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일가들이 한 목소리로 서로 호응하여 단자를 거두어 모아서, 봄에 위봉사에서 만나고, 여름에 개암사에서 만나고, 가을에 실상사에서 만났다가 마침내 전주부 동쪽에 있는 종대에서 선사하는 사람과 기술자 1~2인에게 부탁하고 모두들 한 마음으로 힘을 보태어 1년 간 노력한 끝에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종대는 장소가 비좁고 번잡한 시내에 위치하여 목판인쇄 작업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1812년(순조 12) 주덕재(周德齋)를 지었다. 주덕재는 대지가 넓고 한적한 시골에 위치하여 목판인쇄를 하기에 적합하였으므로 그 이후부터 목판인쇄로 발행된 족보는 모두 주덕재에서 인쇄하였다.
<가경보(1805)경보구서발> 중랑장공파 18세 최종화(崔鍾華)
세월이 흘러 또 다시 한 주갑에 이르므로 호남에 계신 종장 여러분들이 글을 보내 단자를 거두어 전주부 동쪽에 있는 선조 연촌공 완동구제에서 단취하여, 1803년 봄에 시작하여 1805년 봄에 끝낼 수 있었으니 감찰공의 업적을 더욱 크게 만든 것으로 또한 우리 가문에서 조상님의 뒤를 이어가는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경보구서발>은 <경보구서> 즉 <강희보 서문>을 수록한 다음 이어서 지은 발문으로 글을 지은이 최종화는 <강희보>를 만든 최세영의 6세손이다.
같은 책을 만든 같은 장소를 안렴사공파 최봉우는 완동종대(完東宗垈), 중랑장공파 최종화는 완동구제(完東舊第)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바로 완동구제가 완동종대이기 때문이다.
연촌이 말년에 거처하던 살림집은 완동구제라는 이름으로 조선후기까지 보존되어 왔는데, 앞서 주암서원에서 살펴본 바 있지만, 녹동서원에 봉안되었던 연촌 초상화 복사 구본(舊本)은 1769년(영조 45)부터 1774년(영조 50)까지 6년간 완동구제에 봉안되기도 하였다.
<선조연촌부군영정봉안서(1774)> 12대손 처익(處翼)
여름이 되어서야 시골로 돌아와 일가들과 상의하여, 영암에 남아 있는 옛 초상화를 얻어와 주암촌에 모시기로 결의한 다음, 재물을 모으기 시작한지 6년 만에 초상화를 모실 영당 한 칸을 마련하게 되었다.
是夏還鄕乃與諸宗遂倡摹奉之議鳩財若干越六年而始得妥靈之所於是定出公事
마침 전주 일가 중에 화공이 있었으므로 삼종동생 처렴을 화공과 함께 영암으로 보냈더니, 영암에서 말하기를 새 초상화를 녹동서원에 걸었고, 옛 초상화는 완동구제로 보내고 영암에는 없으니 그곳에서 받아다가 잘 손질하여 봉안하라. 하였다고 하므로, 내가 다시 완동구제로 찾아가서 초상화를 받아다가 주암촌에 봉안하였다.
員有可又倩畵手於完之同姓人與三從弟處濂送之灵岩旣摹奉還于完東之舊第修粧移奉焉
완동구제가 지금의 종대라는 사실은 이와 같이 여러 문헌으로 증명되고 있다.
그렇다면 완동구제는 언제, 어떤 이유로, 어떤 절차를 거쳐서 종대가 된 것일까?
종대란 조상이 물려준 종중 소유 집터를 말하는 것인데 흔히 종중 본부가 위치한 곳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완동구제는 연촌이 돌아가신 후 종중 소유로 전해오고 있었으므로 그 때 이미 종대라고 부른다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었으나 전통적으로 완동구제라고 불러왔을 뿐이었다.
다만 종중의 범위는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예전 완동구제로 불리던 시기는 연촌공파 종대 이었다면, 지금 검토하는 시점 이후부터는 문성공대종회 종대, 혹은 중랑장공파 종대로 변천 된 것이다.
최세영이 <강희보>를 만들므로 인하여 문성공계 전주최씨 가문이 확정되었고, 비로소 종중에서 <건륭보>를 만들므로 인하여 종중이 더욱 단결되고 활성화 되었으므로, 이제 시조 문성공 묘소를 찾아 시향을 모시자는 여론이 일어났다.
<광무보(1898) 시조 문성공 행장>
감찰공 휘 세영이 만든 <초성일권(강희보)>을 살펴보면 문성공 묘소는 주덕산에 있다. 라고 적혀 있다.
按監察公世榮草成一卷譜文成公墓在周德山云
훗날 묘제/단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묘제파, 단제파 구분 없이 이와 같이 주장했지만 사실은 <강희보>는 물론 <건륭보>나 <가경보>에 이르기까지 모든 족보에는 문성공 묘소에 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강희보> 즉 <초성일권>은 돈이 없어서 인쇄를 하지 못하고 사람이 붓으로 적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발행된 부수가 적어서 묘제/단제 사건이 일어난 1855년 무렵에는 이미 희귀본으로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강희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하고 그냥 그 책에 그렇게 적혀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었던 것 같다.
<건륭보(1743), 가경보(1805) 중랑장공 행장>
墓在周德山云 묘소가 주덕산에 있다고 한다.
<강희보>는 물론 <건륭보>나 <가경보>에도 문성공 묘소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지만, <건륭보>와 <가경보> 중랑장공 행장에는 묘소가 주덕산에 있다고 한다.라고 적혀 있기 때문에, 만약 주덕산에서 주인을 알 수 없는 조상의 묘소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문성공이 아니라 중랑장공 묘소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용이한 상황이었다.
당시 주덕산에는 중랑장공파 4세 월당공(月塘公) 최담(崔霮)묘소를 중심으로 월당공 후손 선산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묘소의 위치를 알고 있는 선조로서는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 대호군공파 3세 문간공(文簡公) 최철(崔哲)이 가장 세대가 높았고, 두 번째가 월당공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주덕산에는 맨 위에 월당공 묘소가 동쪽을 향해 있고, 정면 아래에 연촌공 묘소가 있고, 비슷한 등고선을 따라 산 너머 서쪽에 송애공 묘소가 있고, 북쪽에 율헌공 묘소가 있다.
송애공파는 부안읍 연곡리에 선산이 있지만, 송애공 묘소 아래에 10세 석계공 최명룡의 어머니 광주안씨와 다시 그 아래에 석계공 묘소가 있다.
소윤공파 사정공(자임)파는 전주에서 세거하여 왔는데, 율헌공 묘소 아래에 사정공 최자임과 아들 직장공 최무강을 비롯한 후손 묘소가 선산을 이루고 있었으며, 연촌공 묘소 주변에도 전주에서 세거해 온 남원종회 교도공(계손)파 후손 묘소가 역시 선산을 이루고 있었다.
소윤공파는 흔히 고부종회로 통칭되고 있지만 고부종회는 6세 동복공(同福公) 최자목(崔自睦) 후손으로 정읍시 정우면 장순리에 따로 선산이 있지만, 사정공(자임)파는 전주에서 세거하였다.
연촌공 묘소 아래에는 4개의 주인을 모르는 고총이 있고, 그 아래에 고려시대 양식의 석축방분(石築方墳) 한 기가 있는데, 사정공(자임)파 가문을 중심으로 그 묘소가 문성공 묘소다. 라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지만, 종중을 주도하는 지식인들 중에는 오히려 <건륭보>와 <가경보> 행장을 근거로 그 사각묘가 중랑장공 묘소일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시조 문성공 묘소에 관한 갈등은 “문성공 묘소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보통사람들의 심정적(心情的) 믿음과 “다른 사람 묘소일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는 지식인들의 이성적(理性的) 의심 사이 갈등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경전을 공부한 지식인들은 “설령 그 묘소가 문성공 묘소라고 할지라도 약간의 의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함부로 조상의 묘소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특히 성리학 원리주의 지향이 강했던 이른바 노론으로 분류되는 중랑장공파 지식인들은 매우 완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