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제 1232편
*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祖師))
오도송(悟道頌) 및
선시(禪詩)
오도송(悟道頌)이란 무엇인가 ?
불교(佛敎)를
공부(功夫)하는
수행자(修行者)가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가운데(中) 하나를
오도송(悟道頌)
이라고 한다.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頌)은
게송(偈頌)의 하나로써
구체적으로
비교해서 설명하면
고승(高僧)이
자신만의 깨달음(覺)을
노래(歌, 句)한 것이
바로
오도송(悟道頌)이며
고승(高僧)이
자신의 임종(臨終) 전에
남겨놓고 가는 노래(歌, 句)를
열반송(涅槃頌)이라고
한다.
게송(偈頌)이란
불교의 가르침(敎義)을
함축(含縮 집약)하여
표현(表現)하는
운문체(韻文體)의
짧은 시구(詩句 문자)를
말하는데
곧 선시(禪詩) 내지
또는 선어(禪語 문장)를
이르는 말이다.
본래(本來)
게(偈)와 송(頌)은
같은 의미로
《게(偈)》
라는 글자(字)는
산스크리트어(梵語)
《가타(gatha)》의
음을 빌려와(音借) 따서
만든 말이고
《송(頌)》
이라는 글자(字)는
《가타(gatha)》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깨달음(正等覺)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게송(偈頌)
즉,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頌)은
오랫동안
수련과정(修練過程)을
통해 함축된 의미로
세속(사바세계)의
사람(大衆)들에게
무엇인가를 전(傳)하고
말(說法 이야기)하고저
하는 것이며
후세(후학)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적(歷史的)
문헌 기록상(文獻記錄上)
오도송(悟道頌)을
가장 먼저 남긴 이(僧侶)는
조동종을 일으킨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禪師)
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구분이 부질없는 일임에야
사람들은
태어남을 기뻐하고
헤어짐은 슬퍼한다.
오랜 세월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선사(禪師) 스님들의
깨달음의 길(佛道行)이
매우 힘들고 어려우며
지난(至難)하듯이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남겨진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頌)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깨달음의 노래는
다시 한번
자신(수행자)의 삶(人生)을
돌이켜보게 하고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리게 한다.
여기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頌)을
올려놓으니
그 깊은 뜻이야
어찌 우리가 모두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마는
행간(行間)의
곳곳(處處)에 숨겨져 있는
깊고 깊은 심오(深奧)한 뜻을
함께 발견(發見)하고
공부(功夫)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반야 보리 광명 智慧)를
찾아보시기 바램해 본다.
본론(本論)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 祖師)
선시(禪詩)와
임종게(臨終偈) 및
오도송(悟道頌) 설해(說解)
"
산중문답(山中問答,
왜 산에 사느냐고)
이태백(李太白, 이백) 선사
문여하사서벽산
(問余何事栖碧山)
소이부답심자한
(笑而不答心自閑)
도화류수묘연거
(桃花流水杳然去)
별유천지비인간
(別有天地非人間)
내게 왜 산에 깃들어서
사느냐고 물어보신다면
빙그레 웃을 뿐 대답 못해도
마음 더욱 넉넉하고 한가하네
복사꽃 물에 흘러 아득히
또한 그러하게 흘러가나니
하늘과 땅 이별하여 인간세상
벗어난 또 다른 세계라네.
"
위(上記)의
시(詩, 禪詩, 게송)는
너무나 잘 알려진
그 유명한 당(唐) 나라 시대의
주선(酒仙)
이백(李白, 701~762)
자(字)는 태백(太白)
호(號)는 청련거사(靑蓮居士)
시성(詩聖)이라고 불리는
두보(杜甫, 712~770)와 함께
중국(中國)
역사상(歷史上)
가장 위대한 시인(詩人)으로
손 꼽히는
이태백(李太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
이라는 시(禪詩)이다.
산거생활(山居生活,
산 속에서 살아감)하며
탈속(脫俗,
속세를 벗어나서 유유자적
신선처럼 살아감)한 맛(묘미)이
진하게 느껴지고 있다.
어떤 사람(凡夫)이
의아(依訝)해서 묻기를
"
왜 산(山中)에 사느냐 ?
"
라고
묻는 말에
그저 빙그레 웃을 뿐...
일체(一切)의
세속적 모든 것(諸法)에서
뛰어넘고
초월(超越)된 마음이
저절로 한가롭기만 하다는
두 번째 구(句節)는
정말 뉘앙스가 미묘(未妙)하여
깊은 울림에 여운(餘韻)을
남기고 있다.
사실적으로 접근하면
세상사(世上萬事)라는 것이
어쩌면 특별(特別)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죽느니 사느니(生死論) 하는
범부(凡夫)들의 문제(問題)가
속세(俗世,
속된 세상)를 떠나서
초월(超越)을 하고
뛰어넘어 버릴 때는
결국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신선(神仙)들이 사는
이상향(理想鄕, Utopia)
도원경(桃源境)
별천지(別天地)
등(etc)으로
풀이해서
해석(解釋)되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선경(仙境, 신선의 경지)을
읊은 시(詩, 禪詩)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러한
이상세계(理想世界, Utopia)를
간절히 그리워하여 꿈을 꾸고
막연히
동경(憧憬)하는
인간(人間 중생)의
순수(純粹)한 정서(情敍)를
소담(素澹,
소박하고 담백)하게 나타내었다
라고 할 수 있다.
세상(世上事)의
근심 걱정(憂,번뇌 망상)을
이고, 지고, 끌어안고
살아 갈 때는
결코
참되고 참 된 선(禪,, Zen)을
맛(覺惺) 볼 수 없다.
잠시라도
걱정을 내려놓고(放下着)
근심을 풀어 헤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의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萬法歸一)
본래 마음(本來面目心)이란
온갖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일어나기 이전의
마음(自性, 본래심)이다.
예(古來)로 부터
산(뫼山, 청산녹수)은
시끄러운 세상(亂世)을
피(避, 회피, 도피, 피난)하는
인간(人間,
중생, 수행자, 처사, 거사)의
휴양처(休養處, 안식처)로써
인식(認識)되기도 했다.
또한
깊은 사색(思索, 일념집중)과
명상(瞑想, 참선)을 할 수 있는
수행(修行精進)을 실천하기
좋은 곳(열반적정처)이었다.
특히
불교(佛敎)에서
입산출가(入山出家)라던가
입산수도(入山修道)라고 하는
말(言說辭辯)을 써 오면서
도(佛道, 일불승대도)를
닦으러(명상, 참선, 수행정진)
산(뫼 山中)에 들어간다.
하였다.
깊고 깊은
산중(山中)에 산다는 것은
이렇듯
세상(世上萬事)의
온갖 시끄러움(難事至難事)을
모두 벗어났다는 뜻과 함께
수도(修道,
명상, 참선, 수행정진을 통해
몸과 마음을 수양하고 기르며
도(道, 佛道)를 추구하고
부지런히 닦음))에
종사(從事)한다는
뜻과 의미(意味)를 내포하며
가지고 있다.
또한
자연(大自然)을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곳도
산(뫼 山)이다.
숲(林)이 있고
골짜기(谷)가 있고
봉우리(峰, 峴, 峙)가 있고
비탈이 있고, 기슭이 있다.
그렇게 산(뫼 山)은
인간(人間 중생)과
자연(大自然)이 서로 만나서
함께 하나(一體)가 되어서
동화(同和)되는 곳으로
참선(參禪)
명상(瞑想)이나
선(禪) 수행(修行精進)을
하기에
아주 좋은 곳(處所)이다.
그래서
불교(佛敎)에서는
일찍이
입산출가(入山出家)라던가
입산수도(入山修道)라고 하는
말(言說辭辯)을 써 오면서
도(佛道,일불승대도)를
닦으러(명상, 참선, 수행정진)
산(뫼 山中)에 들어간다.
"
라고
하였던 것이다.
"
ㅡㅡㅡㅡㅡㅡㅡㅡ
※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見解)와
해석(解釋)으로
오역(誤譯)
오판(誤判)한 부분도
분명하게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후배(先後輩)
제현(諸賢)님들 께서는
언제든지
글 내용 가운데
잘못 된 부분은 옳고 바르게
지적(指摘)해 주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램해 본다.
- 마음그릇 心椀 드림 -
ㅡㅡㅡㅡㅡㅡㅡㅡ
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