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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의 전주곡 - 계몽사상의 확산과 목걸이사건
절대왕정의 쇠퇴
(1) 혁명의 요인들
구제도(舊制度 / 앙시앵 레짐(ancienregime)의 모순,
시민계급(市民階級 / bourgeoisie)의 성장과 계몽사상(enlightenment/ 啓蒙思想)의 만연(漫然),
부르봉왕실의 재정 파탄(破綻),......
이상 열거된 내용들은 프랑스혁명의 원인을 설명할 때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구제도, 즉 앙시앵 레짐이란 무엇인가? 정치적으로는 왕권신수설의 신봉, 사회적으로는 봉건적인 신분제도의 유지, 문화적으로는 카톨릭교회의 지배체제라고 요약할 수 있는데, 이 세가지 가운데 특히 신분제도의 모순을 지적하는 사례가 많다.
일반적으로 봉건사회에서 널리 구성되고 있었던 피라미드형 신분구조에서, 제일 윗 층에는 인간의 영혼과 신에게 봉사하는 성직자(聖職者)들이, 그 다음 층에는 싸움, 즉 전쟁을 맡은 귀족(貴族)들이, 그리고 그 아래로는 이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그 대상(代償)으로 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일하는 평민들이 있었다.
이런 봉건적인 신분질서가 18세기 후반까지 프랑스에서는 계속되고 있었고 이것이 잘못된 제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유럽사회에서 프랑스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이런 제도가 없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독일과 러시아 등 동쪽으로 갈수록 이보다 훨씬 더 심했다. 그렇다면 프랑스혁명은 다른 곳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프랑스 혁명이 영국의 청교도혁명이나 명예혁명과 다른 점이 있다면, 계몽주의 사상이 사회전반을 휩쓰는 가운데 계몽전제군주 제도를 이상으로 생각하고, 여기에 걸 맞는 정치체제를 도입하고자 했던 세력들이 왕권을 약화 시켰고, 상대적으로 지위가 상승된 부르주아지들이 민중들의 폭동을 적절히 활용하였다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을 전형적인 시민혁명이라고 보는 견해도 이런 것과무관하지 않다.
절대왕정하에서 민중들이 일으킨 폭동(暴動)은 거개(擧皆)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다. 그런데 막상 이들이 빵을 얻기 위해 관청이나 부호들의 저택을 습격하면, 군대가 출동하고 빵이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폭도라는 이름으로 잡혀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거나 다른 곳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시대가 흘러 18세기가 되면 이런 불합리한 정치사회를 위로부터 개혁하고자 등장한 것이 이른바 계몽전제군주(啓蒙專制君主)들이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1740 ~ 86),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1762 ~ 96),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1765 ~ 90) 등이 대표적인 계몽전제군주에 해당한다. 산업을 육성하여 경제를 발전 시키고 근대화를 이룩하려면 군주가 전제권력을 쥐고 전면에서 귀족들의 횡포를 막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조금씩은 다르지만 이들 계몽전제군주들이 취한 일련의 조치들이 실패했거나 독재군주로 그 양상이 변질되고 말았다. 귀족들을 억압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일반 서민들을 보호하고 산업을 육성하려면, 이를 뒤 받쳐줄 수 있는 정치 세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귀족들의 반발 또한 거세기 때문에 비록 성공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결국 왕권은 적당한 선에서 귀족들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유럽은 동쪽으로 갈수록 근대화가 늦어지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경제적으로 열악했고, 따라서 새로운 정치체제를 이끌 만한 세력들, 이를테면 영국의 젠트리나 프랑스의 부르주아지 같은 중간계급의 성장이 늦었기 때문이다.
근대화의 요건은 경제적인 성장이 있어야 하고 여기에 수반된 시민계급의 성장이 뒤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귀족이 아니면서도 먹고살기에 넉넉할 정도로 재산도 있고,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 많아야 된다는것이다. 물론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영국에 뒤이어 나름대로 이런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들을 부르주아지(시민계급)라 한다.
당시 프랑스의 인구는 약 2천 3백만명 정도. 이 가운데제 1신분에 속하는 성직자가 약 10만명, 제 2신분에 해당하는 귀족들이 약 40만명, 나머지 2,250만명이 제 3신분에 해당하는 평민들인데, 이들 제 3신분을 다시 세분(細分)하면, 군인이 약 40만명, 부르주아지가 약 2백만명, 그 외 약 2천만명이 프롤레타리아들이다.
아무리 제도상의 모순과 빈부의 차이가 심각하다고 해도, 민중들만의 저항은 기껏해야 폭동에서 거치고 만다. 아래로부터의 혁명(革命/ revolution)은 지배 층이 무기력하거나 자신감이 없을 때, 대안(代案)을 가진 진보적인 상층 집단이 민중들과 손을 잡게 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 프랑스에서 이런 역할을 담당했던 진보적인 집단을 통 털어 계몽사상가, 혹은 계몽주의자들이라고 불렀고, 이들의 뒤에는 부르주아지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2) 계몽사상의 확산
프랑스의 계몽사상(enlightenment/ 啓蒙思想)은 앞 글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볼테르가 1734년 뉴턴의 이론을 소개한다는 명목으로 철학서간을 간행한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의도했던 실질적인 이유는 로크(Locke,John / 1632 ~ 1704)의 근대시민 정치사상, 즉 주권재민(主權在民)과 국민의 반항권(反抗權)을 골격으로 하고,
뉴턴의 자연과학에 입각한 합리적 사고방식을 가미하여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비판하고, 이를 살롱을 통해서 귀족사회에 유포시키는데 있었다.
볼태르가 일으킨 바람으로 프랑스의 살롱에서는 갑자기 영국에 심취한 사람(Anglomanie)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영국의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에아낌없는 찬사를 보냈고,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런 부류들을 통칭해서 계몽사상가(啓蒙思想家) 혹은계몽주의자(啓蒙主義者)들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러나 말이 계몽사상이지 이들의 주장은 출신성분이나 지위, 사회적인 활동 등에 따라서 그 양상은 천태만별(千態萬別)이었다. 어떻게 보면 국가권력이나 제도가 자기를 중심으로, 혹은 자신을 위해서 개편되기를 원했던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딱 부러지게 내놓고 "이것이 계몽사상이다"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통일되고 응집된 핵심적인 이론은 찾기 힘든다. 애써 한 가지 공통점을 찾는다면 이들 모두가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개혁을 바랐던 인문주의자(Humanist)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실상이었다.
독일의 칸트는 계몽이란, 아직 미자각상태(未自覺狀態)에서 잠들고 있는 인간에게 이성(理性)의 빛을 던져주고, 편견이나 미망(迷妄)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定義)를 내렸고, 이것이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비록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어설픈 모양새이기는 했으나 다양한 이들 계몽사상가들의 주장이 어떻게 해서든 많은 사람들을 계몽시켰고, 프랑스혁명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인데, 계몽사상 확산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살롱과 더불어 이들 사상가들의 글을 모아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편찬한 백과전서(Encyclopedie)라는 서적의 보급이 역할의 일익(一翼)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전집류의 사전을 편찬한 디드로(Diderot, Denis/ 1713 ~ 1784)는 무신론(無神論)의 입장에서 맹인서간(盲人書簡 / Lettre sur lesAveugles)을 발표하여 물의를 일으킨 바 있었고, 과학아카데미의 회원으로 활동하던 달랑베르(d' Alembert, Jean Le Rond / 1717 ~ 1783)는 수학, 물리학, 천문학의 집필을 맡아 백과전서 편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두 사람이 공동으로 184명의 계몽사상가와 학자들이 주장하는 글을 감수(監修)·편집(編輯)하고, 1751년 제 1권 간행을 시작으로 근 30년의 세월을 소요하면서 완성한 것이 백과전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대규모 편찬 사업이 국가에서 의도적으로 시행한, 말하자면 거의 같은 시기 중국의 청나라에서 발간한 사고전서와 같은 관찬(官撰)이 아니고, 개인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엮은 출판이라는데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전제군주제도라고는 하지만 동·서양의 차이는 이렇게 달랐다.
여기에 참여했던 184명의 계몽사상가와 학자들을 백과전서파(Encyclopedistes/ 百科全書派)라고 하는데, 자유주의 경제를 주장했던 튀르고, 타고난 비판정신으로 바람을 몰고 다녔던 볼테르, 3권 분립을 주장한 몽테스키외, 사회계약설을 제창한 루소, 중농주의자 케네 등 우리들의 귀에까지 익히 들었던 이름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개혁을 겨냥했다는 것은 기존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것이다. 특히 신학과 교회에 대한 강한 비판을 가한 이 백과전서가 세상에 나오자 당국에서는 발행금지 처분을 내리고 이를 단속하였다. 그런데도 이 책이 세상에서 빛을 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혁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럴까?
이것은 이를 단속해야 할 지배 층 내부에 동조자 내지는 보호자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백과전서의 보호자로 루이 15세의 애인퐁파두르부인(Jeanne Antoinette Poisson, Marquise de Pompadour / 1721 ~ 1764)까지 등장하는 놀라운 사실도 있었다.
파리에서 부유한 군수상인의 딸로 태어나서 징세청부업자와 결혼했다는 루이 15세의 이 아름다운 총희(寵姬)는 7년전쟁에 개입하는 등 국왕을 등에 업고 근 20년간 국정을 간섭했고, 곳곳에 동양 풍의 저택을 짓고, 미술품을 수집·전시했으며, 백과전서의 편찬에도 보호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가 고가의 미술품을 수집함으로서 미술계로서는 활력을 얻을 수 있었으나, 왕실로서는 재정 악화를 초래하게 되었고, 백과전서 편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요즘말로하면 권력의 실세가 정권에 반대하는 재야세력들을 도와 주어 멸망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쌓여서 프랑스혁명은 한 발 앞으로 성큼 다가서게 된다.
백과전서 간행에 보호자 역할을 맡은 중요한 또 한사람의 인사가 법복귀족 출신의 말제르브(Chretien Guillaume de Lamoignon de Malesherbes/ 1721 ~ 1794)라는 인물이다. 그는 1752년 서적검열관장(書籍檢閱官長)으로 취임하였는데, 불온서적을 단속해야 할 위치에서 그 반대로 백과전서의 출판을 보호해주고 드디어 허가까지 해주었다.
루소나 디드로와 친교가 두터워서 항상 그들을 후원해주기도 했던 그는, 정부에서 백과전서의 원고를 압수하라는 지시가 내리면 곧 바로 디드로 일파에게 연락, 문제의 그 원고를 자기 집에 숨겨줌으로써 위기를 면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판 결과라는 것을 당시에는 몰랐을것이다. 결국 그는 혁명이 일어 났을 때 국왕을 옹호하다가 반동으로 몰려 단두대의 칼날에 목숨을 잃었다.
이 외에도 계몽사상가들을 옹호하거나 보호했던 관리나 귀족은 수없이 많았다고 한다. 수많은 살롱에서는 진보적인 계몽사상가들을 환영했고, 이들을 지지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사상가들 중 살롱이나 귀족의 부인들과 인연을 맺지 않았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디드로와 함께 백과전서를 편찬한 달랑베르는 어느 살롱 여주인(드 탕생 후작부인)의 뱃속에서 태어나자 마자 교회 계단에 벌어져 사생아로 자랐고, 역시 아르봉 백작 부인의 사생아로 태어나 사랑에 빠진 여성의 정열과 재기(才氣)가 보석처럼 수 놓여져 고금을 통한 여류 서간문학의 일대 걸작을 남긴 레스피나스(Lespinasse,Julie-Jeanne-Eleonore de / 1732 ~ 1776)는 달랑베르의 애인이었다.
백과전서의 여신(女神)으로까지 칭송 받던 그녀가 데팡부인의 살롱에서 많은 사람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달랑베르를 애인으로 삼았다가,그 후 기베르 백작의 애인이 되면서 기베르백작에게 수 많은 연애편지를 써 보낸것이, 그녀의 사후 1809년에 간행된 저 불후의 명저 서간집(書簡集)이다.
(3) 젊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목걸이 사건
1774년 5월 10일, 루이 15세가 천연두(天然痘)를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사냥과 여색을 좋아했던 이 국왕의 죽음에 대하여 파리시민들은누구도 슬퍼하지 않았고,
그의 손자로서 새 국왕이 된 루이 16(Louis XVI /1754. ~ 1793.1.21)에게 혹시나 하는 한 가닥 희망을 가졌다.
20세의 청년으로 부르봉왕조의 다섯 번째 왕으로 즉위한 루이 16세(1774∼92)는 할아버지 루이 15세처럼 여색에 탐익(耽溺) 하지는 않았으나,
유별나게 사냥을 즐겼고, 자물쇠 만드는 취미를 가지고 있어서 이런 일에만 몰두하고 시간을 보냈다.
불신이 팽배하고 기강이 해이된 마당에 우유부단한 이런 범용(凡庸)한 인물이 프랑스의 국왕으로서는 결코 적격자가 될 수는 없었다.
여기에 국내 외의 상황은 너무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즉위한 2년 후가되는 1776년 7월 4일,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미국의 독립을 단순한 영국 식민지로부터의 독립(獨立/ Independence)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다수의 대표자가, 그들 자신들이 만든법에 따라 지배하는 정치체제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혁명(革命 / American Revolution)이라고한다. 이런 혁명이라는 요원(遼遠)의 불길은 대서양 건너 북미대륙에서 발화하여 유럽으로 건너올 채비를 하고 있었다.
곧 이어 이런 불길은 유럽으로 들어왔는데,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은 아메리카를 실제 이상으로 이상화(理想化)하는 경향에 빠지고, 아메리카전설(傳說)이 생겨나 수많은 젊은이들이 독립전쟁을 돕기 위해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런 과정에서 미국의 독립정신(혁명정신)이 유럽으로 역수출되었고, 이래서 유럽사회가 술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나기도 했다.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 저항했고, 영국 본토에서도 의회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1780년, 한 때 런던시내가 1주일 동안 무법천지가 되기도 했다. 81년에는 도버해협을 건너 스위스로 불길이 옮겨 붙었고, 83년부터는 네덜란드에서, 89년에는 벨기에로 그 불길이 옮겨갔다.
그러나 이런 것은 자체 내부의 분열이나, 다른 나라의 군대가 들어와 진압되고 말았지만, 이런 혁명운동에 가담했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망명처를 찾아 파리로 모여들게 되고, 따라서 파리는 사람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프랑스의 국내사정은 프랑스인 들 뿐만 아니라 유럽전체의 관심에서 벗어날수 없고, 많은 사람이 모이면 별별 짓거리가 다 생겨난다. 더욱 심각한 것은 파리라는 한정된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절대식량의 부족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를 즈음 파리에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비 마리앙투아네트를 사이에 두고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목걸이 사건(Affaire du collier/ Affair of the Diamond Necklace)이라는 게 발생하여 부르봉왕가의 위신 추락과 민심 이반(離反)이라는 두 가지 악수(惡手)가 동시에 불거져 왕실을 더욱 궁지로 몰아갔다. 이 희대의 사기(詐欺)사건을 잠시 따라 가 보자.
1772년 스트라스부르크(Strasbourg)의 사교(司敎) 루이 드 로앙(Louis de Rohan / 1734 ~ 1802)이라는 자가 오스트리아 주재 프랑스대사로서 2년간 빈에 머물면서 루이 16세와 갓 정략 결혼한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난하고 싸다녔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녀의 막내 딸이면서프랑스 왕비가 된 당사자, 곧 마리 앙투아네트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경솔했던 그가 임기를 마치고 귀국 후 궁정의 요직을 바랐으나, 자기가 그처럼 비난하고 다녔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가 되어 베르사이유의 안방 주인으로 앉아 있었기 때문에 일이 꼬이고 말았다. 자기의 경솔한 태도를 깊이 반성했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다.
이런 로앙에게 발루아왕조의 후손으로 몰락한 드 라모트백작부인(Comtesse de La Motte. Jeanne de Luz de Saint-Remy de Valois / 1751~ 91)이 나타나 왕비와 화해 시켜주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경박한 야심가 로앙은 앞 뒤 가리지도 않고 뛸 듯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즉시 자신의 지난 잘못을 반성하는 글을 써서 왕비에게 전해 달라고 드 라 모트백작부인에게 건네고 하회(下回)를 기다렸다. 그러자 왕비는 그 백작부인을 통해서 15만 리브르의 돈을 꾸어 달라는 편지를 역시 드 라모트 백작부인을 통해서 보내왔다. 일이 잘돼 간다고 판단한 로앙은 즉시 돈을 마련하여 백작부인을 통해서 왕비에게 전달했다.
1784년 8월 어느날 밤, 드디어 로앙과 왕비와의 데이트 약속이 이루어지고, 근위병으로 변장한 로앙은 베르사이유궁전에서 왕비를 만난다. 그리고 왕비는 로앙에게 속삭이듯 "과거는 서로가 다 잊어 버립시다. 생각해 봐야 아무 쓸모 없습니다."라고 말한 후 그의 발 밑에 무릎을 꿇은 로앙을 뿌리치고 달아나듯 어둠 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여기까지가 백작부인이 연출한 기막힌 사기연극의 일 막이다.
왕비의 글씨를 흉내 내서 대필해준 것은 백작부인의 애인이었고, 로앙과 데이트한 것은 왕비와 비슷한 모습을 한 니코르란 뒷 골목 여자였다. 이 여자를 구하기 위해 백작부인은 그의 남편과 함께 뒷 골목을 샅샅이 뒤졌다고 한다.
이런 남편의 적극적인 협조아래 모트백작부인은 그야말로 희대(稀代)의 대 사기극, 이른바 목걸이 사건을 다시 연출한다. 이 사건의 서막(序幕)은 이미 루이 15세 때 올라 있었다.
당시 왕실을 출입했던 보석 세공사로서 샤롤 오기스트베머와 폴 바상지라는 두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세계 최고급의 다이아몬드 647개가 완전한 조화를 이루면서 배열된 훌륭하고 아름다운 목걸이를 만들었다. 이들이 판매대상으로 삼은 고객(顧客)은 루이 15세, 대금은 무려 160만 리브르,...
이 엄청난 가격에도 불구하고 루이 15세라면 그의 애인 뒤바리 부인을 위해서 선뜻 사서 그녀에게 선물 하리라고 확신했었는데, 일이 묘하게 되느라고 갑자기 루이 15세가 죽어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 뿐만 아니라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 모아 목걸이를 만들었던 이들 세공사들은 빚쟁이들로부터 심한 빚 독촉까지 받게 되었다.
이들이 다음 고객으로 노린 것은 루이 16세와 아름다운 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마침 갓 출산한 그녀에게 남편 루이 16세의 선물로는 아주 적격이라고 추켜 세우면서 이들 세공사들은 목걸이를 들고 베르사이유궁전을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그러나 아름다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나돌던 소문과는 달리 이를 거절하는 분별력을 가졌다. 결국 이들은 수년간 끈질기게 왕비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를 썼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런 틈 세를 비집고 드디어 모트백작부인이 끼여들어 다시 사기 극을 연출했다. 우선 보석상에는 왕비가 마음이 돌아서서 문제의 그 목걸이를 사고자 하는데, 세상의 이목이 너무 번다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시켜서 구입코자 하니 그렇게 양해해 달라고 통보했다.
그리고는 역시 남편의 협조 아래 모트백작부인은 로앙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가 하면, 왕비와의 친분관계를 과시하고, 왕비의 부탁이라고 하면서 그 목걸이를 로앙이 사서 보내주면 후사하겠다는 거짓 왕비의 뜻을 전했다.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 이 분별없는 로앙은 보석상에서 목걸이를 구입, 백작부인을 배달부로 왕비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이 목걸이는 왕비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백작부인이 분해해서 중요한 것은 팔거나 자신이 가졌고, 나머지는 그녀의 남편이 런던에 가서 처분했다.
그리고 이들은 이 돈으로 4륜마차를 구입하고, 집은 호화가구로 치장했으며 최고급의 옷을 해서 입었다. 그리고는 로앙에게는 이런 왕비의 가짜 편지를 다시 전달했다. "...빚진 돈은 3개월 후에야 갚을 수 있겠다........"로앙은 이 편지를 진짜 왕비의 편지로 믿었다.
로앙은 보석상에게 지불해야 될 첫 번째 불입금을 자신의 힘으로 마련해 보려 했지만 워낙 큰 돈이라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불안해진 보석상이 직접 왕실에 문의(問議)하자, 드 라 모트백작부인의 사기(詐欺) 행각(行脚)은백일하에 들어 나고 말았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유럽이 주목하는 가운데 1785년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9개월 동안 진행되었는데, 재판에서 모트부인은 자기의 과실을 뉘우치기는 고사하고 끝까지 모든 것은 왕비의 소행이라고 강변했고, 민심은 사실의 진위(眞僞)보다는 상대적으로 약자인 모트부인의 말을 믿으려했다. 드디어 파리 고등법원은 이런 판결을 내렸다.
".....로앙 추기경이 계획에 동의한 사실로 범죄를 예측했다고 해서 유죄로 판결할 수는 없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경박하고 무분별하다는 평판이 있는 남녀를 좋아하고 곁에 두고 있으므로, 우리로서는 추기경이 그렇게 생각해도 하는 수 없다....." 따라서 로앙 추기경은 무죄, 가짜 왕비 역을 맡았던 니코르도 무죄, 드 라 모트백작부인 한 사람만 태형(笞刑), 낙인(烙印), 종신금고(終身禁錮)에 처한다........
따지고 보면 국왕과 왕비는 이 사건에서 최대의 피해자다. 그런데도 험악한 세상인심은 이들 국왕 내외를 난도질하기 시작했고 오히려 모트백작부인에게 동정(同情)을 실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누구의 도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트백작부인은 파리를 탈출하여 런던으로 건너갔다.
또다시 그녀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불안해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는 총신을 파견하여 20만 리브르를 주고 그녀의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돈은 돈대로 받아 먹고 백작부인은 계속 독설을 내 뱉기 시작했다.
그리고 회고록이란 걸 집필하여 문제의 목걸이를 받은것도 로앙을 만난 것도 왕비 자신이라고 우기고, 자신은 이들에게 회생된 어리석은 한 마리의 양에 불과하다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프랑스 왕실은 얼마만한 권위와 위엄을 갖출 수 있겠는가?
전원 풍의 아름다운 도시 빈에서 16명의 형제자매중 막내로 곱게 자라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지내다가, 비록 정략이라고는 하나 프랑스로 시집 온 자체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잘못이라면 잘못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프랑스 인들이란 감상적이면서도 매우 즉흥적이고, 애국적이면서도 감정의 기복이 심하여 외국인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왕권을 제한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귀족들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bourgeoisie)들 까지 가세하여 한 목소리를 내게 된다. 그렇다면 부르주아지는 누구며, 이들과 귀족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고, 왕권 제한을 전제로그들이 내민 대안은 어떤 것들인가? 왜 부르주아지라는 중간 계급의 성장이 있었는데도 시민사회로 바로 넘어서지 못하고 혁명이라는 과격한 과정을 겪어야만 했는가?
어쩌면 이들 모두가 자신들만이 왕권의 상속자라고 치부하는 모순에 빠져들고 있었고, 이런 모순을 부르봉왕조는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각기 다른 생각들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우선 뒤엎어 놓고 보자는 심산에서 혁명을 시작했다면, 그 혁명이 조용하게 끝날 리가 없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에서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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