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미 시선
ks kim.
강남 코엑스 시네마 극장에 들어서면 커다란 화면에 압도 당하다가 분위기가 고조된다. 이곳은 빈부고하를 떠나 입장하는 순간부터 왕자와 공주로 대접을 받는 분위기이다. 극장 안 좌석부터 왠만한 가정집 좌석보다 크고 편안하여 그대로 잠을 잔다고해도 무어라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긍정의 마인드만을 갖게 만드는 마법의 공간인 것이다. 이곳에서 펼쳐지는 영화는 온갖 폭력물도, 욕설과 야합과 질투의 대사도 돌비 시스템을 통하여 모두 흘러나온다. 그것은 스피커를 통하여 사랑의 메아리로 재포장 되는듯한 인상을 받는다. 관객 누구도 이런 시스템을 통하여 쏟아지는 거짓 상황, 욕설, 야합에 토를 달거나 가자미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펼쳐는 스릴 넘치는 살벌한 표정과 욕설에서 오히려 시원함을 만낀한다. 저 주인공보다 더 멋진 사랑의 대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을 것 같다. 또는 비꼬는 말로 상대를 후벼파고 쓸어트릴 수 있다고 은연중 자랑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독하다는 역할도 꼭 하고싶은지도 모른다. 표독스러운 시선으로 일상 생활에서는 꿈꿀 수도, 절대할 수도 없을 것 같은 그런 연기를 누군가는 하고 싶다는 것인가?
세월이 변해서인지 슬픈 영화가 끝나도 눈물을 흘리며 극장 문을 나서는 관객을 볼 수가 없다. 날씨가 지구 온난화로 더워져서 그런가, 인심이 야박해져서 그런 것인가? 옛날과는 사뭇 다르다. 극장을 나서면서 담담하게 아이스크림을 사먹거나, 다른 식당 등으로 분주히 가는 분들이다. 영화는 그저 영화 한편 보았다는 것에 만족하는 것 같다. 극장 쓰레기 통 속에는 먹다 남은 다량의 팝콘과 음료들로 항시 가득 채워진다. 누구하나 아까워하지도 않는다. 괜스레 남은 팝콘 들고가는 손에 오히려 주위의 시선이 꼬친다. 팝콘을 주문할때부터 큰컵에 다 못먹을 만큼 듬뿍 담아주어도 대다수 분들은 별 생각없이 받아간다. 혹 직원들에게 이거 너무 많은데하면, “드시다 남으면 버리셔도 되어요”라며, 은근히 극장에 오면서 째째하게 아낄걸 아끼나라는 가자미 눈의 인상을 받는다. 로마에 오면 로마 법을 따르라는 표현이 이곳의 룰인 것 같다.
과거 왕실로부터 10리 떨어진 왕십리라는 곳에 "광무" 극장이 있었다. 그 당시 영화관 좌석은 앉으면, 여기저기서 삐끄덕 거리는 잡음이 극장 안을 멤돌고 있었다. 그렇다고 나무의자는 아닌 철재의자로서 당시로서는 그위에 최고급 천이 깔린 의자였다. 영사기가 돌아가면 극장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요즘처럼 영화 화면에 자막도 없는 무성 영화 필림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전혀 음성이 나오지 않았다. 무대 한켠에 성우가 나와서 맛갈나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무성 영사기를 바라보며 바쁘게 대사를 이어가면, 30~ 40명의 관중들은 한마다도 놓칠세라 귀를 쫑끗 세운다. 관객 누구도 이런 불편한 사항에 토를 달거나 가자미 눈을 치켜뜨지 않는다. 성우가 슬픈 대목을 이야기하면 여기저기서 흐느낌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정말 함께 울고 함께 웃는 퍼포먼스였다. 뒷좌석 관객은 그날만큼은 청력이 커졌는지 귀가 토끼 만해진 것처럼 보인다. 영사기의 불빛이 어둠의 공간을 가로지르며, 뿌연 미세 먼지를 통과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영화관을 나설때면 남자분들은 손수건을 꺼내어 애인에게 혹은 친구에게 혹은 부인에게 건내주기 바쁘다. "그만 울어 저거 다 가상하여 지어낸 것이야, 요즘 세상에 누가 그렇게 살아"라며 어깨를 감싸주며 걸어가는 커플들을 심심치 않게 보게된다. 그러면 상대 여성분은 “당신은 눈물 한방울도 없어, 그런 주인공을 보고도 정말 매정한 사람이야” 하면서 사랑 싸움을 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남성분은 너털 웃음을 지으며, 애써 가슴 속으로 애잔함을 느켜간다. 당시 영화에서의 성공은 누가 고무신 부대를 많이 모이게 했냐에 달렸다고까지 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위에 가자미 시선들을 느낀다.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 기성 세대에 대한 반대 또는 삐딱 노선을 하면 마치 애국자로 가는 길로 여기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를 해본다. 일부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말 끝마다 토를 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가자미 시선으로 보는 것이 습관화 되버린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마 그분들 어린 시절 상한 가자미만을 먹어서 그렇다면 이해 할 수도 있다. 어떤 때는 해도 너무하는 것 같다. 다같이 잘 살자는 것인데 내가하면 로멘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고정 관념이 판치는 것은 아닌가. 그런 기성 세대들의 못된 모습을 보면서 커오고 있는 젊은 세대들 중에는, 저 사람도 그러는데 삐딱한 가자미 시선으로 세상보는게 어떠하냐고한다. 무한한 언론의 자유는 망언에 가까운 것은 아닌가? 가진자의 것은 빼앗느냐, 빼앗기냐에 몰입하는 정국이 결국에는 누군가의 입에 가지미를 통째로 주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왕실로부터 10리 아니 5리만이라도 벗어난 마음으로 모두가 살아간다면 낙원이 될 것이다. 많은 민초분들이 그렇게 살고있는 왕국이 이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삐딱하게 눈이 박힌 가지미를 찾아 종로 뒷골목 생선구이 집으로 해질 무렵 찾아간다. 그곳에 가면 엉덩이 펑퍼짐하고 땡땡이 치마가 더 잘 어울리는 아주머니와 아가씨도 보게된다. 물론 펑퍼짐한 아줌마가 더 많치만 젊은 아기씨가 이 골목에서는 더 돗보인다. 아가씨하면 에어콘 찬바람이 팡팡 나오는 우아한 레스토랑이나 산뜻한 커피숍에서 멋진 까운을 입고 근무하는 모습이 떠오르기도한다. 정말 나하고는 너무 먼 당신인가하는 용기를 마음 속으로만 키워본다.
그러나 이곳 찜통 더위 종로 생선구이 전문 뒷골목은 이정도 더위에는 알랑곳 하지않는다. 손님이 생선구이 백반을 주문하면, 그중에 눈알을 삐딱하게 뜨고 있는 실한 가자미 구이를 추천한다. 윗 몸통은 시커머코 아래 배부위는 처녀의 젓가슴보다 더 하얀 것을 덥석 집어올린다. 가자미가 뜨거운 불길에도 뒤집지도 않으면서 그 열기를 몸으로 다 받고 있다. 삐딱한 가자미 시선에서 어느세 해탈의 경지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알고 보면 세상사가 부처님 손바닥보다 작다고 하지 않던가? 여기에도 음과 양의 조화가 공존하는 것이다.
연탄불 위에 석쇠 망을 놓고 앞뒤로 뒤집어가며 구워지는 가자미를 보자면, 그 냄새에 세상 만사가 황홀해지는 것이다. 구이 냄새만으로도 하루의 피로가 가신다. 샤넬 넘버 5 향수보다 진하게 다가온다. 두툼한 빨간색 고무장갑을 끼고 있는 아가씨 옆으로 다가선다. "아가씨 그거 타지않게 잘 구워주세요"하자, 아가씨가 빙그레 의미있는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아저씨 혼자서 여기 자주 오시는 것 같은데, 아직도 모르세요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사랑은 애가 타야 오래지속 되어요, 더 이야기할까요?, 그러니 가자미 좀 탄다고 말씀 안하셔도 되어요"하는 것이다.
젊은 아가씨한테 한방 멋지게 맞았지만 오히려 기분 좋은 저녁 식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쌀쌀맞게 맞이하던 아주머니와 아가씨가 몇번 보았다고 농까지 받아치는 것이다. 공연히 선수이면서 그러냐는 표정이었나? 선수는 커녕 나이에 맞지않게 맹숭이가 맞을지도 모른다. 이 맛과 말이 통하는 분위기에 여기로 발길을 돌리고 있는 것인가? 주방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빨간 장갑의 아주머니도 빙그레 웃고 있다. "아저씨 다음에 또 오시면 아주 탱탱할걸로 다 드릴게요, 안녕히 가세요"한다. 가수 싸이의 노래처럼 무얼 좀 아는 아가씨인가? 눈 삐뚤어진 가자미를 수없이 구워가면서 즐겁게 생활 전선에 탄탄하게 서 있는 것이다. 정말 눈 안 삐툴어진 아가씨가 비너스처럼 보인다. 열심인 아가씨와 아주머니 분들을 볼때 교훈을 한가지 더 얻고 귀가한다.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마음으로 따뜻한 생선을 구워 본적이 과연 몇번이라도 있었던가?
2024. 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