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하셨더라.”
성경에서 읽기 힘든 부분이 있다. 족보이다. 누가 낳고, 누가 낳고, 또 누가 낳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19절) 족보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이어진다. 중단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아브라함의 아들을 통해서. 다음에 또 기록될 것이다. 이삭의 아들을 통해서.
이삭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낳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고, 여전히 이삭의 하나님이 되어주셔서, 이삭을 축복하신다. 족보는, 사람의 이야기일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하였다. 성경은 리브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언급한다.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20절) 이삭은 이방인 중에서 아내를 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 중에서 리브가를 아내로 선택하였다. 그래서 리브가의 족보를 다시 한 번 언급한다.
그런데 도무지 자녀가 생기지 않았다. 이스마엘은 그렇지 않다. 12아들을 낳았고, 각각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스마엘은 큰 지도자였다.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열두 지도자들이었더라.”(16절) 이삭과 너무 비교가 되는 삶이다.
이삭은 아들을 낳기 위해서 첩을 얻거나, 양자를 들이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로 인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옆에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대신, 이삭은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21절) 이삭이 60세가 되었을 때(26절), 리브가가 아들 에서와 야곱을 출산하였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끼리 결혼하면, 그 가정에는 문제가 없을까? 아픔이 없을까? 싸움이 없을까? 부부싸움 후,조카가 묻는다. 삼촌네는 나이 먹었어도, 알콩달콩 살지 않느냐고.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냥 웃지요.”
차를 탔다. 밖의 풍경을 바라보다 깜짝 놀랐다. 미세먼지가 하나 없어, 저 멀리 있는 산도 가깝게 보인다. 날씨가 너무 좋다. 내년 6월까지는 이렇게 매일 맑은 하늘을 볼 것만 같다. 놀러 다니는 사람은 아주 좋으리라. 비 걱정 없으니, 얼마나 즐기기 좋겠는가? 정말 그런가?
이 말은 이런 뜻이다. 비가 오지 않는다. 가뭄이다. 내년 6월까지는 비 소식을 듣기가 어렵다. 농사도 걱정이다. 식수가 걱정인 곳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뭄에 대한 정부 대책은 없다. 국민들이 알아서 대책을 세우려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재앙이다. 그것은 절대로 축복이 아니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날마다 해가 쨍쨍 뜬다면? 거기는 사막이다. 생명이 없는, 죽음의 땅이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는 가정이라고? 하나님 닮은 부부가 사는 가정이라고? 천국이 이루어진 가정이라고? 그 말은 싸움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이 사는 가정에 어떻게 사랑만 있고, 싸움이 없겠는가? 다툼은 있지만,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가정이어야 한다. 오히려 싸움이 없는 가정은 문제가 더 심각하다. 속으로 감춰둔 아픔이 더 많다. 서로 무관심하다는 뜻이다.
물론 이삭의 가정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픔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녀의 문제이다. 오랫동안 기다렸음에도 도무지 자녀가 생기지를 않았다. 기도해야만, 그것도 아주 많이, 오랫동안 기도해야만 하는 가정이었다.
아브라함은 75세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자녀에 대한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약속에 불과하였다. 결국 86세 때, 아브라함은 하갈을 첩으로 맞았다. 아브라함 생각에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이삭은 기다렸다. 그냥 기다리지 않았다. 기도하면서 기다렸다. 당연히 기도하는 동안 지쳤을 것이다. 포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른 방법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은 아브라함의 삶을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당연히 기도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이삭이 받은 유산? 기도의 유산이다.
젊은이들을 3포세대라 불렀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남성은 결혼, 여성은 출산을 1순위로 포기하였다(20150303). 4월, 7포세대라는 말이 등장했다.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를 포기한, 5포세대라 불렀었다. 여기에 ‘꿈’과 ‘희망’을 잃었기에, 7포세대라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젊은이들이 얼마나 더 많은 소중한 것들을 포기해야 할까? 더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N포세대’라 부른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는 이상, 어려운 시대를 살아야만 한다. 이전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컸다. 지금은 ‘살아남는’ 문제가 제일 크다.
예수쟁이라고 해서 ‘N포세대’를 무사히 지나갈 수는 없다. 예수쟁이에게는 무엇이 가장 큰 어려움일까? 오직 한 가지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태아는 탯줄로 산모와 연결되어 있다. 나는 하나님과 기도의 탯줄로 연결되어 있다.기도하지 않는데, 어떻게 예수쟁이로서의 삶을 살겠는가? 성경은 기도할 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한다.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잠 15:29)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사 38:5) “⑦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⑧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하시니라.”(마 21:22)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응답의 때가 언제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반드시 응답된다. 즉각적으로 응답되는 경우도 있다. 기다리라고 말씀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라고 말씀하는 경우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응답하신다는 사실이다.
자녀의 문제로 인해 많이 힘들어하는 부모에게 해줄 수 있었던 것은 한 가지 대답밖에 없었다. “기도하세요. 늦지만, 반드시 응답됩니다.” “눈물의 자녀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양 옆에 두 명의 강도가 있다. 한 사람은 천국에, 한 사람은 지옥에 갔다. 무엇이 이들의 운명을 가른 것일까? 한쪽 강도는 예수님께 구하였다. 다른 강도는 예수님께 전혀 구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바로 옆에 계시다. 그래서 예수님께 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구하지 않았다. 그것이 차이이다.
아합 때, 3년 6개월의 가뭄이 있었다. 아합은 바알에게 기도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그러나 바알은 아합에게 아무런 응답도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알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바알에게 끝까지 매달렸다.
3년 6개월 후, 아합은, 본의 아니게,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다. 물론 아합이 기도한 것은 아니다. 엘리야가 기도한 것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즉시, 기도하는 즉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골짜기마다, 웅덩이마다 비로 인해 물이 가득 찼다. 고통을 끝내는 힘은 바알에게 있지 않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께만 있다.
구하지 않음은 죄다. 구해야 함은 의무이다. 그런데 축복이다. 이보다 신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대다수의 사람들은 구경꾼이다. 이리 되어도 좋고, 저리 되어도 좋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기대할 것은 없다. 그 많은 사람들 중 하나님께 간구하는 마음을 품은 한 사람이 있었다. 엘리야이다. 그가 있음으로 모든 사람이 축복을 받았다.
사탄도 성경을 믿는다는 사실을 아는가? 사탄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다.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다. 우리보다 더 성경을 잘 알고, 더 잘 믿는다. 사탄과 천사의 한 가지 차이가 있다. 사탄은 성경을 믿는다. 그러나 말씀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지는 않는다. 천사는 기도한다. 예수쟁이는 기도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 안다. 말씀대로 살면 어떠한 축복이 있는지 안다. 그것뿐이다. 구경꾼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지는 않는다. 몸부림치지 않는다. 오히려 기도하다가 말씀대로 이루어지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사탄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예수쟁이들의 모습으로 보인다.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눅 22:54) 베드로의 수준이 이러하였다. 비록 수제자라는 이름을 가지기는 하였지만,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실 때, 베드로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 자리를 완전히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것이 베드로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잘 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는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너무나 잘 안다. 그러나 그뿐이다. 더 이상 베드로에게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거기까지이다. 지금 기도해야 하는데, 지금 예수님 옆에 있어야 하는데, 지금 몸부림쳐야 하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베드로의 자리는 없었다.
신앙은 참 단순하다. 성경을 읽고, 읽은 대로 믿고, 읽은 대로 살면 된다. 이것처럼 쉬운 게 없다.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구경꾼처럼 뒤로 물러선다면, 신앙의 축복은 없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다.
이삭은 믿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반드시 그 약속을 이루시는 모습을 옆에서 보았다. 그래서 의심하지 않았다.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수도 없이 많은 생각이 오고갔을 터인데, 이삭은 잘도 참았다. 그리고 응답의 축복을 누렸다.
사랑하기 위해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믿기 위해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이삭은 믿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이루실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믿음대로 역사하셨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 3:12)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