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 속 부처님 이야기] 21. 승가의 질서는 법랍으로
법랍 순으로 승단 서열 정한 건
‘능력 만능주의’ 경계 위한 의도
현대사회는 능력 만능주의이다. 능력 있는 신참 후배들에게 설 자리를 빼앗기고 어중간한 나이에 회사로부터 퇴출당할 위기에 처한 지인들을 가끔 접하다 보면 마음 한 구석이 썰렁하지만, 살벌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회사의 절실한 입장을 생각해보면 매정하다고 탓만 하기도 어렵다. 하루하루 숨 막히게 돌아가는 현대사회가 현대인에게 요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이미 어릴 때부터 경쟁에 익숙한 삶을 살고 있다. 능력을 키워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꼭 필요한 인물로 인정받고, 이를 기반으로 확고한 지위에 오르고자 노력한다. 한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아름다운 모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란 조절이 잘 안 되는 탓인지, 곧잘 올바른 방향을 잃고 표류할 때가 많다. 능력이라는 말이 풍기는 묘한 매력에 도취되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은 상실한 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만 내달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 때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행하다 어느 정사에 도착했는데, 그 때 육군비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기기 전에, 우리가 제일 좋은 장소를 먼저 차지하자’며 서둘러 좋은 와좌구를 점령해 버려 사리불 등은 머물 곳이 없어 나무 밑에서 자는 일이 생겼다.
이 일을 알게 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아, 누가 먼저 자리나 물, 공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러자 어떤 자는 출가 전의 신분을 근거로 들어 바라문 등의 높은 계급 출신이 먼저 받아야 한다고 대답하기도 하고, 또 어떤 자는 율사나 법사 혹은 깨달음을 얻은 자 등, 출가 후 지니게 된 능력에 따라 먼저 받아야 한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 모든 의견을 다 물리치신 후, ‘출가자는 출가 전의 계급이나 가문, 혹은 깨달음의 깊고 낮음에 의해 상하 질서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신 후, ‘물론 젊은 나이에 깊은 깨달음을 얻는 것은 그것만으로 존경받을 일이지만, 승가의 상하질서는 이것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니라. 먼저 출가한 자가 선배가 되어야 한다’ 라며, 세속에서 태어난 해가 아닌 구족계를 받고 승가의 일원으로 거듭난 후의 햇수로 상하가 정해짐을 설하셨다.
하루라도 빨리 출가한 자는 선배이다. 후배는 선배를 깍듯이 대우하며 먼저 일어나 인사하고 합장하는 등의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당시 자신의 가문을 자랑하며 교만스러웠던 것으로 유명한 석가족 출신의 출가자들 역시 부처님의 이러한 방침을 잘 받들었다고 한다. 아난 등의 석가족 청년 6명이 출가하고자 했을 때, 그들은 ‘우리 석씨는 교만합니다. 이 이발사 우빠리는 오랫동안 우리들의 하인이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우선 그를 먼저 출가시켜 주십시오. 우리들은 그에게 경례하고 일어나 맞이하며 합장하고 공경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석씨의 교만을 제거 하겠습니다’라며, 우빠리를 먼저 출가시켰다고 한다.
속세에서 자신들의 하인으로 살아 온 자를 먼저 출가시켜 선배로 모심으로써, 그들 안에 잠재해 있을지도 모를 교만심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법랍에 의한 승가 운영은 안이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이런 방법으로 현대와 같은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은 분명 무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나친 능력 만능주의는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무엇을 진정한 능력이라 부르며 추구해야 할 것인지 그 올바른 기준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부처님께서 법랍(法臘), 즉 구족계를 받고 먼저 출가한 사람이 서열상 위가 되는 규칙을 정하시고, 이를 기준으로 승가의 질서를 유지해 가는 방법을 선택하신 배경에는 능력이라는 말에 휘둘려 옳고 그름을 잊은 채 위로만 올라가고자 애쓸 수도 있는 인간의 욕망을 경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자랑
(도쿄대 박사)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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