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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하지 않은 죄/삿 2:1-5
1.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 5.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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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채규현목사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교회가라고 했더니 교회도 땡땡이 치고, 헌금하라고 돈을 줬더니 뭐 사 먹고…,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십니까? 뭐, 자녀들까지 생각할 것도 없죠, 여러분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되겠네요. 그럴 때 그런 아이들을 교육할 때 어떻게 합니까? 아이를 불러다 놓고 “너는 네 잘못을 알렷다!” 그럴 때 만약에 아이가 “아니,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제가 사람을 죽였습니까? 학교에서 뭘 훔쳤습니까? 간음을 했습니까?” 여하튼 무슨 잘못을 했냐고 되물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게 마치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그런 식으로 대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챤이라고 하지만 그 삶을 살면서 “내가 과연 죄를 지었는가, 안 지었는가?”를 생각할 때 내가 특정한 잘못한 행동을 했는지 안 했는지를 따져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이 없을 때에 마음 편하게 회개할 것 없이 잠자리에 든다고 제가 얘기했었죠? 바로 그러한 식으로 많은 크리스챤들이 믿은 지 오래되면 될수록 내 삶 속에 별로 크게 문제점을 못 느끼고 삽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었던 죄의 특징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무슨 특정한 죄를 지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안 한 것뿐이에요.
실제로 사사기의 역사는 사사기 3장에 첫 번째 사사 옷니엘에서부터 기록되어 있는데, 1장과 2장은 사사기 전체에 대한 서문인데 두 가지 싸이클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싸이클이 바로 오늘 읽은 2장 1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그 첫 번째 싸이클의 초두에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하고 나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차지하라고 하신 땅에 대해서 처음에는 열심히 차지하죠? 유다가 시므온과 힘을 합해서 차지합니다. 요셉 족속도 차지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좀더 구체적으로 나가서 므낫세, 에브라임, 아셀 등의 지파들은 점점 가다가 힘이 들고 어렵고 하니까 멈춥니다. 심지어 단 지파는 자기에게 할당된 지역의 땅 한 줌도 못 밟고 그냥 쫓겨 가는 신세가 됩니다.
바로 그러한 일이 있을 때에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오늘 말씀인 2장 1절부터 5절까지입니다.
“왜 너희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말씀을 지키지 않느냐? 하나님께서 그 가나안 땅의 모든 백성들을 진멸하고(그들과 함께 하지 말고) 가나안 땅, 약속의 땅을 전부 차지하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차지하지 않느냐?”
그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입니다.
그리하여서 “이제까지는 너희에게 쫓을 능력을 주었는데 너희가 안 쫓았으니까 앞으로는 쫓지도 못하게 만들겠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들을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 면이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을 때에 그것을 불순종의 죄라고 한다니까요.
분명히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교회 잘 다녀라, 공부 열심히 해라.”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할 것은 안 하고 거꾸로 “내가 무슨 문제입니까?”하고 이야기할 때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냐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대한다니까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는가, 안 지었는가를 따질 때에 내가 어떤 특정한 행동을 했느냐, 안 했는냐만 가지고 따집니다.
거꾸로 돌이켜서,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내가 안 했는지는 따져보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에 그것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우리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죄를 지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개인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요구하시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대로 행치 못하면 여러분은 죄를 짓는다니까요.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의 삶을 뒤돌아볼 때 특정한 잘못을 저지른 것이 없다고 해서 마음 편하게 오늘 하루가 지나갔다면 여러분은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그저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해꼬지 안 하고 착실하게 살았다고 해도 여러분은 죄를 지은 것입니다. 전도할 때 보면 많은 분들이 그렇게 이야기해요.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슨 해를 끼쳤느냐? 나는 그냥 내 자신 착실하게 열심히 산다.” 보통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옳은가 하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바로 그렇게 열심히 이 세상을 착실하게 살면서 우리 주님께 어리석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이 몇 사람 나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 두 사람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부자가 열심히 일했습니다. 거짓해서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열심히 일을 해서 남보다 많은 소출을 얻었습니다. 그 당시의 부자면 전부 농사짓는 사람들이었죠? 많은 소출을 얻었어요. 너무나 곡식이 많으니까 창고도 새로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창고를 보니까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래서 “내 영혼아 오늘은 내가 편히 쉬자. 편히 먹고 마시고 놀자.”합니다.
광고 카피에도 그런 말이 있죠?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자, 내가 열심히 일했으니 충분히 누리자.” 할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내가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리하면 그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어리석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 해꼬지 안하고 열심히 산 그 인생은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다가 결국 죽은 뒤에 지옥 가니까요. 그리고 누가복음 16장에도 보면 어리석은 부자가 또 한 사람 나옵니다.
이 사람도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거기 나오지 않아요. 그냥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옥에 갑니다. 그에게 문제는 바로 자기 눈앞에 나사로라는 거지가 앉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자가 특별히 나사로에게 해꼬지 한 것 아닙니다. 그 부자의 문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부유함이 자기 것인 줄 알고 자기만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그 앞의 나사로에 대해서는 무정했다는 말입니다.
그 지옥불에서 목이 타서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합니다. “저 나사로를 시켜서 내 입에 물 한 방울만 떨어뜨려 주십시오.” 그러나 “얘야, 너와 나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어서 오갈 수 없다. 너는 지옥, 여기는 천국이다.”
그 어리석은 부자의 문제가 뭡니까? 잘못을 저질러서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맡기신 그것을 가지고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바로 그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어떤 특정한 행동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삶의 방향을 가지 않고 그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주일날 교회 다닌다고 해서 여러분이 구원받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향한 하나님이 뜻이 무엇이 있습니까? 바로 그 뜻을 압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어찌 하라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재물을 주셨습니까, 재능을 주셨습니까, 아니면 특정한 어떠한 자리를 주셨습니까?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안 했나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들을 안 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이 죄에 대해서 여기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징벌을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열심히 싸워서 그 땅을 차지했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 한 죄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크게 이야기하면 두 가지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한 죄(sin of commission), 해야 될 것을 안 한 죄(sin of omission)의 두 가지인데, 많은 사람들은 한 죄만 생각해요. 하나님의 뜻대로 안 한 죄는 생각지 않습니다.
여하튼 여기서 징벌이 예언되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합니까?
4절부터 보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이 ‘보김’이라는 말 자체가 weepers-우는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자, 자기 잘못을 지적받고 그들이 웁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제사도 드리는데, 여기서 그들이 우는 이유가 뭡니까?
회개라고도 이야기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회개가 참된 회개냐 아니면 거짓 회개냐,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이게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거든요. 왜냐하면 이것이 제대로 구분되지 아니할 때 여러분은 잘못하면 거짓 회개하고도 나는 회개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대단히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회개는 우리에게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참된 회개는 다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자유함과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생명에 이르고 구원에 이릅니다.
그런데 거짓 회개는 슬픔과 한탄이 있습니다. 그냥 겉으로 보기에 회개와 비슷한 모양이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을 잠깐 봅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우리말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는데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Godly sorrow brings repentance that leads to salvation and leaves no regret, but worldly sorrow brings death.”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슬픔과 근심은 결국 회개케 되는데, 회개는 결국 구원에 이르게 되고, 결국 후회 없는 삶으로 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적 슬픔은 죽음밖에 이를 게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적 슬픔이 거짓 회개입니다.
이렇게 거짓 회개와 참된 회개가 명확하게 마지막 종착역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구별할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과 같이 참된 회개는 어떠어떠한 특징이 있고, 거짓된 회개는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같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 참된 회개로 회개할 때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과 생명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제가 4가지 구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적으십시오. 그리고 두고두고 여러분이 잘못했을 때 실제로 그 적은 내용을 한번 보십시오.
지금 내 상태가 참된 회개를 하는 상태인가 거짓 회개를 하는 상태인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거짓 회개는 자꾸 책임 전가합니다.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됐다.”하고 이야기해요. 바로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제일 먼저 한 짓이 바로 책임 전가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이것을 먹었느냐?” 아담에게 물어보죠? 그러니까 아담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여자가 나더러 먹게 해서 먹었습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책임 전가하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다 똑같은 것 같습니다.
여자는 “뱀이 나를 꼬여서 먹게 했습니다.” 그 이상 다른 말은 안 해요. 전부 책임 전가입니다. 그 책임 전가에만 열중하게 돼요.
그런데 이런 소리 많이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주로 부부싸움 할 때 보면 이런 일이 많아요. “당신이 나한테 이것만 안 했어도 내가 이렇게 안 했잖아.”
그런데 참된 회개는 환경이 어떻든 다른 사람이 어떻든 결국 내가 한 일, 아니면 내가 하지 않은 그 어떤 죄, 거기에 대한 책임감에만 철저히 통감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이렇게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 우리의 죄가 이렇게 큽니다.”
대표로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이러한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느헤미야에 나옵니다. 느헤미야 9장 33절에 보면, 느헤미야가 왜 이스라엘이 망했는가하는 면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뭘 당했습니까? 나라가 망해서 아무것도 없죠? 느헤미야도 현재 페르시아의 이방 종주국의 관리로서 예루살렘에 와 있는 것입니다- 주는 공의로우시니-우리가 마땅히 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 행하셨음이니이다.”
이것을 고백합니다.
진정한 회개가 바로 이런 면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내 잘못입니다. 내 환경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환경이 이래서 그랬다, 다른 사람이 이래서 그랬다…”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된 회개는 책임 전가가 끝나는 순간에 비로소 시작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참된 회개는 내가 지은 그 죄 자체에 대해서 슬픔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 회개는 죄의 결과로 내게 임한 고통, 거기에 대한 슬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는데 어떻게 내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런 일을 했을까?’ 이게 참된 회개입니다. 결과는 내가 당해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압살롬에게 쫓겨서 도망가는 순간에 주변에서 야유도 보내고 특히 시므이같은 사람은 돌도 던지고 그러는데 자기는 당해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죄의 결과에 대해서는 내게 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 죄 자체에 대한 슬픔, 그 죄 자체에 대한 더러움과 추악함을 익히 알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내가 이렇게 더럽고 추악한 일을 했을까?’ 이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후 주님과 눈이 마주칩니다. 그리고 나와서 우는 것, 왜 그럽니까? 그가 갑자기 어떤 어려움을 당해서 웁니까? 자기가 잘못한 결과로 뭔가를 괴롭게 당했습니까? 전혀 그런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3년 반 동안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는데…, 주님께서 나에게 뭐라고 하셨나, 나를 어떻게 이끄셨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님을 내가 부인하는 행동을 했구나.’ 바로 거기에 대해서 우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순간에도 바로 그러한 자세로 회개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데, 내가 이렇게 더러운 죄악을 지을 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이게 진정한 회개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거짓 회개는 어떤가 봅시다.
잘못을 하면 내 양심에 상처가 있고 양심이 괴롭다고 했죠? 마치 내가 불에 데었을 때 그 피부가 아픈 것처럼 잘못을 저지르면 우리 양심에 상처가 나서 죄의식에, 마음의 아픔에, 답답함에, 생명이 없습니다. 괴롭습니다. 죄의 결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슬퍼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 연민이에요. 왜 자기 연민이냐면, 만약 이 사람에게 죄의 결과가 임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괴로워하고 슬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의 결과에 초점을 맞춰요.
가장 대표적인 예가 가인이 아벨을 죽인 다음에 하나님이 그에게 징벌하시죠? “땅과 네가 유리하리라 너는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그러자 가인이 대번에 하는 말이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자기에게 임한 벌(punishment)이 너무 중하다고 괴로워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신음합니다.
그게 진정한 의미의 회개는 아닙니다. 괴로워하기는 하지만 회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된 회개는 그 죄를 더럽고 추악한 것으로 새롭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죄가 처음에 우리에게 다가올 때에는 멋있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보암직도 하고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좋게 보인다니까요. 그런데 회개하는 그 순간에 죄의 본질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인 이유는, 똥을 똥으로 보지 아니하고 금으로 보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죄는 더럽고 추악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성이 없다면 그것을 더러운 것으로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죄로 눈이 가리고 나니까 그 똥이 금으로 보여서 덥석 잡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는 이것이 더럽고 추악하다는 것을 알고 떨어내는 행위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에요. 그러면 거짓 회개는 이것은 계속 금으로 봐요. 그런데 그 결과가 벌이니까 괴로워서 하나님 앞에 나갑니다. 그러니 이 행동은 앞으로도 계속 있겠죠. 계속 금으로 보니까요. 이 마음에 이 죄를 갈망하는 마음은 버리지 않은 겁니다.
죄의 결과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죠.
그래서 스테판 차녹(Stephen Charnock)이라는 사람이 이것을 좀더 이해할 수 있게 구분했는데 “참된 회개는 복음적 회개이고 거짓 회개는 율법적 회개다.” 이렇게 구분했습니다.
그 차이가 뭔지 한번 봅시다. 복음적 회개,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사랑하심,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해서 아까 말씀 드린대로 ‘이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내가 이런 행동을 했을까? 내가 이런 행동을 할 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고 괴로우실까?’ 여기에 대해서 아파하고 눈물 흘리는 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소망에 이르게 하는 복음적 회개입니다.
그런데 거짓 회개는 율법적 회개인데,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벌을 주시는 하나님,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벌 때문에 놀래서 얼른 이야기하는 거예요. 애들 키워보면 어떤 애들은 매를 딱 들면 나쁜 짓하다가가도 얼른 와서 빌면서 잘못했다고 하는데, 사실 그것은 다시는 그것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지금 당장 매를 피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와서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회개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마치 그런 식으로 나간다는 말입니다.
칼을 가지고 놀면 엄마가 때립니다. 잘못했다고 하지만 칼 가지고 노는 게 너무 재밌어요. 그러면 그것은 마음에서 버린 것이 아니에요. ‘칼을 가지고 노는 것은 위험한 것이니까 갖고 놀면 안 되겠구나.’ 부모의 의도는 아이가 이 생각을 갖게 하려고 때리는 것인데 그 생각은 안 하고 지금 당장 매는 피하고 보자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면에서 참된 회개와 거짓 회개가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참된 회개는 결국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그 앞에 내가 배신하는 행동을 했구나, 그 앞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행동을 했구나.’ 바로 그것을 느끼며 다시 그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나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특정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내 속에 하나님이 용서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까 본 고린도후서 7장 말씀을 다시 한번 봅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우리말이 조금 더 복잡하긴 한데,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회개에 이르게 하는데, 그 회개는 결국 구원받게 하고 -여기서 회개가 구원받게 한다는 의미는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 이 구원적인 면은 지옥에서 천국이 아니고 우리 삶에서의 구원을 주로 이야기하는 것이고- 결국 그것이 후회할 것이 없는 회개-영어에는 “repentance that leads to salvation and leaves no regret…”라고 나오는데, 그렇게 회개하고 나면 그 다음에 계속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고 그 옛날에 했던 죄의 끈을 끊고 멀어지고 자유하게 되어진다는 말입니다.
그 죄를 좋은 교훈으로 삼아서 앞으로 그 길을 가지 않겠지만, 그 문제에 관해서 계속해서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걸려서 마음에 계속 괴로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거짓 회개는 처음부터 끝까지 행위에 의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도 그냥 못 받아들여요. 내가 뭔가를 해야 해요. 바리새적 회개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 구원을 모든 자기 행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죄를 지을 때 모든 신앙의 근본이 흔들려요. 그러니 하나님 앞에 나갈 때도 그냥 못 나갑니다.
뭔가를 하지 않으면 ‘내가 하나님 앞에 그냥 그렇게 뻔뻔하게 나갈 수 있나?’ 자기를 도저히 용서하지 못해요. 그 말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거부하고 어찌하든지 내 행위로 뭔가 하나님께 보여야만 되겠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뭔가 하나님의 벌이 내리지 않으면 자기 스스로 벌을 내립니다. 일부러 괴로워지는 행동으로 자기를 몰고 가고 그러면서 머리 산발하면서 괴로워합니다. 그렇게 해야 속이 좀 풀려요. 하나님 앞에 내가 뭔가 한 것 같고, 이제 하나님 앞에 조금 떳떳하게 나가도 될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것은 거짓된 회개입니다. 모든 삶이 행위에 의존하고 있어요.
그런데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의 우리의 상태, 우리의 죄적인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아신다는 말입니다. 이미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그 모든 요소, 모든 뿌리를 우리 마음속에서 다 보고 계시는데 뭘 새삼스럽게 하나님 앞에 내놓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나의 이러한 모든 면을 볼 때, 죄악을 지을 때 나의 추악한 면을 다시 보는 겁니다. 하나님 뜻대로 내가 살지 못할 때 그것을 보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괴로운 중에 ‘그렇지,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셨지.’ 언제나 이것을 생각합니다.
내 죄의 깊이를 알면 알수록 오히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은혜가 무엇인지 알고 감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말이 바울의 고백에 있습니다. 로마서 7장 22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을 봅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죄에게 진 거죠. 죄에게 졌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바울의 가장 유명한 탄식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거기서 그 다음 25절이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다시 잡는 것입니다. ‘그렇지, 그러니까 내가 몰랐던 이러한 나까지도 주님께서 아시고,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구나, 감사하구나.’ 바로 이 면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다시 잡은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는 참된 회개는 죄의 추악함과 더러움을 알고 그 자체에 대해서 슬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좀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면 ‘아, 이게 금이 아니고 똥이었구나. 내가 왜 이것을 만졌을까?’ 이것을 다시 한번 아는 행동이 진정한 회개라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할까요? 가서 씻겠죠. 그리고 다시는 그것을 안 만지겠죠. 회개의 열매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는다는 의미가 바로 그겁니다.
옛사람-죄의 것은 아주 더럽고 추악한 거예요. 새사람을 입습니다. 옛날에 내가 거짓말을 많이 했다면 더 이상 거짓말하지 않고 이제는 참된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짓말 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왜냐하면 죄는 그 거짓된 것이 죄이기 때문에 그 반대는 참된 말입니다. 그래서 참된 말, 진실된 말을 해야 합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도둑질 안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방향에서 긍정적으로 가서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남을 돕기 위해서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진정한 회개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죄를 짓던 걸 안 하는 것, 그게 회개가 아닙니다. 거기서 끝나면 회개가 끝나지 않은 겁니다. 반대편의 긍정적 일을 하는 것 까지가 비로소 회개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말을 하는 사람들은 이제는 선한 말을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는 것으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거짓 회개는 회개의 열매는 없이 그냥 감정만 남아 있어요. 자기 연민에 의한 감정입니다. 죄를 지은 상태로 내게 있는 모든 죄의 결과로 느끼는 괴로움과 주변의 모든 문제점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퍼질러 우는 거예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그런 분이 있었어요. 금요 기도회에 와서 누구보다도 자기감정을 쏟아 부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교회에서 제일 골칫거리인 사람이었어요. 기도를 그렇게 하는 게 골치가 아니고 바로 그것이 거짓된 회개였다는 말입니다. 자기 삶의 변화는 없어요. 정말로 하나님 앞에 진실된 회개를 했다면 매일 매일의 삶이 조금씩이라도 변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전혀 안 바뀌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감정, 자기 연민에 의해서 우는 거예요. 여기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음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울음 뒤에 회개의 열매가 없거든요. 진정한 회개는 삶의 방향이 바뀝니다. 그리고 그 전에는 무책임한 삶을 살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책임있는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여러 가지 성경공부를 하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아, 이제는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지.’하고 마음을 먹어요.
제게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되묻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 뜻대로 사시겠습니까?” “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 건데요?” 거기에는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돌이킴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뭐가 내 마음에 없는데 어떻게 열매를 맺습니까?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 됩니다. 내게 있는 죄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하고, 그 구체적인 죄에서 어떻게 벗어나겠다는 것이 있어야 회개의 열매가 제대로 맺히는 것이죠. 두리뭉실 대충 이야기하는 것은 회개 안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우리의 삶에서 즐비하게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게 똥입니다. 그러면 똥이 금으로 보이는 사람이야 거기서 뒹굴겠죠. 똥을 똥으로 보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발뒤꿈치를 들고 똥을 피해서 구체적으로 다니겠죠. 하나 하나 발걸음을 조심히 떼겠죠. 똥을 안 밟으려고요. 포괄적으로 대충 이야기하는 사람은 밑에 똥이 엄청나게 많은데 멀리 바라보고 가는 사람이에요. 안 밟겠어요? 밟죠. 구체적으로 내 잘못을 알지 못하는데 무슨 회개가 됩니까? 자기 삶의 습관에서 구체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알아져야 회개를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제대로 보지 않고 그냥 “아이, 내 마음이 죄인이죠, 뭘. 내가 하는 게 다 죄죠….” 그런데 “구체적으로 뭡니까?”하면 말을 못해요. 진정한 회개는 좀더 구체적으로 내 삶의 문제점을 보고 그것을 제해버리는 계획이 있습니다. 그럴 때 진정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지난날에 한 회개가 참된 회개였습니까, 아니면 거짓 회개였습니까? 은
혜의 하나님 앞에, 사랑의 하나님 앞에 내가 잘못을 해서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에 대해서 내가 괴로웠습니까, 아니면 죄 진 뒤의 벌이 두려워서 하나님 앞에 얘기했습니까? 그 벌이 괴로워서 잘못했으니까 제발 이것 좀 치워달라는 그 기도를 했습니까? 구체적인 내 삶의 잘못된 부분을 하나하나 보려고 노력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우리 제자훈련이나 기초양육훈련은 전부 구체적인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여기서 그 삶에 안 걸리는 사람 없습니다.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해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내 삶의 문제점을 말씀으로 지적받고, 말씀으로 결단하고 하나하나 고쳐나가는 과정, 이것이 제자훈련이며 기초양육훈련입니다. 여러분 혼자서도 해야 하겠지만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일종의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 됨을 아는 것, 매일매일 그 죄성을 느끼는 것, 이것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갑니다. 그러나 특정한 죄에 매였느냐, 놓였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 회개했다면, 내가 불순종한 그것에 대해서 진정으로 참으로 회개했다면 그 끈에서 놓임 받고 자유함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여러분의 잘못이나 불순종이 있다면 다시 한번 참된 회개, 오늘 말씀드린 바로 그러한 회개를 한번 해 보십시오.
내 잘못에 대한 추악함이 무엇인지를 느껴보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책임 전가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하심, 하나님의 자비하심, 하나님의 사랑, 이것이 받아들여져서 감사하는 삶을 사십시오.
여기서 “네 죄를 알렸다!”하고 여러분의 마음을 찌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찌를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 다 죄인이에요. 단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 세상에 살면서도 다시 천국을 회복하는 소망의 방법을 가르쳐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은혜가 우리 성도들에게 누구에게나 있기를 원합니다. 이를 통해서 여러분의 삶이 날로 바뀌기를 원하고, 바뀌는 삶 속에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하던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천국이 여러분의 삶에 지배되고, 아니면 주변 사람들에게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러한 축복이 여러분의 삶에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