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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애(해설원고)
(해설) 지혜의 창, 회환(回還)
-글은 늙지 않는다. –이연수 시인의 제2시집에 덧붙여
이령(시인)
이번 시집은 이연수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2022년 발간된 그의 첫 번째 시집 『 태어났으니 살아봤지 뭐』에 대한 해설도 썼으니 이번이 두 번째 조우다. 이연수 시인은 전문적인 글쟁이가 아니라 5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옷을 만들어 온 장인이라 자신을 소개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오랜 세월을 거쳐 많은 경험이 체화된 생활인이기에 또한 그의 시에서도 시적 기교나 완성도 보다는 생의 깊은 사유, 지혜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인연(因緣)을 생각한다. 인은 결과를 산출하는 내적, 직접적 원인이며 연은 결과의 산출을 도와주는 외적, 간접적 원인일 텐데 시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만났고 시집이 발간되기도 전 시인과 시인이 정성스럽게 지은 시의 집에 최초로 선택된 손님으로서 두 번이나 다시 초대되었으니 예사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을 관통하는 주제가 지나온 세월에 대한 ‘생의 관조’였다면 이번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회환’으로 읽힌다.
대체로 시는 그 시인과 닮았다. 시인의 체화된 삼세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얼비치기 마련이다. 지식과 경험과 좌절의 총체가 지혜라고 한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전 생애를 통해 부단한 자기갱신의 노력과 견딤의 의지를 조화롭게 일궈내는 이다. 시도 시를 쓰는 시인도 마찬가지다. 내 속의 울음뿐만 아니라 타인의 울음까지 울어줄 줄 아는 이라 해서 시인을 예로부터 곡비(哭婢)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나이(연륜)는 실력이다’ 생각했다. 물론 여기서 뜻하는 나이는 비단 생물학적 나이만은 아닐 것이다. 연륜이라는 것은 시인이 걸어 온 인생의 길과 그 길을 걸어오면서 내면화된 사유, 부단한 훈습과 자기 갱신의 의지, 지난한 생을 굳건하게 지나온 견딤, 즉 총체적인 지혜가 문면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기 마련이고 또 그의 작품은 독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잔잔한 위로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시는 절규, 눈물, 애무, 키스, 탄식 등을 암암리에 표명하고자 하는 것, 또 물체가 그 외견상의 생명이나 가상된 의지로써 표명하고자 하는 그런 것, 또는 그런 것을 절조 있는 언어로 표현하거나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한 폴 발레리의 말처럼 시의 감화 감동적인 기능을 담보하는 시인의 미적 경험은 인간고유의 경험양식인 동시에 우주 전체의 어떤 보편적 속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만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하는 것은 시인 개개인이 걸어온 생의 결에 달려있을 것이다. 인간의 전 생애를 통찰하는 세 가지 철학적 가치인 현실에 충실 하라! 죽음을 기억하라! 운명을 사랑하라! 로 집약할 수 있는 삶과 죽음에 관한 파반느, 깊고 우아한 음률 같은 이연수 시인의 새로운 시의 집으로 자박자박 들어가 본다.
지나온 시간
흘러가는 세월
다가올 세상
이 모든 것이 삶의 걸음걸이
어디까지 왔고 걸어가다 보면
어디까지 갈까?
-「길」 전문
모든 사물, 현상들은 절대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났다가 그 원인과 조건이 사라지면 따라서 없어진다. 생명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고 인연이 다하여 흩어지는 현상이다.
어디까지 왔고 걸어가다 보면
어디까지 갈까? -중략
제목에서 이미 삶을 길이라고 시인은 전제하고 있는데 이는 자성(自省)적 깨달음이 진행형이기에 가능한 압축적 표현이다. 죽음은 죽음 자체로 존재하는 실유(實有)가 아닌 반드시 태어남이라는 반연(攀緣)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일반인에게 있어선 필사(必死)이겠으나 깨달은 자에겐 불사(不死)라고 했던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여백의 자성적 물음, 짧지만 마디진 , 비단 시인 개인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물음, 간과할 수 없는 생의 사유를 부려놓고 있다.
오고 가는 계절 흐름에
내 청춘도 말없이 흘러가네
꽃봉오리 맺혔다 하니
어느새 눈꽃이 피고 지고
어쩌겠는가 마음이야
이팔청춘이지만 모습은 변해 있는 것을
어떤 것을 탓하지 말고
그때그때 즐기다 보면
모든 것이 다 내 마음속에 있는데
애태우면 무엇 하나
-「만족과 행복」 전문
행복은 어제도 내일도 아닌 바로 지금,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에 닿은 시인은 말한다. ‘다 내 마음속에 있는데 애태우면 무엇 하나’
의지하여 생겨남(연기)속에서 본디 모름(무명)과 태어나 늙어 죽음이라는 괴로움의 근본원인을 통찰하고 그 모든 발원지가 ‘마음속’임을 깨달은 이의 반야가 반짝이는 시다. 만족과 행복은 ‘그때그때 즐’길 줄 아는 이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인간의 근원적 무지를 꿰뚫어 보는 지혜, 통찰의 시다.
멀리 보이는 세상
무엇이 기다릴지 모르겠지만
살아생전 곱게 살다
가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도 갔다 오지는 않았지만
왠지 선과 악이 있을 거라는
인과응보라는 사자성어가
가슴에 와 닿는다
지금이라도
모질지 않은 삶을 배려하는 단어를 마음에 안고
살아보면 어떨는지...
-「언젠가는」 전문
외적 관감의 모든 현상에 있어 시공간은 경험을 가능케 한다. 지혜의 한 축인 경험이 미진한 인간에게 있어 선험적 이상성, 한정된 경험의 실재성의 표출인 시는 삶의 다양한 가능성이자 최상의 풍부함일 것이다. 시인이 표현한 ‘멀리 보이는 세상’은 미래에 닥칠 어떤 순간이 아니라 실은 ‘지금’이다. ‘살아생전 곱게 살다 가야지 하는 생각’ 은 현재 삶에서 올바른 카르마(業)를 닦아 멀리 보이는 세상을 예비하고자 하는 다짐이다. 생의 관조자로서 스스로의 정진(精進)을 촉구하는 독백이자 독자를 향한 속 깊은 방백이다.
살짝 내미는 새싹처럼
터질듯 꽃봉오리같이
내게 다가왔었지
무어라 말할 수는 없지만
내 가슴은 무척이나 뛰었어
그것이 사랑이었나 봐
고맙고 행복해요
여보...
-「늦은 깨달음」 전문
바라보고 싶었다
고개 숙인
모습이 안쓰러워
살아오면서
한창때가 있었을 텐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에는
초점이 없다
그 사람은
요양병원에 누워있는
나에게 소중한 집사람이다
여보 내게 바람이 있다면
나 살아생전 고운 곳으로 가셨으면 하오
당신에게 사랑이 남아있다면
나의 품에서 보내드리는 것이
내 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이 드는구려
고맙소 감사하오...
-「나의 마음을 알까」 전문
고요한 밤
가을과 속삭이듯
풀벌레들 울어대고
지난날 아름다웠던
시절을 돌이켜보며
멍하니 하늘을 쳐다본다
마음속 아픔의 쿤 덩어리에
이슬처럼 촉촉이 내려앉아
보드라운 붓으로 덩어리를 녹여
수체화를 그려주던 당신
내 마음 구석구석을
핥아주며 상처를 닦아주던
풋풋하고 따뜻했던 당신
떠나려는 내 가슴에 얼굴 파묻고
소리 없이 눈물 흘리던 당신
들썩이던 어깨를 바라보며
못난 내 마음을 탓했던 시간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가슴 한편에 자리잡고
애달프게 생각나게 하네요
지금은 어느 곳에서 잘 지내고 있겠지요
별들도 참 이쁘구나
별 하나 따다 당신께
별 둘, 셋 따다 또 당신께
높은 하늘에 떠있는 별들아
그리운 님 계신 곳
별 똥 빛으로 알려주면 안 되겠니
-「고마웠던 그 사람」 전문
“별 하나 따다 당신께 별 둘, 셋 따다 또 당신께” 별이 된 아내를 향한 속정 깊은 시들이 다수다. 수많은 인연 중 핏줄이 아니면서 핏줄보다 더 가까운 유일한 인연이 어쩌면 배우자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사람이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가 인연의 사전적 의미이겠으나 불교적 의미로는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 원인인 인과 간접적 원인인 연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원인과 조건을 뜻하는 인연에 이은 연연은 인식주체의 마음에서 생기는 연과 마음 밖의 인식대상으로써의 연을 아우르는 말이다. “나 살아생전 고운 곳으로 가셨으면 하오 당신에게 사랑이 남아있다면 나의 품에서 보내드리는 것이 내 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이 드는 구려”
시제처럼 “늦은 깨달음”이었으나 오직 마음에 거침없이 작용하는 것으로 마음의 원인이 곧 결과가 되어 작용하는 등무간연(等無間緣)의 사상이 드러난다.
못 잊어
혹여나 뒤돌아보지만
모든 것이 옛 것이 되었네
옆에 있을 때 잘했으면
후회도 없었겠지만
뒤늦게 진리를 깨달았으니
어찌 하오리까
젊음이 영원할 줄 알았지만
이렇게 쉬 떠날 줄이야
손안에 지식도 둥지 틀어
떠난 지 오래 되었네
떠나간다는 만남을
깊이 생각했다면
후회 없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아쉬움의 길」 전문
인간 누구에게나 내 것 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우연한 사고나 세월이 변함에 따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때 아쉬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한때는 내 것 이었던 것들도 언젠가는 내 것이 아니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된다. 제행무상 아함경의 무상-고-무아의 과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삶의 과정인데 괴로움에 빠지지 않기 위해 경계해야할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탐진치(貪瞋痴)에 대한 반성과 회한의 사유가 드러난다. 노년의 시인에게 당면한 깨달음이 비단 시인 개인의 반성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기에 잔잔한 울림을 전하고 있다.
간사한 마음을 어쩌랴
장마가 길고 힘이 들어서
물 흐르는 소리에도 두근거리더니
여름 뙤약볕에 숨이 막혀
소나기라도 시원하게 뿌리려나
모든 게 마음먹은 대로 되었으면 빌어보지만 헛일이고
선풍기에 몸 맡기고 뒹굴 수밖에
바람 부는 평상에서
박 바가지에 찬 밥 말아 풋고추 장에 찍어
한 숟가락 푸짐하게 먹던 어린 시절
엄마의 미소 그립다
그럭저럭 뜨거움 이겨내면
울긋불긋 단풍이 반겨주겠지
-「변덕스러운 욕심」 전문
누구나 지나온 생을 반추하면 아쉬움과 그리움에 사무치기 마련이다. 잘 물든 단풍은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던가? 지나온 생은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삶에 투영되기에 “그럭저럭 뜨거움 이겨내면 울긋불긋 단풍이 반겨주겠지”라는 시인의 진술은 진정성이 충분하다.
“야속한 마음 헤아릴 수 없지만 삶이 그렇듯 첫걸음이 있으면 마무리하는 안식처가 있듯이 많은 사랑 받았으니 기쁘게 떠날 수밖에”-「목련 같은 삶」 중략
“한낮의 행복함을 뒤로한 채 들녘에는 아름다운 석양의 빛이 비치어 마음 달래주고”
“내 삶에 마지막도 오늘의 석양과 같이 아름다운 색으로 저물어 갔으면 좋겠다”
-「먼 훗날」 중략
욕심으로 점철됐던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점검하는 자세면 울긋불긋 단풍의 절경처럼 행복은 이미 예비 된 것이다.
높은 하늘이 있어
고개를 들어 바라볼 수 있고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로
울어대는 새들이 있어
귀 기울인다
아름다운 꽃을 찾아
벌과 나비들이 날갯짓하고
황토벽에 개비들 먹이를 물고
줄지어 빠른 걸음으로 움직인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들 날리고
졸졸거리며 내려오는 골짜기 물에 목을 축이니
가슴 뻥 뚫린다
오늘도 자연이 주는 선물에 감사하며
아름답고 행복한 곳으로 만들며 보존해야겠다 -「감사하는 마음」 전문
모든 존재들이 상호연결 되어 있고, 개인의 행동이나 생각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물아일체의 경지,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고 개인의 삶이 우주전체의 일부로서 어떻게 역할을 하는지를 이해하는 척도이기 때문에 자연의 내밀한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이는 지혜로운 이다. 자연현상에 눈과 귀를 열고 “감사하는 마음”이 행복의 척도고 지혜의 창이 아닐까?
낙엽도 떠나가고
새들도 어디를 갔는지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홀로 남아
찬바람에 살갗이 찢어지고
외로움에 찌들어 갈 때 쯤
하늘에서 흰 꽃가루 날리어
내 몸 감싸 주네
그런가 보다
힘겨운 것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어
살며시 다가와 아픈 상처 달래주는 자연의 배려처럼
이웃사촌들이 옆에 있다는 걸 잊었었다
-「혼자만이 아니었어」 전문
큰 바람 작은 바람에
흔들리며 쓰러지며
세월을 마주하고 살지만
언제나 그날이 그날처럼
잊어가고 새로운 걸 찾으며 살아간다
연두 빛에서 초록을 지나고
황금물결과 백색 꽃으로
마무리 짓는 사계절이지만
힘찬 울음소리로
세상에 알리며 사계를 맞이하는 아가에 삶도
희노애락을 즐기며 살아가겠지
-「삶이 지나가는 길」 전문
“그런가 보다 힘겨운 것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어 살며시 다가와 아픈 상처 달래주는 자연의 배려처럼 이웃사촌들이 옆에 있다는 걸 잊었었다”삶이 괴롭고 지칠 때 실은 행복도 공존해 있는지도 모른다. 삶을 견딤으로 지속하게 하는 것은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인데 그 희망의 지지자는 나와 함께 하는 소중한 이들이다. “큰 바람 작은 바람에 흔들리며 쓰러지며 세월을 마주하고 살지만” 행복할 때 괴로움도 공존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고 고통과 시련을 통해 거만해지지 않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를 가지게 된다. 행복의 이면에는 고통이 숨어있고 시련의 이면에는 행복이 공존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삶을 이해하게 되고 또한 그 자체로 위로가 되는 것이다. “언제나 그날이 그날처럼 잊어가고 새로운 걸 찾으며 살아간다” 노년의 길목에 서서 시인은 담담한 생의 담지자로서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는 깨달음, 희망을 촉구한다.
이연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글은 늙지 않는다」는 지나온 생의 반추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고자 하는 다짐, 긍정적 의지의 표상이다.
인간의 보편적 일생이 대체로 욕심과 아귀와 수라, 빈궁하천의 생이기 마련인데 시인은 그 속에서 반성하고 웃으며 긍정적 에너지를 나누며 주변인들을 행복하게 하지만 그 고뇌는 여전하기에 끊임없이 시를 쓰고 스스로를 점검하고 있다. 몸은 늙었으나 마음은 늘 깨어있고자 하는 지혜의 창이 바로 그의 두 번째 시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과 사람, 현상과 관계를 관조하며 스스로 인연법을 깨달은 성문연각에 가 닿은 노시인의 잔잔한 울림, 진정성 있는 공명(公明)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