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2: 4 은사와 성령 -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
1] 은사는 여러 가지나
(1) 은사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마톤'(*)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 '은혜의 선물'을 뜻한다.
이 단어는 바울 서신에 16회 나온다. 바울은 이 단어를 특별한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어떤 신기하고 특별한 은사라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2) 여러 가지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이레세이스'(*)는 원래 '분배' 혹은 '분할'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를 여러 갈래 나눈다는 뜻이다.
이 단어가 본장 11절에서는 분사형 '디아이룬'(*)으로 사용되어 '나눠주다'라는 의미로 번역됨으로써 은사의 '다양성'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5, 6절의 '여러 가지'에도 이와 동일한 헬라어가 사용되었다.
2] 성령은 같고
예수를 주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 인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는 어떤 특정한 것들 만이 아니라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그 다양성 위에 한 성령의 역사가 있음을 알아야 분쟁이나 다툼 따위의 문제가 사라질 것이다.
3] 성령의 은사와 관련된 교훈 (고전12: 4-11) : 이한규 목사
1. 하나 됨을 추구 하십시오.
은사도 다양하고 직분과 사명도 다양하고 체험도 다양하지만 그 모든 것을 주신 분은 성령(4절), 성자(5절), 성부(6절)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고 궁극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목적으로 은사가 활용되어야 합니다. 은사를 흔히 ‘하나님이 주신 신비한 재능’으로 여기지만 원래는‘하나님께서 값없이 주는 은혜의 선물’을 뜻합니다.
그래서 특별한 사람에게만 은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사람마다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를 수 있지만 다 같은 성령님이 주신 것이기에 남의 은사를 인정하고 분열을 피하십시오. 믿음의 본질적인 삶은 기독교적인 열심을 갖고 주를 위해 일할 때 성령의 아름다운 역사가 나타나게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분열을 위해 은사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은사를 통해 좋은 일을 했다고 여기지만 하나님 앞에 가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는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독불장군이 되면 안 됩니다. 성령님과 함께 한다는 사람이 늘 혼자라면 문제입니다. 자기가 다 가졌다고 여기고 남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겨도 안 됩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기에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셨습니다.
분열을 좋아하는 고독한 배회자는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원래 남 칭찬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요즘은 동생이나 형이 잘 살아도 배가 아픈 시대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남을 칭찬해주면서 분열을 힘써 피해야 합니다. 교회의 논쟁은 희망보다는 고통을 주면서 본질적으로 비생산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 논쟁을 피하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면서 자신의 은사를 통해 교회의 연합에 기여하십시오.
2. 은사로 유익을 주십시오
왜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다르게 주십니까? 공동체를 더욱 풍성하게 하고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7절). 하나님께서 각 사람마다 바이올린과 같은 은사, 트럼펫과 같은 은사, 피아노와 같은 은사를 다르게 주시는 것은 각각의 은사로 교회를 아름다운 영적인 오케스트라로 만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본문 8-10절에서 성령의 9가지 은사를 언급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9가지 은사 중 가장 먼저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듭니다(8절). 은사의 서열은 없지만 사도 바울이 가장 먼저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든 것은 이 2가지 은사를 중시했다는 뜻도 됩니다. 지혜(소피아)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적으로 잘 적용하는 능력이고 지식(그노시스)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론적으로 잘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믿음의 은사는 구원의 믿음을 뜻하기보다는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믿음을 뜻합니다. 병 고치는 은사는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능력뿐만 아니라 영혼과 정신과 마음의 질병을 고치는 능력”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능력 행함의 은사는 기적적인 일을 통해 하나님을 믿게 하는 은사를 말하고,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통찰력으로 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은사를 말하고, 영분별의 은사는 거짓 선지자로부터 교회와 성도를 지키는 은사를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방언의 은사와 방언 통역의 은사에 대해 언급합니다. 어떤 교인은 방언의 은사가 주는 유익에 대해 의문을 품지만 방언의 은사도 잘 활용되면 교회에 유익이 됩니다. 특히 자신 및 공동체의 기도를 돕는데 좋은 역할을 합니다. 방언의 은사는 고린도 교인들이 가장 자랑했던 은사였습니다. 문제는 방언 구사로 1등 신자와 2등 신자를 나누면서 교회의 갈등이 커진 것이었습니다. 그런 자랑이 없도록 사도 바울은 의도적으로 방언의 은사를 가장 뒷부분에 배치했고 또한 방언의 은사와 함께 방언 통역의 은사를 언급함으로 방언의 무절제한 사용을 주의시키고자 했을 것입니다.
또한 방언 통역의 은사를 언급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행해졌던 방언이 오순절 다락방에서 주어졌던 ‘분명한 언어로 들려졌던 방언’과는 달리 ‘남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들려진 방언’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 다양한 은사 문제로 인해 교회에 갈등이 생기는 상황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은사는 본질적으로 교회에 해가 되지 않고 유익이 되도록 활용되어야 합니다.
3. 은사를 자랑하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이 성령의 9가지 은사를 언급하고 바로 이어서 본문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이 말은 모든 은사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적절하게 나눠주신 것이기에 “은사를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지만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서는 특별히 “방언을 하는 것으로 자랑하지 말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이루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각 사람에게 적절한 은사를 주십니다. 그 은사를 가지고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로 활용하지 말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구로 삼으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자신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거나 자신을 높이는데 사용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것을 가지고 남을 섬기는 데 사용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사용하십시오.
특히 자기 노력과 상관없이 주어진 은사를 가지고는 더욱 자기를 높이는 일에 사용하지 마십시오. 가짜 믿음의 뚜렷한 한 가지 특징은 사람을 높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 10절을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마술사 시몬에 대해 “이 사람은 크신 하나님의 능력이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칭찬입니까? 그처럼 “저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라는 얘기를 들으면 더 조심하십시오. 가짜 믿음은 늘 사람을 높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에게 신비한 어떤 능력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목회자를 높여줄 때는 목회자에 대한 존경과 존중으로 끝내고 격려하는 차원에서 높여주시고 노력하는 모습이 좋게 여겨지면 높여주십시오. 또한 전도를 위해“우리 목사님이 좋아! 말씀도 좋아!”라는 정도로만 높여주십시오. 그 이상으로 목회자를 높이면서 “능력이 있는 종! 위대한 종! 말씀의 종!”이라는 식으로 목회자를 높이면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은혜는 더 이상 머물지 않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큰 공헌을 하고 자기의 재산을 다 내놓아도 그것을 통해 사람이 높아지기보다 예수님만이 높아져야 합니다. 놀라운 일을 성취하고 놀라운 은사를 가지고 놀라운 헌신을 보여주었어도 늘 자신을 감추고 예수님을 높이십시오. 은혜를 받을수록 더 겸손해지십시오. 많은 것을 가지고 큰 일을 했어도 겸손을 잃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높이면 하나님도 그를 더욱 높여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4. 은사의 오용을 피하십시오
자기가 받은 은사를 가장 큰 은사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한 교회를 자기가 받은 은사대로만 이끌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기가 받은 은사는 모든 은사 중의 하나의 은사임을 겸손히 인식하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래서 은사는 늘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정신과 의사가 주기적으로 자기 정신을 진단하여 바로 잡듯이 은사를 받은 사람도 말씀의 빛 아래서 자신을 늘 새롭게 해야 성령 충만한 올바른 일꾼이 됩니다.
어떤 부흥사는 말합니다. “아니, 서당 개도 읊는 방언을 사람이 못합니까? 개만도 못한 성도입니다.” 옛날에 부흥사들의 표현 중에는 그런 무례한 표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부흥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웃으면서 “아멘!”이라고 외치고 박수까지 칩니다. 그렇게 한참 재밌게 졸 틈도 없이 웃고 나온 후에 하는 말이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말입니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는 그렇게 해서 한국교회가 성장했습니다. 지금은 그 후폭풍으로 뼈아픈 성장통을 겪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뜻대로 주시는 은사를 인간 마음대로 주는 것 같이 말하거나 생성시킬 수 있는 것 같이 말하면 안됩니다. 또한 자기가 체험한 은사를 최고인양 교만한 모습을 보여도 안됩니다. 성경에서는 은사에 대한 자랑을 곳곳에서 경계합니다. 왜 예수님이 위대하십니까?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상황에서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고 겸손한 삶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은사를 사모하되 그 은사를 겸손의 도구로 활용하십시오. 각 사람마다 각각의 특별한 은사가 있는 것을 서로 겸손하게 인정해 주십시오. 은사 문제를 가지고 자기로 인해 공동체가 분열하는 모습이 생기지 않게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성령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은혜를 받을수록 겸손하십시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삶에 더욱 머물게 될 것입니다.