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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5월 1일
마지막 잎새는 떨어지지 않는다던
내장목수 석이를 생각하며 TV 본다
화면 속 크로즈업 되는 불멸의 저 청문회.
한 커트씩 퇴색하는 초여름 비극의 스냅
우리들의 눈과 귀로 깊숙이 핏물 밴다
선홍빛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이 낭자하다.
먼 산 노을 불이 되어 내 가슴에 걸려 있고
다시 우리 피부를 타고 내리는 빗방울
화면의 조잡한 字母, 사는 것이 어설프다.”
-이재창 시인의 「年代記的 몽타주·2 – 청문회」 전문
*오늘은 노동절(May Day) 1886년 오늘 미국 시카고 노동자8만명의 8시간노동 요구 총파업을 기려 1889년 오늘을 노동절로 함, 우리나라는 1958년에 3월10일(대한노총 창립일)을 노동절로 함 1963년 근로자의 날로 이름바꿈 1994년에 오늘로 바꿈
*인도의 오늘은 ‘비닐 없는 날’
*구 동독의 노동자의 날
*레이 데이(Lei Day): 하와이
998년 [음]목종(穆宗) 원년, 역대 왕의 기제사 법식을 정함
1091년 고려, 일식 발생
1127년 송의 고종, 남경에서 즉위 (국명은 남송)
1339년 [음]충혜왕(후)(忠惠王(後)) 즉위년, 왕(충혜왕)이 보흥고(寶興庫)를 설치함
1360년 [윤]공민왕(恭愍王) 9년, 왜구가 강화를 침략함
ㅡ윤5월 병진 초하루 왜구가 강화(江華)를 노략질하여 300여 인을 죽이고, 쌀 40,000여 석을 약탈하였는데, 심몽룡(沈夢龍)이란 사람이 왜구 13명의 목을 베고 나서 결국 적에게 살해되었다.
1398년 [윤]태조 7년, 태조가 사초(史草)를 미리 보고자 하여 바치게 함
1415년 조선, 일식 발생
1425년 [음]세종 7년, 공사 천인(賤人)을 속안(續案)에 등록하게 함
1446년 [음]세종 28년, 함경도에 삼수군(三水郡)을 신설함
1451년 [음]문종 1년, 감초(甘草) 재배를 소홀히 한 광양 관리를 처벌함
ㅡ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전에 감초(甘草)를 보낼 때에 땅의 성질이 기름진 곳을 가려서 나주(羅州)·진도(珍島)·광양(光陽) 세 고을에 심어서 기르게 하였는데, 이제 경(卿)이 보고한 모[苗]를 생산한 수를 보건대, 나주의 5조(條)가 1백 95조를 생산하고, 진도의 26조가 1백 24조를 생산하였으나, 광양의 9조는 다만 1조가 모를 생산하고 나머지는 모두 생산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위의 세 고을의 풍기(風氣)와 토성(土性)은 원래 서로 다르지 않은데 나주·진도에 심은 것은 모두 다 모가 살아서 번성하고, 또 이 밤섬[栗島]에 심은 것도 해마다 번성하는데, 홀로 광양에 심은 것만이 기사년에 2조와 경오년 에 7조가 말라 죽었다. 그 관리(官吏)가 조심하여 기르지 않아서 장차 종자를 끊어지게 할 것이니, 마땅히 곧 죄를 다스리되 사유(赦宥)를 지낸 것을 논하지 않으며, 이제부터는 때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보내어 기르는 상황을 살필 것이고, 경도 순행(巡行)할 즈음에 몸소 살펴보아 번성하게 하라."하였다.
1462년 [음]세조 8년, 호적(戶籍)에 의거해 군적(軍籍)을 작성하게 함
1470년 [음]성종 1년, 명나라에서 성종의 책봉 조서(詔書)와 고명(誥命)을 보내 옴
1504년 [음]연산 10년, 김제신·한명회·정창손·심회 등을 부관참시 함(갑자사화)
1510년 [음]중종 5년, 비용 절감을 위해 독서당(讀書堂)을 혁파함
1517년 [음]중종 12년, 주청사(奏請使)는 종1품 이하 관원 중에서 뽑게 함
1549년 [음]이홍윤·배광의·최대관·이휘 등을 처형함
ㅡ상인(喪人) 이홍윤과 배광의·최대관·이휘·이무정은 《대명률(大明律)》에 의거, 수종(首從)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능지 처사(凌遲處死)하고, 아버지와 16세 이상의 아들은 모두 교수(絞首)에 처하고, 15세 이하 아들 및 어머니·딸·아내·첩·할아버지·손자·형제·자매, 그리고 아들의 아내와 첩은 공신(功臣)의 집에 종으로 주었으며, 재산은 모두 적몰(籍沒)하였다
1571년 [음]선조 4년, 이이(李珥)에게 청주 목사를 제수함
1572년 [음]선조 5년, 이이(李珥)가 사직하고 낙향함
1596년 [음]선조 29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감
1601년 [음]선조 34년, 유성룡·이원익·김장생 등 13인을 청백리로 뽑음
1687년 [음]숙종 13년, 경상도 청도에서 어미를 죽인 자를 사형에 처함
1688년 [음]숙종 14년, 태조 영정 초본이 완성됨
1713년 [음]숙종 39년, 첩 자손의 복제(服制)에 대해 논의함
1718년 [음]숙종 44년, 단오에 영상시(迎祥詩)를 짓지 말게 함
1730년 [음]영조 6년, 창경궁에 불이 나 건물 49칸이 소실됨
ㅡ3경(三更)에 창경궁(昌慶宮)에서 잘못하여 화재(火災)가 일어나 사옹원(司饔院) 및 궁방(弓房)과 소주방(小厨房) 도합 49칸이 소실(燒失)되었다.
1735년 [음]영조 11년, 반역의 변란으로 충청도를 공홍도로, 전라도를 전광도로, 강원도를 강춘도로 함
1741년 [음]영조 17년, 《오례의(五禮儀)》의 궁전과 교량 중 이름이 바뀐 것을 수정하게 함
1741년 [음]문신·무신의 전강법(殿講法)을 다시 정함
1770년 [음]영조 46년,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어 창덕궁과 경희궁, 팔도와 양도에 설치하게 함
1775년 [음]영조 51년, 신문고(申聞鼓)를 함부로 치는 것을 금하게 함
ㅡ신문고(申聞鼓)를 함부로 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을 금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임금이, 근장군(近仗軍)이 뇌물을 요구하며 북을 치는 사람을 조종하는 것을 염려하고, 병조의 당상과 낭청을 파직하고 병리(兵吏)를 곤장으로 때려 다스렸으므로, 남잡(濫雜)하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가 날마다 북을 치니, 그 시끄러운 것을 견디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1795년 [음]정조 19년, 과거시험 답안지를 엮어 《풍패빈흥록(豊沛賓興錄)》이라 이름붙임
1826년 [음]순조 26년, 곡식이 익어 가자 금주령(禁酒令)을 완화하도록 함
1831년 [음]순조 31년, 청나라에서 왕세손(뒤에 헌종) 책봉을 위한 칙사가 옴
1890년 제1회 국제메이데이 행진 실시
1895년 한인 학생 114명, 일본 경응 의숙에 입학
1896년 미동초등학교의 전신 한성공립소학교 개교
1903년 민속학자, 철학자 임석재 출생
1905년 급행열차 첫 운행(서울-초량 14시간)
1906년 휘문의숙 설립 (민영휘)
1909년 ‘대한매일신보’ 창간한 영국인 배설 세상떠남
1910년 경원선과 호남선 착공
1915년 제주군과 울릉군을 제주도, 울릉도로 개칭, 도사(島司) 설치
1918년 임야 조사령 공포 : 임야 조사 사업 시작.
1918년 서울시립대학교의 전신 경성공립농업학교가 설립
1922년 어린이날 제정, 방정환 등 색동회가 정함,
ㅡ1927년에 5월 첫 월요일로 바뀌었다가 1946년에 5월5일로 바뀜
1919년의 3.1독립운동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1923년 방전환을 포함한 일본 유학생 모임인 색동회가 주축이 되어 5월1일을 어린이날로 정했다. 1927년에 5월 첫 월요일로 바뀌었다가 1946년에 5월 5일로 바뀌었다. 1961년 정부는 아동복지법을 제정, 공포했는데 5월5일을 어린이날로 정했다. 1973년에는 기념일로 지정했다가 1975년부터 공휴일로 제정했다. 방정환 등 색동회 중심으로 처음 어린이날이 정해진 것은 5월 1일.
1923년 조선 노농 총연맹회가 전국 규모로 최초의 메이 데이 행사를 개최함.
1924년 〈경성제국대학에 관한 건〉 공포
1927년 경성~오사카 간 정식으로 무선통신 개통.
1934년 부산~신경 간 직통열차 운행 개시.
1936년 경부선 복선화
1936년 택시요금 미터제 실시, 기본요금(2km) 50전 800m마다 20전씩 오름
1937년 보천보 발발(동북항일연합군, 혜산진 보천보 주재소 습격)
1942년 일제, 조선어학회 편 <한글> 93호로 폐간
1946년 육군사관학교 태릉"에서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교, 6.25전쟁으로 임시 휴교
1946년 경부선 운행 열차 등, 연료 및 부속품 고갈로 운휴 운행
1946년 국방경비대사관학교 개설
1948년 극장 정원제 실시(서울)
1948년 재판 3심제 실시
1949년 제1회 전국인구조사 실시(남한 인구 2천16만 6758명).
ㅡ제1회 전국인구조사가 1949년 5월 1일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조사결과 총인구는 2천18만명이었다. 남자는 1천20만명, 여자는 9백98만명으로 성비는 102 대 100명이었다. 경북과 경남이 각각 320만, 313만명으로 가장 많았고 제주와 충북이 각각 25만명, 114만명으로 가장 적었다. 서울 인구는 144만명이었다. 그해 7월 유엔 세계경제보고에 의하면 세계인구는 23억 2천이었다. 인구조사에 즈음해 조선일보에는 `당당한 우리한국 정확한 인구로 자랑하자!`는 독려 포스터가 실려 눈길을 끌었다
1953년 미국 국무성서 한국전 공산측 포로중 송환거부자는 48,000여명 이라고 발표
1954년 독도에 민간 수비대 파견.
1956년 농업은행 발족
1960년 과도내각, 3·15선거의 무효 확인
1961년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박래군 출생
1962년 해양경찰대 발족
1963년 민정당 창당(대표최고위원 김병노), 대통령 후보에 윤보선 지명
1963년 우리나라 최초의 볼펜 ‘모나미 153’ 선보임, 2018년까지 55년동안 37억자루 팔림
1967년 국제복음방송국 극동방송으로 이름바꿈
1969년 중앙방송국, 첫 TV 교육 방송 실시
1970년 영친왕 이은 세상떠남 - 이조의 마지막 왕위 계승권자였던 영친왕 이은 씨가 73세를 일기로 운명
1970년 대법원, 통영 32개, 고성 45개 투표구의 선거무효 선언
1970년 치안국, 1969년 중 어린이 3대 안전사고(교통·익사·폭발)로 1,611명 사망·5,774명 부상 집계
1971년 1971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 당선 공고
1978년 서울 남산3호터널 개통
1979년 군위면, 영덕면, 청송면, 봉화면, 영양면, 무주면 등 49개 면이 읍으로 승격
1981년 공직자윤리법안 의결
1981년 정부, 82년부터 교육세 신설 발표
ㅡ정부가 1981년 5월 1일에 교육세를 신설한다고 발표했다. 콩나물 교실, 2부제 수업 등 열악한 교육환경의 개선이라는 `명분`과 조세부담의 가중이라는 `현실`사이의 진통 끝에 교육세가 신설됐다.
교육세 신설 문제는 거의 1년 내내 사회의 쟁점이 되어 찬반이 엇갈렸고 끝내 재산세에 대한 부가징수방안이 철회되는 등 진통을 거듭했었다. 담배 술 이자 및 배당소득 등에 과세되어 이듬해에 2천3백80억원을 징수하는 등 5년동안 모두 1조5천억원이 거두어질 것으로 전망됐다
1981년 정부, 공직자 윤리법안 의결
1982년 경주의 석굴암 관광차 토함산을 오르던 버스가 굴러 11명 사망, 21명 부상
1984년 슐츠 미국 국무장관 방한(레이건 대통령의 중공방문 결과 설명)
1984년 서울대공원(시흥군 과천면) 개원, 공원내에 들어설 국립현대미술관 기공
ㅡ서울대공원이 1984년 5월 1일 과천에 조성된 서울대공원이 개장했다. 이날 개원식에는 전두환 대통령 내외를 비롯, 정부인사와 서울시 관계자, 각계인사, 시민, 학생 등 1천2백여명이 참석했다. 육군군악대의 주악으로 시작된 개원식에서 전 대통령내외는 안상영 서울종합건설본부장으로부터 공원현황을 보고받은 뒤 개원식에 초청된 서울시내 어린이 4백여명과 함께 큰물새우리 해양동물관 맹수사육장 등을 약 40분간 돌아보았다.
서울시는 이날 오후2시부터 가장행렬, 씨름, 그네뛰기 등 개원축하행사를 가졌으며, 남녀고교생 6백 80명이 참가한 가운데 지하철 2호선 서초역을 출발, 대공원입구까지 10km구간의 단축마라톤도 있었다. 오후 6시부터 2시간동안 대공원호수앞광장에서는 인기연예인들이 출연한 경축쇼가 있었다. 총공사비 9백85억원을 투입, 착공 5년7개월 만에 우선 1단계로 문을 연 대공원동물원들은 4백31종 4천61마리의 동물을 수용하고 있으며, 면적만도 창경원의 16배인 87만평규모에 달했다.
1985년 제22회 법의 날
1985년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간행
1986년 조선일보 편집국 기자들, 〈침묵과 대중 조작 강요받는 언론 현실에 대한 입장〉 성명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총재에 김영삼) 통일정책 공방-문안작성자 4명 구인 출두
1987년 경찰, 남노련 위원장 유용화 등 13명 구속
1988년 김정민 북한 사회안전부 소속 전 고위간부, 정치적망명을 요청-외화벌이 실패 추궁 두려워
1889년 문교부, 46일째 학생들의 점거농성상태가 계속돼온 서울교대에 휴교령 내려
1989년 성남시 2개구 설치(수정, 중원). 안양시 2개 출장소 설치(만안, 동안).
1989년 문교부, 학내분규(47일째)로 진통 겪는 서울교육대학에 휴교령
ㅡ문교부는 1989년 5월 1일 학내분규로 47일째 시위하고 있는 서울교육대학에 휴교령을 명령했다. 문교부가 대학에 휴교령을 내린 것은 1986년 10월 31일 인천대에 휴교령을 내린 이후 처음이다. 이에 따라 단순학교관리 업무를 제외하고는 학교기능이 이날부터 무기한 정지됐다.
문교부의 서울교대에 대한 휴교령은 교육법시행령 제68조 3항 `감독청은 특별히 급박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휴교처분을 할 수 있다` 는 규정에 따른 것이다. 문교부에서는 "제2세 국민을 교육해야 할 교사를 배출하는 국립교원 양성기관에서 교수들에게까지 폭행과 폭언을 하여 교권이 유린당하고 있음은 매우 통탄스러운 일로 더 이상 인내할 수 없게 됐다"는 휴교조치의 배경을 설명했다.
서울교대 사태는 지난 3월 15일 학생들의 기성회비 동결요구로 시작돼 학장실 점거, 분신자살, 학생들의 자치학교 개설 등으로 확대돼 왔다. 대학 당국은 이에 맞서 4월 26일 "4월 29일까지 학교를 정상화하지 못할 경우 법적조치를 강구하겠다"는 내용의 계고장을 발송한 바 있다.
1989년 정부는 한전주식 1억2775만274주를 국민주로 매각 결정
1989년 충북 충주시 안림동에서 고려시대 의림사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항아리 발견돼
1989년 한라산 담배 발매 가격 110원
1990년 현대 등 5대 재벌 비업무용 부동산 6개월내 처분을 종용
1990년 여,야- 총체적 난국-민자당,김영삼 대표.김종필 최고위원
1990년 KBS파문 방송계에 확산. MBC등 동조파업 돌입
1990년 메이데이 파업에 40개사 동조
1990년 우리 나라에서 가장 비싼 땅은 명동 33의 2 상업은행 명동지점 부지로 땅값은 평당 1억 2000만원.
1990년 불교방송(BBS) 개국(주파수 101.9MHZ)
1991년 남북음악인 합동연주(NHK-후쿠야마시 공동주최 ‘환일본해국제예술제’)
1991년 강경대군 치사 규탄-잔인한 5월 정국 반정부 운동 급증
1991년 여·야의 국회법 개정협상 실무대표들은 「국회의원 윤리실천 규범」15개항을 최종확정.
1991년 안동대생 김영균 분신
1992년 중국, 태극기를 단 우리나라 배의 중국입항 무조건허용
1992년 한국은행, 2월말 총외채는 401억 8000만 달러라고 발표, 순외채는 131억 4000만 달러.
1992년 정부, 무역중개업 주류도매업 등 8개업종을 올 하반기부터 전면 이동통신업등 10개업종 단계적 개방.
1992년 LA흑인폭동, 한국 교민 상점 600여개소가 습격 받아 약탈 방화됐으며 교민 1명 사망 40여명이 중경상.
1993년 건설부,경기도 평택군등 전국 10개지역 총907만8000평을 지방공업단지로 새로 지정
1993년 노동절 행사 35년 만에 해금
1993년 김진영 육참총장등 해임-군 인사비리등 척결-서원수 기무사령관도
1993년 국방부, 해군 인사비리 수사확대, 뇌물주고 진급 부탁한 정유철, 전건식 준장 구속.
1995년 한국케이블TV 제주방송 개국.
1996년 `학교종` 작사-작곡한 김메리 여사 내한
ㅡ`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우리나라 어린이가 즐겁게 따라 부르고 있는 `학교종`의 작사작곡가 김메리 할머니(92)가 1996년 5월 1일 김포공항을 통해 내한했다. 김할머니가 `학교종`을 작사작곡한 것은 광복 첫해인 1945년. 당시 김할머니는 현제명, 김성태 선생과 함께 음악교과서 만드는 작업을 하면서 초등학교 1학년용 음악교과서를 맡았다.
1904년 서울에서 태어나 배화학교를 졸업한 김할머니는 잠시 논산 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다 1930년 미시간대로 유학, 영문학을 전공했다가 1년후 전공을 음악으로 바꿨다. 이어 1934년부터 13년간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와 이화여대 음악과장을 맡은 뒤 웨인주립대에서 화학과 미생물학을 다시 전공, 20년 간 병원에서 근무했다.
1978년 칠순을 넘긴 김할머니는 평화봉사단원을 자원,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2년 넘게 봉사활동을 했고, 자선사업단체인 `육영선교회`를 만들어 한국문화보급에도 힘썼다. 1989년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해 이후 뉴욕 한인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어린이들을 지도했다.
1996년 정부, 200해리 배타적경제수역(EEZ)을 선포 `배타적경제수역에서의 외국인어업관리법안' 입법예고
1996년 대검 중수부, 이철수 제일은행장이 효산그룹에 거액을 불법대출해주고 1억원의 커미션 받아- 구속
1998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훈할머니 50년 만에 영주 귀국
ㅡ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지 55년 만에 국내 혈육과 한국 국적을 되찾은 훈할머니 이남이씨가 캄보디아 생활을 정리하고 1998년 5월 1일 영주 귀국했다. 경남 진동에서 태어나 18세인 1940년대 초 부산항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훈할머니는 1943년 캄보디아에서 일본군 장교와 살다가 전쟁후 그가 떠나자 캄보디아 남자와 다시 결혼해 어려운 삶을 영위하다 1997년 한국인 사업가에 의해 우연히 발견돼 이날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검찰청의 유전자 감시을 통해 고향과 가족, 한국이름 이남이까지 되찾는 감격까지 느꼈던 훈할머니는 한동안 경북 경산에 머물렀으나 한국말을 전혀 못하고 캄보디아 가족이 그리워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훈할머니는
2001년 2월 15일 굴곡많은 인생역정을 뒤로 한 채 생을 마감했다.
2001년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남 김정남, 일본에 불법입국하다 체포(4일 강제추방)
ㅡ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장남 김정남이 2001년 5월 1일, 처인 신영희와 그녀의 친척인 30대 여성, 그리고 아들로 보이는 4세 남자아이와 함께 위조여권을 소지하고 싱가포르발 JAL 712편으로 나리타(成田) 공항으로 불법입국하려다 체포돼 4일 간 일본경찰의 조사를 받고 중국으로 강제추방됐다.
김정남은 조사 과정에서 자신이 김정남임을 시인했으며, "도쿄에는 디즈니랜드를 보러 왔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법무당국에 따르면 김정남은 도미니카 정부 발행 여권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름은 `팡 시옹(PANG XIONG)`, 출생지는 `KOREA`로 기재돼 있었다.
김정남은 외부엔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북한 내부에선 `작은 김정일` 또는 `새끼 장군님`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뚱뚱한 체형, 통 큰 스타일, 급한 성격 등 외모와 성격이 아버지 김정일을 빼닮았으며, 김정일과의 관계도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의 첫째 부인 성혜림의 소생인 김정남은 컴퓨터와 인터넷에 능해, 이 분야의 `전문가`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 언론은 김정남이 과거 일본을 수차례 드나들었으며 미국과 제주도에도 방문한 것으로 보도했다.
한편 일본 정부가 김정남을 중국으로 추방, 서둘러 사건을 종결시킨 데 대해 일본 내에서 강한 비판론이 제기됐다. 일부 정치권과 언론, 북한 인권단체 등은 "좀더 잡아두고 철저한 조사를 벌여야 했음에도 불구, 조기 송환함으로써 `외교카드`를 스스로 포기했다"고 아쉬워했다.
2002년 제주 무비자입국 허용, 22개국은 비자 필요, 2006년 비자필요국11개국으로 축소, 2018년6월1일 예맨 비자필요국으로 지정
2004년 시청앞 도로 4천평을 개조한 서울광장 개장
2005년 세계최초로 위성DMB(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 본방송 시작
2005년 대한민국의 산악인 박영석이 북극점에 도달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또는 어드벤쳐 그랜드슬램)을 달성
2005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평검사 1백여명, 사법개혁 추진위원회의 〈형사소송법 개정안〉 추진 반대 결의문 제출
2008년 소설가 홍성원 위암으로 세상떠남 『남과 북』
2008년 서울특별시가 서울 지하철 9호선 1단계 구간 25개역의 명칭을 확정해 발표
2012년 주한 미군 AFN Korea가 AFN TV 아날로그 송출을 전면 중단
2017년 경남 거제 삼성중공업내 선박건조장 대형타워크레인 넘어져 6명 숨지고 25명 다침
2017년 트럼프 미대통령 북한 김정은 만날 용의 밝힘
2022년 국민 60% “여가부 제 역할 못해”...80% “여가부 기능은 필요”
1127년 송의 고종, 남경에서 즉위 (국명은 남송)
1555년 황 마르첼로 2세, 222대 로마 교황 작고
1700년 영국의 시인, 문학비평가 드라이든 사망
1707년 영국-스코틀랜드 합병
1714년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군주 앤 여왕 작고
1918년 미국의 지형학자 그로브 칼 길버트 작고
1786년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탈리아어: Le nozze di Figaro)", 빈의 부르크 극장(Burgtheater)에서 초연.
1789년 프랑스 3부회의(제1계급 성직자 제2계급 귀족 제3계급 평민대표로 구성) 175년만에 다시 열림
1802년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국립 육군사관학교인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설립
1819년 프랑스 언론자유 인정
1834년 벨기에 의회, 철도법안 통과.
1844년 미국 모르스 볼티모어 워싱턴간 전신 타전 성
1851년 세계최초 만국박람회 영국 런던에서 열림,
ㅡ엑스포·만국박람회란 말은 이제 공식적으로 쓰지않음,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다루는 등록박람회(Registered Expositions)와 보다 제한된 주제의 인정박람회(Recognized Expositions)로 나눔
- 등록박람회는 기간 6주에서 6개월 5년주기로 개최, 인정박람회는 기간 3주에서 3개월 등록박람회 사이에 개최 원하는 나라가 유치, 등록박람회 전시관은 참가국 부담해 설치 인정박람회에서는 주최국이 지어 참가국에 무상임대
- 2000년 하노버(독일) 2005년 아이치(일본) 2010년 상하이(중국) 2015년 밀라노(이탈리아)는 등록박람회, 2020년 두바이(아랍에미리트)는 코로나19 여파로 2021.10.1~2022.3.31에 열림. 2025년 개최지는 오사카, 1993년 대전 2012년 여수는 인정박람회
1871년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인 파리코뮌의 공안위원회 설립
1873년 영국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 세상떠남(60세), 런던전도협회의 의료전도사로 남아프리카에 파견돼 언어 지리 풍속 등 조사 1844년부터 칼라하리사막 잠베지강 유역 콩고 저지 등 탐험, 빅토리아폭포 등 발견, 1866년 마지막 탐험길에 올랐다가 소식이 끊겼는데 스탠리의 탐험대가 탕가니카 호 근처에서 찾아냄, 뱅웨울루 호수 근방에서 걸린 이질로 세상떠남
1873년 탐험가 리빙스턴 사망
1886년 미국 메이데이 제정
1886년 미국에서 총파업을 시작하여 며칠 뒤 8시간 노동권을 얻어내다. 이후 노동절의 유래가 되다.
1890년 제1회 국제메이데이 행진 실시
1900년 일본, 동경에 전차 운전 개시
1900년 미국 유타 주 탄광폭발 광부201명 목숨잃음
1904년 체코 작곡가 드로브작 사망
1906년 프랑스 파리서 20만인 파업. 계엄선포
1914년 원세개, 중화민국약법 제정
1924년 그리스 공화제 선언
1919년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 국방군과 바이에른 의용군에 의해 진압.
1921년 연합국 배상위원회, 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을 1320억 금마르크로 결정
1935년 레니 리펜슈탈, 영화 `의지의 승리`로 국가대상 수상
ㅡ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에서 개막된 독일제국 문화원식전에서 영화 `의지의 승리` 감독 레니 리펜슈탈이 선전상 괴벨스로부터 국가대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1934년 9월에 뉘른베르크에서 개최된 나치당 전당대회를 기록한 것으로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는 국민투표로 압승한 히틀러가 나치스의 위세를 내외에 과시하고자 개최한 것이다.
`의지의 승리`는 나치스의 찬미작품이라는 비판과 관계없이 7월의 파리 국제예술박람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사상적으로는 부도덕하지만 이 작품의 예술적인 면에서 관객은 감탄한다"고 평가했다.
1945년 나치 선전상 괴벨스, 가족과 동반자살
ㅡ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갈 무렵 베를린이 포위된 가운데 요제프 괴벨스가 자살했다. 아내와 6명의 자녀를 먼저 권총으로 죽인 뒤였다.
괴벨스는 히틀러를 만나기 전까지 나치주의자도 반유대주의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괴벨스는 1922년 6월 히틀러를 처음만난 뒤 곧 그에게 빠져들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독일문헌학으로 막 학사학위를 받은 뒤였다.
괴벨스는 빠르게 히틀러의 사람으로 변신해 갔고, 히틀러는 그를 중용했다. 괴벨스는 히틀러를 총통으로 만들기 위해 선전, 선동과 조작된 여론으로 대중을 나치즘으로 끌어들였다.
1933년 1월 마침내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자 괴벨스는 내각선전상 겸 제3제국 문화원장에 임명됐다. 괴벨스는 선전 전문가로서의 동물적 후각으로 당시 새로운 전파수단으로 떠오른 라디오를 적극 활용했다. 또한 그는 영화에도 손을 뻗쳐 대중들을 전체주의로 끌어들였다.
괴벨스의 진가가 발휘된 것은 승승장구하던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와 아프리카에서 패배해 전세가 역전되던 순간이였다. 신문과 라디오를 이용한 선전활동을 강화했고, 나치 간부들이 지하벙커와 요새로 숨어든 뒤에도 끊임없이 대중 앞에 다가섰다. 하지만 이미 전쟁은 막바지로 접어든 뒤였다.
1931년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완공
1947년 내몽고자치공화국 수립
1948년 미소라 히바리 가수 데뷔
1949년 해왕성의 위성 네레이드가 발견됨.
1952년 일본, `피의 메이데이`
ㅡ미일강화조약이 발효된 후 처음 맞는 메이데이(노동절)인 1952년 5월 1일.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는 행사를 `인민광장`이라 불리는 황궁앞 광장에서 열 계획이었다. 하지만 정부가 불상사 발생을 이유로 사용을 금지시키자 행사장을 명치신궁 근처로 옮겨 개최했다. 집회는 40여만명이 모인가운데 성황리에 끝났다. 참가자들은 집회가 끝나고도 가두행진을 계속했다.
해산지점의 한 곳인 히비야공원에 시위대가 모이자 이들 가운데 수천명이 `인민광장 탈환`을 외치며 황궁앞 광장으로 이동했다. 시위대가 이중교 앞에 도착해 집회를 열려하자 황궁 주위를 지키던 5천여명의 경찰들이 이들의 집회를 제지했다. 최루탄과 플래카드가 난무하는 대혼란의 와중에 돌연 경찰이 발포하기 시작했다. 2명이 사망하고 1천500여명이 부상해 일본에서는 이날을 `피의 메이데이`라고 부른다.
체포된 사람만 1232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261명이 소요죄로 기소되었지만 이들 전원이 무죄로 확정될 때까지는 자그만치 20년의 세월이 흘러야했다.
1956년 일본 미나마타만에서 미나마타병 발생 첫 보고
ㅡ일본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에 있는 신일본질소 미나마타공장 부속병원 원장이 미나마타보건소에 `원인불명의 중추신경질환이 빈발하고 있다"고 1956년 5월 1일 보고했다. 이것이 후에 사회적인 문제로 된 미나마타 공해문제의 첫 발단이다. 구마모토대 의학부는 그 원인이 구마모토시에 있는 신일본질소 미나마타 공장의 폐수에 함유된 유기수은이 어류를 매개로 해 인체에 들어와 중독을 일으킨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1965년에는 니이가타현 아가노가와 하류에서 같은 유기수은중독에 의한 제2의 미나마타병이 발생, 669명이 중독증상을 보이고 55명이 사망했다. 미나마타병 환자동맹은 신일본질소 사장과 공장장을 미필적고의에 의한 살인-살해 혐의로 고소, 1979년 구마모토 재판소는 유죄판결을 내렸다.
1960년 미국 정찰기 U2, 소련 상공에서 피격
ㅡ소련 상공을 침범한 미국 정찰기 `U2기`가 1960년 5월1일 오전 7시30분경, 소련 우랄산맥 상공 2만m에서 격추됐다.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가 오전5시에 U2기의 영공침입을 보고받고 격추를 지시한 뒤였다. 소련은 그동안 U2기의 영공침범에 대해 수차례 항의했지만 미국은 1956년 7월 이후 줄곧 소련 전역을 정찰하고서도 이 사실을 부인해 왔다.
소련은 내심 분통을 터뜨렸지만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데다 아직 요격기나 요격 미사일을 개발하지 못해 속으로만 끙끙앓고 있었다.
U2기는 최대상승고도 2만7400m에 속도는 마하 0.7의 제원을 갖고 있는, 록히드사가 극비리에 개발한 첨단 첩보기다.
목표지 상공에서는 제트엔진을 정지시켜 소리를 내지않고도 정찰비행이 가능하고, 광선 반사를 막기 위해 기체 전체를 검은색으로 뒤덮어 `검은 스파이기`라고도 불렸다.
이날 격추된 U2기는 파키스탄의 페샤와르를 발진해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넘어 소련 영토를 가로지른 후 노르웨이에 기착할 예정이었다.
조종사 게리 파워스는 기체가 피격되면 기체를 파괴해야 하는 원칙을 지키지 않고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자살용 독약도 사용하지 않고 체포돼 결국 미 CIA의 정찰기라는 사실을 자백하고 말았다.
미국은 이 사실도 모른 채 기상관측기가 실종됐다고 둘러대다가 흐루시초프가 증거를 들이대자 그제서야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5월 17일 예정된 동서 4개국 정상회담이 연기되는 바람에 1년 전 흐루시초프가 방미때 제창한 `평화공존` 무드도 일거에 물거품이 됐다.
10년형을 선고받은 조종사는 1962년 2월 소련 스파이 루돌프 아벨과 독일 그리니케 다리에서 교환됐다.
1961년 중국-캄보디아 우호불가침조약 체결
1962년 카스트로 쿠바 사회주의공화국 선포
1962년 프랑스. 사하라사막서 첫 지하 핵실험
1963년 마르틴 루터 킹 목사 버밍햄의 어린이십자군과 인종차별에 항의, 1954년 앨라배마의 몽고메리교회 목사로 인종차별반대운동 벌이다가 몇차례 옥살이 1964년 노벨평화상 받음 1968년 백인인 제임스 얼 레이에게 암살당함 99년형 선고받은 레이가 복역중 세상떠남(1998.4.25. 70세)으로써 사건진상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음
1970년 미군 캄보디아 침공
ㅡ시아누크 실각으로 좌경화된 캄보디아의 공산군성역을 소탕하기 위해 닉슨 미 대통령이 1970년 5월 1일 미군의 캄보디아 진공을 명령했다.
닉슨 대통령은 미군 전투부대를 캄보디아 내에 있는 공산군 은신처를 공격하도록 캄보디아로 파견했다고 발표했다.
전국에 방송된 TV 연설에서 닉슨 대통령은 "캄보디아를 침입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전쟁의 빠른 종결과 미군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월남전쟁의 필요한 확대라고 말했다.
공산군 수용 지역인 사이공 북서쪽 80km 지점으로 월남쪽으로 돌출된 부분을 공격하기 위해 수천명의 미군이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갔다.
닉슨 대통령의 이 조치는 반전주의 의원들의 강력한 반발을 일으켰고, 미 국민은 물론 전세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미군은 두달후인 6월 29일 캄보디아에서 철수했다.
1973년 미국 상하원 워터게이트사건 수사를 위한 특별검찰관 임명요구 결의안 가결
1973년 닉슨-브란트 1차 회담
1978년 아르메니아계 러시아 작곡가 아람 하차투리안 작고
1979년 미국 일리노이 주 커먼웰스 핵발전소 가스 누출
1980년 팔레스타인 자치문제 타개 위한 미국 이집트 이스라엘 3국회담 개막
1982년 영국 아르헨티나 개전
1983년 슐츠 미국 국무장관 동베이루트 미국 대사관서 피격 모면
1985년 수카르노 하타 국제공항 개항.
1989년 로드리게스 파라과이 대통령에 당선
1993년 스리랑카와 내전중인 ‘타밀일람해방 호랑이’ 프레마다사 스리랑카대통령 폭탄으로 암살
ㅡ라나싱게 프레마다사 스리랑카 대통령이 1993년 5월 1일 수도 콜롬보에서 발생한 폭단 테러로 사망했다.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이날 집권 통일국민당(UNP)을 이끌고 노동절 퍼레이드에 참여해 행진하던 중 폭탄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이날 발생한 테러로 대통령의 개인경호원 등 3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60여명이 부상했다. 목격자들과 경찰은 폭탄을 몸에 부착한 자살 테러범이 대통령 일행에 접근하는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대통령 피살사건으로 스리랑카 전역에 무기한 통금령이 선포됐고, 수도 콜롬보 일대에 군이 배치됐다. 68세인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10년 간 총리를 역임한 뒤 1988년 12월 대통령에 당선, 1989년 대통령 취임 이후 끝없이 정치적 위협에 시달려왔다.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데다 지칠 줄 모르는 추진력과 천성적으로 예리한 판단력의 소유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지난 195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좌익계의 거물 인사와 싸워 패한 뒤 1977년 주니우스 자예와르데네 대통령 집권당시 실권이 없는 총리직을 맡아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대대로 가난에 찌든 지방주민들을 위한 1백만 가구의 주택 건설과 빈민들을 위한 구호정책의 실시로 주로 지방과 하류층을 중심으로 지지 기반을 쌓아왔다. 그는 대통령이 된 뒤 장관들에게 엄격한 규율을 적용, 자신의 사전허락 없이는 해외 여행까지 함부로 할 수 없도록 했으며 장관의 임명을 임의대로 행하는 등 다소 독선적인 통치로 많은 정적들을 만들어왔다.
1997년 토니 블레어 영국 노동당 당수, 총선승리로 수상에 취임
2001년 부시 미국 대통령, 국가 미사일방어체제 공식 천명
ㅡ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1일 워싱턴소재 국방대학에서 이른바 ’불량국가’ 의 미사일 및 핵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다국차원의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을 공식천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번 선언에서 ’국가미사일방어’ 용어 중 ’국가(national)’ 라는 단어를 전혀 쓰지 않고 대신 미국의 우방과 동맹국들의 안보와 안전을 지키기 위한 “미사일방어체제” 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사실상 자신의 대선공약을 그대로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이같은 미사일방어체제 구축과 관련, 민주당 의원 등 미 의회와 여론 일각에서 그 구상의 타당성 및 막대한 소요비용을 들어 반대의사를 밝혔다.
2004년 유럽연합 10개국 추가가입으로 25국으로 늘어남, 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체코 슬로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키프로스 몰타
2007년 영국 브리티시 페트롤리엄사의 CEO 존 브라운 사임키로
2007년 네덜란드 세계최초로 우표속에 씨앗담은 씨앗부착우표(stamps with seeds) 발행
2008년 오늘 ‘바다위의 만리장성’이라 불리는 세계최장 해상대교 항저우신대교(36km 건설비 1조6,7700위안) 개통
2010년 장 루이 뒤마 에르메스 전 최고경영자 별세
2010년 2010 상하이 엑스포가 개최
201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에서 킹 샤카 국제공항이 개항
2011년 전범 아이히만 사형 선고한 이스라엘 판사 별세
ㅡ거물 나치 전범 아이히만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이스라엘의 모셰 란다우(99) 판사가 1일(현지시각) 별세했다.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추념일을 하루 앞둔 날에 세상을 떴다. 란다우 판사는 대법관이던 1961년 나치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주관하며 사형을 선고했다.
아이히만은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유대인 집단학살을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그는 독일이 전쟁에서 패하자 남미 아르헨티나로 도피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가 추적에 나선 지 십수년 만인 196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결국 체포됐다. 1962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이히만 재판은 라디오방송을 통해 생중계될 만큼 국제적으로 관심이 컸다.
재판 과정에서 유대인 피해자들이 겪었던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비인간적 학대의 실태도 상세히알려지게 됐다.
2011년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라덴의 사망 소식이 공식 발표
201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복자로 공식 선포
2012년 러시아 모스크바 이상고온 낮 최고기온 28℃ 130년만에 가장높은 봄기온
2019년 새 일왕 나루히토(59세) 즉위
2022년 터키, 그리스와의 분쟁으로 내달 나토 연합훈련 참가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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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