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과 물리학] 30. 절대無와 믿음
- ‘無我’‘空’깨달음으로 체득하는 경지 -
- 믿음없이 머리로만 심경 풀면 오류 범해 -
반야심경은 진리를 ‘공’이라 표현하면서 ‘공’을 설할 뿐 ‘믿음’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야지가 없는 범부한테는 ‘믿음’이 중요하다. 알음알이로써는 알 수 없는 진리가 있음을 믿어야 반야심경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다. 믿음없이 반야심경을 읽으면 ‘불교는 허무를 주장한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머리로만 생각하고 믿음없이 ‘공’이나 ‘무’를 풀이할 때 범부가 범하는 오류는 이런 것이다.
진공에서 우주가 탄생했다라고 말할때 사람들은 ‘진공’이나 ‘무’를 자기식으로 먼저 그려낸다. 대부분 텅빈 공간을 먼저 생각한다. 텅빈 공간 가운데서 하나의 점과 같은 우주가 생겨나 팽창하는 것을 생각한다.
시공간도 없고 물질도 없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것을 그려낼 수 없는 것이다. 시공간도 없고 물질도 없는 곳에서 우주가 생겨났다는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일지라도 보통 사람들은 시공간마저 없는 상태를 상상해내지 못한다. 이것은 ‘아’나 ‘마음’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교육이나 환경들에서 벗어나 일체의 집착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무아지경’이라고 표현하지만 이 상태를 자기식으로 그려낸다. 욕심도 없고 악한 마음이 없는 깨끗한 마음을 그려낸다. 욕심이 나쁜 것이 아니다. 욕심이란 인간의 활성(活性)이 나타난 것이니 근본적으로는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옳다거나 그르다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활성은 활성일 뿐이다. 활성이 없다면 삶의 의미를 잃를 것이다. 문제는 잘못된 집착에 의해 활성이 이기적으로 나타나 타인을 해치는 것이 나쁜 것이다. 즉 집착때문에 본질을 보지 못하고 어리석은 생각과 행위를 하게 되므로 경전은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집착가운데 가장 끈질긴 것은 아집이다. 아집마저 벗어버린 마음이라야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공간과 물질도 없는 상태를 상상할 수 없듯이 ‘아’마저 벗어버린 마음을 보통사람들은 상상할 수가 없다. ‘아’를 벗어난 마음은 마음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어의 상보성원리에서 설명하듯이 자연은 본질적으로 이중성으로 되어 있다. 분별지로 보는한 이중성을 이루는 전체를 볼 수 없고 어느 한쪽을 포기 하고 한쪽만 보게 된다. 분별지로 보는한 항상 주와 객으로 나누어 ‘아’를 주장하고 나머지를 ‘객’이라 하여 나눌 수 없는 하나를 억지로 둘로 나누 어 보기에 진실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물질도 없고 시공간도 없고 아도 없는 그것을 사람들은 이해할 수도 없고 그려낼 수도 없어서 경전이 ‘무’ 또 는 ‘공’이라고 표현한 것을 ‘허무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 게 되는 것이다.
경전이 ‘시고공중 … 이무소득’이라고 설한 내용은 모든 것에서 벗어나 ‘아’도 없는 상태, 즉 주·객이 일체로 된 상태에서 본 내용을 설하는 것이다. ‘공’이 이러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진대 거기에 무슨 수상행식이 있겠으며 의식경계가 있겠는가? 거기에 무슨 밝고 어두움의 상대적 구별이 있겠는가 시공간을 초월한 상태에 무슨 늙고 죽는 것이 있겠으며 고집멸도가 있겠는가?
모든 것이 일체가 되어 ‘아’가 따로 없는 상태에 무슨 지혜라는 것이 따로 있겠는가? ‘공’에 관해서는 분별지로 판단하여 이렇다 저렇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다해도 틀리고 저렇다해도 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직 깨달음만으로 체득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믿어야하는 것이다. 믿을 수 없다면 경전을 버려야 한다.
물리학은 ‘공’을 기술할 수 없고 이중성을 발견하고 자연의 성질을 설명해도 물리학자들도 ‘공’을 체득한 것이 아니지만 물질과 시공간의 성질을 여러모로 자세하게 따져 자연이 단순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심오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심경이 말하는 내용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따라서 물리학은 보통 사람들에게 믿음의 바탕을 마련해 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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