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드의 비밀 외 4편
황순각
우리 몸 어딘가에는 바코드 하나씩 숨어있지
표면은 흑과 백이 무심히 교차하는 듯하나
속살에는 원색 판타지가 부글거리고 있어
매일 다른 색으로 갈아입는 꿈을 꾸면서
바코드가 입체적으로 소리를 얻으면 피아노가 등장하는데
얼마나 싱싱한 음악이 숨죽이며 값나가는 출정을
흥정하는지 몰라
흰색에는 평화를 장전해놓고
검정에는 적의를 비축해 놓았다지
가끔
손과 발에 힘이 들어 간 바코드가 빛을 두르며 일어서거나
혹은 춤추듯 뒤로 돌 때 뿜어져 내리는 멜로디 분수는
역광 속 무지개 표정을 아이스크림 기다리는 아가 손등이나
고단한 사람들 누추하고 구겨진 어깨에 선뜻 걸어 놓고 간다는데
그런 날은
무지갯빛 파도가 철썩거려 기분 좋은 공명이 우려내는 화음이
신호등처럼 깜박이며
수많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우리와 우리 사이에 물결치다
너와 나 중간 어디쯤
오묘한 바코드 별자리 하나 만들어 놓는대
옥수수수염의 시간
황순각
옥수수 껍질을 벗길 때 빼곡한 알갱이에 대한 기대
차곡차곡 쌓아 올리면 그 끝에서 나풀거리는
옥수수수염의 시간과 마주하게 되지
사실 그건 춤이야
일평생 마주하게 되는 부부의 시간도
옥수수수염의 시간과 같아
어디론가 제각기 나풀거리고 싶어 하지
이것들 어떤 퍼즐조각에 끼워 넣어야
화사한 미래가 작동하는 춤이 되는 건지
돌아보니 함께라 여겼던 수많았던 춤들이
반대 방향으로 얽혀 있더라고
일찍이 자유는 제 길을 알아본 거지
그렇게 수북해진 나풀거림들 들추어보니
초보신부의 미숙과 불통을 먹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옥수수 알갱이가
두툼한 지청구를 턱수염으로 매달고
희끗한 귀밑머리를 내비치는 거야
난 그걸 발화 없이도 서로를 들을 수 있는
안테나로만 생각했어
옥수수수염의 시간이 이리 쉽게 물결에 출렁이듯
제 리듬을 얻어 사라져 버리는 춤이 될 줄 모르고
‘보통’을 기록하면
황순각
보통 사람들 보통 이상으로 일 하는데
보통 이하의 밥상을 받더라구
단맛 빠진 싸구려 열매로만 배 불리면
날 것의 야생을 씹는 맛이 나
정성들여 다듬은 치열이 삐끗하는 기분일거야
더 서러운 것은 자유와 맞바꾼 새장의 유혹을
힐끔거리게 된다는 거
그러다 가을 밥상에서조차
꿈을 꿀 때 만져지던 밥의 말랑말랑함이
너무 쉽게 딱딱해져 버릴까봐 두려워지기도
햇살 같은 친절 한 번 붙잡아 본 적 없이도
내내 따라 다니던 설레임이
어느 바람 부는 밤
도시 모퉁이에서 저 혼자 사각거리다
작별 인사도 없이 흩어져 버리면
왠지 쪼그려 앉은 마음이
형광등 아래서 자꾸만 깜박거린대
보통이 똑바로 펴지지 못한 채
커다란 쥐에 겁먹은 새끼 고양이처럼슬슬 뒷걸음질 치다 툭,
이불 속으로 걷어차이고 마는 것 같아서
지하철 의식儀式
황순각
지하에는 지상과 다른 의식이 존재하지
지하철 안 사람들은
오래 전 말에 물리던 재갈을 입에 문 채 고개를 숙이고 바빠
가벼운 목례로 시작하는 의식을
절대 서로 눈 마주치지 않는 규례로 진행시키기 위해
한 곳을 향해 비행하는 새떼들처럼
갈 길이 멀어 서로의 안부를 챙길 여유는
태고 적 관습일 뿐 인거지
첨단 디지털 의식에는 혀를 넘겨받은 손가락이
스마트 폰 위에서 똑똑한 춤을 추는 거야
한 시절이 우리 손끝에서 기차의 속도로 늙어가다
슬며시 아프니까 청춘이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우기네
그럼 새떼들에게 뜯겨 찌그러진 희망이 균형을 잃고
손금위에서 공회전을 하게 되지
간간히 귀마개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반복되는 소음은 놓치지 말기 바랄께
춤 의식에 무아지경으로 빠져버린 무의식을
환승시켜 줘야 하니까
여러 번 환승하다보면
태고 적부터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던
신 새벽에 도착해 있을지 누가 알아
녹색 숨
황순각
내가 매일 한 번씩 숲을 시청하는 건
밤새 땅 끝에서부터 말아 올린 수액으로
정신의 낟알을 불리고
나무가 온 몸으로 술렁인 밀어를
햇빛이 꼬리치며 빗질해 놓은 산정에다
차리기 위함이다
내가 매일 한 번씩 숲을 머금는 건
의욕 야위어가는 저녁에
수수꽃다리에서 함박꽃나무까지 걸어 온 바람이
채집한 향으로 붓을 만들어
하루의 문양을 기록하기 위함이다
더러는 억지스러운 변명이나
어긋나 버린 마음 길 때문에
감정이 울긋불긋해지기도 하지만
숲이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녹색파문을 따
지그시 눌러 붙이면
일정한 간격으로 위로가 불어나더라고
당선소감
황순각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등단을 위해 여러 군데 지원하였으나 번번이 떨어져
좌절하는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겸손을 배우라는 하늘의 뜻인 것 같습니다.
시의 길이 열리지 않아 시조문학에 등단하고 시조집도 냈으나 시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에 마지막으로 시를 지원해보고 안 되면 시조에만 전념하리라 다짐했는데
이렇게 당선을 시켜주시고
저의 개성과 사유를 인정해주시므로 새로운 시의 세계를 개진할 수 있도록 기회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랫동안 학문의 길을 걸어오면서 비교적 활자와 글에 친숙한 편이었으나
시의 영역은 ‘문학의 꽃’이라 배운 대로 시의 예술성 때문에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시가 어두운 터널 같은 시간을 통과할 때 오아시스가 되어 주었고 누구보다 나 자신을 치유하는 존재양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교육학에서도 인문학적인 접근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어떻게 가르칠까 고민을 많이 하는데 제가 직접 시를 써보니
시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잘 들여다보고 정리하여 세상과 아름답게 관계 맺기 위한 시선이고, 더 섬세하고 풍성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장치라는
생각이 듭니다.
훌륭한 애지의 시인들과 지면을 공유할 수 있어 감격스럽고 영광이지만 한편으로는
부족한 실력 때문에 어렵고 떨리는 마음 누를 길 없습니다.
앞으로 시의 본령에 충실하면서도 깊은 사유가 물결쳐 읽고 또 읽고 싶은 시, 사람과 소통하며 어루만지는, 땅에 발 디딘 시를 쓰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시를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하고 일으켜 세워주신 문우님들께도 감사를 전하며
종이가 외면 받는 척박한 문학 환경에서 ‘애지’를 끌어와 주신 관계자 여러분께 경의를 가득 담은 절을 올려드립니다.
약력
황순각, 교육학 박사, 서울교대 강의교수 역임, 앙코르대학교(캄보디아소재) 교수 선교사, 2021 예천 내성천 문예공모전 시 당선, 2023 {시조문학} 신인상 시조등단, 2023 시조집 {초록이 만발하던 날에} (영문번역수록)
이메일; lalisoon@daum.net
첫댓글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