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메니아는 고원지대의 나라다.
수도 예레반의 경우 해발 1천미터 이상의 높은 언덕에 건설된 도시이지만 아르메니아 전체를 본다면 그나마 낮은 지대에 속한다.
동쪽으로 갈수로 산악지형으로 바뀌다가 내륙의 바다라 불리는 거대한 세반호수의 경우만해도 호수의 높이가 해발 1천9백미터에 달한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의 전체적인 지형은 대체로 평탄하고 들판 아니면 구릉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아름다운 나라다.
물의 축복을 받은 나라이면서도 비옥한 대지로 인하여 모든것이 풍요로움을 간직한 나라이다.
저지대와 구릉에선 포도와 사과를 비롯한 옷갖 과일들이 넘쳐나도록 재배된다. 와인과 코냑은 세계적인 품질을 자랑한다.
드넓은 들판엔 사람의 인력이 자라가는 한도까지 밀과 옥수수등을 재배한다. 초원에는 소와 양을 기르고 가파른 언덕에는 올리브와 살구나 호두가 재배된다. 하지만 여전히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땅이 사방에 널려있다.
전형적 낙농국가인 아르메니아는 대자연의 축복을 크게 선물로 받은 그런 나라였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나라 아르메니아.
예전엔 그랬다.
'해바라기(I Girasoli)'라는 영화가 있었다.
소피아 로렌이 주연을 했고 비토리오 데 시카가 연출한 고전영화다.
오프닝에서 광활하고도 광활한 우크라이나의 끝이 보이지않는 해바라기 밭의 풍경이 너무도 인상적인 영화였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 무렵 나폴리의 외진 시골마을에 살던 조반나(소피아 로렌 )는 밀라노에서 온 안토니오(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군대에 징집되지 않기위해 두사람은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지만 안토니오는 결국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떠나게 된다.
시간이 지나 남편을 기다리던 조반나에게 한장의 전사 통지서가 날아든다. 하지만 남편이 살아있다고 확신하는 조반나는 남편을 찾아 오랜 시간동안 소련의 구석구석을 헤맨다. 그 멀고도 힘든 여정에 광활한 해바라기 밭이 화사한 해바라기 꽃과는 다르게 구성지고 슬픈 배경음악처럼 따라 다닌다. 그리고 마침내 천신만고 끝에 남편을 찾아내지만 그는 전쟁중에 부대에서 낙오되어 헤매다가 부상으로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였다. 길에 쓰러져 사경을 헤매는 안토니오를 정성을 다해 치료해준 소련 여인 마샤를 만나 두 딸을 둔 아버지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조반나와 마샤가 첫눈에 상대를 알아보고 집안으로 안내하는 장면, 평생을 찾아헤맨 안토니오가 기차에 내리면서 마주치는 조반나를 알아보던 장면, 기차에 뛰어올라 대성통곡을 하던 조반나의 모습이 지금도 인상적으로 뇌리에 스쳐가는 명화였다.
이번 아르메니아를 여행하면서 첫 느낌에서 부터 온통 이 '해바라기' 영화에서 풍겨나오던 것과 같은 암울하고 음습한 느낌이 시종일관 떠나지를 않았다. 예레반을 떠나 조지아 트빌리시로 떠나는 순간까지 나는 여전히 암울하고 음습한 분위기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그런 느낌이 싫었다.
하여서 나는 아직 예레반에서의 계획했던 시간과 일정이 남아있었음에도 배낭을 꾸렸다. 예정을 앞당겨 아르메니아를 떠났다.
벗어나고 싶었다.
조반나가 남편을 찾아다니던 1940년대 중반 소련의 영향력 안에 놓여있던 식민지배를 받던 당시의 생활모습이 모두 그대로 여전히 아르메니아에 남아있다. 물질만능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아주 아프도록 슬픈 자화상을 느끼게 해준다. 예레반을 벗어나면 아르메니아는 여전히 (구) 소련의 지배하에 허덕이던 먼 과거의 모습 그대로이다.
아스라히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기 시작한다. 결코 유쾌한 마음이 아니다. 이런 느낌이 지속되거나 반복되면 떠나야 한다.
지난 여행의 아르메니아는........ 2년 전의 예레반은 결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아주아주 먼 옛날,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그리디'와 '우고시아'였다. 딸들이 연못가에서 놀기를 좋아하였는데 어떤 영문인지 포세이돈은 두 딸에게 해가진 후부터 먼동이 트기 전까지만 연못가에서 노는것을 허락했다. 하루는 노는데 정신이 팔려 그만 아버지와의 약속을 어기고 말았다. 해가 솟아오르기 시작하면서 '아폴로 신'이 발산하는 황홀한 빛에 그만 넋을 잃었다가 동시에 사랑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자매는 서로 아폴로의 사랑을 차지하려 경쟁하던 중에 언니 그리디가 아폴로에게 나쁜말로 동생을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미 진실을 알고있던 아폴로는 언니를 냉혹하게 외면하기에 이른다. 언니는 뼈저리게 후회를 하고 뉘우친 후에 아폴로에게 거듭 애원을 하지만 끝내 아폴로는 언니를 외면했다. 끝내 선채로 운명을 달리한 그리디의 발에서 뿌리가 내리고 한포기의 꽃이 피어났으니 바로 '해바라기'다.
하여 해바라기의 꽃말은 '당신을 사람합니다' '숭배합니다' '존경하고 사모합니다' '늘 바라보고 있어요'라고 전해져 내려온다.
동양에서는 '오로지 태양만을 바라보며 서 있다' 하여 '주군에 대한 충성'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해바라기는 이름처럼 오로지 해만 쫓아다니며 바라보고 있을까?
노랗고 화사한 모습은 태양을 닮았다는데, 해바라기는 정말로 태양을 따라 고개를 움직일까?
아니다.
해바라기의 진짜 이름은 처음부터 아예 '해 버리기'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해바라기는 하루에 한번 해를 바라본다.
고장난 시계도 하루에 두번은 시간을 맞추는데, 살아있는 해바라기는 움직이는 일 없이 하루에 딱 한번만 해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해바라기가 자동화 태양광 집광판처럼 하루종일 해를 향해 고개를 돌려가며 서 있는 줄로 착각한다. 왜 분명하게 아닌 사실을 마치 진실인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을까? 혹시 모르겠다. 해바라기니까 당연히 해를 따라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열렬한 발상이 언젠가 고개를 돌리는 해바라기를 유전자 변형으로 만들어낼지 말이다.
설혹 그런일이 생겨난다 해도 곧바로 추가될 과제가 남아있다. 해바라기는 꽃이 만발했다 싶어지면 어느새 씨가 자라면서 해바라기는 서서히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씨가 웬만큼 여물면 벌써 고개를 푹 떨군채로 하루에 한번도 제대로 해를 올려다보지도 못하게 된다.
대부분의 모든 꽃들이 제 역활을 다 하고나면 추해지기 마련이다.
여름이 지날무렵이면 해바라기는 서서히 말라가기 시작한다. 꽃잎은 이미 오래전에 모두 떨어지고 갈색으로 변한 줄기 위에 온통 주름으로 빼곡한 검은 꽃이 흙으로 덮힌 자신의 발치만 내려다보고 있다. 그러면 냉기를 잔뜩 머금은 싸늘한 세찬 바람이 검버섯 같은 얼룩이 번져가기 시작하는 삐쩍마른 줄기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버석버석 처량한 곡소리를 내며 스쳐지나간다.
모든 꽃들이 땅바닥에 드러눕는 계절이 와도 여전히 해바라기는 깡마른 줄기로 꼿곳하게 세우고서 그 을씬년스러움 추함을 오래오래 지켜나간다. 태양을 닮았던 화사한 자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숙인 고개 위로 소복하니 눈이 쌓이던 날, 어디선가 개똥지바귀 한마리가 날아와 얼마 남지않은 검은 꽃봉오리를 헤집는 모습을 보노라면 세월의 덧없음에 절고 고개가 설레설레 흔들어지게 된다.
그제서야 '해를 가장 적게 보고 사는 식물이 바로 해바라기였구나'라고 실감이 느껴진다.
아르메니아는 해바라기를 닮았다.
아르메니아가 그토록 열망하면서 바라본것이 소비에트 사회공산주의는 아니었을텐데 말이다. 스산한 허무함만이 가득 남겨진 듯 하다.
왜 아르메니아는 점점 아픈역사의 과거속으로 회귀하고 있을까?
온통 숲으로 둘러싸인 예레반은 아름답고 활기찬 도시다.
다운타운 지하광장 분수대 엺에서는 '에릭 크랩턴'의 라이브 공연실황 중에서 (River of Tears) 가 연주되고 있다.
공연을 즐기는 사람,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는 사람, 쥬스와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지그시 눈을 감고 상념에 잠긴 사람 등등 여타의 세계 어느 대도시와 다를바가 없는 풍경이다. 옆으로 눈을 돌리면 버거킹에 맥도날드에 스타벅스 간판이 늘어서 있다.
도심을 가득채우고 있는 숲속은 온통 멋지고 아름다운 바와 레스토랑과 카페이다. 언제나 사람들로 붐빈다. 한낮에도 운치가 차고 넘치는데 밤이되어 조명이 켜지면 이곳은 전혀 또다른 별천지로 변한다. 황홀하리만치 로만틱한 도시로 예레반은 또한번 변신한다.
숲속 공원에 자리한 카페에서는 매우 멋진 DJ가 중심자리에 서서 분위기 짱나는 발라드 음악을 선곡해 들려주고 연인들의 신청곡을 받아 전해준다. 이젠 기억에서조차 가물가물했던 '아란드롱과 달리다'의 (Paroles Paroles, 달콤한 속삭임)를 여기 예레반 카페에서 듣게될 줄이야........
이런 노래가 흐르는 도심 공원속의 노천카페가 사방에 지천으로 널린곳이 바로 예레반이다.
예레반의 야경을 구경하다보면 도심의 이곳저곳에서 쉽게 버스킹 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냥 보통의 아마추어 수준 이상이지 싶다. 또한 현지인들과 여행자들이 반응도 엄청나다. 얼핏 그네들의 문화수준을 가늠해 볼수 있는 척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된다.
아르메니아어로 된 노래를 부르는 아가씨는 영락없는 그리이스의 여가수 '나나 무수쿠리'랑 영락없는 복사판이다. 관객도 가장 많았다.
나나 무수쿠리의 (Over And Over)를 처음 듣던날의 그 감동을 내가 어찌잊을 수 있단 말인가? 이날의 버스킹 감흥도 역시 그랬다.
예레반 공황국광장의 분수쇼는 비록 규모면에서는 작은 편이나 전세계적으로 이미 짜임새있고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있는 여행자에게는 아주 특별한 이벤트이다. 수많은 사람들로 공화국 광장은 밤이면 밤마다 늘 북적인다. 9시에 시작되는 분수쇼가 진행되기전에 엄청난 수의 군인과 경찰이 동원된다. 각종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예레반 당국의 노력이다. 그런데 이날 계속 공연이 지연되더니...... 9시30분이 지나자 하나 둘 군인과 경찰들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단박에 눈치를 챘다. '오늘 공연은 꽝이로구나'하고 미련없이 광장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예레반의 야경은 로마나 파리나 런던이나 뉴욕과 별반 다를것 없이 생동적이고 화려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의 발걸음은 무겁고 마음은 '어서 내일 예레반을..... 아르메니아를 떠나자' 라는 생각 뿐이다.
'아마도...... 이제 내가 다시 아르메니아를 방문하는 일은 없을것 같다. 굿바이. 예레반.'
가장 번화가인 도심의 중심에선 곧잘 정치가가 마련한 집회장소를 목격할 수 있다.
모든 정치인이 개혁과 복지의 비젼을 제시하며 목청을 돋우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집회로 끝나지 않는다. 개혁과 복지에 대한 설명회나 토론의 장이 결코 아니다. 정치인이 손흔들며 인사를 마치면 곧 인맥을 총동원하여 유명 연예인들의 후원연설의 장으로 변모한다. 스포츠인, 연예인, 가수가 연이어 등장하고....... 그런 무대가 끝나면 곧바로 댄스파티나 경연장으로 변모한다. 디제이와 비보이들이 등장하고 무대와 주변은 온통 춤판으로 삽시간에 변해버리고 만다.
'아! 이런게 정말로 제대로 된 포퓰리즘의 전형이구나. 이런걸 이 먼곳까지 와서 보게 되다니....... 야들이 이걸 모두 한국에서 배워왔나?'
그리고 이 집회장소의 주위로 깃발을 든 한무리의 사람들이 연실 오가면서 구호를 외쳐대는데...... 마찰이나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나라를 팔아 먹는 정치인과 그들과 결탁해 국민을 우롱하고 재산을 갈취하는 재벌들은 모두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의회를 해산하라.'
'재벌을 해체하라.'
아르메니아의 젊은 세대는 주장한다. '체제의 개방과 제도의 완전한 개혁으로 진정한 열린 자본주의를 당장 실현하자.'
아르메니아의 노년 세대는 주장한다. '자본주의의 병폐만이 몰려 들어왔어. 차라리 (구) 쏘련연방 시대로 돌아가자.'
숱한 외세 침략과 질곡의 세월을 아르메니아가 헤쳐오게한 원동력은 '기독교'와 '가족 중심주의'의 가치관 이었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지금의 아르메니아에는 '기독교'가 가치관을 점차 잃어가고 '가족'이 점차 해체 붕괴되어가고 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1870~1924)의 주도하에 1917년 10월에 벌어진 혁명은 노동자.군인.농민을 주체로 무장봉기를 일으켜 부루주아 임시정부를 전복시키고 프로레탈리아 혁명 정권을 수립했다. 오랜 세월동안 억압만 받아오던 민중이 스스로 정권을 창출하는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그들은 '소비에트'라는 행정기구를 만들었고 이를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1991년 (구)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반세기만에 '프로레탈리아 사회주의'는 실패라는 오명하에 역사속으로 사라져갔다.
사회주의 혁명의 시험무대가 되었던 아르메니아를 비롯한 (독립국가 연합, CIS)에 가입한 신생독립국가들은 이 순간까지 심각하게 '사회주의 시험대의 휴유증'으로 몸살을 앓고있다. 아르메니아가 가장 대표적 사례이며 실로 참혹한 현실을 그대로 생생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간의 동서냉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을때 스탈린은 심각하게 경제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미국.영국.프랑스 등 서방의 자본주의 보다 사회주의가 우월하다는 것을 경제부흥과 복지향상을 통해 실현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존립여부는 사회주의 노선을 통한 경제력에서의 승리만이 진정한 혁명의 승리로 직결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고스플란(Gosplan)'을 만들었다.
고스플란은 소비에트 연방의 경제분야를 계획하고 관활하고 통제하는 절대적 권력기관이었다. '소비에트 연방 각료회의 국가 계획위원회'가 공식 명칭이었다. 이들이 사회주의 경제이론의 핵심인 국가 계획경제를 주도했다.
'사회주의식 국가경제'를 쉽게 다시 말하자면, A.B.C.D.E........ 모든 나라가 자신들에게 필요한 소비재와 비소비재를 모두 생산해서 잘 팔리는가 하면 전혀 팔리지 않아 도태되는 무한 경쟁방식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벗어나, 고스플란이 지정해주는 대로 A국가는 비료를 만들고 B국가는 벽돌을 만들고 C국가는 철을 생산하고 D국가는 치약과 비누를 생산하는 방식의 국가별 분업화를 시켜서 최고의 품질로 소비재와 비소비재를 생산한다면 불필요한 경쟁에서 벗어나 지극히 효율적인 계획경제를 기반으로 성장해서 마침내 사회주의 경제가 승리한다는 생각이었다.
고스플란은 연방의 각 국가별로 집약적인 분야를 할당해 배분했다. 서방을 따라잡고 이기는데 가장 필요한 분야는 중공업 분야와 화학공업 분야였다. 그러면서도 생필품 같은 경공업 분야는 대부분 모스코바 인근에 배치하였다. 일단 크렘린의 당간부들의 배는 먼저 채워주고 따스하게 해주어야 되었으니까. 공장을 지으면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던 농민들을 산업현장인 공업분야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각 국가는 고스플란이 배정하고 할당해준 만큼의 물품만 생산해서 모스코바로 보내면 되는것이었다. 그러면 먹고 사는데 필요한 모든것이 배급되어 돌아왔다. 이 제도가 실행되고 한동안은 생산량이 마구 증가하고 품질도 좋았다. 결과로 양질의 배급도 잘 이루어 졌다. 그러나 몇년 지나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고스플란의 할당량이 늘어가면서 품질에 서서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결과는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배급품의 품질도 떨어졌다.
당이 나서서 독려하고 감시했지만, 기초 기반산업이 취약한 채로 시작한 일이었기에 운송에 문제가 발생하고 자원부족까지 생겨나자 여기저기서 일손을 놓고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늘어났다. 생산량이나 활동은 줄었어도 배급에 대한 욕구는 커져만 갔다. 굶주림 앞에는 혁명이고 당에 충성이고 다 소용이 없었다.
사회주의식 국가계획 경제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혁명이 아닌 '개혁(페레스트로이카)'을 주장하면서 종국엔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르메니아가 가장 크게 직격탄을 맞았다.
아르메니아는 고대 이래로 농업과 낙농업을 생업으로 대를 이어져 내려온 나라다.
고스플란은 이런 아르메니아에게 중공업 분야를 배당했다.
위의 사진에서 처럼, 남쪽 아제르바이젠에서 아르메니아를 거쳐서 다시 조지아를 거쳐 북쪽의 카즈베기 산맥을 지나 소련의 모스코바로 연결되는 철로가 건설되었다. 그나마 복선도 아니고 단선이다. 철로의 폭도 좁고 기반도 콘크리트로 받친 대단히 엉성한 철로다. 지금도 조지아 트빌리시와 아르메니아 예레반 간에 철도여객운송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홀수는 예레반 출발, 짝수는 트빌리시 출발로 하루에 겨우 한대가 운행되고 있으면서도 운송시간이 약 13시간에 이른다. 버스 운송 시간의 2배 이상이 걸린다. 철도운송에 대한 모든것이 심하게 낙후된 탓이다.
당시에는 그나마 이 철도가 전부였다. 육로로의 운송은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이런 상황을 기반으로 고스플란은 이 철도의 양 옆으로 빼곡하리만치 제철소를 비롯한 공장을 건설했다. 그리고는 주변의 농가에서 젊은 남녀를 모두 빼내왔다. 그래도 젊은이들은 너도나도 기쁜마음으로 집에서 뛰쳐 나왔다. 공장의 배급이 훨씬 좋았으며 공장지대마다 새로운 마을이나 도시가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70년대초의 구로공단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시작은 그렇게 했는데....... '탁상경제의 허술함'이 곧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철공업을 할당받은 아르메니아에서는 다른 광물과는 다르게 철과 석탄의 생산량이 지극히 적은 맹점을 가지고 있었다. 철과 석탄이 없는 중공업단지를 상상이니 해 볼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회주의(흔히 공산주의)에서는 그런것이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저 당(고스플란)이 하라면 무조건 실행부터 해야만 하는 시대였으니까 말이다.
당장 하나뿐인 저 좁은 철도를 이용해 주변의 다른 나라에서 석탄을 싣고 오고, 철광석을 실어 날라야 했다. 광물을 싣고 온 그 기차에 생산한 철근이나 물품을 실어내야 했다. 배급품도 역시 그 기차로 실어와야만 의식주가 해결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여기저기 공장의 기계들이 녹이 슬기 시작했다. 석탄과 철광석이 와야 철근을 생산할텐데 아무리 기다려도 자재는 오지를 않았다. 철근 생산이 줄어들자 배급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시골 고향에서 밀을 가져다 빵을 만들어 먹으려니....... 젊은 사람이 모두 떠나 방치한 농촌도 그만큼 생산량이 뚝 떨어져 있었다. 상황이 그래도 이미 도회지의 물을 먹은 젊은이들은 시골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려 하지 않았다. 아르메니아의 근본을 지켜왔던 농업과 낙농업도 이미 심하게 망가져 버리고 난 후였다.
페레스트로이카의 결과로 1991년 아르메니아는 (구)소련 연방으로 부터 독립하여 자유를 얻었다.
너도나도 광장으로 뛰어나와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 열기와 환호성이 사그라지자 비로소 더욱 엄청나게 비극적인 현실에 직면한 수 밖에 없었다.
자유를 얻고나면 세상 모든일이 저절로 해결될 줄로만 알았다. 하늘에서 자유라는 빵이 떨어질 줄 알았다.
'아르메니아는 텅 빈 깡통만 남아있는 처지로 전락했다.'
소비재 생산시설을 아예 가져본 적이 없었기에, 비누며 치약이며 양말 하나까지 모두 외국에서 당장 사다가 써야만 했다.
소련이 세워준 공장과 기계설비는 이미 사용불능일 정도로 녹이 슬어 방치된 처지였다. 무엇인가 내다팔고 생필품을 들여올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피폐해진 농업은 자급자족도 어려운 형편으로 전락했기에 내다 팔 엄두도 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꼼짝없이 앉아서 굶어죽을 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소련의 앞잡이였던 자들이 나라의 재산을 서방의 기업들에게 하나 둘 몰래 빼다가 팔아먹기 시작했다. 그런 자들이 앞다투어 서로 자기가 나라를 다시 바로세우겠다고 정치의 깃발을 올리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소련연방 정보기관(KGB)의 앞잡이였던 사람들이 몰래 외국의 기업과 짜고 들어와서....... 소위 뜨는 사업(정보통신. 방송. 석유산업)을 하나 둘씩 싸그리 독차지 해 버렸다.
그런 난국속에서 미쳐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아르메니아 이다.
예레반을 벗어나면 전국 어디고를 가리지 않고 아주 먼 과거속에 갇혀있다. 오로지 예레반만이 아주 특별한 도시로 남았다.
2년 전에는 그래도 지금의 모습보다는 나아보였었다.
조금은 암울한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다 보면서....... 내가 가장 가슴이 아팠던 것은 바로....... 이들의 모습속에 우리 한국인의 모습이 상당하게 투영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는 수준은 달라도 하는 짓꺼리들을 보자면 대한민국도 그리 별반 다를것이 없다는 아픔이 가장 컸다.'
그래서 도망치듯 아르메니아를 벗어나고 싶었다.
아르메니아의 젊은이들은 도시로 도시로....... 자본주의 속에서 소위 한탕 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내서 잡으려 혈안이다.
당장 수입이 없는 노년들은 이제부터 서서히 죽어갈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에서 돈이 없으면 굶어죽을 수 밖에 없으니까. 소련연방 시대에는 나이들어 은퇴를 해도 죽기 전까지는 나라에서 근근히 살아갈 만큼의 무상배급을 해 주었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비록 암울한 시기였다고 하더라도 과거의 그 시절이 더 좋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자본주의는 돈이 없으면 사람을 굶어죽게 놔두지만,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사람을 굶어서 죽게하지는 않았다.'
새벽에 폭우가 쏟아졌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내가 장거리 이동을 해야하는 날은 이상하리만치 비가 자주 내린다.
트빌리시로 향하는 일정을 정리하면서 잠시 새벽 산책을 나갔다. 우산을 빌려쓰고서........
비 내리는 새벽 예레반에는 처음 접하는 어떤 냄새가 났다. 아주 눅눅하고 매퀘한 냄새가 났다.
깊은 숲속에 들어갔다가 만난 소낙비를 피하려 오랫동안 방치해두었던 어느 헛간에 막 들어섰을때 같은 그런 냄새가 났다.
은근히 풍겨오는 냄새가 아니라 그냥 어디선가 훅 하고 들이닥치는 그런 냄새였다.
어쩌면 이것이 예레반의 진짜 모습과 냄새일거라고 오래오래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예레반을 벗어나고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서둘러 일정을 앞당겨 떠나기로 한 결정이 참으로 잘한 일인듯 싶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느긋하게 커피까지 끓여서 마시고나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킬리킬라 터미널까지 버스로 이동을 해서 조지아 트빌리시로 가는 미니버스를 찾았다. 트빌리시에서 예레반으로 올때는 미니버스나 택시요금 흥정이 가능한데, 반대로 예레반에서 트빌리시로 가는 버스는 에누리 한푼도 없는 정찰제다. 7.000드람(약 17.000원)을 주고 벤츠사에서 만든 신형 미니버스에 올랐다. 처음으로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차량은 만났다. 2년 전에도 트빌리시에서 올때는 5시간 조금 더 걸렸고, 갈때는 6시간을 넘겼었는데 라고 기억을 더듬어 보면서 출발을 했다. 아니랄까봐...... 이날 7시간 반을 넘겨서 트빌리시에 겨우 도착을 했다.
우선은 트빌리시로 가는 노선이 달랐다.
2년 전에는 오가는 경로가 같았으며 예레반을 출발하면 세반호수를 거쳐서 딜리잔을 거친 후에 바그라타쉬켄 국경에 도착했다. 국경을 통과하면 1시간 반 남짓 후에 트빌리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코스는 아예 출발서 부터 다른곳으로 향했다. 세반도 딜리잔도 거치지 않았고 아주 오랜시간동안 어마어마한 긴 협곡과 산악지형을 통과했다. 그 후에 바그라타쉬켄 국경에서부터의 나머지 여정은 같았다.
사정이야 모르겠으나 지내놓고 지도를 살피니, 에레반 출발에서 아파란과 스피탁을 통과하면서부터 거대한 산악지형속의 협곡으로 들어가서 투루마니안을 거치는 코스였던것으로 짐작되어 진다. 일부러 돌아가면서까지 운행시간을 늘렸을 이유는 없었을 것이고, 아마도 이 길이 좁고 험한 산악지형이기는 했으나 질러가는 지름길이 아니었겠나 싶다. 다만 중간에 버스 고장시간과 국경에 사람이 너무도 많아서 통관 시간이 제법 걸렸던 때문이리라.
16명의 정원을 가득 채운 버스는 힘차게 아르메니아의 고원지대를 오르내리며 씩씩하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다 갑자기 차가 멈추어 섰다.
우측 뒷타이어에서 매퀘한 냄새와 함께 하얀 연기가 꾸역꾸역 피어 올랐다.
모든 승객이 차에서 내렸다.
그저 황량하기만 한 고원에 세찬 바람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이곳은 이미 겨울이 진행중이다.
운전 기사가 일단 바퀴 안쪽에 물을 끼얹고 나서 엎드려 기어들어간다. 브레이크 드럼이 풀렸다 조였다 해야하는데 작동인 안되어 꽉 조여진채로 한참을 달려온 결과였다. 지나가는 차들이 죄 다 한번씩 서서 들여다보고 지나간다. 어찌어찌해서 차는 다시 출발하게 되었는데 40여분 이상을 황량한 도로 위에서 허비하고난 후였다. 그래도 누구하나 다그치거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 이런 일이 다반사여서 인지 그저 평범한 일상처럼 다들 느긋하게 기다려 줄 뿐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나도 마냥 푸근해 진다. '때가 되면 오늘 안에는 도착하겠지 뭐.'
한참을 더 달리다가 차량이 멈춘곳은 아마도 아파란 쯤이었을것 같다.
커다란 휴계소 겸 대형마트 앞에 버스가 멈추어 섰다. 20분 쉬었다 간단다. 휴식도 취하고 식사도 하고 오란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크고 가장 맛있고 가장 사람이 붐비는 빵집(베이커리)을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빵집이 아니라 빵공장이라 해도 되겠다. 신나는 구경이자 경험 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예레반에서 정말로 돈을 알뜰하게 쓰다보니 아르메니아 화폐 드람이 달랑 동전하나(우리돈 100원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어차피 조지아에 가면 환전을 해야했기에 일단은 무조건 트빌리시까지 참고 가기로 했는데, 점심시간까지 주어질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배낭에 사과 하나와 물만 달랑 들어 있다.
헐.
빵쪼가리 하나 사먹자고 100유로를 여기서 환전 할 수도 없고....... 그 돈을 금방 트빌리시에서 조지아 화폐로 또 환전을 해야하니까.
에이 어떻게 해. 참아야지. 돈이 없어서 굶는것이 아니라 돈을 손에 쥐고서도 참아야만 하느니라.........
그래서 일단 무척이나 신기하게 느껴지는 베이커리 상점 안쪽을 구경부터 하기로 했다. 판매대 뒤에서 직접 빵을 만드는 모습까지 모두 오픈된 매장이다. 여행자라고 소개하고 구경 좀 하자니까 매니저인듯한 사람이 나만 살짝 안쪽 제조공정까지 구경할 수 있게 허락해 준다.
처음 보는 풍경. 신난다. 연실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20분이 지나 버스로 돌아오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이제 빵을 사겠다고 안으로 달려가는 사람도 있다. 운전 기사도 웃더니만 천천히들 볼일 보고 한 20분 더 있다가 떠나자고 하더니 자기도 차를 마시겠다고 다시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버린다.
기다렸던 사람들도 다 그려러니 하면서 일부는 차에 오르고 일부는 다시 흩어진다.
참 요지경 속이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나도 그냥 좋다. 이런게 여행이지 뭐..........
우리 버스 일행이 아닌 비슷한 시간에 도착한 다른버스의 한 여행자 무리가 빵을 한아름 사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가족여행인것 같았다. 내가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니 연세 지긋하신 어른께서 반갑고 환한 모습으로 화답을 하면서 내게 물어 온다.
'아르메니아에 이렇게 맛있는 빵이 있는지 몰랐다. 먹어 보셨지요? 어땠어요?'
'잔돈이 없어서 먹어보지 못했어요. 여기서 빵 때문에 유로를 또 환전하기도 그렇고 해서요.'
'네? 어쩌다 그런 일이........ 그럼 이거라도 한 번 맛좀 보실래요? 정말 맛있어요.' 하면서 빵을 손바닥 반만하게 뜯어서 나에게 건네 준다.
방금 막 구워낸 빵이라 따끈따끈하면서 고소한 풍미가 내 영혼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저절로 목구명 속으로 어느새 사르르 녹아 없어진다.
'와! 정말로 정말로 맛있네요. 최고예요.'
'그렇지요? 아예 이참에 좀 더 드세요.'
하더니만 이 양반 커다란 빵(사진에서 처럼 빵 하나 크기가 내 얼굴 두배 크기만큼이나 크다) 반을 뚝 잘라 나에게 건네준다.
맛있게 먹는 내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다나 뭐라나.......... 벨기에에서 왔다는 고마운 가족 여행객들이 먼저 출발을 했다.
나와 동행인 승객들도 이런 내 모습을 보며 모두 박장대소 한다. 배낭에서 물을 꺼내 커다란 빵 반쪽을 맛있게 먹어 치웠다.
'여행은....... 이런 재미로 하는거야.......... 이게 여행이야.......... ㅎㅎㅎㅎ'
그런데 또 아뿔싸........
세상에 이런 일이......... 헐.
내 뒷좌석에 타신 노부부가 아예 빵을 한아름을 넘어서 한 지계만큼 사서 나오시는게 아닌가.
트빌리시에 사는 딸네 집에 가시는 노부부신데, 이 빵이 아르메니아 인들이 주식으로 먹는 빵이고, 특히 이곳의 빵이 맛있기로 정평이 나 있단다. 그러고 보니 다들 한두개 사가는 사람은 여행자고, 현지인들은 한아름씩 사가고 있다. 따뜻할 때 먹으면 제일 맛있고....... 벽장에 신문지 싸서 선선하게 보관하면 6개월까지 보존해서 먹을 수 있단다. 딱딱하게 굳으면 잘게 뜯거나 부숴서 끊는 물에 넣고 끓여서 먹는단다.
아주머니가 내가 맛나게 먹는 모습 보았다고 버스 안에서 또 사람얼굴 두배만한 빵의 절반을 뚝 잘라 건네 주신다.
아! 어쩌란 말이냐? 배는 이미 든든해 졌지만서도 보내주신 온정을 거절하면 천벌을 받는다고........ 그 빵 마저도 맛있게 먹어치웠다.
아르메니아가 다시 좋아지려고 한다. 역시 사람은 등 따습고 배가 불러야 해. 암. 그렇고 말고.
여전히 동양인을 낯설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스스럼 없이 다가가 인사를 건넨다.
'바레브.(안녕하세요)'
그들은 환하게 웃으면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화답해 오는데 듣다보면 '차이나? 저펜?'이란 단어나 나온다.
'아니? 나는 한국인이야. 대한민국에서 왔어. 꼬레야 나는 꼬레........'
'오. 꼬레...........' 당연히 엄지손가락을 쳐들어 보여준다.
ㅎㅎㅎㅎ. 이 기분. 이 맛. 아는 사람은 안다.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다. 대한민국이 내 조국이라는 것이 늘 자랑스러운 사람이다.
'땡큐. 대한민국도 아르메니아를 사랑합니다. 스노라칼 엠.(감사합니다)'
낡은 차들이 여전히 돌아다니고 있는 아르메니아.
그 중에서도 낡아도 너무 낡은 차를 만났다. 이게 과연 굴러는 갈까? 구경을 하면서 사진을 찍던 중에 차 주인이 나타났다.
몇년이나 되었느냐고 물어보니 40년을 넘겼다고 한다.
세상에나.........
어떻게 관리하냐고 물어보았다.
'대충 어찌어찌 해보면 그럭저럭 아직은 크게 속썩이는 일 없이 잘 굴러가고 있다'고 많이 수줍어 하면서도 친절하게 대답해 준다.
'당신 참 멋져보여요.' 라고 작별 인사를 건넸다.
헐.
차는 다시 출발했다.
한참동안 이제와 같은 고원을 달리더니 이내 협곡으로 접어 들었다.
가파른 언덕위로 산골 마을들이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고 협곡 아래로는 골짜기 가득 계곡물이 흘러내린다.
협곡은 끝을 예측할 수 없을만큼 끊임없이 이어지고, 차는 골짜기와 천길 낭떠러지의 가파른 벼랑을 계속해서 오르락내리락하며 나아간다. 급류가 흐르는 다리를 건너면 병풍같은 바위벼랑 앞에서 이번엔 이쪽으로 다음엔 저쪽으로 급하게 방향을 바꾸며 다른 협곡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협곡의 양쪽으로는 천길 낭떠러지의 바위벼랑이 병풍처럼 길게 늘어서 있다. 다른 길이 없다. 되돌아 가거나 앞으로 나아가는 길 밖에는.
장장 2시간 반 가량을 협곡속에서 달리고 또 달려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얼마나 큰 협곡인지 겨우 상상이 되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본 가장 큰 협곡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이루 형용키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기기묘묘한 대자연의 신비로움이 가득했다. 같은 길로 다시 그 광경을 볼 기회가 부여된다면 이 불편하고 위험한 장거리를 나는 전혀 마다하지 않고 한번 더 버스에 오를 자신이 있다. 그만큼 놀랍도록 장엄한 아름다움이 그곳에 가득했다. 세반호수를 거치지 않은것이 전혀 아쉽지가 않았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여행하는 여행자가 있다면 나는 이 험준한 협곡을 관통하는 이동수단을 적극 권장하겠다. 아무리 피곤해도 졸지 말고 꼭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겨보라고 권하겠다.
비포장 도로에다 코너와 산악도로 경사가 너무 심해서 사진 한 장을 제대로 찍을 수 없었던것이 너무도 아쉬웠다.
차량을 렌트해서 한번 다녀오라면........ 나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나서겠다. 물론 사진을 마구 찍다보면 어느새 해가 저물지도 모르지만.
협곡이 끝나면서 나는 버스가 국경에 가까이 온것을 알았다. 비로소 익숙한 풍경들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바그라타쉬켄 국경은 넘쳐나는 인파와 차량들로 초만원 이었다. 명절전날 고향가는 길의 톨게이트랑 똑같은 풍경이었다.
국경을 통과하는 절차는 그냥 차에서 내려 배낭을 둘러메고 검문소를 통과하기만 하면 되었다. 아르메니아에서 출국해 조지아에 입국하기 전에 약 500M의 국경지대를 일전엔 배낭을 둘러메고 걸어서 통과했는데, 이제는 그것마져도 기다리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 되었다.
상당히 간편해졌다.
어디 그 뿐인가?
2018년 3월을 기점으로 한국과 아르메니아 간에 새로운 비자협정이 맺어져서........ 이제 아르메니아를 여행함에 있어서 비자가 필요치 않게 되었다. 현재 아르메니아는 대한민국 여행자에게 비자 면제협정 대상국이다.
국경을 통과하는데 거의 한시간이 소요 되었다.
이젠 커다란 산이나 깊은 골짜기가 없다. 드넓은 평원을 그냥 달리기만 하면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가 나온다.
얼마 달리지 않아 2년 전에는 보지 못했던 뜻밖의 거대한 조형물이 눈 앞에 나타났다.
'조지아의 어머니 상' 이다.
트빌리시 나리칼라 요새의 어머니 상과는 분위기는 비슷한데 칼을 받쳐서 들어올려주는 꼬마 두 아들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아르메니아의 어머니 상'은 손에 달랑 커다란 칼 한자루만 들고 있다. 어머니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반하여 '조지아 어머니 상'은 한 손엔 칼을, 다른 한 손엔 와인잔을 들고 서 있다. 와서 와인을 함께 나누어 마시는 친구가 될래, 아니면 적이 되어 칼을 맞을래 하는 의미와 상징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동상은 어린 아들 둘이서 엄마에게 칼을 들어주고 있다. 엄마가 나가서 싸워 못지키면 곧 아들들이 자라서 뒤를 이어 싸우러 나서겠다는 상징이 담긴 듯 보여진다.
다르다.
조지아의 영토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2년 전에는 아르메니아나 조지아나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었다. 모든 상황과 여건이 아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분명 조지아는 상당히 변해 있었다. 그들이 쉬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달려나갔었다는 것을 나는 이미 깊게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조지아의 변화가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곧 트빌리시에 도착할 것이다.
버스가 예전처럼 시내에 인접한 아브라바리 지하철 역까지 데려다주지 않는다는 것은 아쉬웠으나, 약간 외곽의 오르촬라타 터미널에 내려준다 해도 별로 크게 불편하거나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이미 트빌리시 대부분의 지역을 직접 걸어서 다녀본 기억이 생생하기에 그냥 므츠바리 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주변 풍경을 다시금 즐겨 볼 생각이었다.
이제 여기는 조지아다.
마침내 7시간을 넘기는 긴 여정 끝에 트빌리시에 도착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나에게 그런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15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무더운 날씨에 20분을 더 걸어서 트빌리시의 올드타운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호텔이 사라졌다.
트빌리시에서 만은 편안하게 쉬고 싶었기에 미리 침실이 두개나 되는 꽤나 괜찮은 호텔을 예약을 해두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정을 바꾸어 서둘러 예레반을 떠나게 되는 상황 발생으로 부랴부랴 예약을 취소하고 올드타운 내에 있는 무조건 저렴한 호텔을 예약하게 되었다. 스케줄이 바뀌게 되면서 트빌리시에 머무는 중간에 1박이나 2박을 배낭만 내버려둔 채 타지로 여행을 떠날 계획을 새롭게 세웠던 때문이었다. 배낭을 지고 옮겨다니고 돌아와서 또 다시 호텔을 구하러 다니느니 가격이 저렴한 곳으로 골라서 신체적 부담을 좀 덜어보자고 생각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호텔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예약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아예 예약한 호텔이 통째로 증발해 버렸다. 처음 겪어보는 난감한 상황이 트빌리시 여행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 트빌리시에서 격는 돌발 상황으로부터 다음 여행을 시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