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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분 - 단편소설 데뷔작
행방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에 전화벨 소리가 온 집안을 뒤흔들었다. 자리에 누워 있던 황 노인의 부인이 엉거주춤 몸을 반쯤 일으켜 기어가듯 전화기에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황병석 씨 댁인가요?”
짜증 섞인 사내의 투박한 말투가 고막을 울린다.
“예에, 그런데요? 누구슈우?”
“여기, 상계동 파출솝니다.”
“파출소라구유? 혹시 우리 영감이 뭔 일 났남유?”
황 노인의 부인이 다급히 물었다
“술에 취해 의사소통이 불가능합니다. 빨리 오셔서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사내는 퉁명스럽게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황 노인의 부인은 불편한 몸을 일으켜 아들과 며느리가 자는 방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왜 그러세요?”
자다가 일어난 황 노인의 며느리가 짜증스러운 듯 부스스한 머리로 방문을 열고 나왔다. 며느리는 밤공기를 요란하게 울리던 전화 소리에 이미 잠이 깨어 있었다. 시어머니는 엉거주춤 몸둘바를 모르겠다는 태도로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영감이 사고를 친 모양이다.”
황 노인의 부인은 아들이 깨어날까 며느리의 어깨너머로 방안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아휴, 가끔 아버님 왜 이러신대요?”
택시운전을 하는 40대 중반의 아들은 잠 속에 빠져 코고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려나왔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한숨 섞인 말에 아무런 토를 달 수 없었다. 일 년이면 서너 번씩 술 먹고 사고치는 시아버지를 어느 누가 좋다고 하겠는가. 더욱이 술 먹는 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사고를 쳐서 자식에게 금전적인 손해를 가져오게 하니 없는 살림에 시어머니는 며느리 볼 때마다 고양이 앞의 쥐의 형국이 되고 마는 것이다.
“얘야, 포장마차에서 술을 먹다가 아마 싸움을 한 모양인 게야.”
췌장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황 노인의 부인이 며느리의 시선을 피하며 몸을 비틀거렸다.
“어머니, 전요 이럴 때마다 함께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애비가 얼마 벌어오는지 아세요?”
“그러게 말이다. 알지 왜 몰라. 네겐 할 말이 없구나. 미안하다.”
시어머니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하며 며느리의 눈을 피했다.
“정신 차리고 살아도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인데 아버님이 자꾸 이러시면 안 되죠.”
“어쩌겠니? 부몬데…”
며느리가 발을 구르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내자 시어머니는 옆구리에 차고 있던 똥주머니를 매만지기만 했다.
“아가, 내가 할 말이 없다. 너희들에게 보탬이 되지 못해 정말 부끄럽다.”
시어머니는 죄인인 양 고개를 떨구었다. 지난달에도 황 노인은 술이 취해 들어오다 전봇대에 부딪쳐 안경을 박살냈다. 그 때도 눈이 안 다친 것만도 다행이라며 며느리가 데리고 나가 새 안경을 맞춰주었다.
“전생에 내가 뭔 죄를 많이 지었길래 이집 식구가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어머니께서 믿고 계시는 하나님은 뭐하신대요?”
며느리는 종교문제까지 들추며 시어머니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래, 어쩌겄냐. 얼른 가서 뭔 일인가 알아봐라.”
황 노인의 부인은 크게 한숨 소리 내며 돌아섰다.
“어머니, 기물을 파손했다고 하셨죠? 돈 있으면 좀 주세요.”
“내게 삼십 만원이 있는데… 가지고 가렴.”
시어머니가 돈을 가지러 방으로 들어가는 등에 대고 며느리가 마음이 바뀌었는지 다시 시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그만 두세요. 우선 내일 임대료 낼 돈으로 해결해 볼께요. 다녀올께요.”
며느리는 퉁명스럽게 말을 뱉고 쾅 소리가 나도록 대문을 닫고는 튕겨나가듯 집을 빠져나갔다.
황 노인의 며느리는 가속으로 달려오는 빈 택시를 발견하고 두 손을 들었다. 멈춰선 택시에 재빠르게 승차한 그녀는 너무 화가 나서 목적지를 잊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아, 네. 상계동에 있는 ××파출소로 가주세요.”
택시기사가 빽 밀러로 흘깃거리며 목적지를 재차 물었을 때 그녀는 자기만의 생각에서 깨어나 파출소로 가자고 대답했다.
“이 시간에 파출소엔 왜 가십니까?”
빈 차로 심야를 배회하던 택시기사는 심심했던지 핸들을 꺾으며 물었다.
“술주정뱅이 시아버지를 둔 탓이죠. 며느리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은지 허구헌 날 경찰서라니까요…”
분이 풀리지 않던 그녀는 마치 말할 대상을 만난 사람처럼 낯모르는 사람 앞에서 시아버지의 흉을 늘어놓았다.
“허허 우리 아버님도 알콜중독 자셨는데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정말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택시기사가 손님의 기분을 맞추려는 듯 반죽을 맞춰주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파출소에 들어서자 경찰 두 명과 술에 만취가 된 황 노인이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황 노인은 며느리가 도착한 줄도 모르고 50대로 보이는 여자와 주거니 받거니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돈 없으면 먹질 말아야지. 누군 땅 팔아 장사하는 줄 알어?”
“누가 안 준다고 했남? 더럽구 더럽구만… 돈 없는 사람 목숨 붙어 있어두 목숨이 아니구먼…”
“하이고, 말로만 하지 말고 당장 내놔. 그리구 남의 물건은 와 부시고 지랄이야. 술을 먹으면 곱게 먹어야지. 자식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으슈?”
포장마차 주인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노인에게 반말로 해대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시아버지가 무전취식에 기물파손으로 50대 여자가 경찰을 부른 것이다. 50대 여자는 포장마차 주인이었다. 여자는 50만원의 합의금을 내놓지 않으면 황 노인을 경찰서에 넘겨 반드시 형사 처벌받도록 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것이었다. 황 노인의 며느리가 사태를 파악하고 포장마차 주인 앞으로 나섰다.
“사장님, 달라는 대로 오십 만원을 다 드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아버님이 파지 줍는 분이에요. 삼십 만원 밖에 없는데… 이것도 제가 드리는 거예요. 제발 받아주세요.”
“이 사람이 지금 장난치고 있나. 이 보시오. 아줌만지 아가씬지 누군지 모르겠지만 백만 원 받아도 시원찮은 판에 삼십 만원에 합의보자고? 어림도 없지라.”
“사실, 이 돈도 내일 임대료 낼 돈이예요. 제발 불쌍한 노인이라 생각하시고 받아주세요.”
그녀가 애원을 하며 불쌍한 모습으로 거짓말을 했다.
“저 할아버지가 하도 구질구질해 보여서 그나마 50만원으로 깎아 준 거예요!”
포장마차 주인여자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들이댔다.
황 노인의 며느리는 밤새도록 잠도 자지 못하고 별수 없이 합의금 오십 만원을 지불한 뒤에야 시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오는 도중에도 황 노인이나 며느리나 입에 본드를 붙였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황 노인의 아들 종호는 온종일 운전을 하고 늦은 시간에 교대하고 피로에 지쳐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아내의 쾅 닫는 문소리에 잠이 깨었다. 한 시간이 지났을까 아내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며 ‘이게 또 뭔 일이래유’ 했다. 아들은 뭔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또 일을 저지른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내가 들어와 방바닥에 펄썩 앉았다.
“여보, 나 이제 더 이상 이 집구석에서 살 수가 없어요.”
그녀는 남편을 쏘아보며 화풀이를 하듯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또 왜 이래? 힘들어 죽겠는데. 아버지 그러는 게 하루 이틀인가?”
“당신과 결혼 한지 12년의 해를 맞았는데 이렇게 산다는 것 너무 지겨워. 정말 지겹단 말이야.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는 건데… 도대체 우린 누구를 위해 사는 거냐구. 당신 아버지는 술주정꾼에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파서 저러시구… 우린 한평생 저 두 노인네 돌보다가 스트레스 받아 아마 내가 먼저 죽고 말거야.”
“우리 아버지 엄마가 당신한테 뭐 그리 잘못하는데 그러냐. 속상할 때마다 술 한 잔 드시고 저러시는데 그것 말곤 잘못하는 거 없잖아.” 그리고 엄마는 병이 들어서 그렇고… 생노병사라고 늙으면 아픈 거야 어쩔 수 없잖아?”
“이젠 정말 지겨워. 우리가 헤어져도 문제될 것 없잖아? 아이도 없으니 얼마나 잘된 일이야. 이쯤에서 우리 그만 헤어져요.”
“당신 미쳤어. 그래 아이 못 낳은 것이 헤어지는데 그렇게 간단한가. 아이를 못 낳아 미안하게 생각할 줄 알았더니… 오히려 헤어지기 편해서 잘 됐다구? 당신이 뭐가 그리 대단해. 아버지 술 드시고 가끔 실수 좀 한다고 이혼까지 해야 돼? 술 드시지 않으면 고물과 박스를 주워 생선 한 마리도 사서 들고 오시는 아버지신데 당신 부모라면 그러겠어?”
황 노인의 아들은 아내를 위로하려다가 이혼이라는 말에 오히려 큰소리치며 싸움이 되고 말았다.
“당신은 정말 나쁜 인간이야. 내가 좀 힘들어서 그러면 좀 받아주면 안 돼? 당신 내 남편 맞아? 달래줄 생각은 않고 오히려 뭐 어쩌고 어째?”
“당신 친정아버지도 술만 퍼마시다가 돌아가셨잖아. 내가 틀린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더 지겹지…”
“미안하다. 아버지 대신 내가 사과할게.”
이토록 아들과 며느리가 시끄럽게 고함을 지르며 싸움하는 중에도 술에 취한 황 노인은 코를 드르릉거리며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황 노인의 부인은 아들과 며느리의 싸움 소리에 벽에 귀를 대고 엿듣느라 잠을 잘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햇살이 창틈으로 새어 들어와 밝았다.
뒷방에 세 들어 사는 가수지망생 순철이 황 노인의 방을 노크했다. 밤을 지새워서 인지 얼굴이 부석부석한 황 노인의 부인이 방문을 밀치며 미소를 띠었다.
“순철이구먼. 아직 출근하지 않았어?”
“다름이 아니고요, 옆방에 살다보니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어요.”
“민망하구먼.”
황 노인의 부인은 맥없이 말했다. 황 노인은 아직도 술에 취한 듯 깊은 잠은 잠 속에 빠져있었다. 현재 봉재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순철이가 가수가 되는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청년이었다.
“이거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토종벌꿀인데요, 어르신 일어나시면 드시도록 하세요. 아마 속이 많이 쓰릴 겁니다.”
“아이고 우리 영감님이 뭐 잘한 일을 했다고 토종꿀까지 드시게 하남. 순철이 먹으라고 어머니가 보내주신 귀한 것을… 고마워서 어쩌지?”
꿀을 받아든 황 노인 부인은 고맙고 미안해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순철이는 빙그레 웃으며 출근이 늦었다며 서둘러 나갔다.
열한 시가 넘어서야 황 노인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의 부인은 아픈 몸을 이끌고 아침에 순철이가 준 꿀물을 타서 황 노인에게 건네며 말했다.
“여보, 어제한 일 기억 나슈?”
황 노인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 몸도 편치 않은데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구먼. 내가 죽일 놈일세.”
황 노인은 주먹으로 자기 가슴과 머리를 마구 쥐어박았다.
“내 몸이 이렇게 시원찮은데 당신마저 술병나면 어떻게 해유. 그리고 당신 때문에 애들이 싸움질 하던데 제발 술 좀 그만 마셔요. 그러다 애들 이혼하겠어유”
황 노인의 손을 잡으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정말 미안구려. 앞으로 당신을 생각해서라도 조심할께.”
황 노인이 아내의 얼굴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다짐을 했다.
“어차피 나는 중병에 걸려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몸이구유. 내가 죽고 나면 당신을 누가 챙겨주겠어요. 부모에게 버림받고 고아나 다름없이 살아온 당신에게 시집와 아들 낳고 정말 행복 했시유. 돈 없는 것 외에는 불편한 적이 없도록 해주셨잖아유. 우리 애들 잘 살 수 있도록 앞으로는 정말 조심하세유.”
“언제나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당신의 그 마음 내 다 알면서도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미안하오.”
황 노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지금 당신과 나 때문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과 며느리 사이가 심각해졌어유. 아이들에게 더 이상 실망 주는 일 없도록 해유.”
황 노인은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세상이 원망스러워도 술로 위로받으려 하지 마세유.”
황 노인 부인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성품도 온화하고 착하여 큰소리 한번 내는 법이 없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노부부는 싸워본 적이 없었다. 황 노인이 어떤 잘못을 해도 늘 남편을 믿어주며 이해해주려 노력했다.
“여보 속이 쓰리실 텐데 어여 꿀물 좀 드시고 주무세유. 순철이가 당신 드리라고 가지고 온 거구만유.”
“그 녀석은 내 아들과 며느리보다 낫구만. 허허허허. 순철이가 꼭 유명한 가수가 되어야 할텐데 말이여.”
황 노인이 가끔 넋을 놓고 밖에 나와 앉아있으면 순철이가 나타나 뽕작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황 노인은 붙임성 있는 순철이 손주녀석처럼 정이 갔다. 두 사람은 알게 모르게 가족처럼 끈끈한 정이 쌓였다.
예전에는 황 노인 부부는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고물을 줍고 다녔다. 그러나 황 노인의 부인의 건강은 점점 쇠퇴해 지면서 황 노인 혼자 일했다. 겨울이 되면서 황 노인의 부인은 방문 출입마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황 노인을 위해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를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부엌을 드나들며 식사를 준비하곤 했다. 고통을 참아가며 온 힘을 다해 반찬을 만드는 일도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식사가 남편과 아들과 며느리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하면 힘든 것도 참을 수 있었다. 황 노인의 부인은 죽음을 예측하는지 오늘따라 정성스럽게 음식을 장만했다.
비가 내리고 어둠이 세상을 까맣게 물들여도 식구들은 귀가하지 않았다. 봉제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순철이는 여느 날과 달리 집안이 컴컴하고 조용하여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줌니! 아줌니! 순철이예요.”
기척이 없었다. 몇 번이고 문을 두드리며 되풀이해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순철이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을 때 컴컴한 방에 황 노인의 부인이 깊은 잠 속에 빠져있는 듯 했지만 갑자기 온몸에 이상한 한기가 느껴졌다.
“아줌니! 주무셔요?”
그래도 황 노인의 부인은 기척을 하지 않았다
순철이는 다급한 마음으로 방에 뛰어 들어가 황 노인의 부인을 흔들어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순철은 119구조대에 연락했다. 5~6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황 노인 부인을 B대학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뒤늦게 도착한 아들과 며느리가 안치실로 들어와 어머니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을 했다. 며느리는 이미 올 것이 왔다는 생각뿐 오열하는 남편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침묵하고 서 있었다.
“엄마, 제가 죽일 놈이에요, 엄마 눈 좀 떠 보세요.”
먹고 살기 바빠 엄마의 임종도 못 지켜드린 불효자라고 바닥을 치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렇게 인자하고 다정하던 어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 술에 만취한 황 노인이 나타났다. 며느린 오늘도 또 술이냐는 표정으로 황 노인을 외면했다. 황 노인의 일그러진 표정은 마치 먹구름과 같아 조금만 건드려도 와르르 굵은 빗방울을 쏟으며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 순간들이 지나가고 있을 때 황 노인이 입술을 달삭이며 열었다.
“여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지? 임자 나왔어, 빨리 일어나 봐. 오늘은 고물장사가 너무 잘 돼서 당신 좋아하는 곶감 사가지고 왔어.”
황 노인은 비닐봉지에 담긴 곶감을 꺼내는데 땅바닥에 곶감 두 개가 흘러내렸다. 황 노인은 꺼이꺼이 슬픈 소리를 내며 울다가 혼절해 버렸다. 응급실로 옮겨진 황 노인은 순간적인 쇼크라고 의사가 말했다.
병원 영안실은 문상객들이 없어 썰렁했다.
삼일 째 되던 날 황 노인의 부인은 벽제 화장터로 옮겨졌다. 절차에 의해 시신은 용광로로 들어갔다. 눈물범벅이 된 가족들의 울음소리는 새끼를 잃은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들렸다. 그리고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검붉은 연기는 이내 사라져버렸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온 황 노인은 며느리가 차려주는 밥상에 입도 대지 않았고 깡술로 여러 날들을 침묵하며 보내고 있었다. 황 노인은 마누라가 죽기 전에 한 말이 기억났다. 그러니까 황 노인이 포장마차 주인과 싸우고 며늘아이가 50만원을 갚고 들어온 다음 날 아들 며느리가 시아버지 때문에 못 살겠다고 이혼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며느리가 아무리 좋은 음식을 차려놓아도 황 노인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토록 즐겨 들던 돼지국밥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황 노인은 부인 생각에 식음을 전폐하고 술만 퍼마시며 고물을 주우러 나가지도 않았다. 부인주려고 사왔던 곶감만 먹으며 방에 틀어박혀 꼼짝을 하지 않았다.
황 노인의 근황을 며칠 동안 지켜보던 순철이는 이러다가 황 노인이 돌아가실 것만 같아 막걸리와 순대를 사들고 와 황 노인의 방문을 두드렸다.
“어르신 저 순철이예요, 어르신이 좋아 하시는 이미자 노래 불러 드릴께요.”
처음에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황 노인이 방문을 열었다.
“그려, 우리 마누라가 좋아하는 ‘동백 아가씨’ 한번 불러 봐.”
“네~에. 순철가수가 멋들어지게 불러보겠습니다.”
순철이는 손에 들고 있던 막걸리와 순대를 대청마루에 올려놓고 마당 한가운데로 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그렇지. 그려그려 허허허 정말 잘해,”
순철이의 구성진 목소리에 황 노인은 순대를 안주삼아 순철이 따라준 막걸리를 들이키며 순철이와 합창을 했다. 그런데 노래를 따라 부르던 황 노인이 갑자기 순철이의 손을 잡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순철아, 정말 고맙다 엉엉, 니가 내 아들놈과 며느리보다 내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구나 엉엉. 너는 꼭 유명한 가수가 될 꺼야. 열심히 노력해 봐.”
“어르신 노래를 부르시다 말고 왜 울고 그러세요? 웃어 봐요. 까까꿍. 히히히.”
순철이가 자신의 입술을 비틀며 웃기려하자 황 노인은 울음 대신 웃고 말았다.
“어르신, 울다가 웃으시면 똥구멍에 뭐난다구 했거든요오. 얼레리 껄레리. 하하하하하하하.”
비록 세들어 사는 순철이지만 황 노인에겐 친구이자 재롱 피우는 손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웃음도 한 순간일 뿐 황 노인의 뻥 뚫린 가슴을 어느 누구도 채워줄 수 없었다.
밤이면 밤마다 황 노인의 베개가 눈물에 젖어 마를 날이 없었다. 원대로 먹고 싶어 했던 곶감을 사다놓고 꺼이꺼이 우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 방에 들어왔다.
“아버님, 식사 좀 하세요. 떠나신 분 생각한다고 돌아오시는 것도 아닌데… 아버님 몸만 상하세요.”
황 노인의 며느리는 좀 더 어머니께 잘 해 드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반성하는 마음으로 황 노인을 극진히 보살피려고 했다. 저녁에 다시 황 노인의 방에 죽을 쑤어가지고 들어가 식사하시길 권했지만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지못해 황 노인이 일어나 앉았다. 볼이 들어가고 눈이 퀭한 것이 병색이 돌았다.
“얘들아, 너희들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다. 내가 무능하여 너희들 고생시키는 구나.”
“아버님, 무슨 말씀을 그리하세요.”
황 노인의 며느리가 송구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제대로 가르쳐 놓지 못해 돈벌이도 시원찮은 저 놈에게 시집와 고생을 시키니 참으로 너에겐 염치가 없구나, 미안하다.”
“아버님, 좀 더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 아픈 어머니를 놔두고 알바를 나간 제 잘못이 더 큽니다. 이렇게 금방 가실 줄은… 흑흑”
“니 엄니 내가 너무 고생시킨 내가 죄인이다. 내가 죄인이나 다름없어.”
뒤따라 들어온 아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눈시울만 적시고 있었다.
세월이 약이라고 하더니 황 노인은 정신줄을 다시 붙잡고 예전과 다름없이 리어카를 끌고 고물을 줍기 시작했다. 그전처럼 술도 먹지 않고 집으로 일찍 들어왔다.
그렇게 평온한 나날이 지속되던 어느 날 갑자기 동네가 시끌벅적해졌다.
가수의 꿈을 키워온 순철이가 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여 본격적으로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TV에 나온 순철의 모습을 동네 사람들이 모두가 기쁨을 감추지 못해 함성을 질렀다.
이후 순철은 좋은 매니저를 만나 음반까지 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순철이 저녁에 부모님께 먼저 인사드리러 간다며 황 노인을 찾아왔다.
“어르신, 자주 찾아뵈러 올께요, 항상 건강해야 해요. 까꿍.”
“그려, 그려, ‘동백 아가씨’도, 꼭 불러 줘야 혀. 장하다 순철아!”
순철이를 떠나보낸 황 노인의 외로움은 예전보다 더욱 깊어져갔다. 화창한 어느 봄날 황 노인은 일을 나가지 않고 있었다. 며느리가 시아바지가 기척이 없자 방문을 두드렸다.
“아버님, 오늘 경로당 친구 분들과 맛있는 것 사 드세요. 어머, 어디 가세요? 우리 아버님 깨끗하게 차려 입으셨네요.”
며느리는 황 노인에게 용돈 3만원을 주머니에 넣어주며 상냥하게 말했다. 황 노인은 아무 말 없이 받아 넣었다.
“그려. 고마워. 잘 놀다 올께.”
그날 저녁 황 노인은 들어오지 않았다. 이후로 황 노인은 석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과 며느리는 가출신고를 했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다. 이년, 삼년이 지나도록 황 노인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난 지도 모른다.
10년이 된 지금, 아들과 며느리는 황 노인이 집을 나간 바로 그날을 황 노인의 제삿날로 정하고 올부터 차례를 지내기로 했다.
스토리 텔러로서의 강점을 지님
《신문예》64호 신인소설 응모작, 양경분의 소설 「행방」을 보면 제법 기승전결의 구성을 염두에 두고 써내려간 작품으로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알콜 중독자 황 노인의 말썽부터 스토리가 전개되는데, 택시운전사인 아들도, 며느리도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가수지망생 곁방살이 순철이 등등 중에서 누군가가 해결시 역할을 할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양경분은 기막힌 반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말썽꾼 황노인 부인의 자살이다. 이것은 예상 못했던 반전이어서 충격이 크다. 특히 기독교인은 자살이 절대 금기다. 때문에 노파의 자살은 소설의 결구를 완전히 뒤집어놓고 있다. 성공적인 반전이다.
결국 황 노인의 가출은 이야기 결구를 위해 억지스런 시도를 했다는 약점을 남겼다. 차라리 노부인의 자살에 결구를 찍는 게 나을 뻔하지 않았을까?
소설은 크레용으로 각기 다른 색깔로 구분되며 인간상이 그려진다. 불가능한 운명에 도전하는 절망적인 인간을 그리거나 강렬한 의욕으로 삶을 포기하지 못하게 한다. 인간자체가 불완전하므로 대중의 의표를 찌르는 예상을 뒤엎을 수도 있어 소설인 것이다.
양경분의 소설 「행방」은 아직도 더 수련해야 될 문장인데도 불구하고 짜임새 있는 구성을 시도했다는 장점이 있다. 이는 소설에 있어서의 필수다. 이 소설가의 앞날을 지켜볼 뿐이다. 성공을 빌어 마지않는다.
시니리오 공부가 소설에 도움 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소중한 사랑의 의미는 무엇인가. 남들처럼 못 입고 못 먹고 못 배웠어도 보듬어 주고 감싸주는 착한 소설속의 황 노인의 안타까운 노인의 행로를 저 나름대로 서술해 보았으나 가슴에만 묻고 있다가 좌절하고 힘들 때 목을 적셔 줄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방송작가협회에서 시나리오를 배운 것이 계기가 되어 소설을 써봤는데 당선소식을 듣고 한편 부끄러웠습니다. 오동춘 박사님을 만나 시를 쓰기 시작했고 모든 것을 마음에만 간직하고 있을 때 저에게 소설을 쓸 수 있도록 희망과 용기를 주신 하옥이 주간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부족하지만 이 세상 속에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과 슬픔을 기록하며 하얀 종이 위에 감동되는 이야기를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또한 부족한 저에게 심사평을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충남 아산 출생.
시인·방송작가. 총신대학신학과 졸업.
한국방송작가협회 수료. 연세대·경기대 사회교육원 문창과 수학.
짚신문학회·한국신문예문학회 부회장. 해물결 동인.
탐미·황진이·박화목문학상·짚신문학상 수상.
시집『새벽으로 가는 길』『침묵의 강』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