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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회 이사야 13장-25장
이사 13-23장은 앞의 장들에 연속되지 않는 새로운 부분으로서,“ ... 에 대한 신탁”이라는 표제들이 특정적으로 나타난다. 이에 따라 본문을 바빌론에 대한 신탁(13,1-14,23),모압에 대한 신탁(15,1-16,14),다마스쿠스에 대한 신탁(17,1-11),이집트에 대한 신탁(19,1-25),바닷가 광야(바빌론)에 대한 신탁(21,1-10,두마(에돔?)에 대한 신탁(21,11-12),드단족(아라비아)에 대한 신탁(23,13-17), ‘환시의 계곡’에 대한 신탁(22,1-14), 티로에 대한 신탁(23,1-18)으로 구분할 수 있다. 표제의 형태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14,28-32에는 필리스티아에 대한 신탁도 들어있다.
이사야서에서 ‘신탁(맛사)’이라는 단어는 여러 민족에 대한 심판 선고를 지칭하는 특수한 의미로 사용되는데,이 신탁들이 모두 이사야 예언자의 것은 아니다. 많은 부분 특히 13-14장의 바빌론에 대한 신탁은 분명 후대의 것이다. 이러한 신탁들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의 흥망도 오직 주님의 결정에,그분의 손에 달려있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이는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이 본문들 안에서는 종종 다른 민족들,특히 과거에 이스라엘을 억눌렀던 이집트와 아시리아까지도 언젠가는 주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특히 19,24-25). 이민족들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섬기게 되리라는 것은 2장에서 예고되었고 이사야서 제3부까지를 포함하는 이사야서 전체에서 부각되는 중요한 주제다. 민족들에 대한 하느님의 통치는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모든 이가 하느님을 섬기게 되는 데에서 완성된다.
이사 13,1-22 바빌론의 멸망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본 바빌론에 관한 신탁”(1). 13장에서는 아직 영화를 누리고 있는 바빌론이 메디아인들에게 무너지게 되리라고 선포한다. 이사야 예언자는 메디아가 강대국인 바빌론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보라, 나는 그들을 거슬러 메디아인들을 일으키리라. 메디아인들은 은에도 관심이 없고 금도 좋아하지 않는다”(이사 13,17). 배경은 기원전 6세기 말,바빌론 유배의 끝 무렵이다. 바빌론은 기원전 6세기 전반에 그 세력이 절정에 달했으나 기원전 562년에 네부카드네자르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내정이 불안해져 7년 사이에 네 명의 임금이 교체되었다. 그 네 번째가 바빌론의 마지막 임금 나보니두스인데(기원전 555-539년 재위),그는 종교적인 이유로 마르둑 신을 섬기던 사제들과 갈등을 빚었다. 이런 이유로 페르시아 출신 메디아의 임금 키루스가 바빌론에 침입했을 때 바빌론의 사제들은 그에게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해방자로 보고 환영했다. 그 결과 바빌론이 무너지고 페르시아가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사 14,1-2 이스라엘의 귀향
“1 주님께서는 정녕 야곱을 가엾이 여기시고 이스라엘을 다시 선택하시어, 그들을 고향에 자리 잡게 하실 것이다. 이방인들이 그들과 합류하고 야곱 집안에 받아들여지며, 2 민족들이 야곱 집안을 맞아들여 고향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이스라엘 집안은 주님의 땅에서 그 민족들을 남종과 여종으로 차지하고, 자기들을 포로로 잡아간 자들을 포로로 잡아 오며, 자기네 압제자들을 지배할 것이다”(1-2).
이사 14,1-2은 내용상 복잡한 단락으로,1절과 2절의 내용도 서로 부합되지 않는다. 앞뒤 문맥을 연결하여 해석하면,이스라엘의 귀향은 바빌론의 멸망(이사 13장)으로 가능하고,14,3 이하는 바빌론의 멸망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하느님의 ‘가엾이 여기심,자비’는 이스라엘의 죄에 뒤따르는 하느님의 진노를 끝맺는 결정적인 전환의 순간이 된다. 탈출 34,6의 두 번째 하느님 이름의 계시에서 뚜렷이 나타나듯이,한번 하느님께 선택을 받아 하느님과 계약 관계에 들어간 백성이 죄를 짓고 그 관
계를 손상시켰을 때에 그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 때문이다. ‘가엾이 여기다’라는 단어가 ‘자궁’과 같은 어원에서 파생되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자녀가 잘못했다고 해서 관계를 끊어버릴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 바로 자비다.
첫 번째 선택은 탈출 19,5; 호세 11,1에서와 같이 이집트 탈출 때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이 그분의 백성이 됨으로써 이루어졌다. 유배 간 이스라엘을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하심으로써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다.
이사 40-66장에서 하느님의 자비는 이스라엘을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그 땅에서 살게 하시는 것으로 실현된다. 유배 간 이스라엘은 스스로 죄 때문에 하느님께 버림받은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자비로 주어지는 귀향은,버림받은 아내와 같았던 이스라엘을 남편이신 하느님께서 다시 맞아들이시는 것과 같다(이사 54,7-10 참조).
이사 14,3-32 바빌론 임금의 종말/ 바빌론과 아시리아의 멸망/ 필리스타아 경고
14장은 이스라엘의 귀향을 알린 후 14,3-21은 바빌론 임금의 종말을 말한다. “3주님께서 너의 괴로움과 불안에서, 너에게 지워진 심한 노역에서 너를 풀어 주시는 날에, 4너는 바빌론 임금에 대하여 이러한 조롱의 노래를 지어 부를 것이다. 어찌하다 압제자가 종말을 고하고 억압이 끝나게 되었는가?”(3-4). ‘조롱의 노래’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 또는 나보니두스에 대한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조롱의 노래’라고 하는 것은 형식적인 면에서의 조가, 곧 바빌론 임금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들이지만 이것은 역설적이다. 이스라엘은 바빌론 임금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고 조가의 형식을 빌려 오히려 그 죽음을 경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을 거슬러 일어나 바빌론의 명성과 그 생존자들을, 그 자손과 후손들을 뿌리 뽑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14,22). 바빌론에 ‘생존자’, ‘남은 자’가 없으리라는 것은 예루살렘의 경우와 대조된다. 이사야에게 예루살렘이 심판의 대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예루살렘은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며 그들의 거룩한 씨앗(이사 6,13)으로서 새 시대를 시작할 것이다. 이 때문에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은 영원한 파멸이 아니다. 반면 바빌론에 대한 심판에는 심판 이후의 시대에 대한 희망은 없다.
1,4,24-27의 이사리아의 멸망 선고는 지나간 과거의 일에 대한 모사가 된다. 아시리아가 이미 멸망한 상태에서 이 말씀은 아시리아가 멸망했듯이 바빌론도 멸망하리라는 확신을 주는 역할을 한다.
이사 15,1-9 모압에 내릴 재앙
15,1-9은 모압에 대한 경고 메시지이다.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자신의 큰 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그의 후손들과 땅이 모두 모압 족속으로 알려졌으며, 요르단 동편 사해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모압과 이스라엘이 혈연적으로 가까운 나라였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두 나라 사이의 상호 관계는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집트에서 탈출 직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지역을 통과하기를 원했으나 모압은 거절했다.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성공하는 모습이 많이 괴로웠다. 그래서 그는 예언자 발람을 불러 아르논 건너편에 진 치고 있는 이스라엘을 저주하기까지 했다.
판관시대에는 모압 왕 에글론이 예리코까지 이스라엘 영토를 침입하여 18년 동안 이스라엘을 압제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게 하였다. 또한 룻기에는 베들레헴의 엘리멜렉이 기근을 피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이사하는 내용이 나온다. 엘리멜렉의 두 아들은 각각 오르파와 룻이라는 모압 여인들과 결혼을 하였다. 룻은 후에 보아스와 결혼하여 다윗의 조상이 되었다.
다윗은 장인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동안 자신의 부모를 모압 사람들에게 맡겼다. 솔로몬은 자신의 아내를 위해 예루살렘 앞 산에 모압의 신 그모스를 섬기는 산당을 지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라가 나뉜 이후에 모압 왕 메사는 북왕국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조공을 바쳤다. 아합이 죽은 후에는 모압의 메사는 이스라엘을 배반하였고, 이스라엘과 유다 연합군의 공격을 받음으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이스라엘과 모압이 서로 괴롭히는 사이였기도 하지만 때론 결혼으로 가족이 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모압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공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압에 대한 신탁. 정녕 밤 사이에 파멸하였구나. 아르 모압이 멸망하였구나. 정녕 밤 사이에 파멸하였구나. 키르 모압이 멸망하였구나”(1). 하느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선포되었다. 하룻밤에 아르 모압이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는 밤에 멸망을 당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멸망의 날이 돌연히 온다는 의미이다.
아르 모압은 모압의 수도 이름으로 오늘날의 랍바에 해당된다. 키르 모압은 거대한 바위 위의 요새화된 도시로 아르 모압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모압의 두 도성이 황폐하게 된다는 것은 나라 전체가 붕괴됨을 의미한다.
모압 사람들은 국가적인 재난에 직면할 때마다 그들의 우상인 그모스 신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울며 호소하였다. 그들은 고대 근동지방의 애도 방식을 따라 각기 자기의 머리털을 베고 수염을 깎으며 맨 몸에 굵은 베를 두르고 지붕 위에서 오열하며 부르짖었다.
모압을 향해 심판을 경고한 예언자마저도 모압의 통곡에 동참한다는 말에서 모압의 비참이 최고로 강조되고 있다(5절). 또한 모압이 멸망하게 된 주 원인은 가뭄이다(6절). 모압을 침공한 군사들이 전략적 목적으로 모압을 향해 흐르는 수원을 차단하였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모압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인 그모스에게 아무리 부르짖어도 재앙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 재난을 모면한다 할지라도 이들마저 사자의 밥이 될 것이라고 한(9절). “그 땅의 남은 자들에게 사자를 보내리라”(9)는 말씀은 대적의 손을 빌려 모압을 벌하시는 하느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하느님의 심판은 철저하고 완전하다. 하느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모압은 끝까지 하느님의 백성이기를 거절했고, 자신들의 신인 그모스를 섬겼다. 우상 숭배한 모압을 향한 하느님의 진노는 철저하고도 완전할 것이라고 이사야 예언자는 경고한다. 이사야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대나 오늘 우리가 호흡하며 살아가는 이 시대나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일은 우리 주변과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경고의 메시지는 매일 우리 삶의 주변에서 우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이사 16,1-14 모압에 대한 경고
16장에는 15장에 이어 모압이라는 나라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특별히 16장 1절~5절까지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하느님의 권고의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멸망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망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예언자들을 통해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모압은 이스라엘의 형제 나라이면서도 이스라엘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래서 다윗왕 때 다윗이 모압을 점령하고 그들에게 조공을 바치게 했다. 사무엘하 8:2절에 보면 “그는 또 모압을 치고 그들을 땅에 눕힌 다음 줄로 쟀다. 두 줄 길이 안에 든 사람들은 죽이고, 한 줄 길이 안에 든 사람들은 살려 주었다. 그러자 모압은 다윗의 신하가 되어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이렇게 조공을 바침으로 이스라엘과 모압은 군신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시대에 나라간에 조약을 맺는 군신조약이다.
모압은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치기로 약속을 했고, 양털을 가지고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그들이 나중에 이 약속을 실행하지 않았다. 계약을 파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16,1절에 모압이 약속한 조공을 다시 바치라고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심판을 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1이 땅을 다스리는 이의 어린 양을 보내어라. 셀라에서 광야를 거쳐 딸 시온의 산으로. 2퍼덕이며 달아나는 새들처럼 둥지에서 쫓겨난 어린 새들처럼 모압의 딸들이 아르논 강의 건널목에서 헤매리라”(16,1-2).
조공을 바치는 것은 왕에 대한 겸손의 표시이다. 우리를 다스리는 왕에게 자신의 소유를 드림으로 왕권을 인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예언자의 메시지는 조공을 바침으로 군신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심판을 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모압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너무나 도도한 모압의 교만에 대하여 들었다. 그의 거만과 교만과 방자함 그의 허풍에 대하여 들었다”(6). 이 말은 모압 사람들은 교만하고 거만하고 화도 잘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하는 것은 허풍뿐이이라는 말이다. 예언자의 말을 들어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만하고 거만하게 분을 낼뿐 예언자의 경고를 받지 않고, 허풍만 떨고 있다는 것이다. 7절부터 하느님께서 심판을 경고한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심판의 메시지이다. 모압은 그 자신 때문에 통곡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자랑할 만한 포도나무가 황폐하게 될 것을 말한다. 모압 사람들은 이런 재난이 오고 이런 고통이 올 때 하느님을 찾지 않고 도리어 그들의 신들과 우상을 찾아간다. 그러나 거기에는 진정한 문제의 해결책이 없다.
이사야 17,1-14 다마스쿠스와 이스라엘의 멸망
17장의 내용은 다마스쿠스에 관한 경고라고 시작을 한다. 다마스쿠스에 관한 심판에 대한 내용이다. 아시리아가 전쟁을 준비하고 이집트를 쳐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다. 북 이스라엘과 아람의 나라도 이제 아시리아의 전쟁에 휘말라게 된다. 북 이스라엘과 아람(시리아)이 전쟁에 휘말려 동맹을 맺는다. 이스라엘이 아람과 동맹을 맺는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이 유다의 왕에게 동맹을 요청을 한다. 그러나 유다왕은 이 동맹을 거절한다. 이러한 내용이 7-8장의 내용이다. 이것이 전쟁을 배경이 되어서 나오는 말씀이 이사야 17장의 말씀이다.
“다마스쿠스에 대한 신탁. 보라, 다마스쿠스는 이제 성읍이 아니라 폐허 더미가 되리라”(1). 아람의 수도가 다마스쿠스이다. 북이스라엘의 수도가 사마리아이다. 아람의 수도 다마스쿠스는 성읍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전쟁으로 파괴가 되어 그대로 폐허 더미로 그대로 된다는 것이다.
“에프라임에서 보루가, 다마스쿠스에서 왕국이 없어지고 아람의 남은 자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영화와 같은 꼴이 되리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3). 에프라임의 요새와 다마스쿠스 나라와 아람의 남은 자가 모두 섬멸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한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함께 동맹하여 유다를 친다. 이것은 잘못된 길이므로 하느님이 이 잘못된 동맹을 벌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심판이다.
이사 18,1-7 에디오피아에 대한 말씀
18장 1절은 다른 장하고 시작하는 방식이 다르다. 17장이나 19장에서 첫 시작 모두 경고의 말씀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사야 18장은 경고라고 시작을 하지 않는다. “아아, 에티오피아의 강 건너편 날개 달린 배들의 땅! 사신들을 바다로, 왕골 배에 태워 물 위로 보내는 땅! 너희 날쌘 특사들아, 가거라, 훤칠하고 말쑥한 겨레에게로. 어디에서나 두려움을 일으키는 민족, 강줄기가 여러 갈래로 뻗은 땅에 사는 강력하고 승승장구하는 겨레에게로”(1-2).
에티오피아는 사우디 아라비아 에멘 등을 포함한다. 에티오피아가 이렇게 넓은 땅을 가지고 나라를 유지하고 있을 때에 주위에 괴롭히는 나라가 아시리아이다. 아시리아는 지금으로부터 2700여년 전에 기원전 714년경에 아시리아가 주변의 나라를 전쟁으로 다 잠식하여 가고 있었다. 주변의 나라들이 아시리아의 침략을 막으려고 연합하였다. 에티오피아도 여기에 동참을 한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승리를 보장을 받을 수가 없다. 이때 군사력이 자주 작은 에티오피아의 나라가 파피루스로 배를 만든다. 갈대로 배를 만들었다. 파피루수의 배를 타고 에티오피아의 나라의 각료들이 건너편의 나라들에게 도움을 청하여 갔지만 모두 거절하였다. 에티오피아 각료들은 외부 나라에 힘을 빌리려 했지만 전적으로 하느님께 매달렸다면 에티오피아는 주님의 힘으로 이길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때에 훤칠하고 말쑥한 민족과 어디에서나 두려움을 일으키는 민족에게서, 강줄기가 여러 갈래로 뻗은 땅에 사는 강력하고 승승장구하는 겨레에게서, 만군의 주님의 이름을 모신 곳 시온 산으로 만군의 주님께 드릴 선물이 보내질 것이다”(7).
이사 19,1-25 이집트의 멸망
19장은 한때 강국인 이집트의 쇠퇴와 멸망 그리고 개종과 회복을 예언하는 장이다. 한때 누구도 넘볼 수 없었던 강국이었던 이집트는 아시리아의 침입으로 정치적으로 아시리아에 종속되고, 계속해서 바벨론의 네부카드네자르와 바사의 캄비세스,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의 침략을 받음으로 근동에서 세력을 잃은 역사적 멸망을 이루게 된다.
“이집트에 대한 신탁. 보라, 주님께서 빠른 구름을 타시고 이집트로 가신다. 이집트의 우상들은 그분 앞에서 벌벌 떨고 이집트 사람들의 마음은 속에서 녹아 내린다. 내가 이집트인들을 부추겨서 동기끼리 이웃끼리 싸우고 성읍끼리 왕국끼리 싸우게 하리라. 집트 안에서 사람들은 혼이 빠지고 나는 그들의 계획을 무산시켜 버리리라. 그러면 그들은 우상들과 혼령들 영매들과 점쟁이들에게 물어보리라(1-3). 주님의 등장으로 우상으로 얼룩진 이집트땅이 떨며 두려워 마음이 녹아날 것이다. 주님께서 이집트인들 스스로를 격동시켜 서로를 치며, 저들의 정신이 쇠약해져서 저들의 계획을 깨뜨린다. 이집트인들은 어려운 상황에 대해 우상과 마술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겠지만, 냉혹한 주인의 손에 들려질 것이다. “내가 이집트인들을 냉혹한 군주의 손에 넘겨 포악한 임금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리라. 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4).
5-10절까지는 생명줄이었던 나일강이 마름으로 악취가 나고 경제 손실과 생계와 곤란에 대해 말한다. 어부들과 베 짜는 자들과 같은 경제권을 가진 서민들이나 기둥과 같은 왕권도 다 무너질것을 예언하고 있다. 생명의 근원지가 끊길 것을 말한다. 11절에서 15절까지는 지속적으로 바로의 지혜와 계획이 우둔하고 어리석음을 강조한다.
특별히 이사야 당시의 왕인 아하츠도 북이스라엘과 아람공격으로 진통을 가질 때 아시리아나 이집트를 의지하는 모습들을 만나게 된다. 교묘한 외교정책으로 자신만의 계획을 이루는 것이다.
16절부터는 이집트 회복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19장과 20장 사이 이 문단은 아주 특수한 이방 땅의 회복과 종말을 다루고 있다. 18절에 “그날에 이집트 땅에는 가나안 말을 하고 만군의 주님께 충성을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생길 터인데, 그 가운데 하나는 ‘태양의 도시’라 불릴 것이다” 라고 한다. 주님의 계획은 이렇게까지 광대하고 예측 불가능한 것이다. 이제는 통제 불가능한 것만 같았던 이집트가 주님을 알며 주님을 경외할 것이며, 주님께 서원하여 주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23 그날에 이집트에서 아시리아로 가는 큰길이 생겨, 아시리아인들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인들은 아시리아로 가며, 이집트인들이 아시리아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것이다. 24 그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아시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복이 될 것이다. 25 곧 만군의 주님께서 “복을 받아라, 내 백성 이집트야, 내 손의 작품 아시리아야, 내 소유 이스라엘아!” 하고 말씀하시면서 복을 내리실 것이다. ”(23-25).
23-25절에는 이집트, 이스라엘, 아시리아의 종말론적인 평화와 주님을 경배할 것이라는 선언적 예언이다. 이 예언은 이사야의 바램이 아닌, 주님께 지시받은 계시임을 말한다.
이 구원과 회복은 "그 날"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16절부터 6번이나 등장한 "그날"은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 20절 말씀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자이자 보호자를 보내실 것이다 말씀한다.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약속에 따라 온전한 구원을 이루실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을 말한다. 이사야는 이렇게 종말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되어 과거 원수 되었던 자들이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을 바라보고 있다.
무수한 계획들 속에 모든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그곳에 구원자 메시야가 오시면 주님의 계획이 선포되고 완전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죄로 인해 막혔던 모든 담들이 깨뜨려질 것이다. 마침내 원수가 되었던 이집트가 주님의 백성이 될 것이며, 주님의 손으로 지은 작품 아시리아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은 하느님께 구원의 대상이다. 이스라엘의 절대적인 적이였고, 우상과 악의 구렁텅이였던 이집트조차 주님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계획과 섭리 속에 우리의 삶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미움과 불신 속에서 사람 안에 하느님의 구원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대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이사야 20,1-5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의 멸망
예레미야나 에제키엘의 경우 상징적 행동들이 여럿 나타나는데,이는 예언자가 어떤 의미를 담은 행위를 통해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으로서 대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행동을 하여 의문을 갖게 하고 이어서 말로 그 의미를 풀어주곤 한다. 이사 20장의 상징적 행동은 18-19장에서 선포된 내용과 직접 연결된다. 이집트와 에티오피아가 겪게 될 운명이 20장에 기록된 이사야의 행동을 통해 눈앞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시리아 임금 사르곤이 파견한 총사령관이 아스돗으로 진군해 와서, 아스돗을 공격하여 그곳을 점령하던 해의 일이다”(1). 20,1에서 말하는 사건은 기원전 711년의 일이다. 에티오피아 임금이 이집트를 지배하던 기원전 713-711년에 필리스티아는 아시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고 유다도 여기에 희망을 두었다. 필리스티아의 5개 주요 도시들 중 가장 북쪽에 있던 아스돗은 그러한 움직임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713년에 아스돗의 임금 아주리가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기를 거부하자 아시리아는 그를 폐위했고,기원전 712년에 아스돗이 이에 맞서 일어났지만,그다음 해에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는 총사령관을 아스돗으로 보냈다. 반아시리아 에티오피아-이집트에는 원군이 오지 않았고 아스돗은 아시리아에게 정복되었다. 본문의 배경인 기원전 711년에 유다 임금은 히즈키야였는데,히즈카야 역시 유다에서는 정치적 독립과 종교적 개혁을 추구했던 임금이었다.
“3 그 뒤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종 이사야가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에 대한 표징과 예표로서, 삼 년 동안 알몸과 맨발로 다닌 것처럼, 4 그렇게 아시리아 임금이 이집트 포로들과 에티오피아 유배자들을 젊은이나 늙은이나 할 것 없이, 이집트에게 수치스럽게도, 엉덩이까지 드러낸 채 알몸과 맨발로 끌고 갈 것이다”(3-4). 이 말은 이사야가 상징적 행동을 시작하고 나서 3년 동안은 그 의미에 대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았음을 뜻한다. 하느님은 이사야에게 다만 어떤 행위를 하라고 명하셨을 뿐이다. 당시에 사람들은 이사야의 행동이 예를 들어 아스돗의 운명을 나타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3년 후의 말씀에서 비로소,그의 행동은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의 운명을 보여주시는 것임이 밝혀진다. 아스돗을 비롯하여,이집트에 의지하면서 아시리아에 대항하려고 했던 이들이다.
심판은 이집트를 향한다. 아스돗이 점령당하는 것보다도 이집트가 무너지는 것이,힘이 있다고 생각했던 강대국에게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아시리아가 이집트를 공격한 것은 에사르 하폰 또는 아슈르바니팔이 아시리아의 임금이던 시기,곧 기원전 680년 이후의 일이다.
이사 21,1-10 바빌론의 멸망
이사 21,1-10은 13-14장과 마찬가지로 페르시아와 메디아가 바빌론을 멸망시킬 것을 선포한다(예레 50-51장 참조). 이 일은 기원전 539년에 이루어졌다. 본문에는 환시에 대한 보도가 들어있어,13-14장의 ‘바빌론에 관한 신탁’이 실제로 이루어지라라는 것을 더 강하게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한다. 14장이 멸망을 미래의 일로 예고한다면,21장에서 는 이미 “‘아, 옵니다! 병거 부대가, 두 줄 기마대가 옵니다.’ 그는 다시 말하였다. ‘무너졌습니다, 무너졌습니다, 바빌론이! 그 신상들도 모조리 땅바닥에 부서졌습니다.”(9절)라고 외치고 있다.
1-5절은 예언자가 본 환시(2절)를 중심으로 하고 있고,6-10절은 그가 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다른 의견도 없지 않으나 아마도 본문은 이사야 예언자 자신에 의한 것이 아니며,적어도 최종 본문은 기원전 6세기에 키루스가 바빌론을 점령한 사건을 묘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신상들도 모조리 땅바닥에 부서졌습니다”(9)라는 말에서 바빌론의 파괴에서 특히 신상들이 부서짐을 부각시키는 것은 신전이 무너지라는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제2이사야서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바빌론의 신들이 인간의 손으로 만든 우상이기에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짓밟힌 나의 백성아 타작마당에서 으깨진 나의 겨레야 내가 이스라엘의 하느님 만군의 주님에게서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하였다”(10). 1-10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빌론의 멸망을 알리는 것이고, 환시에 대한 보도는 이 예언의 확실성을 보증하는 역할을 한다. 예언자가 전하는 말씀이 자신의 말이 아님을 10절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이사 22,1-14 예루살렘에 대한 책망
22,1-14은 예루살렘에 관한 내용이고,22,15-25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 관한 내용이므로 서로 연관된다. 그러나 1-14절은 “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의 독립된 신탁으로 제시된다. 많은 이들은 주로 8-11절을 근거로 하여 이 신탁이 기원전 701년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에 쳐들어왔다가 점령하지 못한 사건을 본문의 역사적 배경으로 이해한다(이사 37장 참조). 이러한 해석이 본문의 모든 부분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본문을 읽어보기로 한다.
“9 다윗 성에 균열이 많음을 살펴 알았으며 아랫저수지에 물을 모아들였다. 10 그리고 너희는 예루살렘의 가옥 수를 파악하고 성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옥들을 허물었으며 11 옛 저수지의 물을 받아 놓으려고 두 성벽 사이에 저장소를 만들었다. 그러나 너희는 이 모든 것을 이루신 분을 찾아보지 않았고 이 모든 것을 멀리서 꾸미신 분을 살펴보지 않았다”(10-11). 전쟁에서 포위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물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아하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사 7,3에는 “윗저수지”에 대한 언급이 있다. 다른 의견들도 있지만,그 윗저수지가 22,11에 언급된 “옛 저수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옛 저수지’ 외에 히즈키야는 “기혼 샘의 위쪽 물줄기를 막아 다윗 성 서쪽 밑으로 돌려” (2역대 32,3) 도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였다(2열왕 20,20 참조). 집회 48,17에서는 그가 “쇠 연장으로 바위를 뚫고 저수 동굴을 만들었다”고 말하는 데,그가 만든 것이 “아랫저수지”다. 그 저수지가 다윗 성의 옛 성벽과 새성벽 사이에 자리하고 있기에 이사 22,11에서 “두 성벽 사이에” 저장소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행위들은 전쟁을 준비하는 정상적인 조처들이고,그중에서도 물을 확보한 것은 산헤립의 침공 때 예루살렘이 버틸 수 있게 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아시리아가 주님의 도구임을 알지 못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아시리아를 통해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정화하고자 하신다면 이스라엘은 그 과정을 겪어야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수지를 만들고 가옥 수를 세는 것은 인간적인 방책들로 하느님의 계획을 거스르려는 시도들일 뿐이다. 눈앞에 닥쳐온 어려움들은 아시리아 때문에,또는 다른 무엇 때문에 생겨난 일이 아니다. 아시리아의 침략에 대응할 군사적이고 외교적인 방법을 찾는 것보다 더 필요한 일은 그것을 ‘이루시고’ “꾸미신" 분의 의도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보아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면서 ‘내일이면 죽을 몸, 먹고 마시자.’ 하는구나”(13). 이집트와 고대 근동의 문화 안에서 이와 비슷한 문장들이 자주 나타나는 것을 보악 이러한 인생관은 여러 시대 여러 지역에 흔히 퍼져있었던 것 같다. 13절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해석은,아시리아의 공격을 받던 예루살렘 주민들이 이제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죽을 수밖에 없으니 먹고 마시자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회개였고(이사 22,12) 그들이 회개한다면 아직도 이스라엘에게는 미래가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느님,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이제 끝이라고만 생각 했다는 것이다. 둘째 해석은 이것이 산헤립의 군대가 물러간 다음의 상황을 묘사한다고 보는 것이다. 기적적으로 예루살렘이 파괴되지 않고 아시리아 군대가 물러갔을 때,예루살렘은 그 일시적인 해방을 기뻐할 뿐 장차 다가오는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도 깨닫지 못한다.
이사야는 이런 예루살렘에게 경고한다. 이사야는 아시리아의 공격 앞에서 히즈키야에게 예루살렘이 멸망하지 않으리라고 말했지만,이제 승리에 도취되어 있는 예루살렘에게 그들이 겪게 될 하느님의 징벌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사 23,1-18 티로와 시돈에 내릴 심판
티로는 페니키아인의 도시국가(고대 페니키아)로서 특출한 상업적인 수완으로, 당시 세계 무역의 중심지였다. 티로의 상업적 수완은 기세가 등등하였으며 허영과 자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티로의 교만은, 이사야를 비롯하여 아모스, 요엘, 즈카이랴, 에제키엘 등 여러 예언자들의 경고를 들었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경고를 무시했고 외면했다.
그래서 결국, 당시 지중해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티도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다. 이사야 13장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는 바빌론에서 시작하여 23장 티로와 시돈에게 내린 심판으로 끝이 난다.
“티로에 대한 신탁. 통곡하여라, 타르시스의 배들아. 집 하나 남김없이 파괴되었다. 키팀 땅에서 오는 길에 그들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다”(1).
1절의 표제는 “티로에 대한 신탁”으로 되어있으나 23장 본문에서는 여러 곳에서 시돈에 대해 말하고 있다. 두 본문이 합쳐졌거나 편집 과정을 거쳤다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더 단순하게 이 본문을 페니키아 지방 전체에 대해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티로와 시돈은 그 대표적인 도시들로 언급된 것이다. 23장에서는 먼저 티로의 갑작스런 멸망을 선포하고 마지막에는 그 회복을 예고한다. 해변에서 멀지 않은 섬 도시인 티로는 아시리아의 살만에세르와 산헤립,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에게 공격을 받았다. 마지막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파괴되었는데,본문이 그 가운데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타르시스의 배”는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뜻할 수도 있다. 타르시스는 보통 스페인이라고 생각되는데,근래에는 이 단락에 나오는 타르시스의 경우(이사 23,6참조) 키프로스 섬에 있는 다른 도시로 보는 견해도 있다. 요나가 니네베로 가라는 하느님의 명을 피해 멀리 도망가려고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타르시스의 배들은 먼 바다를 다니는 배들을 대표한다.
티로와 시돈이 하느님의 경고를 받는 것은 엄청난 부와 안전한 성읍으로 인해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사람들을 유혹하여 진리의 길 밖으로 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바로 그러한 티로와 시돈에게 경고하고 있다. 단순히 이방인이고,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고 계신 경고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자녀들을 죄의 길로 인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8절에서 티로에게 닥친 이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이사야는 9절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한다. “8 누가 왕관의 수여자 티로를 두고 이러한 결정을 내렸는가? 그 상인들은 제후들이며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서 존경을 받는데. 9 모든 영화의 교만을 짓밟고 세상에서 존경받는 자들이 모두 망신당하도록 만군의 주님께서 이러한 결정을 내리셨다. ”(8-9).
절대로 멸망은 없으며, 영화와 부귀만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티로 주민들에게 하느님이 친히 나타나시어서 티로를 몰락시키심으로 인간의 교만하고 오만한 자기충족적인 욕심을 굴복시키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굴복은 결국 그들에게서 오염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접 보게 함으로 교만한 생각을 내려놓고, 우상을 향해 달려가는 마음을 돌이켜 주님께 돌아오게 하고 계신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바빌론과 모압과 유다, 아람, 북이스라엘,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등 모든 나라가 바로 이 교만과 오만의 죄 때문에 패망과 몰락을 경험한다. 살아계신 하느님이 계속 찾아가셔서 자신의 하느님 됨을 보여주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이 누리는 부와 영광, 그리고 영원한 것처럼 보이는 권세로 인해 찾아오신 하느님을 거부한 결과이다. 23장에서 티로 역시 이런 하느님의 보편적인 세계통치 원칙으로 패망과 몰락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향한 교만, 하느님이 필요 없다는 교만, 하느님 없이도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그 교만 때문에 구원의 손길이 거두어지고 패망과 몰락이 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하느님은 교만한 이들을 꺾어서 없애버림으로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은 교만하여 주님을 저버리는 이들에게도 은총의 손길을 내미신다.
“17 일흔 해가 지난 뒤에 주님께서는 티로를 돌보아 주실 것이다. 그러면 그는 다시 해웃값을 받게 되어, 땅 위에 있는 세상의 모든 왕국들에게 몸을 팔 것이다. 18 그러나 그 벌이와 해웃값은 쌓이거나 모이지 않고 주님께 봉헌될 것이다. 그 벌이는 주님 앞에서 사는 이들이 넉넉한 음식과 값진 의복을 장만하도록 바쳐질 것이다. ”(17-18).
티로는 자신의 교만으로, 하느님과 상관없는 삶 때문에 멸망을 경험하지만 하느님은 다시금 티로와 시돈을 회복시키신다. '티로를 돌보아 주실 것이다'는 말을 직역하면 하느님이 티로를 방문하신다는 말이다. 직접 찾아가셔서 회복의 은혜를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70년 동안 잊혀있던 티로를 다시 찾아 주시어 회복시켜 주심을 뜻한다.
17절에서 티로가 몸을 판다는 것은 상업적 교역을, ‘해웃값’은 교역을 통해 얻은 이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시 해웃값을 받게 되어”는 티로가 과거의 번영을 되찾게 되리라는 것을 뜻한다. 즉 하느님이 티로와 시돈을 회복시켜주셔서 이전과 같이 해상무역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달라진 것은 그 무역에 이제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그들의 소득이 하느님께 봉헌되어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무역항에서 교만이 중심이된 도시에서 변하여 하느님께 봉헌하는 도시,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을 경험하는 도시가 될 것이라는 회복의 약속을 준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아픔과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 아픔을 통해 다시금 하느님께 눈을 돌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사 24,1-12 세상에 내릴 하느님의 심판
이사 24-27장은 앞의 장들과 구분된다. 내용상으로 보면 어떤 개별적인 민족들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심판을 말하며,역사 안에서 가까운 미래에 이루어질 일들을 이야기하지 않고 마지막 때에 있을 일들을 말하기 때문이다. 문학적으로는,논리적으로 연결된 긴 본문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묘사들과 탄원이나 감사의 기도들이 섞여있다. 이 부분을 지칭하여 ‘이사야의 묵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묵시문학의 여러 요소 가운데 몇 가지가 단편적으로 나타난다고 해서 묵시록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으며 전체적으로 묵시문학과 같은 틀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사람에게 전해지는 계시,또는 계시를 설명해 주는 천사적 존재 등은 나타나지 않는다.
저자 문제에 있어서는 이사야가 이 장들을 직접 썼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13-23장과의 관계에서 보아도 24-27장은 앞에 나온 여러 민족에 대한 신탁을 이미 전제하면서 그것을 보편화시키고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신학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것은 13-23장에 실린 이민족들에 대한 신탁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심판이라는 것이 하느님의 통치권의 표현으로 이해된다는 점이다. 심판의 완성은 “만군의 주님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임금이 되시어"(24,23)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이고,그날에는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25,6)고 선포된다.
따라서 24장은 종말에 일어날 대환난과 심판 전의 온 땅이 황폐 될 것을 예언하는 본문이다. 13장부터 이어진 유다와 10대 주변 국가들에 대한 심판 예언이 마무리되고 이제는 보다 넓은 종말론적인 심판과 메시야 왕국의 승리 예언들을 선포하고 있다. 대환난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요한계시록 21장을 연상케 하며 새 땅과 새 예루살렘과 반대되는 사망과 애통하는 모습들을 소개하고 있다.
“보라, 주님께서 땅을 파괴하고 황폐시키시며 그 표면을 뒤엎고 주민들을 흩으신다”(1).
1절에서 하느님은 온 땅을 황폐하고 공허하게 만드신다. 황폐와 공허의 모습은 2절과 3절, 온 땅이 격변하고 사람을 흩으지고 땅을 흔드시며 모든 삶의 질서들이 흔들릴 것을 경고한다. 질서가 흔들릴 때 사용되는 단어는 ‘에베트’, ‘노동하다’라는 뜻이다. 즉 주인에게 존속되어 섬기는 것을 말한다. 대심판날에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철저한 공의로움에 의해 심판을 내릴 것인데, 각자가 참되신 주인에게 존속되어 살았는지, 피조물로서, 구원받은 자로서 온전한 노동을 하며 살았는지를 심판하실 것이다. 마지막 때에 누구에게 존속되어 살았는지가 우리의 심판의 유무를 정하게 될 것이다.
“4 땅은 말라 시들고 누리는 생기를 잃어 시들며 하늘도 땅과 함께 생기를 잃는다. 5 땅은 그 주민들 밑에서 더럽혀졌으니 그들이 법을 어기고 명령을 거슬러 영원한 계약을 깨뜨렸기 때문이다”(4-5).
온 땅이 황폐하고 공허해지는 이유를 4절과 5절에서는 율법의 위반과 계약의 파기로 보고 있습니다. 5절 말씀 “그들이 법을 어기고 명령을 거슬러 영원한 계약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율법을 폐하는 과정에 땅이 주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다고 한다. 더럽게 되었다는 것은 우상 숭배로 얼룩진 죄악을 말하는 것이다. 민수 35,34에서도 “너희가 사는 땅, 곧 내가 그 안에 머무르는 땅을 너희는 더럽혀서는 안 된다. 나 주님이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인간 사회가 더러워졌으며, 인간으로서 창조주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자신을 스스로 주인으로 여기는 교만의 상태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다시 5절에서 율법의 파괴뿐 아니라 영원한 계약을 깨뜨렸다 계약을 깨뜨리는 것은 성경 13번 나오는 문장으로서 사람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싫어하는 사실을 부각시킬 때 사용되었다. 영원한 계약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과 맺은 계약을 지칭해서도 사용되지만, 무엇보다도 홍수 후에 노아와 맺으신 계약을 가리킨다(창세 9,16: “하느님과 땅 위에 사는,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계약”). 이 계약의 범위는 시나이 계약처럼 이스라엘에 한정되지 않으며, 이 계약이 깨어졌을 때 이에 대한 심판은 온 땅에 미치게 된다.
영원한 계약이 마지막으로 다루어진 곳은 신약성경이다. 이 계약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구약에서부터 신약을 관통하는 영원한 계약을 깨뜨리는 주역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은혜를 거부하고 자신의 의로 구원을 쟁취하는 오늘날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하느님의 창조 질서가 무너져가며, 하느님이 조성하신 이 땅에서 주민다운 삶을 살아내지 못한 채, 죄로 얼룩진 악에게 존속되어 살아가는 자들에게 심판이 불가피해 보인다.
그 결과 6절에서 13절까지 온 땅이 황폐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24장 본문의 또 다른 주요 키워드는 ‘땅’이라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집어삼키고 그 주민들은 죗값을 받는다. 그러므로 땅의 주민들은 소멸되어 사람들이 얼마 남지 않는다”(6). 예루살렘과 유다라는 제한된 선택된 민족의 땅에서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조성하신 온 우주적 땅으로 전환되고 있다. 창세기때부터 계약된 백성들이 머무는 모든 지역과 영역에서 이 단어가 쓰여진 것이다.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도 후대들이 살아가야 할 그 땅이 저주받아 황폐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단죄를 받아 땅의 존속된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형벌에 처해진다. 이 심판은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다. 우리의 삶의 터전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평생 몸담아 살아왔던 이 땅이 심판의 대상이 되어가는 비통함과 애통함이 머물러야 할 것이다.
황폐한 땅 한복판에서 모든 종류의 즐거움과 쾌락이 사라질 것을 예언한다. “7 햇포도주는 마르고 포도나무는 생기를 잃으며 마음에 기쁨이 넘치던 자들은 모두 한숨짓는다. 8 손북의 흥겨운 소리도 그치고 희희낙락하던 자들의 소란도 멎었으며 수금의 흥겨운 소리도 그쳤다. 9 더 이상 노래 부르며 포도주를 마시지도 못하고 술은 입에 쓰기만 하다. ”(7-9). 7절에서 우리는 새 포도즙이 생기를 잃으며, 마음이 즐겁던 자가 다 탄식함을 본다. 8절에서 말할길 소출이 없어 음악과 사람들의 소리가 중지되고 무거운 침묵만이 흐르게 될 것이다. 9절에서는 약탈을 당한 성읍이 허물어진다고 한다.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 완전히 황폐하여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해 버린다.
10절에서 사람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성읍도 무너졌다고 한다.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학대와 약탈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종말은 이미 확정되었으며 결코 피할 수 없다. 세상 그 누구도 하느님의 심판 앞에서 제외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암흑으로 세상 쾌락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 깨어 근신할 때이다.
14절부터 23절까지는 천지가 갈라지는 대환난으로 악인들이 극한 두려움 속에 망할 것을 예언한다. 마지막 날의 심판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사냥꾼의 사냥과 같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은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15 ‘동쪽에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바닷가에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라.’ 16 우리는 땅 끝에서 울려오는 노랫소리를 듣는다. ‘의로운 이에게 영광이어라.’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끝장이다, 나는 끝장이다, 큰일났구나! 배신자들이 배신하였다. 배신자들이 배신하고야 말았다”(15-16). 따라서 악한 영들과 땅의 권세자들에 대한 종말의 대심판 후에 그 백성들 가운데 영광의 왕으로 재림하신 주님의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다가오는 주님의 심판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더 크고 위대한 찬미의 이유가 된다.
그래서 마지막 23절 말씀처럼 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 할 때가 온다 한다. “만군의 주님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임금이 되시어 그 영광이 당신 원로들 앞에서 빛나리니 달은 수치스러워하고 해는 부끄러워하리라”(23).
23절은 24장의 절정이다. 이 장에 묘사된 심판은 주님께서 시온에서 임금이 되시는 것으로 완성된다. ‘주님께서 임금이 되신다’는 것은 구약성경의 다른 본문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특히 이사 52,7(“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과 하느님의 통치 시편들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시편에서 나오는 주제다. 이 구절을 ‘임금이 되시다’라고 번역해야 할 것인지 또는 ‘임금이시다’라고 번역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계속되지만,심판이 끝난 다
음 비로소 하느님께서 임금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 자체도 왕권의 행사에 속하는 것이고,다른 본문들도 참조한다면(시편 93편 등) 창조부터가 이미 하느님의 다스리심의 실현임을 알 수 있다. 그 다스리심의 중심이 되는 장소가 바로 시온의 성전이다(미카 4,7 참조).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달”과 “해”라는 이름 대신 각각 ‘빛나는 백색’과 ‘열기’라는 명칭이 사용된다(이사 30,26; 아가 6,10 참조). 이는 창세 1,16에서 해와 달을 “큰 빛물체”,“작은 빛물체”라고 부를 때와 마찬가지로,신화적인 색채를 배제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해와 달은 주변의 여러 민족에게 신들로 숭배를 받았으나 구약성경에서는 이들을 하느님의 피조물로 규정하고,이들에게 의지하는 것이 헛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때에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고 그 원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 선포한다. 세상 모든 것의 심판 후 하느님께서 그 찬란한 영광을 완전히 드러내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종말의 모습은 주님께서 온 우주의 왕으로 인정을 받으시고 그 영광을 만천하에 드러내시는 것으로 그 절정에 달한다. 해와 달도 비할 수 없는 찬란한 영광의 빛이 임하는 것이다. 온 우주의 왕을 만군의 주님이라 부른다. 이는 천사들과 악한 영들까지도 다 주님의 권한에 굴복하기 때문이다.
이사 25,1-5 감사 기도
“1주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제가 당신을 높이 기리며 당신 이름을 찬송하리니 당신께서 예로부터 세우신 계획대로 진실하고 신실하게 기적들을 이루신 까닭입니다. 2성읍을 돌무더기로, 요새 도시를 폐허로 만드신 까닭입니다. 이방인들의 성채는 더 이상 성읍이라 할 수 없고 다시는 영원히 복구되지 못하리이다”(1-2).
이 노래는 이사 24장의 선포가 이루어진 데에 대한 감사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2절에 언급된 도시의 몰락은 24,10에 연결되고,3절에서 말하는 다른 민족들이 하느님을 기리는 것은 24,15에 연결되며,4절에서 말하는 포악한 자들에 대한 승리는 24,21-22에 연결될 수 있다. “저의 하느님”을 향한,곧 한 사람의 화자를 가정하는 기도 형식은 이사야서에서는 매우 드물고 오히려 시편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심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39장에서,하느님을 향해 감사를 드리는 기도는 큰 단락들을 끝맺는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과 유다에 관한 예언들(이사 1-12장)을 끝맺는 12장에서 감사의 기도가 나타나고, 13-23장의 민족들에 대한 심판이 있은 후 24-27장 안에 감사 기도들이 들어 있으며,이사야서 제1부의 거의 마지막인 38장에 히즈키야의 감사 기도가 자리하고 있다. 많지는 않으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러한 기도들은,심판 이후의 미래를 내다보는 넓은 전망 안에서 심판 선고를 이해하게 해준다.
1절부터 보면, 24장에서 계속해서 ‘주님께서 이러이러한 일을 행할 것이다.’라고 하다가 25장 1절에서 “주님, 당신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이 땅을 뒤엎어서 온 민족 이렇게 혼돈의 세계에 빠지게 되지만, 그 주님이 자신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다. 그 하느님을 내가 높이고, 주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는데 이것이 그냥 우발적으로 저지른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 세운 계획대로 뜻대로 성실하게, 그리고 진실되게 행하셨기 때문이라고 노래한다.
2절에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무시하고 그 위용을 자랑하던, 교만에 선봉에 서 있던 성읍들을 돌무더기로 만드시고, 황폐하게 만드셨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만드셨다. 그러한 하느님의 위용과 기세를 견줄 자들이 없다. 3절에 어떠한 강한 민족도 하느님 앞에 무릎 꿇고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어떠한 포학한 민족들도 무릎 꿇고 주님을 경외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은 단순히, 가진 힘으로 사람들을 꺾으시는 그런 포악한 군주가 아니다. 4절에 보면 포악자가 폭풍과 같은 기세로 성벽을 공격할 때, 하느님께서는 힘없는 이들을 지키는 요새가 되고, 가난한 자의 요새가 되시며, 폭풍을 피할 피난처, 폭염을 피할 그늘이 되어 준다.
이러한 모든 강렬한 힘은 결국 진정한 축제를 꽃피우기 위함이다. 포학하고 하느님을 대항하는 무리들을 잠재운 후에 하느님께서는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그 잔치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맛보지 못 했던, 기름진 것들과 맑은 포도주로 채워질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7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6-7).
6-10절은 이사야서의 종말론적 전망에서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인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시온)으로 모여드는 날을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의 표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후에 유다교 안에서 잔치는 메시아 시대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발전하고,신약성경에서도 그러한 비유를 찾아볼 수 있다. 하늘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한 예수님의 말씀들은,구약에서 약속되었던 메시아 시대가 도래한 시점에서 그 초대에 응답할 것을 요구한다. 마태 8,11에서는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라고 선포된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잔치라는 표징과 특히 6절은 여러 가지 배경에 연결되지만,그 모든 배경의 출발점은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 친교를 나타낸다는 점이다. 그래서 제사들 가운데 친교제에서는 제사에 참여한 이들이 제물 일부를 나누어 먹었고,탈출 24,11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주님과 계약을 맺고 나서 “하느님을 뵙고서 먹고 마셨다”고 말한다. 이제 시온 산에서 임금이 되신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신다면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받아들이시어 친교를 맺으심을 상징한다. 신약에 이르러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것을 비판하였고(마태 9,11),사도들의 경우도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문제로 논쟁이 있었다(갈라 2,11-14). 두 경우 모두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그들에게 구원이 주어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살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은 종말에 이루어질 충만함을 나타내기도 한다(마르 6,30-44 오전 명을 먹이신 기적 참조).
7절에서 주님께서는 모든 겨레와 모든 민족들의 너울과 덮개를 없애 버리는 것이, 억압 받던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 안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 억압과 자유는 단순히 힘이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받았던 억압이 아닌, 죄와 죽음에 사로잡혀 억눌렸던 바로 그 억압이다. 그리고 그 자유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다. 8절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며 조롱당하고 핍박당할 때 흘렸던 모든 눈물을 하느님께서 닦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잔치를 즐김으로 그들이 당했던 모든 수치를 온 천하에서 찾아볼 수 없게 함으로서 종말적 희망을 보여준다.
“9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10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9-10ㄱ). 9-10은 구원된 이들의 감사 노래이다. 바로 이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바로 이 분이 우리의 아버지시다! 때로는 우리가 수치와 조롱을 참고, 세상의 기준으로는 손해 보며, 굳이 감당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감당하며 살아왔던 이유, 우리의 삶의 이유, 우리의 목적 하느님이시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우리는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이다! 10절 서두에 “주님의 손”은 무엇인가를 행하는 도구이고, 힘과 능력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사 1-12장에서 하느님이 ‘손이 뻗어있다’는 것은 ‘분노가 풀리지 않는다’는 것과 자주 연관되어(이사 5,25)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힘을 나타낸다. 그러나 10절에서는 그 심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시온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임을 알 수 있다. 구원은 악에 대한 심판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10절에 이스라엘 대적 중에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던 모압이 당한 결말을 다시 한 번 언급한다. “그러나 검불이 거름 구덩이에서 짓밟히듯 모압이 제자리에서 짓밟힐리라”(10). 지푸라기가 거름더미에서 밟히듯이 그렇게 모압은 자신의 홈그라운드, 처소에서 밟힐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발버둥칠 것이다. 11절에 헤엄치는 자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있는 힘껏 팔을 앞으로 뻗듯이 팔을 뻗겠지만, 하느님은 오히려 그 팔을 밟아버릴 것이다. 12절에 지금은 성벽 위에 높은 요새를 세워 견고히 지키지만, 그 모든 것을 헐어버릴 것이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올바른 종말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참 중요하다. 힘든 현실을 그냥 피하고만 싶은 도피성 종말론과 현재의 문제에 너무 급급한 나머지 나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저 먼 곳에 있는 종말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여정 위에서, 하느님과 동행하며 기쁠 때 하느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슬프고 힘들 때도 위로하시는 하느님을 붙잡고,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느님을 믿음으로 감사하고 찬미하는 삶이 지금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영원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종말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