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 이병기 선생 시조의 발자치를 따라서
이효녕(명예문학박사·시인·소설가)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듯한 초사흘 달이 별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이병기 시조 ‘별’>
사람이 살면서 어느 한 분야에 능하기도 그리 쉽지 않다. 또한 여러 분야에 걸쳐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을지라도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으면 금방 잊히게 마련이다.
바로 가람 이병기 선생이 근대사회에 남긴 큰 업적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같은 연안이씨 후손으로서 솔직히 부끄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심정이다.
가람 이병기 선생은 1891년 3월 5일 전북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에서 변호사 이채의
장남으로 태어나셔서 국문학 연구의 초창기에 주춧돌을 놓은 학자요, 쇠약해 가던
우리 시조시를 부흥 발전시킨 시인이며, 교육자요, 한글운동가이시기도하다.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두고
미진도 가까이 않고 우로 받아 사느니라.
<이병기 시조 ‘난초’>
위에 ‘난초’는 비록 문학 소년이 아닐지라도 학창시절에 교과서에서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가람 이병기 선생의 시조다. 가람 선생은 난초복, 술복, 제자복을 타고
났다고 한다. 얼마나 난을 아꼈으면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갈 때도 처자식의
안위보다는 난초가 죽지 않게 잘 보살피라고 했을까?
가람은 술자리와 강의실이 따로 없을 정도로 전북 전주 풍남문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길가에 앉으면 그곳이 곧 강의실이었다고 한다. 이토록 난초를 극진히
사랑하는 애란가요, 술을 좋아하시는 애주가이시면서 사대부들이 향유하던
공상적·이념적 문학의 현실감을 갖춘 표현과 묘사력을 통해 민족 전체의 문화로서
전환하고자 노력하셨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상황에서 민족정신을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로 한글운동을 전개하시고, 언어를 통한 민족주의 표현이
갖는 한계를 문학운동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셨던 가람 선생이 연안이씨 중 근대
인물의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어느 누구보다 커다란 자랑으로 자긍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가람 선생은 어린 시절 완고한 조부의 명령으로 9세부터 상투를 틀고 10여 년 동안
한문을 공부하시던 중 중국 양계초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읽으시고
깨달은바 있어 19세 나이로 70리 길을 걸어 전주보통학교에 통학하여 6개월만인
1910년 졸업하셨다. 1913년 한성사범학교에 들어가 졸업하신 후 비교적 늦게
신학문에 뜻을 세운 가람 선생은 이 기간 중 나라와 겨레를 생각하시어 밤이면
조선어강습원에 나가 주시경(周時經)선생의 조선어문법 강의를 수강, 우리말과
글의 연구에 대한 뜻을 굳히시면서 한편으로 시조시 창작과 그 이론적인 연구에도
차츰 관심을 기울이셨다. 1926년 '시조란 무엇인가' 등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
시고, 1927년 '시조회’, 1928년 ‘가요연구회’를 조직하시어 시조 시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전시가 전반에 걸친 연구를 계속하셨다. '한중록', '인현왕후전', '의유당
일기', '요로원야화기', '어우야담', '역대시조선' 등은 가람이 발굴하여 소개한
것들로 가치가 높다.
그뿐만 아니라 창씨제도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본성명 '이병기'를 끝까지 고수하
셨다. 그러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함흥형무소에서 1년 가까이
복역하신 뒤 출감하신 뒤 낙향하시어 농사와 고문헌(古文獻) 연구에 몰두하시다가
해방직후 서울로 다시 올라오셔서 1946년 미 군정청 편수관,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교수로 '국문학개론' 첫 강의를 하시면서 ‘고전문학에 나타난 향토성’ 등의 논문을
발표하셨다. 그 뒤 단국대학교·신문학원·서라벌예술대학 등에서 강의하시다가
6·25전쟁 중 고서(古書)를 트럭에 실어 날라 고향에 보관한 일은 너무도 널리
알려진 일화다.
서울대학교에 계시다가, 1952년 명륜대학이 국립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에
편입되면서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 학장이 되어 1956년 정년퇴임까지 재직하
시고 나서, 다시 중앙대학교 교수로 <국어국문학>에 논문 ‘별(別) 사미인곡’·
‘속(續) 사미인곡’을 발표하셨다.
그러나 1957년 한글날 기념행사에 참석하시고 귀갓길에 뇌일혈로 쓰러지신 뒤
1962년 전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으시고 고향에 서 요양하시다가
1968년에 태어나신 요산에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장례는 전라북도 예총장(藝總葬)
으로 치러졌으며, 전주시 다가공원에는 그의 시 ‘시름’이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고, 그의 생가와 가까운 여산남초등학교 교정에도 그의 시 ‘별’을 새긴 비가 있다.
무엇보다 가람 선생은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시조시인으로서 현대시조를 이끈
인물로 더욱 유명하시다. 그는 종래의 고식적인 형식을 깨뜨리고 좀 더 자유로운
문학 장르로서 현대시조를 여는 선구적인 역할을 하시면서 ‘조선문단’, ‘동아일보’,
‘동광’, ‘현대공론’, ‘신동아’, ‘조선일보’ 등에 주옥같은 시들을 발표 하셨으며,
1939년에 이들을 묶은 <가람시조집>을 펴내 대단한 인기를 끄셨다.무엇보다
가람 선생은 일제의 강요에도 끝끝내 굴하지 않으시고 지조를 지키시며 단
한편의 친일(親日)적인 글을 쓰지 않아 후학들의 귀감이 되셨으며, 광복 후에도 ‘
현대문학’, ‘월간문학’ 등에 꾸준히 시를 발표하셨으며 수많은 기행문과 서간문을
남기셨다. 특히 1909년부터 근 60년에 걸쳐 쓴 일기는 2백자 원고지 4천매가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훌륭한 산문문학(散文文學)으로 평가를 받으셨다.
이토록 많은 업적을 남기셨기에 가람선생은 2001년, 20세기 시조 중흥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받아 당시 문화관광부 ‘6월의 인물’에 선정된바 있으며, 2011년
9월에는 ‘가람 이병기의 문학과 사상’ 이란 주제로 원광대 숭산기념관과 여산
가람생가에서 가람선생 탄생 12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리기도 하여 업적을
재조명하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하기야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이토록 훌륭한 가람 선생이 우리 연안이씨 가문에서
출생하신 것을 모르고 지내다가 시와 소설로 등단하여 활동하면서 한국문인협회
회원들과 더불어 10여 년 전 서울에서 버스 한 대로 출발하여 생가(生家)로
문학기행을 떠나면서 비로소 뒤늦게 알게 되면서 그에 따른 뿌듯한 마음 어디고
감출 수 없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익산시 여산면에 들어서서 큰길가에 차를 세워
놓고 걸어서 찾은 윤씨 자부가 관리하는 생가는 한 눈에 보기에도 너무도 관리가
안 되어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넓은 집을 자부 혼자 살림을 살면서 관리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지니고 한국문인협회가 내려준 생가 앞에 표증을 보고 나서
집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조선 말기 선비 집안의 배치를 따라, 안방과 사랑채 등을 돌아보고 생가를 나와서
오른쪽에 위치한 묘지를 가려고 조금 걸어서 크게 구성되어 있을 것만 기대하였
는데 당도하니 그렇지가 않았다. 아마도 이는 고인의 명에 따라 이렇게 조촐하게
묘지를 만들었을까?
아니면 생전에 계실 때와 그리고 사후의 가람 선생을 동시에 보게 해주는 청렴함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가람 선생 묘’라는 비석은 아주 볼품없고
그리 크지 않은 봉분 역시 잡풀이 무성한 그대로 손질이 안 되어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그러다가 가람문학상을 받는 후배가 있어 다시 찾으니 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어 익산시 에서 맡아 보수 공사가 마무리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엉만 다시 올리고, 담장 보수하고, 배수로만 내려고 계획했는데,
도리까지 썩어서 공사가 더 커졌다고 한다. 그러나 십 여년 전 안내판은 글씨가
벗겨져 알아볼 수 없었으나 이제는 무엇보다 잘 정돈된 깨끗한 안내판을 볼 수 있어
흐뭇한 마음을 안고 돌아왔다.
‘이병기 선생 생가(李秉岐 先生 生家)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로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로 이 집은 국문학자이며 시조 작가인 가람 이병기 (1891
~1968)선생이 태어나 사시던 곳이다. 조선말기 선비의 가옥 배치를 따르고 있는데
안채·사랑채·헛간·고방채·정자 등이 남아 있다. 소박한 안채와 사랑채 안담한 정자와
연못에서 선비가옥의 면모를 잘 살필 수 있다.
슬기를 감추고 겉으로 어리석은 체 한다는 뜻을 간직한 ‘수우제(守遇齊’)라는
사랑채 이름에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며 평생을 지조 있는 선비로 살아온 그의
풍취가 은은하게 느껴진다.’ 라는 내용이 한글과 영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문을 열고 생가에 들어서면 먼저 네모난 작은 못이 나오는데, 이는 주차장을
만들면서 못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의 못 남쪽 끝에는 계일정(誡溢亭)
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지나치는 것을 경계하라'는 의미이므로 항상
분수를 지키고자 노력했을 면모에 새삼 머리가 수그러진다. 언젠가는 이 정자도
복원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지난 번 보았을 때는 부속건물이 더 있었지만, 지금은 정자, 사랑채, 안채, 그리고
곳간채 한 동이 있다. 모두 초가로 화려하지 않아 소박하기 그지없는 생가에 당호
(堂號)는 수우재(守愚齋)로 할아버지 때부터 불러온 '어리석음을 지키는 집'이란
겸손한 이름이다.
안채는 ㄱ자 모양이다. 양반 가옥의 구조를 따라 누마루까지 갖췄지만 규모가 작고
아주 소박하고, 사랑채 앞에는 승운정(勝雲亭)이란 자그마한 정자가 있다. 이
정자에 앉아서 술이라도 한 잔 한다면 구름을 탄 기분이리라. 승운정 옆에는
전라북도 지정 기념물 112호로 지정된 커다란 탱자나무가 마치 문지기라도 되는 듯
서 있다.
사랑채에는 주련이 걸려 있다. 이곳에 올 때면 가람 선생이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할 것만 같다. 윤씨 자부가 지난 번 들려준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어느 날인가 가람 선생이 방안에서 밖으로 담뱃대를 내밀며 불을 붙여 오라고
했단다. 당연히 아랫사람에게 시킨 것이었겠지만, 마침 사랑채를 지나던 사람이
담뱃대를 받아 불을 붙여서 방안으로 담뱃대를 내밀었다고 한다. 담뱃대를
받으면서 보니 바로 아버지였다. 깜짝 놀란 가람 선생이 이 일을 계기로 담배를
끊었다고 한다. 가람 선생도 그렇지만 아들인지 분명히 아시면서 담뱃불을 붙여
주신 가람 선생 부친도 너무도 훌륭하신 분이 아닐 수 없다.
주차장 오른쪽 언덕에는 동상이 있는데, 둘레에 가람의 시조 '고향으로 돌아가자'와
연보가 새겨져 있다. 이 옆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100여 미터를 더 들어가면 생가
대나무 숲 뒤 묘지의 봉분이 따로 없이 ‘가람延安李公秉岐박사묘’라는 글자가
새겨진 묘비만 서 있고 그 밑에 잠들어 계시다.
그런데 안내문이 없어서 생가 뒤에 있지만 찾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막상 묘소에
가더라도 너무 방치되어 있고 석물 하나 제대로 갖추지 않아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곳이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닭이 알을 품은 형상이라 석물을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생가에서 해마다 4월 둘째 주 토요일에 가람기념사업회
에서 주관하는 가람시조문학제와 더불어 학술행사와 함께 전국가람시조백일장이
열리고 있다.
가람기념사업회에서는 문학관을 지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지만 아직은 그대로다.
또한 익산시는 가람의 업적을 추모하고 시조문학의 발전을 위하여 가람시조
문학상을 제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79년부터 97년까지는 ‘시조문학사’에서 17회
까지 시상하다가, 98년과 99년에는 ‘문학사상사’에서 2회, 그리고 2000년부터는
익산시에서 시행하고 있다. 2009년도부터는 가람시조문학 신인상을 제정하여
지난해에는 4회 시상을 마쳤다.
이토록 근대 인물로 추앙받는 가람 선생을 추앙하는 일에 우리 연안 이씨 일가들이
나서서 많은 관심과 참여를 하는 것이 후손으로 할 도리가 아닌가 싶다는 생각을
하며 이 글을 마친다.
가람 이병기 선생의 연보
*1891~1968. 국문학자. 시조시인. 전북 익산 출생
*조선어 강습원 졸업(1912)
*한성사범학교 졸업(1913)
*조선어 연구회 간사(1921)
*동광학교, 휘문고보 교원(1922)
*1923년부터 조선문단을 통해 시조, 수필 발표
*1926년 동아일보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이후 시조를
이론적으로 연구
*1930년 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
*1935년 표준말 사정 위원(전북 대표)
*1942년 조선어 학회 수난으로 1년 복역
*광복 후 미군정청 편수관(1945)
*서울대학교 교수(1946), 전주 명륜대학 교수(1951), 전북대학교
문리과 대학장(1952), 중앙대학교 교수(1956)
*예술원 추천회원(1957), 학술원 공로상(1960), 학술원 임명회원(1960)
*전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1961)
*문화포장 받음(1962)
*저서: 가람 시조집. 국문학 개론. 국문학 전사.
*주해서: 역대 시조선, 한중록, 요로원야화, 의유당일기, 인현왕후전, 어우야담,
근조 내간선, 국어 문학 명저, 가람 문선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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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행히 고려대학교 박물관을 찾은 1968년 봄
가람선생께서 박물관장직에 계셨었다.
나는 같은 건물 4충에 연구소에 있었다.
같은 연안이가라고 하시며 각별히 중요한 심부름을 시키시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경북지방과 전남지방으로 출장다녀온 이후 뵙지 못했다.고향으로 가신때 였다. 참으로아쉬운 조우였는데
당시 고려대에서는 민족문화사업을 기획하려던 때 였음으로
많은 인재를 모시려던 시기였는데 참 아쉬워 한 그 때그시절이 생각난다
효녕박시님 덕분에 새삼 아스라한 추억으로 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