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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영민 목사
서 론
이사야서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대단히 많은데 57장에서는 ‘왜 의인들이 일찍 죽느냐?’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순교를 당해서 죽던지 아니면 다른 원인으로 죽던지 의롭게 산 사람들이 왜 악인들 보다 먼저 죽느냐?’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57장 1절에서는 ‘의인이 죽을찌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찌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가 예언하던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이 유다사회에서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우상숭배하던 악인들이 증가했습니다. 믿음을 지키고 의롭게 살려고 하는 의인들은 일찍 순교를 당했는데 특별히, 므낫세 왕은 수많은 의인들을 죽였습니다. 아니면 또 다른 원인으로 죽거나 일찍 죽더라도 누구하나 슬퍼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아! 하나님은 악인들은 빨리 죽이시고 의인들은 오래 살게 하시면 사람들이 보고 악인으로 살다가는 빨리 죽고 의인이 되면 오래 사는 구나. 그러니 의롭게 살자 그렇게 하시는게 좋으련만, 하나님은 어찌하여 의인을 빨리 걷어가시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57장 1절 후반에서 말씀하시기를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라고 하시고 2절에서는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고 그랬습니다. 유다 백성들의 죄악으로 바벨론이 침공을 받을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비참한 포로가 되어 온갖 수모를 당할 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화액’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화액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이 의인들을 천국으로 데려 가셨다는 말입니다. 화액으로 인해 수모를 당하는 거 보다는 믿음으로 살다가 하나님을 위해 순교를 당하거나 일찍 죽는 것이 도리어 났고 이것이 하나님의 평안에 들어가며 영원한 안식으로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의인을 부르셔도 때가 되어 부르시고 도리어 유익케 하기 위해서 일찍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보는 것에 따라서 관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목사님이 막걸리를 마셨다 그러면 초신자는 그걸 보고 “목사님이 어떻게 술을 마시느냐? 나는 이런 교회 안나온다”고 반응을 합니다. 그러나 청년들은 “우리 목사님은 앞서가는 분이시다. 대화가 통할 수 있을 거 같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안수집사 초년병은 “저런 목사를 어떻게 목회자로 믿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느냐? 쫓아내자”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원로장로님 쯤 되면 “그건 막걸리가 아니라 우유고 나도 그런거 다 먹었어”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사건도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성숙도와 관점에 따라서 많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의인이 일찍 죽으면 ‘믿고 살아도 소용없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화액이 올 것이기 때문에 화액전에 화액으로 수모당하고 오래 사는 것보다 하나님을 위해서 당하고 일찍 평안에 드는 것이 백 번 낫지 않느냐 그래서 데려 간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언어로 이렇게 한 구절에 위대한 진리를 표현할 수 있을까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늘 본문 말씀인 이사야 57장 15절은 위대한 구절입니다. 또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선지자의 문서계시가 아니고서는 인간의 지식으로는 상상할 수 도 없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진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 가지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또 의인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하나님과 의인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먼저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살펴보겠습니다.
15절 전반에서 말씀하시기를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매우 많지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두드러진 위대한 세 가지 속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지존무상하신 분이십니다.
예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지존파가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지존하다는 것은 ‘지극히 존귀하다’라는 말이고, ‘더 높은 존재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극히 존귀하신 분이시며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 가장 높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체험한 하나님은 지존 무상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이사야 6장 1절에는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분이고 하나님보다 더 높은 보좌에 앉은 존재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사야서 66장 1절에도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늘이 넓어도 하나님이 앉아 계신 의자에 불과하고 땅이 넓어도 하나님이 한 발 올려놓으시는 발등상에 불과하시다는 말입니다. 우상숭배하는 자가 왜 어리석은 줄 아십니까? 가장 높으신 분이 여호와이신데 낮은 존재, 비천한 존재, 악한 존재,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런 영적인 존재들을 높은 신인줄 알고 믿고 섬기고 있으니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인간 자신이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상숭배자들은 낮은 존재, 비천한 존재, 또는 자기 스스로가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우상들을 다 집합시켜 놓습니다. 그리고는 우상숭배하는 자들에게 “너희들이 섬기는 우상 하나한테만 기도하지 말고 총 집합시켰으니까 우상들이 응답해 주는지 그 앞에서 부르짖고 기도해 보라 우상들이 응답해 주는가?
그런데 내가 한번 훅 불면 다 날아간다”는 것이 57장 13절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으로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은 다 바람에 떠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의 내용입니다. “네가 모은 우상(your collection of idols)’을 다 모아서 집합시켜 네가 부르짖어 보아라 그리고 우상들이 집합된 힘으로 너의 기도에 응답하는가 보아라. 그런데 내가 한번 콧바람을 불어볼 것인데 그러면 바람에 떠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다” 우상들은 하나님이 콧김 한번만 불어도 다 날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지존무상하신 분이시고 하나님 이외에 더 높은 신이 없습니다.
대전에 제가 알고 있는 목사님 가운데에는 이런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할아버지 때부터 도가에 정통한 집안입니다. 도교 책을 읽고 한자로 공부해서 도통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충남대학교를 다니면서 계룡산 신을 부릅니다. 그러면 계룡산 신이 찾아와 신하고 대화를 하는 신접한 경지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가만히 보니까 계룡산 신보다 더 센 신은 없는가 했더니 한라산 신이 더 세더랍니다. 그래서 한라산 신을 불러서 접신해 보니까 한라산 신보다 더 센 신이 있더랍니다. 백두산 신입니다. 그래서 백두산 신과 접신해 보니 백두산 신보다 더 센 히말라야 신이 있더랍니다. 그래서 신 위에 더 높은 신이 있으니 히말라야 신보다 더 높은 신은 누군가하고 어느 날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듣는 중에 ‘여호와 하나님이 지존무상하시다’는 말씀을 들은 겁니다.
그의 맘속에 ‘여호와 하나님은 그보다 더 높은 분이 없는 제일 높은 분이로구나 그런데 인간은 이 여호와 하나님과 분리되어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니 예수 믿고 죄 사함 받아 예수님만이 중보자 되시어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지존무상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는 거로구나’는 생각이 들었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전에 접했던 귀신, 악신들이 총 공격을 감행하여 가지고 심하게 괴롭혀서 견딜 수가 없어 되어 그 귀신들을 물리치려고 40일 금식기도를 세 번이나 했습니다. 그리고 침례신학대학원에 입학해서 공부하고 지금 목사가 됐습니다. 그가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더 높은 신은 없구나. 여호와 하나님만이 지존무상 하신 분이시구나’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 낮은 존재, 악한 존재를 섬기지 마시고 지존무상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이 유다 백성들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사람들입니다. 바벨론 왕이 아무리 세계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높은 존재가 되도 진실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지존무상하신 만왕의 왕이요 인간과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은 영원히 거하시는 분(he who lives forever)입니다.
영원(eternity)이라는 관점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차원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만물과 인간은 모두 시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도 시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일이 있습니다. 또 여러분도 모두 시작이 있습니다. 자동차도 시작이 있고, 집도 시작이 있고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다 시작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거하시는 영원무궁한 존재입니다. 만약 하나님 임기가 5년 단임제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섬겨야 될지 아니면 그 다음에 오는 새로운 하나님을 섬겨야 될지 고민을 해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임기가 없고 영원무궁하시며 그 권세가 변함이 없으신 존재이신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거룩하다 이름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불의함과 불순함, 그리고 불완전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는 백퍼센트 순결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깨끗하지 못하고 불완전 한 것은 거룩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6장 2절에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스랍 천사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며 찬송합니다. 하나님은 지존무상하시고 영원하시며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사도바울도 이 하나님을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서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라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위대하신 분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이거나 추상적인 용어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다가 어려움, 외로움, 고통을 격을 때, 문제로 인하여 고민하고 있을 때 우리의 하나님은 나의 문제보다 더 크시고 어떤 원수보다도 더 위대하시며 어떤 고통보다도 더 크신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우리에게 실제적인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반석, 그리고 환란 날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십니다.
이처럼 위대하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우리가운데 오셨다는 겁니다는 것이 성탄절의 의미입니다.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들을 수 있는 하나님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일 모래 12월 25일 11시에 성탄절 축하 예배를 드립니다. 여러분 모두 가족들과 함께 오시기를 바랍니다. 한국 사람이 아닌 미국인 설교자가 설교 중에 “12월 25일이 예수님 생일이란 증거가 어디 있느냐? 성경에 그런 증거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몰라서 믿고 있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12월 25일에 예수님이 탄생했다고 믿는 사람은 전 세계에 한명도 없습니다. 또 그 분이 “성탄절은 초대교회에서 지내지 않았던 절기다. 4세기에 콘스탄틴 황제가 이방종교에 풍습을 두고 있는 것을 기독교에 들여온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사실이지만 사람이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보고 부정적으로만 설교하면 안 됩니다. 제가 그 설교를 한 시간 듣고 나니까 워낙 부정적인 설교여서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분명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신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시고 탄생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탄생 날짜를 모르지만 날짜를 하루 정해서 탄생을 생각하고 기념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또한 콘스탄틴 황제가 이방인들이 축제를 많이 만들어 놓고 지키니까 그들을 전도해야 되겠는데 전도하는 방식은 그걸 기독교식으로 바꾸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진리에 기초해서 그것을 성탄절기로 바꾼 것을 나쁘게만 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에 대해서 이것은 기독교 적이 아니므로 안 지킨다는 부정적인 마음을 갖지 마시고 내가 일 년에 한번 나를 위해서 오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이것을 기념하고 축하하겠다는 좋은 마음으로 예배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 계절에 나만 생각하지 않고 나보다 고통 받고 추운 이웃들도 생각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뭐든지 부정적이지만 긍정적인 사람은 뭐든지 긍정적으로 봅니다.
한 명은 긍정적이고 한 명은 부정적인 두 어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험을 했습니다.
선생님이 부정적인 아이에게는 아주 좋은 선물을 주었습니다.
컴퓨터, 축구공 그리고 초콜릿을 큰 상자에다 포장해서 줬습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아이한테는 소똥을 잔뜩 담아 가지고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정적인 아이는 그 선물을 받더니 “이 컴퓨터는 금방 고장 나게 생긴 컴퓨터인데 왜 이런 걸 나에게 주느냐? 이 공은 조금 있으면 바람이 빠질 공인데 바람 넣는 기계까지 같이 줘야지 공만 주면 어떡하느냐? 그리고 이 초콜릿을 먹으면 내 이빨이 썩을 건데 나 이빨 빨리 썩으라고 이 초콜릿을 주느냐?”하면서 시종일관 불평을 했습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아이는 소똥이 담긴 상자를 열어보더니 “아빠 소똥이 이만큼 많은걸 보니까 나한테 선물한 소가 엄청 큰 소인가 보죠?”라고 했습니다.
어떤 동네에 온천이 나니까 사람들이 “뜨거운 물만 나고 찬물은 왜 안 나오느냐?”라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찬물까지 주시니까 주실라면 비누까지 주시지 비누는 왜 안주시느냐고 불평했습니다. 여러분, 부정적인 마음으로 성탄을 보내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위대한 계절에 따뜻하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마음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지존무상하시고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의인은 어떤 존재인가?
이사야 57장 15절 후반에는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통회하며 겸손한 자(contrite and humble)는 구약의 하나님의 자녀들을 묘사하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시편 51편 17절에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이사야 66장 2절에서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오랫동안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를 했을지라도 우리 속에는 여전히 이기심, 탐심, 부정직, 탐욕이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겸손한 심령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스로 의로운 채 하고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멸시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권고하시지도 않습니다.
지난주에 대선이 끝났습니다. 저는 대통령 당선자가 전에 사업을 잘했고, 시장직을 잘 이행했다는 것보다 교회에서 결코 쉽지 않은 차량봉사위원을 3년 동안 했다는 사실을 위대하게 생각합니다. 그 교회 장로들이 처음에는 ‘저 양반이 하루 이틀 나와서 폼 잡는 거겠지’라고 생각 했는데 그렇지 않고 3년을 매주 나와 모자 쓰고 옷 입고 “후루룩 후루룩” 호각을 불면서 3년동안 봉사를 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는 겁니다. 겸손하고 통회하는 심령, 이것이 위대한 것이고 구약시대 하나님은 성도들이 그런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해야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됩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내적인 가르침을 받는 사람만이 그렇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사야서 29장 24절에서 ‘마음이 혼미하던 자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시고 54장 13절에서도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는 크게 평강할 것이며’라고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이 예언의 말씀을 근거로 요한복은 6장 4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하나님 난 배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날 가르치지 마십시오”라면서 영혼을 닫는 사람은 겸손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를 가르치십시오. 내게 내적인 교훈을 주십시오소”라며 하나님께 배우려는 마음(teachable mind)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가르칠 수 있는 영혼이 돼야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을 가르칠 것입니다. “난 다 알고 있다. 난 배울 거 없다. 나만큼 아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라”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의인의 심령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께 배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께 가르쳐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시편 119편 12절에서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그랬습니다. 119편 33절에서도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라고 그랬으며 119편 66절에서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사오니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께 배우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이 성탄절에 여러분 영혼이 하나님이 가르칠 수 있는 영혼이 되시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의 참된 모습, 자신의 부패함, 연약함,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상하고 통회하며 겸손한 심령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겸손하고 통회하지 않으면큰 문제가 일어나게 되지만 다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면 문제가 없이 모두 힘을 합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과 의인은 어떤 관계인가?
이사야 선지자는 두 가지 동사로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거한다(live)’라는 동사이고
또 하나는 ‘소성케 한다(revive)'는 동사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통회하고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십니다.
지존무상 하시고 거룩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 높고 거룩한 데만 거하는 것이 아니라 통회하고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십니다. 다시 말해 함께 사신다는 겁니다. 함께 동거동락하고, 먹고 마시며, 함께 웃고 울고, 고난에 슬퍼하고, 도와주시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역사입니까?
이사야서 66장 1절로 2절에서도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를 안식할 처소로 삼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만하고 스스로 의로우며 다 아는 체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런 영혼에서는 도무지 불편해 하시고 안식하지 못하십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함께 거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요한복음 15장 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기록되었고, 마태복음 28장 20절에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위대한 하나님은 예수 믿고 겸손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가진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통회하고 겸손한 자의 영혼을 소성케 하십니다.
소성케 한다는 것은 ‘부흥을 주신다(revive)’는 말입니다. 새롭게 하고 ‘생명력(vitality) 을 주신다’, ‘하나님이 위로와 격려를 주신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치심으로 소성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통회하며 회개하는 자에게 “내가 네 죄를 사하였노라”하는 확신을 주시면서 영혼을 소성케 하십니다.
사도행전 13장 38절에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딴 게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죄 용서 받는다. 예수 믿는 자는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과거에 수많은 죄가 있어도 예수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는다는 복음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 영혼이 죄 사함 받은 확신을 갖게 되면 영혼이 소생되어 힘을 얻게 됩니다.
셋째로는 이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소성케 되는 겁니다.
저는 삶이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이 날 친히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를 대신 죽게까지 사랑하셨다’라고 혼자서 중얼 거립니다.그러면 영혼이 소생되고 힘을 얻게 됩니다.
요한복음 16장 27절에서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제 삼자를 통해서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여러분을 친히 사랑하시고 이것은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친히 사랑하셔도 우리 삶 가운데 고통, 고난, 질병, 사망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이게 친히 사랑 하시는 거냐고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의 말씀처럼 섭리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는 겁니다. 뭐든지 다 합하여 나중에 보니까 선이 되더라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섭리를 의지해서 또 영원히 소생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언젠가 죽기는 죽겠습니다만은 예수 믿는 자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해서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영생하는 생명을 가지고 살게 될 줄로 확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탄절에 하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이유는 우리에게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생명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그러므로 지금 살다가 병에 걸려 죽게되더라 ‘아이고 나는 왜 죽나’ 그러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다시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얼굴 갖고 영원히 살아서 뭐 하겠어요? 감기 걸리고 아프며 몸살 나는 얼굴로 영원히 살아 뭐하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썩지 않으며 영원히 사는 몸을 가지고 부활해서 영생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 이 모든 진리를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가르쳐 주심으로 우리 영혼은 소생함을 얻고 ‘아 이 세상에 사는 것이 다가 아니구나’라고 깨닫고 다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이 성탄절을 맞이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지존무상하심을 다시 한번 인식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이 내게 도움이 되시고 나와 함께 거하시며 내 영혼을 소성케 하시고 나를 친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영혼을 열어 “하나님 날 가르치소서. 그리고 내 영혼이 언제나 통회하고 겸손한 심령이 되어 하나님이 안식할 처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