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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기다렸던 오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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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3: 29-32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형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칼자루 쥔 사람이 요셉이라서 요셉의 형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아마도 다른 지역에 곡식이 있었다면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넓은 애굽땅 요셉이 살고 있는 곳에서만 곡식을 판 것이 아닐 것이었습니다.
다른 지역도 요셉의 명에 의하여 곡식을 팔았던 지역이 여러곳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짐작한 요셉은 요셉의 형들 중 한명을 불모로 잡아 놓았습니다.
이제 30년 가까이 보지 못하였고 소식도 듣지 못하였던 동생을 보게 되었습니다.
엄마의 피붙이 동생을 낳다가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요셉의 나이는 10살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몇 년을 함께 살다가 요셉은 종으로 팔려 갔고요.
아직 어린 철부지였던 동생 베냐민의 안부가 너무 궁금하였을 것입니다.
살려달라고 그렇게 사정하였던 요셉의 과거를 생각하면 정말 믿을 수 없는 형들이었습니다.
그 동생이 왔습니다.
너무 반가워 울컥하는 충동을 다잡으면서 안으로 들어가서 울고 나옵니다.
지난번에는 베냐민이 없을 때도 울었죠?
형들이 요셉의 이야기를 하였을 때 요셉은 울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밝혀서는 안 되었습니다.
동생 베냐민의 환경을 알기 전에는 절대로 자신의 신분을 노출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제 동생이 안전함을 확인한 요셉은 형제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를 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아마도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
갑자기 총리관저로 초대를 받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이런 말을 합니다.
창 43:18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완전 얼어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까?
지난번 곡식을 사로 왔을 때 지불했던 돈이 자루에 그대로 있었다.
아마도 그러한 착오 때문에 우리는 이미 어떻게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두려워서 청지기 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창 43:20-22 “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그리스도인 양심들은 적어도 이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혹 차착이 있어서 나의 돈이 그대로 나의 수중에 있다면 하나님께서 주셨다 생각하고 입 싹 닦으면 안 되겠죠?
집에서 아버지 야곱이 바르게 처신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청지기는 무슨 대답을 합니까?
창 43:23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요?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셨다.
아마도 요셉의 형제들은 정신이 없어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올바로 기억하지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나쁜 것은 아니다 라고 생각했겠죠?
그리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고 그들의 나귀에게도 먹이를 주더라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가져온 예물을 준비하였습니다. 누가 준비해 준 예물이었습니까?
창 43장 1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43:11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마지막 부분에 개역 성경에는 비자와 파단행이라고 되어 있는데 비자와 파단행이 어떤 것일까 하고 생각하였는데 개정성경은 유향나무 열매와 감 복숭아라고 되어 있네요. 감복숭아라는 말도 첨 듣죠. 귀한 열매들이다 라고 이해하고요.
요셉이 어렸을 때 두 번의 꿈을 꾸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성경이 그렇게 말을 합니다.
첫 번째 꿈은 곡식단이 요셉의 단을 둘려서서 절을 하는 것이고요.
두 번째 꿈은 해와 달과 별이 요셉에게 절을 하더라.
그래서 형들이 어떻게 해석하였습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너희에게 절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요셉의 부모가 요셉에게 절을 하였습니까?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 않았죠? 그럼 꿈 중 하나는 틀렸습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그 꿈의 성취가 11절의 말씀이라 이해를 합니다.
비록 요셉 앞에서는 무릎을 꿇지 않았지만 예물을 준비하여 드리라는 말은 무슨 말로 이해가 됩니까?
여러분들은 예물과 선물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선물은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남에게 어떤 물건 따위를 선사함 또는 그 물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요.
선물과 관련된 예를 들어보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성규성도님이 침례를 받을 때 구집사님이 성경을 선물했다. 맞는 예인가요?
그런 것을 가지고 예물이라고 하지 않죠?
결혼 전에 보내는 선물을 가지고 예물이라 하나요? 선물이라 하나요?
그럼 예물은 무엇을 가지고 예물이라 하나요?
국어사전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 고마움을 나타내거나 예의를 갖추기 위하여 보내는 돈이나 물건.
2. 혼인할 때 신랑과 신부가 기념으로 주고받는 물품.
3. 신부의 첫인사를 받은 시부모가 답례로 주는 물품.
보통 어려운 자리를 원할한 자리로 바꾸어 보려는 의도들이 있는 물품처럼 보입니까?
저희들은 그런거 아무것도 없이 하였지만 처녀 총각들이 결혼 전에 신부집에 신랑집에 보내는 선물을 예물이라 하지요. 그리고 예단이라고 하고요.
그런데 결혼하고 난 다음 생일이라고 무엇을 싸주는 것을 가지고는 선물이라 합니까 예물이라 합니까?
그럼 정확하게 정의는 내리지 못해도 예물과 선물의 차이를 좀 느낄 수가 있습니까?
꼭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제가 생각해보니 예물은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을 가지고 예물이라 하고요, 선물은 신분 상관없이 보내지는 것을 선물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선물입니까? 예물입니까? 선물이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예물입니까? 선물입니까? 예 그것은 예물도 아니고 선물도 아니고 헌물이라고 합니다.
그럼 예물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잘 봐 주세요 라는 것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야곱은 요셉에게 무엇을 보냈다고요?
예물을 보냈다.
그리고 막내 아들 베냐민을 보내는 것 이 모든 일들은 요셉의 두 번째 꿈에 대한 성취라고 저는 이해를 합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마련해 주신 예물을 정돈한 형제들은 요셉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점심을 함께 하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런 말씀을 보여 줍니다.
창 43:26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
다시 한번 형들은 엎드려 절합니다.
이번엔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아버지가 보낸 예물과 함께 절을 함으로 아버지가 그 중 함께 한 것과 다름 없었다고 했죠.
요셉은 그런 거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궁금한 안부를 묻습니다.
창 43:27-31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이르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요셉이 울보 같다고 언제 말씀 드렸죠? 베냐민을 보니까 마음이 복받쳐 있을 수가 없어서 율곳을 찾아 울고 나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씀은 오찬의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창 43:32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그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형제들의 순서대로 자리를 베열하는 것을 보고 요셉의 형들은 이상이 여겼다 햇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라고 생각했겠죠?
그 이상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생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 보다 음식을 다섯 배나 줍니다.
요셉은 이런 날이 오기를 너무나 기다렸습니다.
동생과 함께 먹는 날을 말입니다.
저는 이제 여기서 우리와 함께 먹기를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좀 보려 합니다.
얼마 전 구도자 할머니 식사 대접을 하러 간다고 해서 제가 카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맛있는 것을 대접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다른 나라도 그런지 몰라도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만나면 식사부터 하려고 하죠?
왜 그렇습니까? 먹는데 무엇이 생긴다고요? 정이 생긴다.
요셉이 동생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무슨 마음이 들었을까요? 가나안에서는 흔하게 먹을 수 없는 그런 값진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을까요?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애굽의 좋은 곳들도 보여 주고 싶었을까요?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저는 어느곳을 방문하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우리 장유교회 성도들입니다. 함께와서 먹고 싶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경치 좋은 곳을 보면 우리 성도님들 떠 오릅니다. 함께 오고 싶다고요.
얼전 고령 치과 원장님 만들어 놓으신 수목원을 구경시켜 주려고 아내와 함께 갔습니다. 근데 전에 없던 풍경이 만들어 져 있었습니다.
저수지를 가로 질려 목조 다리를 만들어 놓았고요 둘래길도 만들어 놓았고요.
다리 건너 가보고 싶었는데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오고 싶어서 그냥 가자고 했습니다.
누구의 마음도 그렇다는 것입니까? 아마도 요셉의 마음은 더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알아 볼 것이 있습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형들의 마음을 떠 보려고 동생 베냐민에게는 음식을 더 풍성하게 차려 주었습니다.
얼마나 고대하던 자리였는지 모릅니다.
이곳에 사랑하는 아버지도 함께 계셨으면 좋을 것을 하는 마음 요셉에게 있었을까요?
예수님 지상 봉사를 거의 마쳐가려 할 때도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려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음식과 음료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 내용이 누가복음에 있습니다.
눅 22:15-20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내가 고난 받기 전에 다른 말로는 십자가 전에 무엇을 하기를 원하였다고 합니까?
함께 음식을 먹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이 유월절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기 까지 먹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떡과 포도즙을 주시면서 이것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를 위해 주어진 내 몸이고 내 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를 알았다면 제자들이 어떻게 그 떡을 먹고 마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십자가가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마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를 만나 함께 또 다시 음식과 관련된 말씀을 하십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무슨 이야기 입니까? 우리와 함께 먹고 싶다는 말씀 아닙니까?
요셉이 자기 동생과 형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함께 하기를 원하였던 것 이상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먹는 자리를 함께 하고 싶다,
우리 성도님들 여러분들도 그 자리에 함께하길 원하십니까?
저 하늘 문이 열리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생명나무 아래 그 식탁으로 초대 받을 때 우리 함께 그 자리에 참여하게 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