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을 공부해 과거시험을 치르고, 시험에 합격하면 공무원이 된다.
시험에 떨어지면 자기 살던 고장 서원에서 또 공부를 한다.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어찌하여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표를 내고 또 서원으로 간다.
시험 응시를 위해서는 책을 읽어야 하는데, 값비싼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대부들뿐이다.
만인에게 열려 있던 과거시험은, 법규상에만 열려 있을 뿐 실제로는 사대부만
볼 수 있었다.
선비들은 독서 인생을 성리학에 '올인'할 수밖에 없었다.
필독서에는 세무, 국방, 사법, 보건 따위 각론은 적혀 있지 않았다.
선비들은 요순시대를 이상사회로 묘사한 중국 책을 읽으며 입신양명을 꿈꿨다.
향교와 서원에는 대부를 꿈꾸는 선비들이 우글거렸고, 조정에는 꿈을 이룬 선비들이
우글거렸다.
그렇게 선비가 많았으니 조선에는 당연히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濟家治國平天下)
의 세상이 강림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1543년 백운동서원이 생긴 이후 조선 정치에서는 덕치가 사라졌다.
대신 정치는 피칠갑으로 점철됐다.
공론이요 명분론이라는 비난은 받을 수 있어도, 성리학 자체는 배타적 학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성리학은 성리학을 공부하거나 공부할 여유가 있는
선비, 사대부 계급에게 독점된 학문으로 변했다.
사대부는 독점한 학문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체의
다른 학문을 배척했다. 바로 지식의 독점을 통한 독재다.
무(武)라 천시하던 칼과 총 대신, 지식인들은 지식에 피를 묻혀 폭력적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해갔다.
자기와 다른 지식을 가진 예비 권력자들을 죽여 버린 것이다.
이리하여 등장한 용어가 사문난적(斯文亂賊)이었다.
'아름다운 글을 어지럽힌 도적'이라는 뜻을 가진 사문난적은 원래 유교를 반대하는
자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조선 지식인, 곧 지식권력자들은 이 말을 경전을 주자와 다르게 해석하는 자'로 바꿔
정적을 처단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 박종인 저, ‘대한민국 징비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