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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 목사 / 성령님, 사모하고 사랑합니다! (아 3: 1-4)
사람이 가진 가장 큰 소망은 무엇일까요? 부자되는 것? 성공하는 것? 장수? 건강?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이것이 사람이 가진 가장 큰 축복이다 .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이 말에 동의하시나요? 세상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우리가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사랑받는 것이랍니다.
우리는 보통 욕망을 나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욕망을 죽이라 . 성경에서도 나는 매일 죽노라 했습니다. 그러나 욕망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욕망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그것이 옳고 좋을 때는 생의 에너지가 되고 그것이 나쁘고 넘칠 때는 악의 원인이 됩니다.
한자를 잘 아는 분에게 욕망 할 때 欲 자를 풀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욕欲 은 하품 을 뜻하는 흠欠 과 골짜기 를 뜻하는 곡谷 자로 되어 있답니다. 하품 은 피곤할 때 입을 벌리는 모양이고, 골짜기는 산과 산 사이에 움푹꺼져 있는 곳을 말합니다. 흠 은 벌린 입처럼 비어 있고, 곡 은 깊은 골짜기처럼 꺼져 있습니다. 공통점은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비어 있어서 나쁘지만 비어 있어서 축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어 있기 때문에 채우고 꺼져 있기 때문에 돋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거룩한 욕망이 필요할까요?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욕망은 정화되고 다스려져야 한다. 그러나 욕망을 없애서는 안 된다 . 우리에게 거룩한 욕망은 필요합니다. 이 욕망을 히브리어로 에체르 라고 합니다. 이 말을 우리 말로는 소원 , 열망 , 갈망 등으로 번역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에게 마음의 소원을 주십니다. 시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 하나님은 또한 우리안에 마음의 열망을 부어 주시기도 합니다. 빌2:13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 이 소원 이 에체르 , 거룩한 열망, 영적 갈망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거룩한 열망이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열망을 다룬 책이 아가서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왕과 신하입니다. 주인과 종입니다. 우리는 그의 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장 가깝게 묘사한 비유가 신랑과 신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랑입니다. 우리는 그의 신부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아버지와 아들, 왕과 신하와 달리 아무런 격차가 없습니다.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삽니다. 같은 집에서 같은 식탁, 같은 통장, 같은 침대를 쓰고 삽니다.
주인으로서 하나님은 우리의 경외의 대상이요,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우리의 공경의 대상이요, 왕으로서 하나님은 우리 복종의 대상이지만, 신랑으로서 하나님은 우리 사랑의 대상입니다. 신랑과 신부 사이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직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며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그 외에 어떤 사랑의 목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순수한 사랑이 신랑과 신부의 사랑, 연인과 연인간의 사랑입니다. 그것을 다룬 책이 아가서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게도 순수하게, 그렇게도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이 어느날 연락도 없이 사라졌다면 여러분은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 사랑하는 님을 찾아 울며 불며 길을 떠나지 않겠습니까? 오늘 아가 3장은 바로 이것을 다룬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찾는지. 하나님을 다시 찾는 기쁨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찾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3:1,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 여기에 사랑의 특징이 나옵니다. 사랑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찾는 것입니다. 없어서만 찾는 것이 아닙니다. 있어도 찾습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 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낮에만 찾는 것이 아닙니다. 밤에도 찾습니다. 다시 1절을 보십시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우리 말로는 밤에 찾았노라 했지만 원문의 뜻은 밤마다 찾았다 는 것입니다. 밤마다, 낮마다 찾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는 사람을 애타게 찾아본 경험이 있습니까? 학자들에 의하면 아가서의 주인공은 솔로몬왕과 슬람미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서로 잘 맞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그의 지혜, 그의 능력, 그의 권세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였습니다.
그런데 슬람미 여인은 누구입니까? 아가1장에 의하면 그는 포도원에서 일하는 아가씨요, 들판에서 양을 치는 가난한 시골 처녀입니다. 아1:5을 볼까요?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 검으나 아름다우니 . 이 여인이 슬람미 여인입니다. 포도원에서, 빈들에서 하루종일 일만 하느라 얼굴이 까맣게 탓습니다. 어떻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얼굴이 새까만 여자를 미인이라고 부릅니까? 요즘은 미용으로 선탠을 하지만 해서 슬람미 여인은 그럴 돈도 여유도 없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아침부터 밤까지 일만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이 얼굴이 하얗고 피부가 백옥같은 여자를 찾지 못해 슬람미 여인을 사랑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얼굴 예쁘고 피부 좋은 여인은 왕궁에 많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야 사랑하는 사랑, 그래서 사랑하는 사랑, 그래도 사랑하는 사랑, 가장 좋은 사랑은 그래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솔로몬왕은 자기와 사회적 신분도 안 맞고 가난한 데다 얼굴까지 까만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1장에만 슬람미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한 것이 7번이나 됩니다. 8절, 여인중에 어여쁜 자야, 9절, 11절 너는 바로의 병거의 준마로구나. 13절, 너는 몰약 향주머니요,14절,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요, 15절, 너는 네 눈이 비들기 같구나. 17절, 너는 백향목 들보요 잣나무 서깨래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이루어진 것을 믿습니까?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다가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온 것을 믿습니까? 사랑은 하나님이 먼저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왕이요 우리는 슬람미 여인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은 도무지 격이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먼저 사랑했습니다.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내 내 영혼 거듭났네 . 그래서 사랑의 특징은 이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당신이 이미 나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 11세기의 성자 성 버나드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했습니다. 솔로몬왕같은 위대한 왕이 슬람미 여인같이 천하고 낮은 나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그가 나를 먼저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 버나드가 찬송가 85장 3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그 사랑받은 자만이 그 사랑알도다 .
여러분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먼저 사랑했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심지어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과 원수로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 사랑의 언약입니다. 이 사랑의 언약을 우리는 구원이라 부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우리가 맺은 사랑의 언약입니다. 언약이 불변하듯이 구원도 불변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결혼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주례자의 설교가 아니라 신랑, 신부의 약속입니다. 약속은 신실합니다. 말로 맺은 약속은 영원히 지켜야 합니다. 말로 맺은 약속이 이렇다면 피로 맺은 계약은 얼마나 중하겠습니까? 구원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로 우리와 맺은 약속입니다. 한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입니다 .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습니다 . 요10:28-29절입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부터가 중요합니다. 사랑의 언약은 사랑의 시작입니까? 사랑의 끝입니까? 사랑의 시작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의 시작입니까? 끝입니까? 시작입니다. 요즘 온 나라를 시끄렇게 하는 구원파의 결정적인 오류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신앙생활의 끝으로 봅니다. 그래서 구원받으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은 달리기의 결승점이요 등산의 정상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으면 끝납니다. 그래서 구원받으면 더 이상 기도도 안하고 회개도 안하고 심지어 잘못해도 구원받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업을 통해 불법적으로 돈벌고 그 결과 사람이 죽고 그래도 회개할 줄 모르고 큰 소리칩니다. 이미 구원받아 다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구원은 신앙생활의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슬람미 여인이 사랑하는 님을 찾아 헤메는 이유를 알겠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약속을 가져오지만 약속했다고 사랑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솔로몬을 찾아 헤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계속 찾아야 하는 이유는 구원받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의 약속이 사랑의 완성이 아니듯이 구원받았다고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을 넘어서 온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딤후3:15절에 성경의 목적이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 구원 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가 있습니다. 17절, 딤후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 또 하나가 온전 입니다. 우리는 구원에서 온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구원에 머무르면 초보신앙입니다. 이것이 구원파가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고 거기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 2절을 보실까요? 아3:2,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 1절과 2절에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찾으나 찾지 못하였노라 . 왜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가 어려울까요? 신앙생활 잘하려면 잘할수록 하나님은 더 많이 잃어버립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혼의 메마름 , 혹은 영혼의 어두운 밤 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렇게 가까이 계신 것 같은 하나님이 어느날 사라져 불러도 대답이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 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될까요? 이것은 오랫동안 기도하는 사람들의 질문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잃어버릴까? 17세기 프랑스의 영성가 프란시스 드 살레라는 사람이 그 이유를 7가지로 말했습니다.
(1) 지나치게 피곤하게 영적 생활을 하여 몸을 혹사시켰을 때 하나님을 잃습니다. 몸이 피곤하면 기도도 안 나옵니다.
(2) 영적 욕심이 많고 지나치 하나님께 영적인 응석을 부릴 때 하나님이 숨습니다. 애기가 지나치게 엄마를 의지할 때 엄마가 자녀의 자립심을 키워주기 위해 잠시 숨는 것과 같습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의 달콤함과 기쁨을 잃어버릴 때 하나님이 잠시 숨습니다. 그래서 다시 회복시킵니다.
(4) 지나치게 감정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숨습니다. 감정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말씀에 의지하라고 숨습니다. 영적 젖떼기입니다.
(5) 하나님께 거짓으로 기도하고 가식으로 하나님을 믿을 믿을 진실하게 되라고 하나님이 숨습니다.
(6) 세상 재미에 푹 빠져 살 때 하나님이 시야에서 멀어집니다.
(7) 이미 받은 영적인 은혜를 잃고 살 때 받은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 해 주려고 하나님이 잠시 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부재는 아닙니다. 잠시 숨는 것 뿐입니다. 그때 우리는 더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순찰자가 필요합니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누군가로 부터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해서 안되니까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슬람미 여인이 그때 나타난 사람이 순찰자였습니다. 3절 볼까요? 아3:3,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 여기 순찰자가 나옵니다. 순찰자가 누구입니까? 성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어두운 밤거리를 지키는 요즘 말로 하면 경찰입니다. 이 순찰자가 밤에 일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역사적으로 말하면 사도요, 교회 스승이요, 수도자요, 신학자요, 개혁자요, 목회자들입니다. 이들은 어두운 시대에 역사의 새 날이 되도록 골방에서 기도하던 사람들입니다. 순찰자의 또 하나 특징은 누구의 지시를 받고 일한다는 것입니다. 경찰이 스스로 일합니까? 아닙니다. 나라의 부름을 받고 일하고 높은 사람의 지시를 받고 일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적 여정에서 이 순찰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제가 살아온 날을 돌이켜 봐도 오늘의 제가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목회자, 학교 선생님, 교수님, 교회 장로님, 권사님, 친구, 책으로 만난 교회사의 수많은 스승들, 그들을 안내와 도움을 받아 여기 까지 왔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영적 코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요한 클리마쿠스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했으나 지도자 없이도 전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히 자신을 속이고 있다. 이집트를 탈출하는 사람들에게는 모세가 있었고, 소돔을 탈출하는 사람들에게는 천사가 지도자였다. 우리의 썩어가는 환부를 고치려면 분명 아주 숙련된 의사가 필요하다. .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때 필요한 것이 겸손입니다. 나에게도 영적 스승이 필요하고 영적 멘토, 영적 코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결혼생활과 영적 생활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우리중에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성숙한 사람도 없고 남의 지혜를 필요로 하지 않을만큼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
재미있는 것은 여인은 순찰자의 도움을 받았지만 순찰자도 여인을 돕기 원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인과 순찰자, 도움 주고 도움 받고, 길을 묻고 길을 돕고, 이것을 우리는 멘토, 멘티 라고 합니다. 멘토, 멘티는 옛날 그리스에서 시작된 교육방식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을 가르쳤고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쳤습니다. 멘토는 멘티를 낳고 멘티는 또 멘토가 됩니다.
성경을 보면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모두 겸손히 배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롯은 삼촌 아브라함에게 배웠고, 모세는 장인 이드로에게 배웠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가르쳤고 드보라는 바락을, 나오미는 룻을,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엘리는 사무엘을 사무엘을 다윗을 가르쳤습니다. 다윗은 나단을 멘토로 삼았고 다윗은 아들 솔로몬을 가르쳤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엘리사는 선지학교 생도들을, 이사야는 히스기야를 가르쳤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였고, 예수님은 12제자를 가르쳤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아볼로를 가르쳤습니다. 또한 바울은 실라를, 디모데를, 디도를, 오네시모를, 빌레몬을, 율리오를 제자로 삼았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중에 스스로 된 사람이 있습니다. 없습니다. 구약시대의 사울이 있습니다. 사울은 아무에게도 안 배우고 아무에게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망했습니다. 신약의 가롯 유다 역시 멘토도 멘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망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겸손히 배우기 원합니까? 목회자를 존중하십시오. 하나님은 그 교회에 그 사람이 필요해서 그를 교회목회자로 보냈습니다. 현실적으로 교인은 그 교회 목회자를 통해서 배울 수 밖에 없습니다. 장로님들에게 배우십시오. 장로님을 존중하지 않은 데 좋은 교회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목자와 교사에게 배우십시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길에 안내자요 동반자입니다. 또한 동시에 교회 리더쉽들은 교인들의 순찰자가 되십시오. 길 안내자의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길을 알고 그 길을 가 보았고 그 길을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 단지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길을 알아야 합니다. 그 길을 가보았어야 합니다. 그 길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멘토링의 전문가 팀 엘모어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에게 멘토는 다섯 가지를 주라고 말합니다.
(1) 핸들을 주라. 핸들은 자립심이다.
(2) 지도를 주라. 지도는 방향이다.
(3) 실험실을 주라. 실험실은 현장실습이다.
(4) 뿌리를 주라. 뿌리는 근본이다,
(5) 날개를 주라. 날개는 비전이다. 그러면 그 다음은 잘 할 것입니다.
그러나 순찰자로서 가장 좋은 순찰자는 성령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길을 걸을 때 늘 함께 하시고 앞장서 안내하는 분이 계십니다.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어머니처럼 길 안내에 있어 세 가지 일을 합니다. 어머니는 자녀와 함께 하고 가르치고 인도합니다. 요14:16-18,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갈 때 같이 동행합니다. 성령님은 가르칩니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 마지막으로 인도합니다.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 하나님을 향해 길을 떠난 여러분, 순찰자가 필요합니까? 목회자가 순찰자입니다. 영적 지도자가 순찰자입니다. 교회사의 스승들이 순찰자입니다. 무엇보다 성령님이 순찰자입니다. 성령님과 함께 하나님 만나시기 바랍니다.
영혼의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장면이 되면 슬람미 여인이 순찰자의 도움을 받아 사랑하는 이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4절을 볼까요? 아3:4, 그들을 지나치자 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 여기 어머니 집 , 나를 잉태의 이의 방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어머니 집은 무엇일까요? 우리를 잉태한 이의 방은 무엇입니까? 아가서는 비유적인 방법으로 우리가 돌아갈 최종적인 영적 목표지를 말합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집입니다. 어머니의 집은 하나님이 계신 집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돌아갈 영적 고향, 하나님이 계시는 영원한 집입니다. 그런데 그 집은 죽어서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갑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존재의 모태요, 하나님 임재의 현장입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성전 지성소요 신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토마스 켈리라는 영성학자는 그것을 divine center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마음에 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이 거하는 중심 센터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거하시는 집입니다.
그 집은 어떻게 갑니까? 다시 4절,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 그들은 순찰자입니다. 밤에 성을 지키는 경비들입니다. 그들이 이 여인이 찾는 사랑하는 님이 있는 곳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찾고 찾아도 못 만났는 데 그를 본 순찰자에 의해 만났습니다. 그러나 순찰자를 만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를 지나쳐야 합니다. 목회자든 교황이든 기도자든 어떤 영적 지도자도 우리가 만날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 만나는 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그들을 우리는 무시하지 않으면서 지나쳐야 합니다. 자신을 순찰자로 여기는 영적 리더들은 사람들이 자기를 찾고 있다는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순찰자는 안내자일 뿐입니다. 내가 본 것을 말할 뿐입니다. 누구든지 마7:8절, 누구든지 구하는 자는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립니다 . 사55:6절,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고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부르라 . 찾으면 찾고 부르면 응답합니다.
그레서 간 곳이 하나님 계신 집입니다. 4절 다시 볼까요? 아3:4, 그들을 지나치자 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여기에 세 동사가 눈에 띕니다, 만나고 , 붙잡고 , 놓지 아니하였다 . 하나님을 찾는 과정이 무엇일까? 만나고, 붙잡고, 놓지 않는 것입니다. 한 가지씩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그를 붙잡았습니까? 그를 지금 놓지 않고 있습니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붙잡아야 합니다.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놓지 말아야 합니다. 만나고 붙잡는 것은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놓지 않는 것은 현재형입니다. 이미 하나님 만났습니까? 이미 붙잡았습니까? 지금 놓지 않고 있습니까?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암시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님과 함께 어머니 집으로 간 여인을 그 집에서 영원토록 사랑하는 님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집에서 예수님과 함께 머물고 있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돌아가 머물 하나님의 집은 우리에게 어떤 집일까? 그 집이 어떤 집이 길레 우리는 날마다 주님과 함께 성령의 도움으로 그 집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 이미 돌아가셨지만 우리에게 좋은 영성적 삶을 가르친 미국의 헨리 나우엔이 계십니다. 그분이 쓴 <두려움을 떠나 사랑의 집으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나우엔은 우리가 돌아가 영원히 머물 하나님의 집의 세 가지 특징을 말합니다.
(1) 그 집은 친밀한 집입니다. 세상은 두려움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계신 집은 우리에게 친밀합니다. 왜?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친밀함의 반대는 두려움입니다. 사랑하면 두렵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사랑의 반대입니다. 주가 나와 함께 동행을 하면서 나의 친구 되시었네, 우리 서로 받은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 친밀성.
(2) 그 집은 풍성한 집입니다. 세상은 가난하고 인색합니다. 그러나 집에 가면 풍성합니다. 물질이 많아 풍성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많아 풍성합니다. 하나님안에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마른 땅에 샘물터지고 사막에 물 흐를 때 기쁨으로 찬송부르며 거룩한 길 다니리 .
(3) 그 집은 기쁨의 집입니다. 요15: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 왜 기쁩니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계속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날마다 주님을 찾음으로 가능합니다. 날마다 성령님이 우리를 안내하시고 인도해주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 거룩한 열망을 우리에게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