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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통치
제목 : 예수님의 통치
성경 : 엡 1:20-23
찬송 : 208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200426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엡 1: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엡 1: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엡 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의 승천”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일 주제와 연관이 되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통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해 드리겠습니다.
유명한 작곡가인 헨델이 몸이 약해져 음악활동을 못하게 되어 빚을 지게 됩니다. 빚을 갚지 못하자 사람들의 고소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헨델은 하나님과 깊은 친교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때 작곡한 곡이 유명한 '메시아' 입니다. 그 대곡을 쓰고서 헨델은 얼마나 감격하며 눈물을 흘렸는지 눈물 자국이 원 악보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 후 헨델은 건강이 더욱 나빠져 급기야 눈을 실명하고 맙니다. 그는 마지막 죽기 직전의 고난주간에 메시아를 직접 지휘하고 그 다음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메시아 곡의 후렴 중 반복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가 다스리신다 그가 다스리신다 만왕의 왕 그가 다스리신다" 입니다. '다스리신다' 는 말이 무려 43번이나 곡 중에 반복됩니다. 주님은 왕으로 오시며, 우리는 그 분께 순종하고 그 분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이 되어야 한다는 곡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십니다. 믿습니까?
‘코로나19’ 사태를 경험하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나라를 누가 어떻게 통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통치하는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그 백성들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현명하고 지혜 있는 통치자가 다스리는 백성들은 위기가 기회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하이델 베르크 요리문답
✔50문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라는 말이 왜 덧붙여져 있습니까?
답: 그리스도는 거기에서 자신을 그의 교회의 머리로 나타내기 위해서 하늘에 오르셨으며, 성부께서는 그를 통하여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51문
우리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이 영광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첫째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그의 지체인 우리에게 하늘의 은사들을 부어주십니다. 둘째 그는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모든 원수들로부터 보호하고 보존하십니다.
한 사람의 삶에서 자존감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청년이 자신은 쥐라고 확신하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쥐라고 생각했기에 가장 무서운 것은 고양이였습니다.
‘고양이 앞에 쥐’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청년은 많은 상담도 받고 치료도 했지만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그를 데리고 목사님께 갔습니다. 목사님이 청년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락없이 쥐구먼” 이 청년은 목사님의 말을 듣고 ‘이제야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부터 목사님을 계속 만났고 목사님은 복음을 전하여 청년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목사님은 선포했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쥐가 아닙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청년은 그 선포를 듣고 또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 저는 이제 쥐가 아니군요. 이제 사람으로 살 수 있군요. 감사합니다.” “가서 쥐 생활을 청산하고 사람으로 삶을 시작하십시오.”
이 청년이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교회 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30초도 되지 않아 교회로 다시 뛰어 들어왔습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숨을 헐떡거리면서. 목사님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교회 바깥에 고양이가 있어요.” “아니, 이제 더 이상 쥐가 아니고 인간인데 그 고양이를 발로 차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이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혹시 저 고양이가 제가 쥐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면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를 쥐처럼 살게 만드는 요인, 우리를 위축시키고 주저앉게 만드는 요인은 우리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축시키고 주저앉게 만드는 요인은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그 내부에 있는 요인을 영적 자존감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를 위축시키고 주저 앉게 만드는 낮은 영적 자존감, 어떻게 해야 납덩이같이 무거운 낮은 자존감의 무게를 이길 수 있을까요?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빛 아래서 나를 볼 때 낮은 영적 자존감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지금 나와 어떻게 관계하고 계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로서 제대로 된 영적 자존감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동료들과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베테랑 어부들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그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신 분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물고기의 향방을 아시는 주님을 만나 뵙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을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고백을 통해서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고 고백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는 말을 오해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에게 오른쪽, 왼쪽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영은 방향도 없고 자리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은 신학적인 용어로 ‘신인동형론’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뭔가를 설명할 때 아이가 알아들을 수 없으면, 그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설명하듯이 하나님에 대한 신비한 사실을 인간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근동 지방 사람들은 항상 오른손을 사용합니다. ✔오른손은 권능, 힘, 기술, 뛰어남의 상징입니다. 왠지 왼손은 오른손보다 열등하고 자치가 적이 보입니다. 특히 손으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왼손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왼손은 화장실 청소용이기에 오른손으로만 식사를 합니다.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말은 하나님 옆에 앉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근동 문화적 배경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과 같은 지위를 확보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을 높이셔서 자신과 동일한 영광과 지위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면 그분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그것이 없었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영으로만 있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와 똑같은 몸을 가진 상태로 영광과 권능과 지위를 소유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너무 고생을 하셨기 때문에, 2000년 동안 쉬어도 피곤이 회복되지 않아 지금도 하늘나라 소파에서 쉬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왕의 자리, 왕좌에 앉으셨다는 뜻입니다. 온 우주 만물의 통치자로 등극하셨다는 뜻입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엡 1: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엡 1: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엡 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예수님은 기독교의 교주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불교도나 무슬림이나 다른 이교도들은 안 믿어도 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에수님은 그분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은 그리스도인만의 구주가 아니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인류에게 사랑을 가르친 스승이 아닙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해 창조되었고, 만물이 그의 손안에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와 소유주로서 그것을 통치하고 유지하며 관리하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찬양할 때 ‘만유의 주’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 예수님과 관련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온 우주 만물, 온 나라, 어떤 이름이나 사람이나 권력도 예수님의 통치권 밖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모든 역사를 유지하고 모든 만물이 그 발아래 복종하는 왕 중의 왕이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신뢰할 때 영적 자존감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미국에서 상한가를 달리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이수혁 주미대사’입니다. 이수혁 주미대사는 정읍출신으로 국회의원을 하다가 주미 대사로 파송 받아서 근무하고 있는데 진단키트나 방호복 등을 구입하기 위해서 미국 주지사들이 대사를 많이 접촉한다고 합니다. 어느 때보다 자존감을 갖고 근무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은 영적 자존감을 가지고 살고 계십니까? 우리는 누가 보낸 대사들입니까? 만왕의 왕이시며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는 예수님이 보낸 대사들입니다. 그렇다면 당당하십시오. 자존감을 가지십시오.
✔예수님은 지금 거기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이것은 단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지금 거기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도 가르쳐줍니다. 그것을 알아야 우리가 이 땅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잊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사도신경의 한국말 번역에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맨 끝에 ‘가’자 하나가 더 붙은 것이 의미의 큰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라고 해야 합니다. ‘가’와 ‘며’, 그 토씨 하나가 승천과 재림 사이에 있는 이 고백을 괄호 속에 묶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이 대목은 우리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이 엄청난 고백을 괄호 속에 묶어 버린 이 ‘가’자 하나가 2000년을 생략해 버린 것입니다. 승천에서 재림까지, 승천에서 오늘까지 2000년의 세월, 예수님은 지금 저 하늘에서 지친 몸을 회복하시면서 이 땅을 내다보며 구경하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가’자를 빼야합니다. 만약 저 하늘에서 하시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우리도 이 땅에서 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 한 글자 때문에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내세 주의적 신앙, 현실 도피적 신앙, 그릇된 종말론, 억지 재림론 등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분이 2000년 동안 하나님 우편에서 하고 계신 일은 괄호 속에 묶어놓고 잊어버려도 될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 언제 오셔요.”, “빨리 천국에나 가면 좋겠다.”
이러면서 살아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는 이유는 주님이 저 위에서 일하시는 것과 똑 같은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과 지위로 만물을 통치하시며 특별히 교회의 머리로 일하고 계십니다. 방점은 다시 오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은 결코 주님이 오시는 날만 기다리고 앉아서, 이 땅의 삶이 끝나고 돌아갈 천국만 고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자 하나 때문에 거듭나자마자 천국 가는 것을 생각하고, 이 땅에서 보내는 성도의 삶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이 땅에 남겨진 것은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재림하실 때까지 거기 계신 이유와 같은 이유입니다.
만물의 통치자이신 예수님은 지금 만물의 주인으로서 계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머리로 계십니다. 예수님의 전능하신 손안에 두 가지가 들려 있습니다. 하나는 만물이고, 하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거기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엡 1: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엡 1: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엡 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예수님 때문에 교회와 만물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만물의 작은 일부이거나 큰 세상의 구석에 있는 조그마한 집단이나 주변 세력이 아닙니다. 개인으로서나 공동체로서나 교회는 세상의 중심입니다. 세상은 교회가 전해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복음을 알려줄 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통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을 바꾸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중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교회가 이런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어떤 풍파에도 위축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중심이고 세상을 이끌고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누구입니까? 바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당당하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십니까?
✔ 교회는 세상의 주변적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교회의 주변적 존재입니다. 교회의 세상에 물을 흘려보내는 수원지와 같습니다. 수원지에 아무리 물이 가득해도 밸브를 잠가 버리면 물은 한 방울도 흘러 갈 수 없습니다. 교회가 이와 같은 축복의 밸브를 잠가버리면 세상은 하나님 없이 힘들게 살다가 죽고 말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어둠 속에 살다 영원한 파멸에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고 교회로서 세상에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심긴 그 작은 세상은 하늘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인 여러분에게 맡겨진 선교지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소명을 잊어버리면 엉뚱한 목표와 가치에 삶을 낭비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온갖 허세를 떨고 앉아 있던 아그립바 왕과 로마의 군사 지도자들과 예루살렘의 중요한 종교 지도자들 앞에 섰습니다. 그 장면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만히 서 있기도 두려운 VIP모임에, 포승줄로 손발이 묶인 바울이 나와 섭니다. 그러나 바울은 묶인 두 손을 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행 26: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도대체 바울은 무슨 권세를 가졌기에 왕의 영광과 군사 지도자나 유대 지도자의 권세보다 자신의 처지를 더 높게 여겼을까요? 그 자존감의 근거는 만물을 다스리고 교회를 통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는 의식과 확신에서 온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예수님의 축복의 통로라고 인식했습니다.
✔교회가 뭡니까? 영어로 ‘처치’(church)인데 이 말은 독일어로는 ‘키르케’(kirche)이고, 헬라어의 ‘큐리아코스’에서 나왔습니다. ‘큐리아코스’는 ‘주님께 속한 것’(belonging to the Lord)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귀히 여기고 책임져주십니다. 그분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령으로 세우신 은사들과 지도자들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날마다 자라갈 수 있게 하실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축복의 통로로 살아갈 힘이 되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혹시라도 낮은 영적 자존감 때문에 힘들어 하시지는 않습니까? ‘나는 되는 게 없어,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나는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끊임없는 궁색함 가운데 자기 삶을 탄식하며 살아오지는 않으셨습니까? 소극적으로 아무것도 시도하려 하지 않고, 피곤에 찌들어 살아오지는 않으셨습니까? 영적 자존감을 회복하십시오. 믿음의 눈을 들어 하늘의 왕을 바라보십시오. 만유의 왕이 우리를 돕기 위해 저 하늘에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요즘 우리 시아가 자주 부르는 노래가 있는데 ‘나야 나’라는 노래입니다. 당당하게 외쳐보십시오. ‘나는 그런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