학( 미술, 음악 등)으로부터 시학적 감상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아 성공적으로 형상화시킨 대표적인 시인임에는 틀림없으며 그 중심에 ‘전경화’기법이 흐르고 있다. 말하자면 일상적 의미와 시 문법을 벗어나기 위해 그림 작품을 차용하여 그것들을 자신만의 허무주의적인 낯설은 이미지와 언어로 색채로 재 구현 해 냈다는 점이다.
그림 작품의 언어적 재 구현은 시의 창작성을 헤칠 수 있는 리스크가 매우 크다. 그러나 김춘수는 ‘주관에 의한 선택적 변형’이라는 천부적 재능과 시작 기술의 묘수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본고에서 탐색해보고자 하는 패러디(perody) 시 읽기의 차원에서 반드시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덧붙이자면 이러한 김춘수 패러디(perody) 작시태도는 후술하는 라캉이 정립한 '언어를 통한 욕망이론'에 심취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 달리의 <나르시스의 변신> 의 시학적 함의
그림 패러디(perody)시에 대한 시학적 접근을 위해 먼저 신화를 패러디(perody) 한 달리의 유명한 그림 한 폭을 소환해 본다. 그림에서 보듯 달리의 <나르시스의 변신,1936>은 ‘나르시스의 신화’를 패러디(perody)하고 있다. 인용된 김춘수의 시 「나르시스의 노래」 의 부제 역시 < 살보도르 달리의 그림에 >라고 붙이고 있는 것을 보면 결국 김춘수의 이 작품은 문학(나르시스 신화)→그림(달리)→문학(인용시)으로의 이중적 패러디 (perody)과정을 거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중적 페러디를 시학적 측면에서 음미해 보고자 먼저 달리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자. 화폭이 ‘시간의 터널’을 관통하는 두 개의 의식세계가 대비적으로 균등 분할(즉 모티브가 2개로 구성)되어 있다. 즉, 달리는 나르시스의 의식을 구상화 하면서 하나의 모티브( 수선화 생애의 내면세계 )가 다른 모티브로 변신하는 환상을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림을 시인의 눈으로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림의 오른쪽 부분은 나르시스가 죽어 변했다는 수선화가 엄지, 검지, 중지에 의해 세워진 알 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다. 시인이라면 적어도 저 세 손가락과 알과 수선화의 이미지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달리의 <나르시스 변신>에 대한 심오한 시철학적 의도요 주제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달리도 시인이었음을 상기하면 그러한 의도는 더욱 명징해진다.
(출처: 네이버 이미지/ 달리 <나르시의 변신,1936> )
우선 그림 오른쪽 모티브인 '수선화 생애의 내면세계'를 더듬어보자. 이러한 시학적 접근은 아무래도 전문적인 가이드가 필요할 것 같다. 정끝별 평론가의 견해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알>은 나르시스의 완전하지 않지만 폐쇄된 에고(ego)의 내면의식 세계요, 3대 구상화 대상으로서의 <손>은 나르시의 자의식이며, <수선화>는 나르시스의 아름다움의 메타포로 해석하면서 달리는 회화의 주제인 나르시스의 변신의 내면의식 세계를 에고(ego), 미의식, 자의식의 상징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논문에 적고 있다. (패로디 시학, 문학세계사, 1997 참조)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시간의 터널을 지나 왼쪽 모티브인 '수선화 사후의 내면세계'로 눈을 돌려보자. 3대 구상화 대상물(손가락, 알, 수선화)이 황폐하게 말라 비틀어져 있다. 에고(ego)와 미의식과 자의식 상실의 시대를 투영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한 이미지는 시적 감각으로 그림 속 세상을 면밀하게 관찰하면 <나르시스> 변신의 실체를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가? 수면(거울)위로 투영되어버린 나르시스 죽음의 자화상 ! 그것은 고독하며 번뇌하는 성인남자가 왼쪽 무릎을 세우고 왼팔을 늘어트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저 암울한 '나르시스의 변신 '이 아니던가! 그 내면의 모습은 '자아의 상실'이요 에고(ego)의 황폐화이며, 아름다움이 추함으로 전도되어버린 시대적 슬픔에 대한 고뇌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고뇌하고 절망하는 인간의 실존적 이미지가 소름 돋도록 철학적 인식으로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나. 「나르시스의 노래」, <나르시스 변신>의 패러디(perody)
이러한 연유로 초현실주의의 거장화가인 달리의 <나르시스 변신>은 결국 꿈과 현실, 무의식과 자의식, 환상과 실재라는 상반된 세계의 변증법적 통합을 일구어 낸 문학 철학적 그림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화가 달리를 시인이며 철학자로 호명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전술한바와 같이 ‘그림과 시가 어우러져 사는 동족의 나라’ 시인 대통령인 시인 김춘수는 이러한 <나르시스 변신>을 어떻게 시의 언어로 패러디(perody) 해 내었을까 궁금해진다.
패러디(perody)의 본질은 원작자와 동일한 창조적 독자로서 인식이다. 그러므로 원작은 새로운 이해와 해석에 의해 가치와 의미도 재창조 되어야 한다는 것이 통설이다. 인용 된 김춘수의 「나르시스의 노래」는 그러한 면에서 달리의< 나르시스의 변신>을 ‘재창조적인 패러디(perody)’라는 시의 언어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따라서 달리의 상상과 김춘수의 상상이 어떻게 부합되고 차별화(재창조)되는지를 읽어 낼 수 있다면 그림을 시로 읽어 내기위한 패러디(perody)의 묘미를 체득할 수 있으리라 본다.
김춘수의 「나르시스의 노래」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아름다운 물의 요정이라 생각하여 그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다가 빠져 죽어 ‘수선화’로 변했다는 나르시스의 신화와 달리의 < 나르시스의 변신>을 동시적으로 패러디(perody) 하고 있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여기서 필자는 부제에 주목했다. 굳이 부제를 '달리의 그림에' 라고 끌어들여 붙인 시작 의도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새로운 이해와 해석에 의해 원작의 가치와 의미도 재창조되는 패러디의 본질을 두 개의 측면에서 쉽게 읽어 내야 함을 시사한다. 함축하자면, 우선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달리의 그림과는 달리 말고 투명한 김춘수의 시가 빚어내는 대조성이 눈에 띈다. 달리의 그림에서 ‘물가의 수선水仙’이 이중성과 애매성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이다. 원작 그림과 패러디 시와의 ‘상호 대화성’을 낚아채어 이를 절묘하게 문학적으로 승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 「나르시스의 노래」, 그 패러디적 이해와 해석
이러한 원작 재창조의 패러디(perody)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시의 행간 속을 더듬어 보자. “여기 섯노라, 흐르는 물가 한 송이 수선(水仙)되어 나는 섰노라”는 달리의 그림 속 ‘인간의 실존적 존재확인을 위한 자세’를 환기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아름다웠노라/ 아름다웠노라)”도 신화 속 나르시스의 외모가 아니라 시간과 풍화를 견디는 실존적 자각에서 비롯되는 ‘고독한 외로움’을 환기한다. 그러기에 “뉘가 나를 울리기만 하고/ 내가 뉘를 울리기만 하는 ”그 아름다움은, 달리의 그림과 김춘수 시 사이의 대화성에 비롯되는 그로테스크한 이중성과 애매성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여기서 시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인용된 신화나 그림이나 시에서 공통적인 정서의 근저에는 바로 ‘물’이라는 이미지 장치가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 실존이라는 문제를 염두에 둘 때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라 대체하여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인용된 작품을 패러디(perody) 측면에서 이해하는 중요한 코드가 됨직하다. 신화 속의 ‘물’이 나르시스의 얼굴을 비춰주는 ‘실제적인 거울’의 이미지인데 반해, 그림 속의 ‘물’은 화가 달리 자신의 어두운 내면의식을 투영하는 탁한 이미지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김춘수는 ‘맑게 흘러가는 물소리’를 강조함으로써 그러한 어둠의 내면의식을 대조적으로 맑게 걸러주고 있지 않는가? 놓쳐서는 안 되는 김춘수 패러디(perody)시 읽어내기의 급소다.
이러한 김춘수 <시>의 패러디적 대조성을 행간에서 더 찾아보자. 인용 된 김춘수 패러디(perody) 시는 본질적으로 창조와 모방, 독창성과 진부함이 서로에게 길을 터 줌으로써 새로운 이해와 해석에 의해 원작(달리의 그림)의 가치와 의미를 재창조 해 내고 있다. “어둠 속으로 아아라히 흐르는 흘러가는 물소리...”는 달리적 내면의 어둠과 고뇌를 맑게 흘러가는 물소리로 한층 맑게 걸러주고 있다. 그러므로 ‘물소리’는 ‘울리다’라는 동사와 어우러져 ‘맑은 슬픔’ 즉, ‘내면화 된 울음의 이미지’로 명징해 진다. “ 팔랑이는 나비와 흘러가는 새”는 또 어떠한가? 달리의 그림과는 다른 밝고 동적인 분위기를 형상화 하고 있다.
부언하자면 이러한 김춘수의「나르시스의 노래」는 ' 맑음의 동적 분위기'는 시의 외형적 구조에서조차 발견되고 있다. 시 창작의 스킬을 위해 행간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1) 잦은 연 갈이 2) 흐르는 물의 시각화 장치로서의 말줄임표 3) 존재론적 시간의 관통과 시간의 내면을 응시하는 아름다움의 메시지를 담아내기 위한 풍부한 여백의 배정 4) 잦은 쉼표를 도입한 시상의 이미지화 유도 5) 4연과 6연의 괄호( )쓰기는 또한 무슨 의도일까? 내면의식과 외면을 동시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입체적(시각적) 효과가 아니겠는가?
3. 그림과 시 철학적 사유
- 애드바르트 뭉크의 <절규>
뭉크의 <절규>를 만난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공포의 소리를 지르고 말 것이다. <절규>는 절망적인 내면의 세계를 인식하고 강렬한 색채와 구도와 보이지 않는 언어로 현실의 불안과 절망을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뭉크의 보이지 않는 영혼의 노래이자 고백시를 만나는 순간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정신분열증과 불행하고 어둡고 기괴한 정신세계의 무의식적인 내면의 세계에서 절망적인 고독한 삶의 굴레를 벗어 던질 수가 없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폐결핵과 정신분열증의 치명적 유전자를 온 가족들이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고독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살아야만 했다. 30세의 한창 젊은 나이에 그린 <절규>는 그러한 자신에게 다가오는 정신분열 증세의 극치를 반영하는 반면 그를 초현실주의적 화기이자 무의식의 철학자로 호명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화가 뭉크(Munch)의 정신분열적인 삶의 고통과 절망의 내면세계가 <절규>를 통해 적나라하게 자화상으로서 투영되고 있기 때문에 <절규>를 시문학적 측면에서 감상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두 줄기의 철학적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즉, 프로이트(오스트리아, 1856∼1939) 정신분석에 기저한 '무의식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적 인식'과 이와 결을 달리하고 있는 라캉(프, 1901-1981)이 시도한 정신분석에서 언어학을 도입하여 '언어를 통한 무의식의 세계'를 정립함으로써 문학(시학)과 철학의 교두보를 마련한 문학 철학적 인식에 대한 사전 이해가 필요하므로 이에 대해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정신분석 시인의 얼굴, 시그마프레스, 2015 참조)
가. 프로이트의 무의식 세계와 정신분열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구조를 '빙산'에 비유한다. 수면 위로 보이는 ‘의식’은 수면 아래 존재하는 ‘무의식’에 비해 극히 작은 일부분으로 본다. 의식은 단지 무의식의 내면세계에 존재하는 타자의 시선에 비친 자아(ego)의 그림자 이미지일 뿐이라는 애기다. 말하자면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또 다른 자기, 즉 진정한 자신의 모습(自我)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가면의 얼굴'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결국 사람들이 보는 나는' 본질적인' 내가 아니라 그들 눈에 비친 나의 '외면적 인식'으로서의 이미지요 모습인 페르소나(Persona)일 뿐이라고 애기다.
이러한 프로이트적 정신구조로는 우리는 내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외부로 드러낼 수 없는 것이며, 결국 본능적으로 이러한 페르소나(Persona)라는 외면적 인식의 탈을 쓰고 정신적 평정을 얻으면서 살아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의식의 저변에는 의식의 질서를 파괴하는 욕구가 본능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무의식이 의식 표면에 분출되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에너지가 과도하게 분출되어 정신적 평정(안나의 방어기제)이 무너지면 본성(무의식)과 갈등을 일으켜 정신적인 과부하로 인하여 우리는 절망과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라는 정신분열 증세에 빠져 들게 된다는 것이다.
나. 라캉의 욕망이론
실존철학의 전도사요 언어를 통한 욕망 이론을 정립한 라캉(Lacan)이 프로이트 ‘무의식’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만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문학철학’이라는 범위내로 한정 해 본다면 라캉이 프로이트와 결별한 것은 ‘무의식’에 대한 욕망의 대상을 보는 견해가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즉. 프로이트는 문학적 욕망의 대상을 성적 해석에 둔 반면, 라캉은 언어를 통한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이론을 정립하면서 대척점에 선다. 이러한 라캉의 무의식에 대한 철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본다면 그의 주장대로 거울에 비친 시인들 자신의 모습(자화상)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아니요, 타자의 시선에 비친 시인의 그림자요 이미지 일 뿐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단정하지 못하고 '분열된 자아'를 통해 인식 할 수밖에 없다는 논증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정신분열 해 가는 자신의 무의식을 회피하고자 발버둥 침으로써 소위 안나 프로이트의 자기방어기제로서의 극단의 소외된 자아의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은 뭉크가 견지해야 했을 정신적 평정으로서의 페르소나( Persona)를 태생적으로 극복이 불가했음을 방증하는 철학적 깨달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 뭉크(Munch), 그림「절규」에 대한 시 철학적 사유
이러한 두 개의 상반된 철학적 인식의 흐름을 바탕으로 뭉크를 만나보자. M.그로써는 "그림은 언어 없는 시이며, 시는 그림 없는 언어"라 주창한다. 그는 「화가의 눈」이라는 평문을 통해 “그림이 말하는 내용은 결코 하찮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화가가 살고 있는 시대에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가장 고매한 상상이라야 한다.”라고 덧대면서 구체화한다. 이를 위에서 기술한 2개의 큰 철학적 사류를 상호 접목하여 이해하면 비로소 저 비극적인 가족사로 평생을 정신분열증으로 사경을 헤매야 했던 비운의 화가 뭉크(Munch)가 <절규>라는 그림 속에 토해내고 싶었던 절규로 메아리치는 시의 언어를 우리는 비로소 듣게 될 것이며, 라캉이 주창했던 내면의 무의식 세계에서 분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분열된 자아로 인식되어지고 궁극에는 페르소나(Persona)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이 시대에 정신분열적인 자화상으로 투영되는 절망의 시를 써 내려 갈 수 있을 것이다. 솔직한 인간 내면의 무의식으로 분출되는 본성의 감정을 목도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감상을 통해 우리는 뭉크(Munch)가 쏟아 낸 <절규>라는 그림 시를 통해 대리만족하는 카타르시스마저 경험하기에 충분하다고 보며 <절규>의 기의(시그니피에)가 되고 있는 ‘절망’에 대한 시학적 접근이 가능하리라 본다.
1) 뭉크(Munch)의 <절규>에 대한 고백 추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뭉크의 절규! 그것은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무의식에서 분출해 낼 수 없었던 절망이 자연을 통해 외부로 투영 된 곧, 본질적인 자아(ego)였던 것이다. 범부에게는 카타르시스로 비쳐질 수도 있겠지만 뭉크에겐 심각한 우울증의 분신들이기에 여기서 프로이트적인 정신분열이요 공황장애였다.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그는 붉은 태양이 지고 있는 블루 불랙의 피요르드가 흐르는 오슬로 해안도로를 친구와 같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육지와 바다와 하늘이 S커브 밴드로 구부러진 채 요동치며 선홍색 붉음과 어둠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석양에 물들어 가는 구름 하늘마저 핏빛으로 응고된 채 불안정한 흔들림으로 채색되어 갈뿐 침묵으로 몸을 휘감고 있어 긴장감마저 흐르고 있었고. 저 멀리 아스라져 가는 도회지의 불빛과 항구에 닿으려는 가녀린 어선들은 어둠에 생포되어 존재마저 흐릿해져 가고, 오로지 피처럼 불 타 흐르는 피의 구름바다만이 괴기스러운 환청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출처: 네이버 이미지/ 뭉크 <절규> )
그는 공포에 떨어야 했을 것이다. 그 공포와 환청은 저 자연을 관통하는 끝없는 비명으로 인해 의식은 물론 무의식마저도 쫓기면서, 머리가 지끈거리고 난청이 환청으로 겹치면서 지겨운 공황장애로 인하여 두 귀를 막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그의 모습일 뿐 타자의 시선에 비친 그의 그림자요 이미지가 결코 아니어서 혼란스러웠으리라. 아! 같이 거닐던 친구마저도 타나토스의 사자가 되어 검은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저만큼 뒤를 바짝 따라 붙고 있었고. 도대체 서른 나이에 왜 인간의 존엄한 형태를 빼앗기고 있어야 했단 말인가? 공포에 질린 저 열린 입과 눈썹조차 지워져버린 눈은 이미 아케론 강나루에서 산자인지 죽은 자인지를 심판받고 있었으니.... 강 건너 검은 안개 숲속에서 어린 시절 피눈물 흘리며 강을 건너신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최근 기어코 우울증을 견디지 못해 이 강을 건너야만 했던 사랑하는 여동생이 손짓하고 있었고.....
2) 뭉크(Munch)에 대한 미학적 역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시인들은 120년전에 뭉크가 그려 낸 말없는 절규의 그림 시를 어떻게 읽어내야 할까? 그리고 어떠한 철학적 인식을 덧댈 수 있을까? 폐병과 정신불안의 광기로 저주받으며 절망적인 삶을 지탱해야만 했던 한 고독한 화가의 노래 <절규>를 통해 시인들은 어떻게 자화상을 그려낼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시학으로서의 역설(paradox)적 미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림 시나 시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론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뭉크의 절규는 희망의 회로 찾아나서는 대담한 ‘광기’다. 이러한 ‘광기’가 아니라면 저 절망적인 <절규>의 끝이 보이지 않을뿐더러 81세로 생을 마감한 정신분열증 환자 뭉크를 소환할 수 없다.
여기서 그림 속의 행간을 더듬어 필자의 개인적인 사유로 삼아보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러한 ‘광기’를 '희망'의 반향으로 읽어 낼 수는 여지를 찾고자 함이다. 핏빛 붉은 하늘구름과 형형한 석양의 굴곡진 웨이브는 태생적으로 저주받은 정신적 육체적 나약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과 갈구를 씨줄 날줄로 엮어내며 채색을 입혀 항거한다. 그 채색의 행간 배면에는 그러한 불안감과 절망을 예술혼으로 승화시키고자하는 뭉크의' 당찬 노래가 언어화 되어 생기롭게 배열되어 있다.
그뿐인가? 블랙 블루의 피요르드가 꿈틀거리며 농울 치는 핏빛 노을 구름과 환상적으로 조응하고 있다. 그 남성다운 굵은 블랙 블루는 강하게 꿈틀대며 저 붉음의 열정 속으로 파고들어 하늘에 끝자락에 열기를 이어주고 있다. 뭉크의 무의식 세계를 과감하게 분출해 냄으로써 페르소나(Persona)적인 정신의 평정을 북돋아주는 응원의 메시지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고 보니 이제 동행했던 친구들이 타나토스가 보낸 죽음의 사자가 아니라고 부드럽게 속삭인다. 검붉은 절규는 어느새 선홍빛 열정과 견고한 푸름의 에너지로 전이되고 승화되어 오슬로 해변도로에 희망의 반향을 일으킨다.
이제야 절망적이던 뭉크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며 <절규>의 진실이 또한 차분하게 읽힌다. 그대는 이제 그토록 죽음과 불안과 공포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던 정신공항장애의 터널을 벗어나고 있다. 「절규」를 희망의 ‘광기’로 육지와 바다와 하늘에 불을 지르는데 성공 한 것이다. 또한 그대의 광기어린 <절규>를 통해 우리는 이 처절하리만큼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한 절규를 대리만족하는 카타르시스마저 경험하였으니 어찌 명작이 아니 할 수 있겠는가.
4. 맺으면서
요약하자면 전반부에서는 살바도르 달리가 <나르시스의 변신>에서 나르시스 신화를 그로테스크한 고독의 환상으로 내면화시켰다면, 이를 패러디(perody)한 김춘수의 「나르시스의 노래」는 원작의 분위기를 차용, 내면화시킴으로써 투명한 비극적 아름다움으로 변용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곧 김춘수의 시는 예술과 종교, 철학적 사고로 읽어내야만 하는 함을 시사한다. 살펴 본바와 같이 김춘수는 그러한 달리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원 텍스트의 의미를 주관화시켜 새로운 이해와 재해석에 의해 원작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창조 한 것이다. 화가가 대상을 관찰하여(혹은 신화를 상상하여) 대상의 내적 의미를 간소한 초현실주의적 선의 형체로 표현 했듯이 말이다. 바로 이것이 의 패러디(perody) 시의의 견고한 작시 태도라 할 수 있겠다. 그러한 측면에서 김춘수는 한국 시학사에서 패러디(perody)를 진정한 문학의 줄기로 인식하여 시학의 발아를 최초로 선언한 ‘시와 그림의 동족의 대통령’이었음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후반부에서는 시학측면에서 뭉크의 그림을 통해 융숭 깊은 철학적 사유의 발견이 가능함을 제시 해 보고자 하였다. 어찌 보면 그것이 시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뭉크의 <절규>를 절망으로 보았지만 필자는 반대로 광기어린 ‘희망’으로 읽었다. 문학 철학적 측면에서는 그러한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화가의 자화상은 표면의 얼굴을 회화한다지만, 뭉크는 내면의 얼굴까지 형상화 하였으니 이제 ‘철학자 시인 뭉크’라고 문학사에 한줄 새기어 호칭할 수 있지 않을까? 전술한 바와 같이 그림을 시로 읽어 낼 수 있는 묘미를 선사 해 준 선각자는 언급한 바처럼 무의식의 세계에 언어의 전도사를 자임한 라캉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으로의 무의식 개념이 기반을 이루고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추론이 가능한 것은 그는 절절한 체험에서 우러나는 무의식을 영혼의 노래로 육화하여 캔버스에 오롯이 그려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절규>를 통해 내재되어 있는 분열과 소외를 경험하지만 이를 세계와 소통하고자 하는 광기어린 희망의 절규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유일한 화가였기에 온가족의 죽음이라는 ‘태생적인 잔혹사’를 극복하고 팔순을 넘기는 생을 구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문학 철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정신분열자가 아니라 페르소나(Persona)를 유지하고 있었던 '정상인'이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그림과 시는 문학 철학적으로 시의 동족으로서 특히 인용한 바와 같이 패러디(perody)와 그 바탕을 이루는 철학적 사유라는 측면에서 더욱 유의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그림을 통한 패러디(perody) 시 창작의 견고한 시학적 디딤돌을 제공해 주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