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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동(駕谷洞)
*가곡동의 유적 지도
1. 칠성당 2. 청룡사 3. 용두교 4. 고수부지 5. 용두암(구 흥용사) 6. 칠성굴 7.용주사 8.용궁사 9. 밀주국민학교 10. 밀양도자기 11. 담배인삼공사 12. 농산물 검사소 13.세종중.고등학교 14. 한국전력 공사 15. 구 예림교 16. 예림교 17. 못안만댕이 18. 밀양역 19.산성고개 20. 굴바위 21. 반팅이산 22. 산성산(391.4m) 23. 꾀리봉(앵봉) 24. 배고개 25. 구순고개 26.긴골 27. 죄피골 28. 자씨산성 29. 문둥골 30. 노리자리 31. 말굴래등 32. 가시개 바위 33.불선고개 34. 배암등 35. 밋등걸 36. 서당골 37. 남포리 38. 재넘고개 39. 새빗땅만댕이 40. 조개골 41. 멍에실<그림 추후 업로드 예정>
* 가곡동의 지세와 연혁
동으로 용활동, 서로 상남면, 남으로 삼랑진읍, 북으로 삼문동에 접한 지역이다. 그 연혁은 밀주지(密州誌)에 '가곡리는 고칭(古稱) 망우곡(忘憂谷)이고, 남포리는 일명 '이창(耳倉)'이라는 기록이 있고, 일본 국회 도서관 소장 경상도읍지에 '이창리'가 나오며, 규장각 소장 경상도읍지(1832)에 가곡리, 남포리가 나온다.
1914년에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부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가곡리라 하고 남쪽 강가에 있다고 하여 이창리를 남포리라 하였다.
1931년 4월 1일부로 밀양면이 밀양읍으로 승격(부령제103호, 1930.12.29공포)되었고, 1989년 1월 1일부로 법률 제 4050호(1988.12.31공포)로 밀양읍이 밀양시로 승격됨과 동시에 가곡리와 남포리를 합하여 가곡동으로 된 것이다.
1991년말 5개통 84개 반으로 행정구역이 구분 조정되어 있는 총면적 6.20㎢(답 0.37, 전 0.58, 임야 3.50, 대지 1.37)의 지역이다.
가곡동의 지명 변경 과정은 망우곡, 이창리가 가곡리, 남포리로, 가곡리가 가곡동으로, 다시 가곡동과 남포리를 합하여 가곡동으로 변경된 것이다.
가곡동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현 가곡동 4통(멍에실) 마을의 양쪽 산이 우뚝 솟아올라 그 형상이 꼭 소의 멍에 같이 생겼다 하여 한자로 駕자와 谷자를 합성하여 가곡이라 했고, 남포리는 글자 그대로 남쪽 강가에 있는 포구라는 뜻으로 남포리라 한 것이다. 각종 지명 유래에 대한 설명은 편의상 가곡동과 남포리로 나누어 설명하기로 한다.
■ 멍에실
밀양지에 '가곡리는 고칭 망우곡(忘憂谷)'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가곡동 4통을 호칭하는 말이며 곧 구가곡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망우곡'이란 구전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고려장(高麗葬)터'가있었던 곳이라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망우'란 곧 근심을 잊는다는 말이니까 부모를 고려장으로 묻어 놓고 돌아설 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근심을 잊어라'라는 뜻으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실은 '망우'는 '멍에'를 한자로 음사한 것이고 '駕'는 뜻을 적은 것이다. 고려장 이야기는 하나의 전설일 뿐이다.
■ 신가곡(新駕谷)
구가곡(멍에실)의 서북쪽에 있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인데, 곧 밀양역의 북쪽에서 현 가곡동사무소까지의 지역 일원을 신가곡이라 한다. 곧 현 가곡동 2,3통을 지칭하는 말이다.
■ 용두목
용두산 서편 산록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 용두목인데, 지금의 가곡동 1통 지역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밀양역에서 대구 방향으로 올라가는 철로 오른쪽으로 밀양도자기 공장이 있는 지역 일대를 용두목이라 한다.
■ 용두산(龍頭山)
밀양 가곡동에 있는 명산으로 용이 엎드려 잠자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용두산이라 이름하였고 잠든 용에게 종을 울려 깨우기 위하여 자씨산(慈氏山)에 절을 세우니 이것이 형원사(瑩源寺)이다. 산의 정상은 일자봉(一字峯)으로 동쪽에는 호두산(虎頭山)이 뻗어 있고 서쪽에는 용두산(龍頭山)이 돌출하여 이른바 용호의 꼬리가 서로 엉켜 있는 형국을 한 명산이다. 이 용두산에는 단청를 화려하게 한 청룡사, 용두암(舊흥용사), 용궁사, 용주사 등 아담한 절들이 산재해 있어 많은 불자들이 찾아 오는 곳이다.
■ 구손고개
구가곡에서 활성이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활성이리를 속칭 '구손동'이라고 한다.
■ 배고개(배나무진)
가곡동 4통(멍에실)에서 남포리(현 가곡동 5통)로 가는 길목인데, 옛날에는 이곳에 배나무가 많이 있었다 하여 배고개라 하였고, 또 배나무가 있는 나루터라 하여 배나무진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이 고개를 오가는 사람들이 돌을 주어 고개 마루에 던져 모운 조산(造山)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흔적을 볼 수 없다. 이곳은 남포리에서 상남면 예림리 쪽으로 강을 건너는 나루터였기 때문에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 주막이 있었는데, 1970년대 정부의 철도변 정비 계획에 의하여 주막집이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옛날에는 배가 닿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다리가 놓여져 있다. 배가 닿는 곳이라는 뜻으로 배곡 또는 배고개라 한다.(양덕이씨 말)
■ 반팅이산
용두산의 동북쪽인 가곡동 4통(멍에실)에서 북동쪽에 위치한 산으로, 멍에실에서 쳐다보면 그 형상이 흡사 반팅이(함지)를 엎어 놓은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반팅이산 밑에 있는 골짜기가 바로 각곡골이다.
■ 꾀꼬리봉
속칭 '붕딤이'라고도 한다. 용두산과 반팅이산과의 중간에 있는 산봉우리를 말하는데 일명 앵봉(鶯峯)이라 고도 한다.
■ 문둥골
가곡동4통(멍에실)에서 구손고개의 좌편 첫째 골짜기로, 이 골짜기의 산 중간 지점에 맑은 물이 솟아오르는 데가 있다.
구전에 의하면 옛날에 어느 문둥이가 이 물을 먹고 몸을 씻고 해서 치성을 드렸더니 문둥병이 완전히 나았다. 이로 인해 문둥골이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골짜기에는 넓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옛날에 나무꾼들이 나무하려 갈 때나 올 때에는 으례 이 바위에서 놀면서 잠시 쉬었다가 갔다고 한다. 이 바위를 문둥골에 있는 바위라는 뜻에서 '문둥바위'라고 하나 지금은 채석으로 인하여 없어져 버렸다.
■ 죄피골
가곡동 4통에 있는 골짜기로, 다시 말하면 구손고개에서 멍에실로 넘어 내려오면 좌편의 첫째 골짜기가 문둥골이고, 두번째 골짜기가 곧 죄피골이다, 그리고 세번째 골짜기를 긴골이라 한다.
■ 산성고개
멍에실에서 활성1이로 넘어가는 고개로, 이곳에 는 묏등이 있었으며 배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이 고개는 너무나 시원할 뿐만 아니라 멍에실이 눈 아래 보이고 또 금시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옛날에 나무꾼들이 이 고개에 오면 으례 쉬었다가 가는 곳이었다. 양덕이씨(梁德伊氏 : 남포리 거주)말에 의하면 이 고개에 배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배나무지기'라고도 했다는 것이다.
■ 말굴레등
멍에실의 안산에 있는 산등성이로 속칭'말등대'라고도 한다. 지형이 흡사 말등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노리자리
갑만댕이(멍에실의 안산)에서 산성으로 가는 길 중간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누군가가 묘를 섰다가 이장하게 되어 묘를 팠더니 마침 노루 한 마리가 뛰어 나왔다고 한다. 이곳에는 지금도 파묘한 자리가 남아 있다. 이런 전설에 의한다면 '노루가 뛰어 나온 자리'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노리자리'이다.
■ 못안말랭이
멍에실과 신가곡 사이에 있는 산등성이로 그 지형이 흡사 못과 같이 폭 꺼져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못이 있었던 곳이라 한다. 여기서 '말랭이'는 산이 길게 등성이가 진 곳을 '마루'라고 하는데 이 '마루'를 사투리로 '말랭이' 또는 '만댕이'라고 한다.
■ 용두연(龍頭淵)
일명 기우연(祈雨淵)이라고도 한다. 밀양시 가곡동 용두산 산록에 있는 심연을 말한다. 자씨산에서 뻗어내린 산의 모양이 용두와 같다 하여 용두라는 이름이 붙었고, 그 앞이 심연으로 되어 있어 용두연이라고 했다. 구밀주지에는 1628년(인조 6년)에 밀양에 심한 가뭄이 들어 부사 정두원(鄭斗源)이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더니 그 치성으로 비가 내렸다 하여 부人들이 이 비를 '태수우(太守雨)'로 이름 지었다 라고 기록되어 전한다. 옛부터 '용두춘화(龍頭春花)' 또는 '용두야우(龍頭夜雨)'라 하여 밀양 팔경과 십경으로 그 절경을 노래하기도 했다. 이곳은 기우처로서 아주 정결하고 신성스러운 곳으로 여겨 왔으나 근래에 와서 보트장이 개장되어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유원지로 변해 버렸다.
■ 용두교(龍頭橋)
밀양시 가곡동 용두목에서 밀양시 삼문동 송림 쪽으로 통하는 곳에 세워져 있었으나, 사라호 태풍 때 유실되어 버리고 현 밀양 경찰서 앞에서 가곡동으로 통하는 용두교는 1961년(연장280,폭원 9.7, 높이 15, 견간 14)에 새로 축조된 다리로서 밀양시를 관통하는 간선 도로 중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랑이다.
■ 예림교
밀양시 가곡동과 상남면 예림리 사이에 놓여 있는 다리(연장 360, 폭원 7.7, 높이 5.6,견간 20)로 1960년에 신축되었다. 마산, 김해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교랑이다.
■ 굴바위
멍에실(舊駕谷) 뒷편 반팅이산 북쪽 산등성이에 굴이 있는 바위가 있다. 바로 이 바위가 굴바위다.
옛날에 촛불을 켜고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치성을 드리던 곳이요, 또한 마을 사람들이 세상이 어지러울 때 잠시 피신하던 피란처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 굴바위 안의 넓이는 약 10여평이나 되고 굴위에는 큰 바위가 덮여 있고 굴 앞에는 돌담을 쌓았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굴 안에는 깊숙한 굴이 또 있었는데 그 길이는 알 수가 없고 지금은 그 굴이 막혀 있는 상태다. '굴바위'는 굴이 있는 바위라는 뜻이다.
■ 용두제(龍頭堤)
용두연 아래에서 응천강이 두 갈래로 흐르고 있는데, 용두제은 그 본류의 남림(삼문동 율림)쪽 호안제로 추정되고 있다.
옛날에 큰 비가 내리면 물이 넘쳐 율림(삼문동 남림)에 횡류하므로 민전에 피해가 많았다. 또 고을 형세가 완실하지 못하다 하여 술사들이 꺼려하였으므로 이곳에 제방을 축조하여 막았다.1631년(인조 9, 신미)에 부사 이필영(李必榮)이 당시 경상도 관찰사에게 품신하여 현풍, 창녕, 영산, 창원, 김해, 양산, 청도, 밀양 등 8개 군현의 군부를 동원, 제방을 크게 수축하였으나 몇년 되지 않아 무너졌다. 1668년(현종9, 무신)에 부사 이동직(李東稷)이 개수하였으나 또 무너졌고, 1675년(숙종1, 을묘)에도 부사 이희년(李喜年)이 증축 보수하였지만 다시 무너졌다고 하였다.
그 이후에도 강물이 범람할 때마다 유실과 증수축이 여러 차례 되풀이 되었지만 1910년대에 이르러 현대 토목 기술의 도입으로 원래의 용두제를 견고하게 개축하는 한편 전사포리 건너편에까지 이어지는 응천제를 증축 연장함으로써 지금의 삼문제가 된 것이다.
■ 자씨산성지(慈氏山城址)
밀양읍의 활성동(구서원)과 가곡동(멍에실) 및 삼랑진읍 숭진리(임천) 등 세 동리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으로 약 390m되는 산마루의 성지이다.
성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약 1500m 정도이고 높이는 3m, 폭은 1.5m가 되는데 석축은 거의 허물어졌으나 산정 주위에는 그 흔적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어 이 산성이 규모가 큰 석성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성에 대하여는 밀주지(密州誌)에 자씨산성(慈氏山城) 또는 덕성(德城)이라는 기록이 전해올 뿐 그 규모와 유래, 축성 연대 등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성지의 여기저기에서 가끔씩 출토되는 유물들이 대개 가야 계통의 토기 파편이 많았다는 점으로 보아 삼한 시대 이래의 산성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이곳은 응천강이 낙동강에 흘러 들어가는 수운의 요충지로서 고대 이래 왜구 침입에 대비한 산성으로 볼 수 있으며, 산성 위 남쪽 아래인 삼랑진읍 숭진리와 임천리 일대에는 지석묘와 고총급에 해당하는 삼국시대 고분군이 유존하는 등 밀양 지역에서는 매우 유력했던 읍락사회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웃한 추화산성과 함께 주목되는 고대 석성지이다.1960년대에 이 성내의 땅을 개간하여 뽕나무를 심고 잠실을 만들어서 양잠을 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 칠성굴
용두산에 있는 치성을 드리는 굴(堂)이다. 바위가 자연적으로 풍화 작용으로 떨어져 나가 마치 굴처럼 되어 있어 조그마한 부처를 모셔 놓고 지금도 정월 보름에 치성을 드리고 있다.'칠성굴'이라는 명칭은 칠성당을 모신 굴이라는 뜻에서이다.
■ 고수부지
용두목의 일류제에서 용두교까지 연장 418m와 폭 45m로 조성된 고수부지로 가곡동의 제방을 견고하게 함은 물론이고 시민들의 아침 저녁 산책로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 이창리(耳倉里)
속칭 '귀창리'라고도 한다. 밀양지(密州誌)에 남포리(南浦里)는 일명 이창(耳倉)'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현 가곡동(駕谷洞) 5통, 즉 남포리가 이창리(耳倉里)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부(府-城內)에서 남쪽으로 약 10리 밖의 지점에 위치한 응천강(凝川江) 하류에 있다.그로 인하여 일명 이창진(耳倉津)이라고도 한다. 또 이곳에는 지금 같으면 숙박시설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창원(耳倉院)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밀양부(密陽府)의 조세(組稅)를 보관할 창고가 이곳에 있었는데 이 창고를 이창(耳倉)이라 했다. 고려 시대 이래 모든 물자의 운송수단은 주로 배를 이용한 수로(水路)였기 때문에 낙동강으로부터 범선(帆船)의 왕래가 성행한 밀양의 관문 역할을 하였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창(耳倉)이라는 명칭은 속명인 '귀창'이 한자(漢子) 표기되어 '이창(耳倉)'으로 된 것이고, 이창리(耳倉里)는 '이창(耳倉)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며, 남포리(南浦里)는 '부(府-城內)의 남쪽에 있는 '남구(浦口)'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창은 지금 자리만 남아 있어 그 자리를 이창터라고 부르고 있다.
■ 조개골
남포리의 남동쪽 '새빗땅 만댕이'남쪽에 있었던 마을로, 지금은 없어지고 전답이 조성되어 있다. 옛날에 마을이 었었을 때에 '조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던 골짜기'라는 뜻에서 생긴 명칭이 조개골이다.
■ 서당골
지금 남포리의 중앙이 되어 있는 굼텅진 골짜기로, 옛날에 마을 젊은이들을 교육시키던 서당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당(書堂)이 있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서당골이라 한 것이다.
■ 배암등과 구담만댕이
배암등은 남포리 동북 쪽에 위치한 산의 능선인데 이곳 능선에는 새로 만든 밭이 조성되어 있다. 아마도 토지가 귀할 때 만들어진 산전(山田)으로 추측된다. '새빗땅만댕이'라는 명칭은 '비스듬한 땅에 새로 만든 밭이 있는 산마루'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 불선골
일명 불성골이라고도 한다. 배암등 옆에 있는 골짜기로 이 골짜기의 남쪽 산에는 돌 무더기가 많이 있는데 옛날부터 사람들이 자기의 소망이나 입신 출세를 위하여 이 돌무더기에 촛불을 켜 놓고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불을 켜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 밋등껄
서당골 위 북쪽에 있는 길을 말한다. 묘(墓)의 사투리로 '미'라는 말이 있는데 옛날에 이 길가에 묘가 있었다고 한다. '밋등껄'은 '묘등이 있었던 등성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 뱃다리
배곡과 남포리(南浦里)에서 개밭(갯가의 개흙으로 형성된 밭)으로 통하는 다리를 말하는데 지금은 그 다리가 없어지고 거기서 북으로 약 50m 위쪽에 잠수교가 놓여 있다. 옛날에는 배가 닿은 곳으로 해서 '뱃다리'라 했다.
■ 콧등바위
콧등바위는 배암등 동쪽에 있는 바위로, 마치 바위의 형상이 사람의 콧등처럼 툭 불거져 맺혀 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 가시개 바위
남포리 뒷산에 있는 재넘 고개 밑에 있는 바위로, 두 개의 바위가 흡사 가위처럼 나란히 서 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가시개 바위다.
■ 재넘 고개
가시개바위 위쪽 남포리의 동쪽 산 능선으로 해서 활성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 야시굼팅이
야시굼팅이는 남포리 앞 강 건너 개밭 중앙에 있는 들인데, 옛날에 상남제(上南堤)가 축조되기 전에는 개밭 일대가 갈대와 잡초로 우거져 있어서 그 우거진 잡초 사이에서 야시(여우의 사투리)가 숨어 있다가 자주 나타나곤 했다고 한다. 굼팅이라는 말은 지대가 조금 낮은 곳을 이르는 사투리다.'야시굼팅이'라는 이름은 여우가 숨어 있는 지대가 낮은 곳이라는 뜻이다.
■ 질매등
개밭 아래에 있는 지대가 조금 높은 곳을 말한다. 소의 질매같이 지대가 높은 들이라는 뜻이다.
이상에서 설명한 각종 지명 유래 이외에 가곡동 내에는 밀주국민학교를 비롯하여 세종중.고등학교, 한국전력공사 경남지사 밀양지점, 한국담배인삼공사 밀양지점, 국립농산물 검사소 밀양 출장소,밀양역 등이 집결되어 있으며 밀양시 승격과 더불어 고층 건물이 여러 군데 건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곡동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는 구도로의 정비와 도로 양편의 상점이 신, 개축되어 그야말로 밀양 관문의 면모를 쇄신시킨 일취월장(日就月將)하는 희망찬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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